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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 한눈 · 별권
세계 종교사 사건사전
시대순 사건 항목
검수용 교정본 · 배포 금지
같은 시대, 서로 다른 믿음은 어떤 역사를 지나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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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 사건 항목
이 책이 다루는 것
- 배경과 원인
- 전개와 결과
- 종교별 관점
- 학계의 평가
이 책은 역사적 사실, 종교 전통의 주장, 학문적 해석을 구분해 씁니다. 확정되지 않은 연대와 논쟁 중인 내용은 그렇게 밝혀 적었고, 특정 종교의 관점만으로 다른 종교를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세계 종교사 사건사전
이집트 탈출 전승 (기원전 1250년)
이집트와 시내 광야 · 유대교
히브리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다 탈출해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었다고 전한다. 이 이야기는 유대교 신앙과 절기(유월절)의 뼈대를 이룬다.
성경은 열 가지 재앙, 바다를 건넘, 광야 40년, 시내산 율법 수여의 순서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 이스라엘이 한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고 전한다
학계의 평가: 연대(기원전 15세기설과 13세기설), 규모, 역사성 자체가 모두 학계의 논쟁 대상이다. 이 앱은 전승과 역사 재구성을 섞지 않고 나란히 적는다.
사마리아 함락과 북이스라엘의 멸망 (기원전 722년)
사마리아 · 유대교
신아시리아 제국이 근동으로 세력을 넓히는 가운데 북이스라엘이 조공을 끊고 반기를 들었다.
몇 해에 걸친 포위 끝에 수도 사마리아가 함락되고 주민 상당수가 강제 이주되었다.
- 북이스라엘 왕국이 사라졌다
- 주민 이주와 외지인 정착이 이뤄졌다
요시야의 종교개혁 (기원전 622년)
예루살렘 · 유대교
아시리아의 힘이 약해진 틈에 남유다 요시야 왕이 종교와 정치를 함께 정비했다. 성전을 수리하다 율법책을 발견했다고 성경은 전한다.
지방 성소를 없애고 예배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았으며, 발견된 율법책에 따라 유월절을 지켰다고 전한다.
- 예배 장소가 예루살렘으로 집중되었다
학계의 평가: 신명기 계열 문헌의 성립 시기와 이 개혁의 관계가 구약학의 오랜 쟁점이다.
예루살렘 함락과 제1성전 파괴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 · 유대교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사이에서 줄타기하던 남유다가 바빌로니아에 반기를 들었다.
포위 끝에 도성이 무너지고 성전이 불탔으며, 지배층과 기술자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 제1성전 파괴와 제사 중단
- 유다 왕국의 소멸
- 바빌론 포로기의 시작
키루스 칙령과 귀환 (기원전 538년)
바빌론 · 유대교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점령하면서 근동의 지배자가 바뀌었다.
유배된 여러 민족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성소를 재건하도록 허용했다.
- 유대인 일부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 성전 재건이 시작되었다
학계의 평가: 성경이 전하는 칙령 문안의 형태와 키루스 원통의 관계가 논의된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깨달음과 첫 설법 (기원전 528년)
보드가야와 사르나트 · 불교
브라만교의 제사와 카스트 질서 바깥에서 수행으로 해탈을 찾는 사문(沙門)들이 활동하던 시대였다.
불교 전통은 그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고, 사르나트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 가르침을 폈다고 전한다.
- 출가 공동체(승가)가 만들어졌다
학계의 평가: 생몰연도, 초기 가르침의 원형이 어디까지인지가 계속 연구되고 있다.
제2성전 봉헌 (기원전 516년)
예루살렘 · 유대교
귀환자들이 성전 재건을 시작했으나 자금과 이웃 세력의 반대로 오래 지체되었다.
예언자들의 독려와 페르시아 총독의 허가로 공사가 재개되어 봉헌에 이르렀다.
- 제사 제도가 다시 시작되었다
제1차 결집 (기원전 483년)
라자그리하(라지기르) · 불교
붓다의 입멸 후 가르침과 규율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가 승가의 과제가 되었다.
불교 전통은 오백 명의 제자가 모여 가르침(경)과 규율(율)을 함께 외워 확인했다고 전한다.
- 구전으로 전해질 가르침의 틀이 정해졌다고 전한다
학계의 평가: 결집의 규모와 실제 여부, 시점이 모두 논쟁 대상이다.
에스라의 율법 낭독 (기원전 458년)
예루살렘 · 유대교
제사장이자 서기관인 에스라가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왔다고 전한다.
백성 앞에서 토라를 소리 내어 읽고 뜻을 풀어 주었으며, 공동체가 이를 따르기로 했다고 전한다.
- 토라가 공동체의 공적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학계의 평가: 에스라가 가져온 ‘율법책’이 오늘의 오경과 같은 것인지가 논의된다.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성벽 재건 (기원전 445년)
예루살렘 · 유대교
귀환 이후에도 예루살렘은 성벽이 무너진 채였고 공동체는 흔들렸다.
페르시아 왕의 허가를 받은 느헤미야가 총독으로 부임해 짧은 기간에 성벽을 쌓았다.
- 도성의 형태가 회복되고 공동체 규율이 정비되었다
제2차 결집과 승가의 분화 (기원전 383년)
바이샬리 · 불교
붓다 입멸 후 백 년쯤 지나 계율의 세부 해석을 두고 견해가 갈렸다고 전한다.
바이샬리에 모여 열 가지 쟁점을 논의했고, 결론에 승복하지 않은 쪽이 갈라졌다고 전한다.
- 상좌부 계열과 대중부 계열의 갈래가 나타났다고 전한다
학계의 평가: ‘제2차 결집’과 근본 분열이 같은 사건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알렉산드로스의 근동 정복 (기원전 334~323년)
소아시아·레반트·이집트·페르시아 · 유대교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아우른 마케도니아가 페르시아 원정에 나섰다.
십여 년 만에 소아시아에서 인도 서북부까지 이르렀고, 곳곳에 그리스식 도시를 세웠다.
