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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 한눈 · 제1권
세계 종교사의 출발
고대 근동에서 기원전 1세기까지
검수용 교정본 · 배포 금지
같은 시대, 서로 다른 믿음은 어떤 역사를 지나왔는가
검수 완료 7 / 7장
차례
- 제1장 기원전 20~7세기의 세계 종교
- 제2장 기원전 6세기의 세계 종교
- 제3장 기원전 5세기의 세계 종교
- 제4장 기원전 4세기의 세계 종교
- 제5장 기원전 3세기의 세계 종교
- 제6장 기원전 2세기의 세계 종교
- 제7장 기원전 1세기의 세계 종교
이 책이 다루는 것
- 종교란 무엇인가
- 고대 세계와 종교
- 유대교의 형성
- 불교의 탄생과 발전
- 기독교 탄생 이전의 세계
- 기원전 종교사 연대표
이 책은 역사적 사실, 종교 전통의 주장, 학문적 해석을 구분해 씁니다. 확정되지 않은 연대와 논쟁 중인 내용은 그렇게 밝혀 적었고, 특정 종교의 관점만으로 다른 종교를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제1장 기원전 20~7세기의 세계 종교
기원전 2000년~기원전 601년
고대 근동의 제국들 사이에서 이스라엘 종교 전통이 자리를 잡는다.
읽는 글
제1장 기원전 20~7세기의 세계 종교
고대 근동의 제국들 사이에서 이스라엘 종교 전통이 자리를 잡습니다
기원전 2000년 ~ 기원전 601년
여는 장면 — 신이 많던 세계
기원전 2000년 무렵의 세계에는 아직 우리가 아는 어떤 세계 종교도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집트에는 신전이 있었고, 메소포타미아에는 지구라트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도시마다 다른 신을 섬겼습니다. 도시가 흥하면 그 도시의 신이 강한 것이고, 도시가 망하면 그 신이 진 것이었습니다. 신은 땅과 함께 있었고, 백성과 함께 있었습니다.
이 긴 시간 속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른 길을 걸어갔습니다. 여러 신 가운데 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한 분만을 예배하는 길이었습니다. 그 전통이 오늘날의 유대교로 이어집니다.
이 장은 천사백 년을 다룹니다. 세기 하나로 끊기에는 자료가 성기고, 무엇이 언제 일어났는지 확정하기 어려운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1. 제국들이 오가던 땅
이 시기의 근동은 큰 세력이 번갈아 지나가는 통로였습니다.
이집트의 중왕국과 신왕국이 남쪽에서 올라왔고,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가 동쪽에서 밀고 왔으며, 아나톨리아의 히타이트가 북쪽에서 내려왔습니다. 이스라엘 전통이 형성된 가나안 지역은 그 사이에 낀 좁은 땅이었습니다.
- 기원전 18세기경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이 만들어졌습니다.
- 기원전 13~12세기 청동기 문명이 지중해 동부에서 잇따라 무너졌습니다.
- 기원전 9~7세기 신아시리아 제국이 근동 대부분을 지배했습니다.
- 인도에서는 베다 문헌이 형성되고, 기원전 8~6세기 사이에 초기 우파니샤드 사상이 나타났습니다.
- 중국에서는 주나라의 봉건 질서가 흔들리며 춘추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은 오늘 루브르에 서 있습니다. 검은 돌기둥에 쐐기문자가 빼곡한 이 유물은 재산과 상해와 계약을 다루면서, 그 모든 것을 '신에게서 받은 정의'라는 틀 안에 놓습니다. 성경의 율법과 형식과 내용에서 자주 비교되는 자료입니다.
2. 이스라엘 종교 전통의 형성
성경은 이 시기를 족장들의 부름, 이집트 탈출, 시내산 언약, 왕국과 예언자들의 이야기로 전합니다.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는 모두 아브라함을 자기 전통의 조상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세 종교를 '아브라함 계통 종교'라 부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의 실재를 확인할 당대 자료는 없습니다. 족장 시대의 연대(기원전 19세기경) 역시 성경 전승을 바탕으로 한 추정이며, 학계에서 여러 견해가 맞섭니다.
이 시기의 종교사에서 눈에 띄는 흐름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예배의 중심이 모였습니다. 처음에는 여러 성소에서 제사를 드렸으나, 점차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이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둘째, 예언자들이 나타났습니다. 아모스는 기원전 8세기에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하며 제사보다 정의를 앞세웠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짓밟는 사회를 향한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이사야는 같은 세기에 예루살렘에서 아시리아의 위협 앞에 선 왕실을 향해 말했습니다.
이사야서는 여러 시대의 글이 한 책으로 묶였다는 것이 학계의 다수 견해입니다(1~39장·40~55장·56~66장). 기독교는 이 책의 여러 대목을 그리스도와 연결해 읽어 왔고, 유대교는 그 해석을 공유하지 않습니다.
3. 출애굽 — 전승과 역사 사이
성경이 전하는 이집트 탈출은 유대교 신앙과 절기의 뼈대를 이룹니다. 유월절은 해마다 이 이야기를 되새기는 절기입니다.
유대교는 이를 해마다 되새기는 건국의 기억이자 해방의 원형으로 봅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예표하는 사건으로 읽어 왔고, 쿠란도 무사(모세)와 파라오의 이야기를 예언자 전승으로 전합니다.
이 규모의 탈출을 직접 뒷받침하는 이집트 기록이나 고고학 증거는 아직 없습니다. 소규모 집단의 이동 기억이 커진 것으로 보는 견해, 후대의 신학적 서사로 보는 견해 등이 맞섭니다. 연대도 기원전 15세기설과 13세기설이 나뉩니다.