- 아케메네스 제국이 무너지고 헬레니즘 세계가 열렸다
마우리아 왕조의 성립 (기원전 322년)
파탈리푸트라(파트나) · 불교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으로 인도 서북부의 정치 질서가 흔들린 뒤였다.
찬드라굽타가 마가다를 장악하고 북인도 대부분을 아우르는 왕조를 세웠다.
- 인도 아대륙 대부분이 하나의 통치 아래 놓였다
히브리 성경의 그리스어 번역(70인역) (기원전 280년)
알렉산드리아 · 유대교, 기독교
이집트의 유대인 공동체는 일상에서 그리스어를 썼고 히브리어를 잘 읽지 못했다.
오경이 먼저 번역되고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 나머지 책들이 옮겨졌다.
- 그리스어를 쓰는 유대인이 자기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학계의 평가: 번역의 시기와 범위, 사용된 히브리어 원본의 형태가 계속 연구되고 있다.
칼링가 전쟁과 아쇼카의 전환 (기원전 261년)
칼링가(오디샤) · 불교
마우리아 제국이 아직 복속시키지 못한 칼링가를 정복하려 했다.
격전 끝에 정복했으나 막대한 인명 피해가 났다.
- 아쇼카가 무력 정복을 그만두고 다르마에 따른 통치를 선언했다
스리랑카 전래 (기원전 247년)
아누라다푸라 · 불교
아쇼카가 여러 지역에 전법사를 보냈다고 전한다.
스리랑카 왕실이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승원이 세워졌다고 전한다.
- 섬 전체에 불교가 자리 잡았다
안티오코스 4세의 유대교 금지 (기원전 167년)
예루살렘 · 유대교
예루살렘 내부의 헬레니즘 수용파와 반대파의 갈등에 왕권이 개입하면서 상황이 격해졌다.
안식일 준수와 할례를 금하고 성전에 다른 제사를 들였다.
- 유대교 예배가 중단되고 저항이 촉발되었다
학계의 평가: ‘종교 박해’라는 틀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 최근 연구의 강조점이다.
마카비 항쟁과 성전 정화 (기원전 167~164년)
유대 지방 · 유대교
탄압에 맞서 시골 제사장 가문이 무장 저항을 일으켰다.
게릴라전으로 세력을 넓혀 예루살렘을 되찾고 성전을 정화해 다시 봉헌했다.
- 성전 예배가 회복되었다
- 하누카 절기의 기원이 되었다
쿰란 공동체의 형성 (기원전 150년)
쿰란 · 유대교
하스몬 왕조의 성전 운영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광야로 물러났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사해 서북안에 공동체가 자리 잡고 규율과 성경 사본, 해석 문헌을 남겼다.
- 독자적 달력과 규율을 지닌 공동체가 유지되었다
학계의 평가: 문헌의 저자 집단과 유적의 성격을 두고 여러 학설이 맞선다.
폼페이우스의 예루살렘 점령 (기원전 63년)
예루살렘 · 유대교
하스몬 왕조 형제 사이의 왕위 다툼에 로마가 중재자로 끌려 들어왔다.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에 들어가 성전 지성소까지 들어갔다고 전한다.
- 유대가 로마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 하스몬의 독립이 사실상 끝났다
팔리 삼장의 문자화 (기원전 29년)
스리랑카 알루비하라 · 불교
기근과 전란으로 구전 전승이 끊길 위험이 있었다고 연대기는 전한다.
승려들이 모여 그때까지 외워 오던 가르침을 나뭇잎에 적었다고 전한다.
- 팔리 삼장이 문자로 고정되었다고 전한다
헤롯의 제2성전 증축 (기원전 20년~63년)
예루살렘 · 유대교
로마의 후원으로 왕이 된 헤롯은 대규모 건축으로 정통성을 보이려 했다.
성전 산을 크게 확장하고 성전을 화려하게 다시 지었으며, 공사는 그의 사후에도 이어졌다.
- 당대 세계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성소가 되었다
예수의 십자가형 (30년)
예루살렘 · 기독교, 유대교
로마의 지배 아래 유월절 순례로 붐비던 예루살렘에서, 갈릴리 출신 교사 예수가 성전 뜰에서 소동을 일으킨 뒤 체포되었다.
예수는 유대 지도층에게 넘겨졌다가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인도되어 십자가형을 선고받았다. 십자가형은 로마가 반란자와 노예에게 쓰던 처형 방식이다.
- 제자 공동체의 흩어짐과 재결집
-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초기 공동체의 형성
학계의 평가: 처형 연도(30년 또는 33년), 재판 절차, 유대 지도층의 관여 정도가 학계의 주요 논쟁점이다. 사료 문제로는 요세푸스 「플라비우스 증언」의 가필 범위가 오래된 쟁점이다. 어느 서술도 후대의 집단 책임론을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것이 현대 학계와 주요 교단의 공식 입장이다.
예루살렘 회의 (49년)
예루살렘 · 기독교, 유대교
이방인 신자가 늘면서 그들에게 할례와 음식 규정을 요구할 것인지가 공동체의 현안이 되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과 안디옥에서 온 대표들이 모여 논의하고 절충안을 정했다.
- 이방인 신자에게 할례를 요구하지 않기로 했다
학계의 평가: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의 서술 차이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가 오랜 논쟁거리다.
유대 전쟁과 예루살렘 성전 파괴 (66년~74년)
예루살렘 및 유대 지방 · 유대교, 기독교
무거운 세금, 총독의 실정, 종파 간 갈등이 겹쳐 유대 지방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66년 봉기가 시작되어 70년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성전을 불태웠다. 마사다 함락으로 전쟁이 끝났다.
- 성전 파괴와 제사 제도의 중단
- 예루살렘의 파괴와 대규모 인명 손실
학계의 평가: 마사다 함락 연도는 73년과 74년이 맞선다. 총독 플라비우스 실바의 부임 시기를 근거로 74년으로 보는 견해가 1990년대 이후 힘을 얻었다. 어느 한쪽을 확정으로 적지 않는다.
야브네의 재편 (70년~132년)
야브네(얌니아) · 유대교
성전이 사라진 뒤 유대교는 제사 없이 신앙을 이어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야브네에 모인 학자들이 율법 해석과 절기·기도 규정을 정리하며 유대교의 새로운 중심을 만들었다.
- 회당과 율법 연구가 종교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학계의 평가: ‘야브네 회의에서 정경을 확정했다’는 오래된 설명은 현재 학계에서 대체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점진적 과정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바르 코크바 항쟁 (132년~135년)
유대 지방 · 유대교, 기독교
70년 성전 파괴 이후에도 회복의 기대가 남아 있었고,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정책이 갈등을 촉발했다.
시몬 바르 코크바가 이끄는 세력이 한때 넓은 지역을 장악했으나 3년 만에 진압되었다.
- 막대한 인명 피해와 파괴
- 유대인의 예루살렘 출입이 금지되고 도시가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재건되었다
학계의 평가: 봉기의 직접적 계기(도시 재건인가 할례 금지인가)가 사료마다 다르게 전해진다.
마르키온 논쟁과 정경 논의 (144년)
로마 · 기독교
여러 갈래의 가르침이 함께 존재하는 상황에서 무엇을 받아들일지 정해야 할 필요가 커졌다.
마르키온이 유대교 성경을 배제하고 축약된 목록만을 내세우자 로마 교회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 교회가 자기 문헌 목록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압력이 생겼다
불경 한역의 시작 (148년)
낙양 · 불교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 출신 승려들이 중국에 들어왔다.
안세고와 지루가참 등이 낙양에서 경전을 한문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낯선 개념을 옮기느라 도가 용어를 빌려 쓰기도 했다.
- 중국어로 읽을 수 있는 불교 문헌이 생겼다
미쉬나 편집 (200년)
갈릴리 · 유대교
성전이 사라진 뒤 구전으로 이어지던 율법 해석이 흩어질 위험이 있었다.
유다 하나시가 주제별로 정리해 여섯 편의 묶음으로 편집했다.
- 구전 율법이 문헌으로 고정되었다
마니교의 등장 (240년)
사산조 페르시아 · 기독교
조로아스터교·기독교·불교의 요소가 함께 흐르던 이란과 메소포타미아가 무대였다.
마니가 자신을 예언자 계보의 마지막으로 내세우며 가르침을 폈고, 여러 언어로 전파되었다.
- 로마에서 중앙아시아까지 퍼진 국제적 종교가 되었다
데키우스 박해 (250년)
로마 제국 전역 · 기독교
3세기의 위기 속에서 제국의 결속을 신들에 대한 제사로 다지려 했다.
모든 주민에게 제사를 드리고 증명서를 받도록 명령했고, 거부한 그리스도인이 처벌받았다.
- 처음으로 제국 전체 규모의 조직적 박해가 이뤄졌다
- 많은 이가 제사에 응해 배교자로 분류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대박해 (303년~311년)
로마 제국 전역 · 기독교
제국을 재정비하던 황제가 전통 종교 질서 회복을 함께 추진했다.
교회 건물 파괴, 성경 압수와 소각, 성직자 체포와 제사 강요가 이어졌다.
- 가장 규모가 큰 박해였으나 기독교를 없애지는 못했다
밀라노 칙령 (313년)
밀라노 · 기독교
박해가 실패로 끝나고 제국의 두 통치자가 종교 정책을 조정했다.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의 자유로운 예배를 허용하고 몰수 재산을 돌려주기로 했다.
- 기독교가 합법 종교가 되었다
학계의 평가: 문서의 성격과 명칭이 학계에서 다시 검토되고 있다.
니케아 공의회 (325년)
니케아(이즈니크) · 기독교, 가톨릭, 동방정교회
아리우스의 주장을 둘러싼 논쟁이 동방 교회 전체로 번졌다.
황제가 소집한 회의에 각지의 감독이 모여 신경을 채택하고 부활절 날짜 문제도 다루었다.
- 니케아 신경이 채택되고 아리우스의 주장이 배척되었다
학계의 평가: 회의 참석자 수와 진행 과정의 세부는 사료마다 다르다.
테살로니카 칙령과 국교화 (380년~392년)
테살로니카·콘스탄티노폴리스 · 기독교, 유대교
니케아 신앙과 다른 계열의 대립이 이어지는 가운데 황제가 한쪽을 국가의 신앙으로 정했다.
380년 니케아 신앙을 제국의 공식 신앙으로 선포하고, 392년에는 전통 종교의 제사를 금했다.
- 기독교가 사실상 국교가 되었다
- 전통 종교의 공적 제사가 금지되었다
구마라집의 한역 사업 (401년~413년)
장안 · 불교
쿠차 출신 승려 구마라집이 전란 중에 중국으로 옮겨 왔다.
국가의 지원 아래 대규모 번역단을 꾸려 대승 경전을 옮겼다.
- 《묘법연화경》 《금강경》 등 널리 읽히는 한역본이 나왔다
서고트의 로마 약탈 (410년)
로마 · 기독교
게르만 여러 집단이 제국 안으로 이동하는 가운데 서고트가 이탈리아로 들어왔다.
사흘에 걸쳐 도시가 약탈당했다. 80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 제국의 무적 신화가 무너졌다
에페소 공의회 (431년)
에페소 · 기독교, 동방정교회, 가톨릭
마리아를 ‘하나님을 낳은 이’라 부를 수 있는가를 두고 알렉산드리아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충돌했다.
회의 진행 자체가 파행을 겪었고, 네스토리우스가 파면되었다.
- ‘하나님을 낳은 이’ 호칭이 승인되었다
학계의 평가: ‘네스토리우스주의’라는 이름이 그의 실제 입장과 얼마나 맞는지가 논쟁된다.