이 앱이 취하는 태도는 분명합니다. 전승과 역사 재구성을 섞지 않고 나란히 적습니다. 어느 한쪽을 지우면 이 이야기가 왜 삼천 년을 이어졌는지도, 왜 학자들이 논쟁하는지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가장 이른 기록은 남아 있습니다. 기원전 1208년경 이집트 파라오 메르넵타가 세운 승전 비문입니다. 이 비문에서 ‘이스라엘’에는 도시나 나라가 아니라 사람의 무리를 가리키는 이집트 상형문자 한정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이름의 집단이 가나안에 있었다는 것까지는 말할 수 있지만, 그 집단의 규모나 성격, 성경이 전하는 이스라엘과의 관계까지는 이 비문으로 알 수 없습니다.
4. 기원전 722년 — 북이스라엘이 사라지다
성경은 기원전 930년경 왕국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었다고 전합니다. 두 왕국이 나란히 있었다는 것은 기원전 9세기의 비문들(메샤 석비, 아시리아 왕실 기록)로 확인되지만, 분열의 경위와 그 연대는 성경 서술에 기댄 것입니다. 그리고 기원전 722년, 신아시리아 제국이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함락했습니다.
몇 해에 걸친 포위 끝에 도성이 무너졌고, 주민 상당수가 강제로 옮겨졌습니다. 왕국은 사라졌습니다.
함락 연도를 기원전 722년으로 보는 견해와 720년으로 보는 견해가 갈립니다. 살만에세르 5세가 포위를 시작했고 사르곤 2세가 자기 비문에서 함락을 자기 공으로 적었는데, 두 왕의 교체 시기와 비문의 서술이 맞물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옮겨진 주민의 수도 사르곤 비문의 27,290명이라는 숫자 하나뿐이어서 실제 규모는 알 수 없습니다.
아시리아가 이 지역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그들 자신이 새겨 두었습니다. 대영박물관의 라기스 공성 부조입니다. 다만 이 부조는 사마리아 함락이 아니라, 스무 해 뒤인 기원전 701년 산헤립이 남유다를 친 원정을 새긴 것입니다. 같은 제국이 같은 방식으로 이웃 왕국을 삼키는 장면이라 나란히 놓을 뿐, 722년의 기록이 아닙니다. 그리고 승리자 쪽이 남긴 기록이라는 점을 잊지 않고 성경의 서술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이 사건이 남긴 것은 영토의 상실만이 아니었습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이 망했는가'라는 물음이 예언자 문헌의 큰 주제가 되었습니다. 신앙 전통의 중심은 남유다로 옮겨졌습니다.
이 지역에 남은 사람들과 오늘의 사마리아인 공동체가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당사자마다 말이 다릅니다. 열왕기하 17장은 아시리아가 옮겨 온 이방 주민들과 섞였다고 적고,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이 옮겨 가지 않고 남은 요셉 지파의 후손이며 오히려 남유다 쪽이 전통을 바꿨다고 말합니다. 한쪽 서술만 옮기지 않습니다.
5. 기원전 622년 — 요시야의 개혁
아시리아의 힘이 약해진 틈에 남유다의 요시야 왕이 종교와 정치를 함께 정비했습니다. 이 개혁을 전하는 자료는 열왕기하 22~23장과 역대하 34~35장뿐이며, 이를 뒷받침하는 당대의 비문이나 유물은 아직 없습니다.
성경은 성전을 수리하다 율법책을 발견했고, 그것이 개혁의 계기가 되었다고 전합니다. 지방 성소를 없애고 예배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았으며, 발견된 율법책에 따라 유월절을 지켰다고 합니다.
율법책 발견 기사가 개혁을 정당화하기 위한 서술인지, 실제 발견인지가 논쟁거리입니다. 발견된 율법책이 신명기 계열 문헌과 연결된다는 것이 유력한 설명이며, 신명기 계열 문헌의 성립 시기와 이 개혁의 관계는 구약학의 오랜 쟁점입니다.
확실한 것은 이것입니다. '한 곳에서 드리는 예배'라는 형태가 이 무렵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이 무너질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다음 장에서 보게 됩니다.
6. 같은 시기, 다른 곳에서는
세 지역을 나란히 놓아 보겠습니다. 서로 만난 적 없는 곳들입니다.
| 고대 근동 | 인도 | 중국 | |
|---|---|---|---|
| 종교의 모습 | 도시마다 다른 신, 신전과 제사 | 베다 제사와 우파니샤드 사상 | 조상 제사와 하늘(天) 신앙 |
| 이 시기의 큰 흐름 | 이스라엘 전통의 형성과 예언자 운동 | 제사 종교에 대한 물음이 자라남 | 주나라 질서가 흔들림 |
| 뒤에 무엇이 되었나 | 유대교 | 불교·자이나교 | 유교·도가 |
기원전 8~6세기에 세 지역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기존 종교 질서를 다시 묻는 움직임입니다. 근동에서는 예언자들이 제사보다 정의를 말했고, 인도에서는 제사 중심의 브라만교에 대한 물음이 자랐으며, 중국에서는 옛 질서가 흔들리며 새로운 사상이 나올 자리가 열렸습니다.
이들 사이에 접촉은 없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놓고 보는 것은 비교를 위한 배치이지, 영향 관계가 아닙니다.
이 장이 남긴 다섯 문장
- 이 시기 세계에는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불교 가운데 어느 것도 아직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 이스라엘 종교 전통은 고대 근동 제국들의 틈바구니에서 형성되었습니다.
- 성경의 이야기와 고고학·역사학의 재구성은 겹치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합니다. 둘을 섞어 말하지 않습니다.