칼케돈 공의회 (451년)
칼케돈(카디쾨이) · 기독교, 가톨릭, 동방정교회
에페소 이후에도 그리스도 안의 두 본성을 설명하는 방식을 두고 대립이 이어졌다.
황제가 소집한 회의에서 두 본성이 혼합되지도 분리되지도 않는다는 정의문을 채택했다.
- 칼케돈 정의가 채택되었다
베네딕도 규칙의 제정 (529년)
몬테카시노 · 기독교, 가톨릭
서로마가 무너진 뒤 수도 생활의 기준이 지역마다 제각각이었다.
베네딕도가 온건하고 실행 가능한 공동생활 규칙을 정리했다.
- 기도와 노동, 순명과 정주를 축으로 한 수도 생활이 자리 잡았다
하기아 소피아 완공 (537년)
콘스탄티노폴리스 · 동방정교회, 기독교
폭동으로 옛 성당이 불탄 뒤 유스티니아누스가 전례 없는 규모로 다시 지었다.
5년 남짓 만에 거대한 돔을 올린 성당이 완성되었다.
- 동방 기독교 전례의 상징적 공간이 되었다
일본 불교 전래 (538년)
아스카 · 불교
한반도의 백제가 야마토 왕권과 교류하며 불상과 경전을 보냈다.
왕실 안에서 받아들일 것인가를 두고 다툼이 있었고, 결국 수용 쪽이 힘을 얻었다.
- 일본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들어왔다
학계의 평가: 연대뿐 아니라 초기 수용의 성격(정치적 동맹의 일부였는지)이 논의된다.
히즈라(메카에서 메디나로의 이주) (622년)
메카 → 메디나 · 이슬람교
메카의 지도층이 무함마드와 그 추종자들을 배척하면서 공동체의 존립이 어려워졌다.
무함마드와 신자들이 메디나로 옮겨 가 공동체를 세우고 도시의 여러 집단과 협약을 맺었다.
- 신앙 공동체가 정치 공동체의 성격을 함께 갖게 되었다
현장의 구법 여행 (629년~645년)
장안 → 중앙아시아 → 인도 → 장안 · 불교
한역 경전의 번역이 서로 달라 원전을 직접 확인할 필요가 커졌다.
현장은 국법을 어기고 출국해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의 여러 불교 중심지에서 배우고 돌아왔다.
- 대량의 산스크리트 경전을 가져와 번역 사업을 벌였다
예루살렘의 무슬림 접수 (638년)
예루살렘 · 이슬람교, 기독교, 유대교
동로마와 사산조의 오랜 전쟁으로 지친 시리아·팔레스타인이 차례로 무슬림 세력에 넘어갔다.
포위 끝에 도시가 항복 조건을 협상해 넘어갔다고 전한다.
- 기독교 주민과 성소의 존속이 인정되었다
- 유대인의 거주가 다시 허용되었다
카르발라 사건 (680년)
카르발라(이라크) · 이슬람교
무함마드 사후 공동체 지도자의 자격과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이어졌다.
무함마드의 외손자 후사인과 소수의 일행이 우마이야 군에 포위되어 살해되었다.
- 우마이야 왕조의 지배가 굳어졌다
학계의 평가: 수니·시아의 분기를 하나의 사건으로 환원하지 않는 것이 최근 연구의 경향이다.
무슬림 세력의 이베리아 진출 (711년)
이베리아반도 · 이슬람교, 기독교, 유대교
서고트 왕국 내부의 왕위 다툼으로 방어가 흔들리던 때였다.
지브롤터를 건넌 군대가 몇 해 만에 반도 대부분을 장악했다.
- 이베리아에 이슬람 통치가 시작되었다
학계의 평가: 공존(콘비벤시아)의 실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가 오랜 쟁점이다.
성상 파괴 논쟁 (726년~787년)
콘스탄티노폴리스 · 동방정교회, 기독교
성상 공경이 우상숭배인가를 두고 황제와 수도원 세력이 부딪쳤다.
황제의 명령으로 성상이 제거되고 옹호자가 박해받았으며,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가 공경을 인정했다.
- 성상 공경이 신학적으로 정당화되었다
아바스 혁명과 바그다드 건설 (750년~762년)
바그다드 · 이슬람교
아랍인 우대 정책에 대한 비아랍 무슬림의 불만이 쌓여 있었다.
호라산에서 시작된 봉기가 우마이야를 무너뜨렸고, 새 왕조가 바그다드를 세웠다.
- 정치 중심이 시리아에서 이라크로 옮겨졌다
카롤루스의 황제 대관 (800년)
로마 · 가톨릭, 동방정교회
교황이 동로마 대신 프랑크 왕국을 후원자로 택하는 흐름이 이어져 왔다.
성탄절 미사에서 교황이 카롤루스에게 황제의 관을 씌웠다.
- 서방에 별도의 ‘황제’가 생겼다
카라이파의 대두 (830년)
바그다드·팔레스타인 · 유대교
탈무드 전승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성경만을 따르려는 흐름이 세력을 얻었다.
카라이파 학자들이 성경 본문 연구와 히브리어 문법 연구를 발전시키며 랍비 진영과 논쟁했다.
- 유대교 안에 뚜렷한 두 갈래가 생겼다
성상 공경의 최종 회복 (84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 동방정교회
787년 공의회 이후에도 성상 파괴 정책이 한 차례 되살아났다.
황후 테오도라의 결정으로 성상 공경이 회복되었고, 이를 기념하는 주일이 정해졌다.
- 성상 논쟁이 끝났다
회창폐불 (845년)
당 제국 전역 · 불교, 기독교
사찰이 소유한 토지와 인력이 국가 재정과 병력에 부담이 된다는 인식이 커졌다.
수천 곳의 사찰이 헐리고 승려가 환속했으며, 경교·마니교·조로아스터교도 함께 금지되었다.