-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왜 망했는가'라는 신학적 물음을 낳았습니다.
- 인도에서는 불교가 나올 사상적 토양이 마련되고 있었습니다.
생각해 볼 질문
- 고대 근동에서 '한 분만 예배한다'는 생각은 왜 특별한 것이었을까요?
- 성경이 전하는 이야기와 고고학이 말하는 것이 다를 때,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남유다 사람들의 신앙에 어떤 질문을 던졌을까요?
이 장에서 쓴 자료
문헌
- 함무라비 법전 (기원전 18세기, 아카드어) — 루브르 박물관
- 메르넵타 석비 (기원전 1208년경, 이집트 상형문자) —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자료 사진
- 함무라비 법전 석주 (실제 유물) · 라기스 공성 부조 (실제 유물) · 메르넵타 석비 (실제 유물)
참고
- 이스라엘 왕국사 관련 표준 개설서와 고고학 보고
- 고대 근동 문헌 자료집(함무라비 법전, 아시리아 연대기 등)
- 히브리 성경 본문 (전승 자료로 표기)
「종교사 한눈」이 모아 둔 자료로 작성한 원고입니다.
검수 이력
- 1차 · 사실 확인 — 라기스 공성 부조를 722년 사마리아 함락 대목에서 떼어 내고, 자료에 적힌 대로 기원전 701년 산헤립의 유다 원정임을 밝힘. 사마리아 함락에 722년설과 720년설이 갈린다는 점과 이주 규모의 근거(사르곤 비문 27,290명)를 추가. 왕국 분열 연대가 성경 서술에 기댄 것임을 표시. 요시야 개혁의 자료가 성경 기록뿐임을 명시. 초기 우파니샤드 시기를 기원전 8~6세기로 넓힘.
- 2차 · 관점 검토 — 사마리아인 공동체의 기원을 열왕기하의 서술만으로 적지 않고, 사마리아인 자신의 자기 이해를 나란히 실음. 메르넵타 석비에서 무엇까지 말할 수 있는지를 한정사 표기를 근거로 한정.
- 3차 · 저작권 확인 — 자료 사진 3장의 이용 조건 확인(CC BY-SA 3.0 / 4.0).
- 남은 것 · 외부 검토 — 쓴 쪽과 검수한 쪽이 같습니다. 출판 전 제3자의 확인이 필요합니다.
1. 세기를 여는 한 장면
기원전 2000년 무렵의 세계에는 아직 우리가 아는 어떤 세계 종교도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이집트에는 신전이, 메소포타미아에는 지구라트가 있었고, 사람들은 도시마다 다른 신을 섬겼다. 이 긴 시간 속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여러 신 가운데 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한 분만을 예배하는 길을 걸어갔고, 그 전통이 오늘날의 유대교로 이어진다.
2. 기원전 20~7세기의 세계사 배경
이집트 중왕국과 신왕국,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 아나톨리아의 히타이트가 번갈아 근동을 지배했다. 인도에서는 인더스 문명이 저물고 베다 문화가 자리 잡았으며, 중국에서는 상나라와 주나라가 이어졌다.
- 기원전 18세기경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이 만들어졌다.
- 기원전 13~12세기 청동기 문명이 지중해 동부에서 잇따라 무너졌다(‘청동기 시대의 붕괴’).
- 기원전 9~7세기 신아시리아 제국이 근동 대부분을 지배했다.
- 인도에서는 베다 문헌이 형성되고 기원전 8~7세기부터 우파니샤드 사상이 나타났다.
- 중국에서는 주나라의 봉건 질서가 흔들리며 춘추시대로 접어들었다.
3. 한눈에 보는 연대표
| 연도 | 일어난 일 | 관련 종교 |
|---|---|---|
| 기원전 2000년경 | 고대 근동에 도시국가와 신전 종교가 널리 퍼져 있었다. | |
| 기원전 1900~1500년경 | 성경이 전하는 아브라함·이삭·야곱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기. 연대는 학계에서 논쟁 중이다. (학문적 해석) | 유대 |
| 기원전 13세기경(1250년경) | 이집트에서의 탈출과 시내산 언약을 전하는 출애굽 전승의 배경 시기. (전통의 주장) | 유대 |
| 기원전 1000년경 | 다윗과 솔로몬의 왕국 전승. 예루살렘이 종교 중심지가 된다. (전통의 주장) | 유대 |
| 기원전 930년경 | 성경은 왕국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었다고 전한다. 두 왕국의 존재는 기원전 9세기 비문으로 확인되나, 분열의 경위와 연대는 성경 서술에 기댄다. (전통의 주장) | 유대 |
| 기원전 722년 | 아시리아가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함락한다. 함락 연도는 722년설과 720년설이 갈린다. | 유대 |
| 기원전 8~7세기 | 아모스·호세아·이사야·미가 등 예언자들의 활동이 문헌으로 남는다. | 유대 |
| 기원전 622년 | 남유다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이 계기가 되었다고 성경이 전하며, 이를 뒷받침하는 당대 자료는 없다. (학문적 해석) | 유대 |
4. 유대교
여러 신 가운데 한 분만을 예배하는 길
이스라엘 종교 전통은 고대 근동의 종교 세계 안에서 형성되었다. 성경은 족장들의 부름, 이집트 탈출, 시내산 언약, 왕국과 예언자들의 이야기로 이 시기를 전한다. 역사학계는 이 전승들이 언제 어떻게 문헌이 되었는지를 두고 여러 견해로 나뉘어 있다.
- 예배의 중심이 여러 성소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이는 과정을 겪었다.