- 중국 불교가 큰 타격을 입었다
- 중국의 경교 공동체가 사실상 무너졌다
슬라브 선교와 문자 창제 (863년)
대모라비아 · 동방정교회, 가톨릭
모라비아의 군주가 자기 말로 가르칠 선교사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요청했다.
두 형제가 슬라브어를 적을 문자를 만들고 성경과 전례서를 옮겼다. 라틴어·그리스어·히브리어만 거룩한 언어라는 주장과 부딪혔다.
- 슬라브어로 예배하고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클뤼니 수도원 설립과 개혁 운동 (910년)
클뤼니 · 가톨릭
지역 영주가 수도원장을 임명하고 교회 재산을 좌우하는 관행이 널리 퍼져 있었다.
설립자가 수도원을 교황에게 직속시켜 지역 영주의 간섭에서 떼어 냈다.
- 개혁된 수도원 연합망이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코르도바 칼리프국 선포 (929년)
코르도바 ·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
이베리아를 다스리던 우마이야 가문이 바그다드·카이로와 대등함을 내세우려 했다.
스스로 칼리프를 칭하고 궁정과 학문을 크게 후원했다.
- 코르도바가 유럽 최대 규모의 도시이자 학문 중심지가 되었다
대장경 목판 인쇄 (971년~983년)
청두·개봉 · 불교
목판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방대한 경전을 대량으로 찍을 수 있게 되었다.
국가 사업으로 13만 장에 이르는 목판을 새겨 대장경을 인쇄했다.
- 경전을 대량으로 보급할 수 있게 되었다
키예프 루스의 개종 (988년)
키이우 · 동방정교회
루스의 대공이 이웃 여러 종교를 살핀 끝에 동방 기독교를 택했다고 연대기는 전한다.
대공이 세례를 받고 백성에게도 세례를 명했다.
- 루스가 동방 기독교권에 들어갔다
학계의 평가: 개종의 실제 동기와 과정, 연대기 기사의 신뢰도가 논의된다.
동서 교회의 상호 파문 (105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 가톨릭, 동방정교회
언어(라틴어·그리스어), 전례 관습, 신경의 필리오케 표현, 로마 주교의 권위 범위를 둘러싼 차이가 수백 년에 걸쳐 쌓여 있었다.
로마에서 온 사절단이 총대주교를 파문하는 문서를 하기아 소피아에 두었고, 총대주교도 사절단을 파문했다.
- 양측 지도부 사이의 공식 단절
학계의 평가: 당시 사람들이 이 사건을 최종적 분열로 인식했는지 자체가 논쟁거리다.
클레르몽 교회회의와 원정 호소 (1095년)
클레르몽(프랑스) · 가톨릭
만지케르트 패배 후 동로마 황제가 서방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교황 우르바노 2세가 회의 말미에 동방을 돕고 성지로 갈 것을 호소했고, 참가자에게 영적 보상을 약속했다.
- 수만 명 규모의 원정이 조직되었다
학계의 평가: 우르바노 2세가 실제로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남아 있는 다섯 개의 연설 기록은 모두 사건 이후에 쓰였고 내용이 서로 다르다.
라인란트 유대인 학살 (1096년)
보름스·마인츠·쾰른 등 · 유대교, 가톨릭
제1차 십자군에 참가하려 모인 무리 가운데 일부가 출발 전 유대인 공동체를 습격했다.
여러 도시에서 유대인 공동체가 개종을 강요당하거나 살해되었다. 일부 주교가 보호를 시도했으나 막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 여러 공동체가 사실상 소멸했다
제1차 십자군의 예루살렘 점령 (1099년)
예루살렘 · 가톨릭, 이슬람교, 유대교
3년에 걸친 원정 끝에 십자군이 예루살렘에 이르렀다.
포위 끝에 도시를 함락하고 무슬림과 유대인 주민을 대규모로 살해했다.
- 예루살렘 왕국 등 십자군 국가가 세워졌다
톨레도 번역 학파 (1130년~1200년)
톨레도 · 가톨릭, 이슬람교, 유대교
1085년 톨레도가 기독교 왕국에 넘어가면서 아랍어 장서가 그대로 남았다.
유대인·모사라베·라틴 성직자가 함께 아랍어 문헌을 카스티야어를 거쳐 라틴어로 옮겼다.
- 아리스토텔레스·의학·수학·천문학 문헌이 라틴 유럽에 들어왔다
하틴 전투와 살라딘의 예루살렘 회복 (1187년)
하틴·예루살렘 · 이슬람교, 가톨릭, 유대교
십자군 국가들이 내부 분열을 겪는 사이 살라딘이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합했다.
물 없는 고지에서 십자군 주력이 궤멸했고, 몇 달 뒤 예루살렘이 항복 조건을 협상해 넘어갔다.
- 예루살렘이 88년 만에 무슬림 통치로 돌아갔다
- 제3차 십자군이 소집되었다
요크 유대인 학살 (1190년)
요크 · 유대교, 가톨릭
제3차 십자군 준비 열기 속에 잉글랜드 여러 도시에서 유대인 공격이 이어졌다.
피신한 공동체가 성탑에 갇혔고, 다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살해되었다.
- 요크의 유대인 공동체가 사실상 소멸했다
인도 불교 대사원의 파괴 (1193년)
날란다 · 불교, 이슬람교
북인도의 정치 질서가 무너지고 새 세력이 갠지스 유역으로 들어왔다.
날란다·비크라마실라 등 대사원이 습격을 받아 파괴되었다.
- 인도 본토 불교 교단의 학문 중심이 무너졌다
학계의 평가: 쇠퇴의 원인 비중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계속 논쟁된다.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 가톨릭, 동방정교회
성지로 향하던 원정이 뱃삯 문제와 동로마 왕위 다툼에 얽혀 방향을 잃었다.
사흘 동안 도시가 약탈당했고 성당과 도서관, 성유물이 털렸다.