- 예언자들은 제사보다 정의와 자비를 앞세우는 목소리를 냈다.
-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무너지면서 남유다에 신앙 전통이 집중되었다.
- 기원전 622년 요시야의 개혁은 신명기 계열 전통과 연결되어 논의된다.
5. 기독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1세기 유대교 안의 예수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6. 가톨릭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라틴어를 쓰는 서방교회 전통이 로마 주교를 중심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서서히 형성되었다. 특정 연도를 창립일로 삼기 어렵다.
7. 동방정교회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그리스어를 쓰는 동방교회 전통. 1054년은 분열을 상징하는 사건이지 시작점이 아니다.
8. 개신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16세기 종교개혁 과정에서 여러 갈래로 형성되었다.
9. 이슬람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무함마드의 활동과 함께 7세기 아라비아에서 시작되었다. 622년 히즈라를 이슬람력 원년으로 삼는다.
10. 불교
인도에서는 베다 종교와 초기 우파니샤드 사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불교는 기원전 6~5세기에 시작된다.
11. 종교 간 관계
유대교 ↔ 불교 — 문화·학문·예술 교류
이 시기에 두 전통은 서로를 알지 못했다. 이스라엘 종교 전통은 고대 근동의 제국들 사이에서, 인도 종교문화는 베다 전통 안에서 각각 형성되고 있었다. 만남이 없었다는 사실 자체를 적어 두는 것이 이 앱의 방식이다.
유대교 ↔ 기독교 — 공통 기원과 공유 전통
기독교는 아직 없다. 다만 이 시기에 만들어진 성경과 예언자 전통, 절기와 언약 개념이 뒤에 기독교가 그대로 물려받는 유산이 된다.
유대교의 자리에서: 유대교는 이것을 자기 전통의 형성기로 본다.
기독교의 자리에서: 기독교는 이 시기의 문헌을 자기 성경의 앞부분으로 읽는다. 다만 그 해석은 유대교와 다르다.
12. 이 세기의 결정적 사건
이집트 탈출 전승 (기원전 1250년)
히브리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다 탈출해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었다고 전한다. 이 이야기는 유대교 신앙과 절기(유월절)의 뼈대를 이룬다.
원인
- 이집트에서의 강제 노역
- 성경이 전하는 하나님의 부르심
전개
성경은 열 가지 재앙, 바다를 건넘, 광야 40년, 시내산 율법 수여의 순서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결과
- 이스라엘이 한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고 전한다
장기적 영향
- 유월절이 유대교의 중심 절기가 되었다
- 해방의 이야기로서 후대 기독교와 여러 사회운동에도 인용되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유대교 | 매년 유월절에 되새기는 건국의 기억이자 해방의 원형이다. |
| 기독교 | 그리스도의 구원을 예표하는 사건으로 읽어 왔다. |
| 이슬람교 | 쿠란도 무사(모세)와 파라오 이야기를 예언자 전승으로 전한다. |
| 역사학계 | 이 규모의 탈출을 직접 뒷받침하는 이집트 기록이나 고고학 증거는 아직 없다. 소규모 집단의 이동 기억이 커진 것으로 보는 견해, 후대의 신학적 서사로 보는 견해 등이 맞선다. |
학계의 평가
연대(기원전 15세기설과 13세기설), 규모, 역사성 자체가 모두 학계의 논쟁 대상이다. 이 앱은 전승과 역사 재구성을 섞지 않고 나란히 적는다.
사마리아 함락과 북이스라엘의 멸망 (기원전 722년)
신아시리아 제국이 근동으로 세력을 넓히는 가운데 북이스라엘이 조공을 끊고 반기를 들었다.
원인
- 아시리아의 팽창
- 북이스라엘의 반기와 이집트에 대한 기대
전개
몇 해에 걸친 포위 끝에 수도 사마리아가 함락되고 주민 상당수가 강제 이주되었다.
결과
- 북이스라엘 왕국이 사라졌다
- 주민 이주와 외지인 정착이 이뤄졌다
장기적 영향
- 신앙 전통의 중심이 남유다로 옮겨졌다
- 이 지역 주민들이 훗날 사마리아인 공동체로 이어진다
- ‘왜 하나님의 백성이 망했는가’라는 물음이 예언자 문헌의 큰 주제가 되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유대교 | 언약을 저버린 결과로 해석하는 예언자적 서술이 성경에 남았다. |
| 역사학계 | 아시리아 왕실 비문과 성경 기록이 서로 보완된다. 이주 규모는 사료마다 달라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 |
학계의 평가
함락 연도를 722년으로 보는 견해와 720년으로 보는 견해가 갈린다. 살만에세르 5세가 포위를 시작했고 사르곤 2세가 함락을 자기 공으로 비문에 적었는데, 두 왕의 교체 시기와 비문의 서술이 맞물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 남은 주민과 오늘의 사마리아인 공동체가 어떻게 이어지는지도 쟁점이다. 열왕기하 17장은 이방 주민과 섞였다고 적고,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이 남은 요셉 지파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요시야의 종교개혁 (기원전 622년)
아시리아의 힘이 약해진 틈에 남유다 요시야 왕이 종교와 정치를 함께 정비했다. 성전을 수리하다 율법책을 발견했다고 성경은 전한다.
원인
- 아시리아 쇠퇴로 생긴 정치적 여유
- 지방 성소의 난립
- 예언자 계열의 요구
전개
지방 성소를 없애고 예배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았으며, 발견된 율법책에 따라 유월절을 지켰다고 전한다.