- 라틴 제국이 세워져 반세기 넘게 도시를 지배했다
학계의 평가: ‘의도된 침공인가 우연한 표류인가’가 오랜 논쟁이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 (1215년)
로마 · 가톨릭, 유대교, 이슬람교
교황권이 절정에 이른 시기에 교회 전반의 규율을 정비하려 했다.
성사와 고해, 성직자 규율, 이단 대응, 소수자 규정 등을 폭넓게 결정했다.
- 해마다 고해와 영성체를 하도록 정했다
- 유대인과 무슬림에게 구별되는 복장을 요구했다
일본 가마쿠라 신불교의 등장 (1224년)
가마쿠라·교토 · 불교
전란과 기근으로 말세 의식이 퍼졌고, 기존 대사찰은 귀족 중심이었다.
염불, 좌선, 제목 등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단순한 수행을 내세운 새 종파들이 잇따라 일어났다.
- 정토종·정토진종·선종·일련종 등이 자리 잡았다
몽골의 바그다드 함락 (1258년)
바그다드 · 이슬람교
몽골이 서쪽으로 진격하며 이란과 이라크를 차례로 장악했다.
포위 끝에 도시가 함락되고 칼리프가 처형되었으며 도서관이 파괴되었다.
- 5백 년 이어진 아바스 칼리프조가 끝났다
아비뇽 교황청 시기 (1309년~1377년)
아비뇽 · 가톨릭
교황과 프랑스 왕의 충돌 끝에 교황청이 로마를 떠나 프랑스 남부에 자리 잡았다.
일곱 명의 교황이 잇따라 아비뇽에 머물며 행정과 재정 조직을 크게 키웠다.
- 교황청 관료제와 재정 체계가 정비되었다
흑사병과 유대인 학살 (1347년~1351년)
유럽 전역 · 유대교, 가톨릭
몇 해 사이 유럽 인구의 삼분의 일가량이 사라지는 대유행이 닥쳤다.
스트라스부르·바젤·마인츠 등 여러 도시에서 유대인 공동체가 고문 끝의 자백을 근거로 학살당했다.
- 수백 곳의 공동체가 파괴되었다
서방 교회의 대분열 (1378년~1417년)
로마·아비뇽 · 가톨릭
교황청이 로마로 돌아온 직후의 선거를 두고 다툼이 일어났다.
로마와 아비뇽에 각각 교황이 서고, 뒤에는 피사에서 제3의 교황까지 나와 세 명이 병존했다.
- 유럽 각국이 정치적 이해에 따라 서로 다른 교황을 지지했다
위클리프의 개혁 요구와 영어 성경 (1380년)
옥스퍼드 · 가톨릭, 개신교
교회의 재산과 권위에 대한 비판이 잉글랜드에서 커지고 있었다.
위클리프와 그 제자들이 성경의 권위를 앞세우고 성경을 영어로 옮겼으며, 롤라드라 불린 추종자들이 생겼다.
- 영어 성경이 필사로 퍼졌다
얀 후스의 화형 (1415년)
콘스탄츠 · 가톨릭, 개신교
대분열을 수습하려 열린 공의회가 개혁 문제도 함께 다뤘다.
안전 통행을 약속받고 공의회에 온 후스가 체포되어 이단으로 단죄되고 화형에 처해졌다.
- 체코에서 후스 전쟁이 일어났다
피렌체 공의회의 재결합 시도 (1439년)
피렌체 · 가톨릭, 동방정교회
오스만의 압박을 받던 동로마가 서방의 군사 지원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긴 논쟁 끝에 합의문에 서명했으나, 동방 대표 일부는 끝내 서명하지 않았다.
- 형식상 재결합이 선언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 이슬람교, 동방정교회
동로마는 도시 하나만 남은 상태였고, 오스만은 대포를 앞세워 포위했다.
53일의 포위 끝에 성벽이 뚫렸고 마지막 황제가 전사했다.
- 천 년 넘게 이어진 동로마 제국이 끝났다
- 하기아 소피아가 모스크가 되었다
구텐베르크의 성경 인쇄 (1455년)
마인츠 · 기독교, 가톨릭, 개신교
금속 활자와 유성 잉크, 압착기를 결합한 인쇄술이 완성되었다.
라틴어 성경을 180부 남짓 인쇄했다.
- 책을 대량으로 똑같이 찍어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라나다 함락과 유대인 추방령 (1492년)
그라나다·카스티야 · 유대교, 이슬람교, 가톨릭
이베리아 재정복이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고, 종교적 단일화 정책이 강화되었다.
1월 그라나다가 항복하고, 3월 유대인에게 개종하거나 떠나라는 칙령이 내려졌으며, 8월 콜럼버스가 출항했다.
- 이베리아의 이슬람 통치가 끝났다
- 수만 명의 유대인이 추방되었다
- 대서양 항해가 시작되었다
95개 논제 발표 (1517년)
비텐베르크 · 가톨릭, 개신교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자금을 위한 면벌부 판매가 독일 지역에서 논란이 되었다.
루터가 면벌부에 관한 95개 토론 주제를 발표했고, 인쇄되어 몇 주 만에 독일 전역에 퍼졌다.
- 대규모 신학 논쟁이 시작되었다
학계의 평가: 게시 장면의 역사성, 루터의 초기 의도(개혁인가 분리인가)가 주요 논쟁점이다.
트리엔트 공의회 (1545년~1563년)
트리엔트 · 가톨릭
개신교의 확산과 오래된 내부 개혁 요구가 함께 압력이 되었다.
세 차례에 걸친 회기 동안 교리와 규율을 정리했다.
- 성경과 전통의 관계, 성사, 칭의에 관한 가톨릭의 입장을 정리했다
- 신학교 제도를 도입했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 가톨릭, 개신교
제국 안에서 가톨릭과 루터파 제후의 무력 충돌이 이어졌다.
제후가 자기 영지의 신앙(가톨릭 또는 루터파)을 정하도록 하는 원칙에 합의했다.
- 일시적 평화가 확보되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 (1572년)
파리 및 프랑스 여러 도시 · 가톨릭, 개신교
가톨릭과 위그노(프랑스 개혁파)의 갈등이 왕실 혼례를 계기로 폭발했다.