결과
- 예배 장소가 예루살렘으로 집중되었다
장기적 영향
- ‘한 곳에서 드리는 예배’라는 형태가 자리 잡았다
- 발견된 율법책이 신명기 계열 문헌과 연결된다는 것이 학계의 유력한 설명이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유대교 | 언약으로 돌아간 모범적 개혁으로 기억된다. |
| 역사학계 | 율법책 발견 기사가 개혁을 정당화하기 위한 서술인지, 실제 발견인지가 논쟁거리다. |
학계의 평가
신명기 계열 문헌의 성립 시기와 이 개혁의 관계가 구약학의 오랜 쟁점이다.
13. 주요 인물
| 인물 | 생몰 | 활동 | 후대의 평가 |
|---|---|---|---|
| 아브라함 | 기원전 19세기경(전승) | 성경은 그가 고향을 떠나 가나안으로 갔다고 전한다 |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가 모두 자기 전통의 조상으로 삼는다. 그래서 세 종교를 ‘아브라함 계통 종교’라 부르기도 한다. 역사학계는 그의 실재를 확인할 자료가 없다고 본다. |
| 모세 | 기원전 13세기경(전승) | 이집트 탈출을 이끌었다고 전한다 /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다고 전한다 | 유대교는 그를 가장 큰 예언자로, 기독교는 율법의 중개자로, 이슬람교는 주요 예언자 가운데 하나로 존중한다. 토라의 저자를 모세로 보는 전통과 여러 자료가 오래 편집되었다고 보는 학계의 설명이 나란히 있다. |
| 아모스 | 기원전 8세기 | 북이스라엘에서 예언 활동을 했다 / 그의 말이 예언서로 남았다 | 예언자 문헌 가운데 이른 시기의 것으로, 사회 정의를 말하는 신앙의 원천으로 오늘날까지 널리 인용된다. |
| 이사야 | 기원전 8세기 | 아시리아 위협기에 유다 왕실을 향해 예언했다 | 이사야서는 여러 시대의 글이 한 책으로 묶였다는 것이 학계의 다수 견해다(1~39장·40~55장·56~66장). 기독교는 이 책의 여러 대목을 그리스도와 연결해 읽어 왔고, 유대교는 그 해석을 공유하지 않는다. |
14. 주요 문헌과 사상
| 문헌 | 시기 | 언어 | 핵심 내용 |
|---|---|---|---|
| 함무라비 법전 | 기원전 18세기 | 아카드어 | 재산·상해·가족·계약에 관한 판례 모음으로, 신에게서 받은 정의라는 틀 안에 놓여 있다. |
| 메르넵타 석비 | 기원전 1208년경 | 이집트 상형문자 | 가나안 원정의 전과를 새긴 승전 비문.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가장 이른 기록이다. |
15. 지도와 이동 경로
고대 근동과 이스라엘 전통의 무대 (기원전 2000~601년)
족장 이야기와 출애굽 경로의 지점들은 확정된 것이 아니라 전승에 따른 비정이다. 확실한 것과 추정을 섞어 읽지 않도록 주의한다.
| 장소 | 성격 | 설명 |
|---|---|---|
| 우르 | 도시 | 성경이 아브라함의 출신지로 전하는 곳. |
| 하란 | 도시 | |
| 예루살렘 | 성지 | 기원전 622년 요시야 개혁의 무대. |
| 사마리아 | 도시 |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 함락. |
| 니느웨 | 도시 | 신아시리아 제국의 수도. |
| 바빌론 | 도시 | |
| 테베(룩소르) | 도시 | 이집트 신왕국의 중심. |
경계 확실성: 논쟁 중
| 경로 | 성격 | 설명 |
|---|---|---|
| 족장 이야기의 이동(전승) | 이주 | 창세기 서사의 지명을 이은 것으로, 역사적 경로가 확인된 것은 아니다. |
16. 사진과 유물로 보는 역사
17. 핵심 정리
- 이 시기 세계에는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불교 가운데 어느 것도 아직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 이스라엘 종교 전통은 고대 근동 제국들의 틈바구니에서 형성되었다.
- 성경의 이야기와 고고학·역사학의 재구성은 겹치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한다. 둘을 섞어 말하지 않는다.
- 인도에서는 불교가 나올 사상적 토양(베다·우파니샤드)이 마련되고 있었다.
18. 비교표
| 고대 근동 | 인도 | 중국 | |
|---|---|---|---|
| 종교의 모습 | 도시마다 다른 신, 신전과 제사 | 베다 제사와 우파니샤드 사상 | 조상 제사와 하늘(天) 신앙 |
| 이 시기의 큰 흐름 | 이스라엘 전통의 형성과 예언자 운동 | 제사 종교에 대한 물음이 자라남 | 주나라 질서가 흔들림 |
| 뒤에 무엇이 되었나 | 유대교 | 불교·자이나교 | 유교·도가 |
서로 만난 적 없는 세 지역에서, 기존 종교 질서를 다시 묻는 움직임이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다.
19. 생각해 볼 질문
- 고대 근동에서 ‘한 분만 예배한다’는 생각은 왜 특별한 것이었을까?
- 성경이 전하는 이야기와 고고학이 말하는 것이 다를 때,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남유다 사람들의 신앙에 어떤 질문을 던졌을까?
20. 확인 퀴즈
아시리아가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함락한 해는?
- 기원전 922년
- 기원전 722년
- 기원전 586년
- 기원전 539년
‘아브라함은 기원전 1900년경 사람이다’라는 문장은 어디에 해당하는가?
- 복수의 자료로 확인된 사실
- 종교 전통의 주장에 근거한 연대 추정이자 학문적 논쟁 대상
- 현대 역사학계의 합의
- 고고학이 확정한 연대
기원전 20~7세기에 ‘아직 형성되지 않은’ 종교로 바르게 묶인 것은?