파리에서 시작된 학살이 여러 도시로 번져 수천 명이 살해되었다.
- 프랑스 종교전쟁이 격화되었다
30년전쟁 (1618년~1648년)
중부 유럽 · 가톨릭, 개신교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개혁파(칼뱅)를 포함하지 않았고, 제후들의 종교·정치 이해가 얽혀 있었다.
보헤미아에서 시작해 덴마크·스웨덴·프랑스가 차례로 개입하며 30년간 이어졌다. 가톨릭 프랑스가 개신교 편에 서기도 했다.
- 중부 유럽 일부 지역에서 인구가 3분의 1 이상 줄었다
학계의 평가: 이 전쟁을 얼마나 ‘종교 전쟁’으로 부를 수 있는지가 계속 논쟁된다.
갈릴레오 재판 (1633년)
로마 · 가톨릭
지구가 움직인다는 주장이 성경 해석과 충돌한다는 판단이 있었다.
그는 자기 주장을 철회하고 가택 연금 상태로 여생을 보냈다.
- 지동설 관련 저작이 금서 목록에 올랐다
학계의 평가: 이 사건을 종교와 과학의 본질적 충돌로 볼 수 있는가가 논쟁의 핵심이다.
시마바라 봉기와 일본의 기독교 금지 (1637년~1638년)
시마바라 · 기독교, 가톨릭
선교로 신자가 늘었으나 막부는 기독교를 통치의 위협으로 보고 탄압을 강화했다.
농민과 신자들이 봉기했으나 진압되었다.
- 기독교 금지가 철저해지고 쇄국 정책이 굳어졌다
러시아 정교회의 전례 개혁과 구교도 분리 (1654년~1666년)
모스크바 · 동방정교회
총대주교 니콘이 그리스 관행에 맞춰 전례서와 예식을 고치려 했다.
성호를 긋는 손가락 수 같은 세부까지 바뀌자 이를 거부하는 이들이 분리해 나갔다.
- 구교도(라스콜니키)가 갈라졌다
샤브타이 츠비 운동 (1665년~1666년)
오스만 제국·유럽 · 유대교
1648년 동유럽 학살의 참상과 카발라의 종말 기대가 겹쳐 구원에 대한 갈망이 컸다.
그가 메시아로 선포되자 유럽과 중동의 공동체가 크게 술렁였으나, 술탄 앞에 선 그가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운동이 무너졌다.
- 대규모 실망과 혼란이 뒤따랐다
대각성 운동 (1734년~1745년)
북아메리카 식민지 · 개신교
형식화된 교회 생활에 대한 불만과 개인적 회심 체험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야외 설교와 순회 전도로 대규모 집회가 잇따랐고, 교단의 경계를 넘어 번졌다.
- 회심 체험을 강조하는 신앙 형태가 자리 잡았다
웨슬리의 회심과 감리교 운동 (1738년)
런던 · 개신교
국교회 안에서 형식적 신앙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지고 있었다.
웨슬리가 회심 경험을 한 뒤 야외 설교와 소그룹(속회)을 통해 조직적인 운동을 폈다.
- 규율 있는 소그룹 중심의 신앙 운동이 확산되었다
와하비 운동과 사우드 가문의 동맹 (1744년)
디리야(아라비아) · 이슬람교
후대에 더해진 관행을 걷어 내고 초기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나왔다.
종교 지도자와 지역 수장이 동맹을 맺어 종교 개혁과 정치적 확장을 함께 추진했다.
- 아라비아 중부에 새로운 정치·종교 체제가 세워졌다
학계의 평가: 이 운동과 현대 극단주의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첨예한 쟁점이다.
하시디즘의 시작 (1750년)
포돌리아(동유럽) · 유대교
학문 중심의 엘리트 문화와 메시아 운동의 좌절 뒤에, 가난한 이들이 다가갈 수 있는 신앙이 필요했다.
바알 셈 토브를 중심으로 기쁨과 기도, 일상의 거룩함을 강조하는 흐름이 퍼졌다.
- 동유럽 유대 사회의 큰 부분이 이 운동에 참여했다
프랑스 혁명과 탈기독교화 (1789년~1794년)
프랑스 · 가톨릭, 유대교
교회는 프랑스에서 최대의 지주였고 신분제의 한 축이었다.
교회 재산이 국유화되고 성직자에게 국가에 대한 서약이 요구되었으며, 공포정치기에는 예배가 사실상 금지되기도 했다.
- 교회가 국가에서 분리되는 과정이 폭력적으로 시작되었다
개신교 세계 선교 운동 (1792년~1900년)
인도·중국·아프리카·태평양 · 개신교, 기독교
부흥 운동으로 자란 헌신과 유럽의 해상 진출이 겹치면서 선교 단체가 잇따라 세워졌다.
선교사들이 성경을 현지어로 옮기고 학교와 병원을 세웠다. 그 과정은 식민 지배의 확장과 자주 겹쳤다.
- 기독교가 아시아·아프리카·태평양으로 크게 퍼졌다
학계의 평가: 선교의 유산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가 오늘날에도 활발히 논의된다.
성서 역사비평의 확산 (1835년~1900년)
독일 대학 · 기독교, 개신교, 가톨릭
역사학과 문헌학의 방법이 성경 연구에 본격 적용되었다.
오경의 여러 자료를 구분하는 가설, 복음서의 형성 과정 연구, 예수의 생애를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 성경을 역사 문헌으로 읽는 학문 분야가 자리 잡았다
학계의 평가: 역사적 방법과 신앙적 읽기의 관계는 지금도 열린 물음이다.
일본의 신불분리와 폐불훼석 (1868년~1874년)
일본 · 불교
새 정부가 천황 중심의 국가 신도를 세우려 하면서 불교와 신도를 분리하려 했다.
사찰과 불상이 파괴되고 승려가 환속했으며, 사찰의 토지와 특권이 사라졌다.