- 기독교·이슬람교·불교
- 유대교·기독교
- 이슬람교·불교
- 기독교·가톨릭
정답 1) 2 · 2) 2 · 3) 1
해설
1. 기원전 722년이다. 기원전 586년은 신바빌로니아가 예루살렘을 함락한 해로, 서로 다른 사건이다.
2. 족장 시대의 연대는 성경 전승을 바탕으로 한 추정이며, 학계에서 여러 견해가 맞선다.
3. 불교는 기원전 6~5세기, 기독교는 1세기, 이슬람교는 7세기에 시작된다.
21. 주석과 참고문헌
- 이스라엘 왕국사 관련 표준 개설서와 고고학 보고
- 고대 근동 문헌 자료집(함무라비 법전, 아시리아 연대기 등)
- 히브리 성경 본문(전승 자료로 표기)
제2장 기원전 6세기의 세계 종교
기원전 600년~기원전 501년
성전이 무너진 세기, 그리고 붓다가 나타난 세기.
읽는 글
제2장 기원전 6세기의 세계 종교
성전이 무너진 세기, 그리고 붓다가 나타난 세기입니다
기원전 600년 ~ 기원전 501년
여는 장면 — 불타는 성전과 떠나는 왕자
기원전 587년 또는 586년, 예루살렘 성전이 불탔습니다. 바빌로니아의 기록과 성경의 두 계산법이 한 해 어긋나 있어, 이 책은 어느 한쪽으로 굳히지 않고 둘을 나란히 적습니다.
신을 예배하던 건물이 사라진 자리에서 유대인들은 성전 없이도 신앙을 이어가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제사를 드릴 제단이 없고, 순례할 곳이 없고, 제사장이 할 일이 없어졌습니다.
거의 같은 무렵, 인도 북부에서는 한 사람이 왕궁을 떠나 고통의 뿌리를 묻고 있었습니다.
서쪽 끝에서는 성전이 무너지고, 동쪽에서는 새로운 길이 열린 세기입니다. 두 곳은 서로를 몰랐습니다.
두 일을 한 세기에 놓는 이 배치는 붓다의 전통적 연대(기원전 563~483년경)를 따를 때만 성립합니다. 학계의 수정 연대(기원전 480~400년경)를 따르면 붓다는 다음 세기나 그 뒤의 사람이 됩니다. 이 책은 어느 쪽도 확정하지 않으므로, 이 장의 '같은 세기'라는 틀 자체가 하나의 선택임을 밝혀 둡니다.
1. 제국이 바뀌던 세기
신바빌로니아가 근동을 지배하다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에 무너졌습니다. 그리스에서는 폴리스가 성장했고, 중국은 춘추시대 후기로 공자가 활동했으며, 인도에서는 갠지스 유역에 여러 나라가 다투고 있었습니다.
- 기원전 605년 이후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근동을 장악했습니다.
-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가 바빌론을 점령했습니다.
- 페르시아는 피지배 민족의 종교에 비교적 관용적인 통치를 폈습니다.
- 중국에서는 공자(기원전 551~479년경)가 가르쳤습니다.
- 인도 갠지스 유역에서 여러 사상가들이 브라만교의 제사 중심 종교를 비판했습니다.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는 바빌론의 이슈타르 문이 복원되어 서 있습니다. 푸른 유약 벽돌에 짐승 문양이 새겨진 거대한 성문입니다. 유대인이 끌려간 도시가 어떤 곳이었는지를 이 문 하나가 말해 줍니다.
2. 기원전 587/586년 — 성전이 무너지다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사이에서 줄타기하던 남유다가 바빌로니아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포위 끝에 도성이 무너졌고, 성전이 불탔으며, 지배층과 기술자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유다 왕국은 사라졌습니다.
바빌론 연대기와 예루살렘 발굴의 층위가 성경 기록과 대체로 맞물립니다. 다만 끌려간 인원 수는 사료마다 다릅니다.
유대교는 이 날을 티샤 베아브로 해마다 애도합니다. 동시에 신앙이 새로 태어난 자리이기도 합니다.
이 사건이 던진 물음은 무거웠습니다.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라면, 그 집이 불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가 진 것인가, 우리 하나님이 진 것인가.
3. 성전을 잃고 책과 공동체를 얻다
포로기의 유대인 공동체가 찾아낸 답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제사를 드릴 성전이 없는 상태에서, 안식일 준수와 할례와 율법 낭독과 공동체 모임이 신앙의 중심 표지가 되었습니다. 건물이 아니라 시간과 몸과 말과 사람이 신앙의 자리가 된 것입니다.
성전 없는 신앙 형태가 포로기에 자리 잡았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설명입니다. 에스겔과 제2이사야 계열 문헌이 이 시기의 신학을 담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포로로 끌려간 공동체 가운데서 예언했습니다. 그가 남긴 것은 세 가지 생각입니다. 성전이 없는 곳에도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는 것, 각 사람이 자기 행위에 책임을 진다는 것, 그리고 마른 뼈가 살아나듯 회복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이때 자리 잡은 형태가 없었다면, 오늘의 유대교도 없습니다. 그리고 훗날 기원후 70년에 성전이 다시 무너졌을 때, 유대교는 이미 이 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4. 기원전 539년 — 뜻밖의 해방자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가 바빌론을 점령했습니다. 성경(에스라 1장)은 그가 유대인의 귀환과 성전 재건을 허락했다고 전하고, 키루스 자신의 원통 비문은 메소포타미아 여러 신전의 신상과 주민을 제자리로 돌려보냈다고 적습니다. 두 기록은 결이 비슷하지만 같은 문서가 아닙니다.