- 일본 불교가 제도적 기반을 크게 잃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 (1869년~1870년)
바티칸 · 가톨릭
교황령이 축소되고 근대 사상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교회의 권위를 분명히 하려 했다.
신앙과 도덕에 관해 공식적으로 선언할 때의 교황 무류성을 정의했다.
- 교황 수위권과 무류성이 교의로 선포되었다
파나두라 논쟁 (1873년)
파나두라(스리랑카) · 불교, 기독교
식민 통치 아래에서 기독교 선교가 활발했고, 불교계가 공개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이틀에 걸친 공개 토론에 수천 명이 모였고, 불교 측 발언이 널리 호응을 얻었다.
- 불교 부흥 운동에 큰 힘이 실렸다
시카고 세계종교회의 (1893년)
시카고 · 불교,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만국박람회의 부대 행사로, 세계의 여러 종교 대표를 한자리에 모으는 시도가 이뤄졌다.
아시아의 종교 지도자들이 서구 청중 앞에서 직접 자기 전통을 소개했다. 힌두교의 비베카난다와 불교의 다르마팔라 등이 큰 반향을 얻었다.
- 아시아 종교가 서구 대중에게 직접 소개되었다
제1차 시온주의자 대회 (1897년)
바젤 · 유대교
러시아의 학살(포그롬)과 서유럽의 드레퓌스 사건으로, 해방만으로는 안전을 얻을 수 없다는 인식이 퍼졌다.
헤르츨의 주도로 여러 나라 대표가 모여 조직과 강령을 마련했다.
-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을 팔레스타인에 세운다는 목표가 공식화되었다
홀로코스트 (1941년~1945년)
독일 점령 유럽 전역 · 유대교
종교적 반유대주의의 오랜 전통 위에 19세기 인종 이론이 결합하면서, 유대인을 인종적으로 규정하고 배제하는 정책이 가능해졌다.
차별 법령, 격리, 강제 이주를 거쳐 조직적 절멸 정책이 시행되었다. 절멸 수용소에서의 대량 학살이 그 정점이었다.
- 약 600만 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고 유럽 유대인 공동체가 파괴되었다
학계의 평가: 교회와 개별 지도자들의 책임 범위, 저항과 침묵의 사례에 대한 평가가 계속 논의되고 있다.
이스라엘 건국과 팔레스타인 실향 (1948년)
팔레스타인 ·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19세기 말 시온주의 운동, 영국 위임통치, 홀로코스트 이후의 난민 문제가 겹쳤다.
1947년 유엔 분할안 이후 전쟁이 일어났고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포했다.
- 유대 국가가 수립되었다
- 수십만 명의 팔레스타인 주민이 고향을 떠났다(나크바)
- 아랍 국가들에 살던 유대인 다수도 이후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학계의 평가: 이 항목은 오늘날 살아 있는 정치 쟁점이다. 이 앱은 어느 한쪽의 서술을 정답으로 제시하지 않고, 사실과 각 당사자의 관점을 구분해 적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62년~1965년)
바티칸 · 가톨릭
근현대 세계와의 관계를 다시 정리해야 한다는 요구가 오래 쌓여 있었다.
네 차례 회기에 걸쳐 16개 문헌을 채택했다.
- 모국어 전례를 허용했다
- 다른 기독교 전통과의 일치 운동에 참여를 표명했다
- 종교 자유를 인정하는 선언을 채택했다
- 〈우리 시대〉로 타 종교, 특히 유대교와의 관계를 새로 정리했다
이란 혁명 (1979년)
이란 · 이슬람교
급속한 근대화 정책, 정치적 억압, 외세 개입에 대한 반발이 쌓였다.
대규모 시위로 왕정이 무너지고 이슬람 공화국 체제가 수립되었다.
- 시아 이슬람 법학자가 국가 최고 권위를 갖는 체제가 만들어졌다
9·11 이후 종교와 안보 담론의 결합 (2001년)
뉴욕·워싱턴 · 이슬람교, 기독교
20세기 후반의 정치적 갈등과 극단주의 조직의 활동이 배경에 있었다.
민간 항공기를 이용한 공격으로 약 3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 전 세계에서 안보 정책과 이슬람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었다
학계의 평가: 종교가 이 폭력의 원인인지, 정치가 종교의 언어를 쓴 것인지가 계속 논쟁된다.
〈우리와 당신 사이의 공통된 말〉 서한 (2007년)
요르단 암만 · 이슬람교, 기독교
9·11 이후 높아진 긴장 속에서 대화의 틀을 만들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138명의 무슬림 학자와 지도자가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공통 기반을 제안했다.
- 여러 교단과 신학교가 공식 응답을 보냈고 정기 대화가 시작되었다
정교회 대공의회(크레타) (2016년)
크레타 · 동방정교회
정교회 전체가 모이는 공의회를 열자는 논의가 20세기 초부터 이어져 왔다.
오랜 준비 끝에 열렸으나 러시아 등 네 개 교회가 불참했다.
- 여러 문헌이 채택되었으나 전체 교회의 참여는 이루지 못했다
〈인간 형제애〉 문서 서명 (2019년)
아부다비 · 가톨릭, 이슬람교
가톨릭과 수니 이슬람의 대표적 기관 사이에 대화가 여러 해 이어져 왔다.
교황과 알아즈하르의 대이맘이 함께 문서에 서명했다.
- 종교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폭력을 함께 규탄하고 공존을 선언했다
감염병 유행과 온라인 예배의 확산 (2020년~2022년)
세계 ·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불교
전 세계적 감염병 유행으로 모임 자체가 제한되었다.
예배·기도회·순례가 중단되거나 온라인으로 옮겨 갔다. 메카 순례와 부활절·유월절 모임도 크게 축소되었다.
- 종교 활동의 상당 부분이 온라인으로 이동했다
학계의 평가: 이 시기의 변화가 종교 생활에 남긴 영향은 지금도 연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