성경은 이 이방 왕을 이례적으로 높이 평가합니다. 이사야 45장 1절은 그를 두고 '기름 부음 받은 자(메시아)'라고까지 부릅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이 호칭이 이방 통치자에게 붙는 곳은 여기뿐입니다.
대영박물관의 키루스 원통은 바빌론 점령을 정당화하고 여러 신전과 주민을 복구·귀환시켰다고 밝히는 왕실 문서입니다.
이 원통은 특정 민족만이 아니라 여러 신전 복구를 말하는 일반 정책 문서이며, 유대인을 직접 언급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전하는 칙령의 문안과 곧바로 같은 문서는 아닙니다. '최초의 인권 선언'이라는 현대의 평가도 과장이라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견해입니다.
관용은 페르시아의 통치술이기도 했습니다. 피지배 민족이 자기 신에게 제사를 드리며 제국의 안녕을 빌게 하는 것이 실리에 맞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결과입니다. 유대인 일부가 돌아갔고, 기원전 516년경 제2성전이 봉헌되었습니다.
많은 유대인은 바빌론에 남았습니다. 이 공동체는 그 뒤로도 끊이지 않았고, 훨씬 뒤인 기원후 3~6세기에는 바빌로니아 탈무드를 엮어 내는 학문의 중심이 됩니다. 디아스포라는 이때부터 유대교의 예외가 아니라 상수가 되었습니다.
5. 같은 세기, 인도에서
인도 북부에서 고타마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고 가르침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전승은 그 자리를 각각 다르게 전합니다. 깨달음은 마가다의 보드가야에서, 첫 설법은 그보다 서쪽인 사르나트에서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사르나트에는 다메크 탑이 서 있습니다. 다만 지금 보이는 건축은 기원후 5~6세기의 것입니다. 자리는 전승이 이어 왔고, 건물은 훨씬 뒤의 것이라는 점을 함께 적어 둡니다.
브라만교의 제사와 카스트 질서 바깥에서, 스스로의 수행으로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했습니다. 출가자 공동체(승가)가 만들어지고 재가 신자가 이를 후원하는 구조가 생겨났습니다.
가르침의 뼈대는 네 가지 진리(고·집·멸·도)와 여덟 갈래 길이었습니다. 극단적 고행도, 제사 중심의 종교도 아닌 중도의 길입니다. 태생의 신분(바르나)이 아니라 행위가 사람을 규정한다는 주장도 함께 있었습니다.
붓다의 생몰연도는 확정된 사실이 아닙니다. 전통적 연대(기원전 563~483년경)와 수정 연대(기원전 480~400년경)가 맞섭니다. 이 앱은 어느 한쪽을 확정으로 적지 않습니다.
불교는 그를 깨달은 이로 존경하되 창조주 신으로 예배하지 않습니다. 이 점이 다른 세 종교와의 큰 차이입니다.
초기 가르침은 문자가 아니라 암송으로 전해졌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가 다음 세기의 과제가 됩니다.
같은 세기에 자이나교의 마하비라도 비슷한 문제의식으로 활동했고, 페르시아에서는 조로아스터교 전통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6. 두 전통을 나란히 놓으면
| 유대교 | 불교 | |
|---|---|---|
| 이 세기에 일어난 일 | 성전 파괴와 포로, 그리고 귀환 | 붓다의 활동과 승가의 시작 |
| 무엇을 물었나 | 성전 없이 어떻게 신앙을 이어갈 것인가 | 고통은 어디서 오고 어떻게 벗어나는가 |
| 답의 형태 | 안식일·율법·공동체 | 네 가지 진리와 여덟 갈래 길 |
| 연대의 확실성 | 587/586·539·516년경 — 제국 기록과 발굴로 뒷받침됨 | 두 계열의 연대가 100년 넘게 벌어져 있음 |
두 전통은 서로를 알지 못했습니다. 같은 세기에 놓고 보는 것은 비교를 위한 배치입니다.
다만 이렇게 볼 수는 있습니다. 한쪽은 잃어버린 것 앞에서 물었고, 다른 한쪽은 가진 것 앞에서 물었습니다. 성전을 잃은 사람들과 왕궁을 떠난 사람이, 각각 다른 자리에서 같은 크기의 물음을 만난 세기였습니다.
이 장이 남긴 다섯 문장
- 기원전 587/586년 성전 파괴와 바빌론 포로기는 유대교의 성격을 바꿔 놓았습니다.
- 성전 없이도 신앙을 유지하는 방식(안식일·율법·공동체)이 이때 자리 잡았습니다.
-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의 관용 정책으로 귀환과 제2성전 재건이 가능해졌습니다.
- 같은 세기에 인도에서 불교가 시작되었고, 두 전통은 서로 알지 못한 채 각자의 길을 갔습니다.
- 붓다의 생몰연도는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 학계의 논쟁거리입니다.
생각해 볼 질문
- 예배할 건물이 사라졌을 때, 사람들은 무엇으로 신앙을 이어갔을까요?
- 붓다와 예언자들은 각각 자기 시대의 종교에서 무엇을 문제 삼았을까요?
- 정복자가 종교에 관용을 베푸는 것은 왜 정치적으로도 이득이 되었을까요?
이 장에서 쓴 자료
문헌
- 키루스 원통 (기원전 539년경, 아카드어) — 대영박물관
자료 사진
- 이슈타르 문 (실제 유물) · 키루스 원통 (실제 유물) · 사르나트 다메크 탑 (실제 유물)
참고
- 히브리 성경 열왕기하·에스라 (전승 자료)
- 바빌론 연대기, 키루스 원통 비문 (1차 사료)
- 초기 불교 팔리 문헌과 연대 논쟁을 다룬 연구서
「종교사 한눈」이 모아 둔 자료로 작성한 원고입니다.
검수 이력
- 1차 · 사실 확인 — 성전 파괴 연도를 자료대로 587/586년 병기로 되돌림(원고가 586년으로 굳혀 자료와 어긋나 있었음). 키루스 칙령의 첫 문장을 원통 비문이 실제로 말하는 범위로 좁힘. 바빌론 유대 학문 중심지의 시기를 기원후 3~6세기로 명시. 깨달음(보드가야)과 첫 설법(사르나트)의 자리를 구분하고, 다메크 탑의 건축이 기원후 5~6세기임을 밝힘.
- 2차 · 관점 검토 — 「성전이 무너진 세기이자 붓다의 세기」라는 이 장의 틀이 붓다의 전통 연대를 따를 때만 성립한다는 점을 여는 대목에 밝힘. 이사야 45장의 「기름 부음 받은 자」 호칭을 근거로 제시. 「카스트」를 당대의 바르나로 고침.
- 3차 · 저작권 확인 — 자료 사진 3장의 이용 조건 확인.
- 남은 것 · 외부 검토 — 쓴 쪽과 검수한 쪽이 같습니다. 출판 전 제3자의 확인이 필요합니다.
1. 세기를 여는 한 장면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 성전이 불탔다. 신을 예배하던 건물이 사라진 자리에서 유대인들은 성전 없이도 신앙을 이어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 거의 같은 무렵 인도 북부에서는 한 사람이 왕궁을 떠나 고통의 뿌리를 묻고 있었다. 서쪽 끝에서는 성전이 무너지고, 동쪽에서는 새로운 길이 열린 세기다.
2. 기원전 6세기의 세계사 배경
신바빌로니아가 근동을 지배하다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에 무너졌다. 그리스에서는 폴리스가 성장했고, 중국은 춘추시대 후기로 공자가 활동했으며, 인도에서는 갠지스 유역에 여러 나라가 다투고 있었다.
- 기원전 605년 이후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근동을 장악했다.
-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가 바빌론을 점령했다.
- 페르시아는 피지배 민족의 종교에 비교적 관용적인 통치를 폈다.
- 중국에서는 공자(기원전 551~479년경)가 가르쳤다.
- 인도 갠지스 유역에서 여러 사상가들이 브라만교의 제사 중심 종교를 비판했다.
3. 한눈에 보는 연대표
| 연도 | 일어난 일 | 관련 종교 |
|---|---|---|
| 기원전 597년·587/586년 | 신바빌로니아가 예루살렘을 두 차례 함락하고 성전을 파괴한다. 바빌론 포로기가 시작된다. | 유대 |
| 기원전 6세기 중반 | 포로기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안식일·할례·율법 낭독이 신앙의 중심 표지로 자리 잡는다. (학문적 해석) | 유대 |
| 기원전 539년 | 키루스 2세가 바빌론을 정복한다. | |
| 기원전 538년 | 성경(에스라 1장)은 키루스 칙령으로 유대인의 귀환과 성전 재건이 허용되었다고 전한다. 키루스 원통은 메소포타미아 여러 신전의 복구를 말할 뿐 유대인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 | 유대 |
| 기원전 516년경 | 제2성전이 봉헌된다. | 유대 |
| 기원전 6~5세기(전통 연대) 또는 5~4세기(수정 연대) | 고타마 싯다르타가 활동한다. 전통 연대(기원전 563~483년경)와 수정 연대(기원전 480~400년경)가 100년 넘게 벌어져 있어, 그를 이 세기 사람으로 놓는 것 자체가 하나의 선택이다. 이 앱이 사건에 적어 둔 -528년은 전통 연대의 값이다. (학문적 해석) | 불교 |
| 기원전 6세기 | 자이나교의 마하비라가 활동하고, 페르시아에서는 조로아스터교 전통이 자리 잡는다. |
4. 유대교
성전을 잃고 책과 공동체를 얻다
성전 파괴와 바빌론 포로기는 유대교 역사에서 가장 큰 전환점 가운데 하나다. 제사를 드릴 성전이 없는 상태에서 안식일 준수, 할례, 율법 낭독, 공동체 모임이 신앙의 중심 표지가 되었다. 페르시아의 통치 아래 일부가 귀환해 제2성전을 세웠지만, 많은 유대인은 바빌론과 이집트에 남았다. 디아스포라가 이때부터 유대교의 상수가 된다.
- 기원전 586년 제1성전 파괴, 기원전 516년경 제2성전 봉헌.
- 포로기에 성전 없는 신앙 형태가 자리 잡았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설명이다.
- 에스겔·제2이사야 계열 문헌이 이 시기의 신학을 담고 있다.
- 유대인 공동체가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사는 형태가 굳어졌다.
5. 기독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1세기 유대교 안의 예수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6. 가톨릭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라틴어를 쓰는 서방교회 전통이 로마 주교를 중심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서서히 형성되었다. 특정 연도를 창립일로 삼기 어렵다.
7. 동방정교회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그리스어를 쓰는 동방교회 전통. 1054년은 분열을 상징하는 사건이지 시작점이 아니다.
8. 개신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16세기 종교개혁 과정에서 여러 갈래로 형성되었다.
9. 이슬람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무함마드의 활동과 함께 7세기 아라비아에서 시작되었다. 622년 히즈라를 이슬람력 원년으로 삼는다.
10. 불교
고통의 뿌리를 묻는 길이 열리다
인도 북부 마가다 지역에서 고타마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고 가르침을 펴기 시작했다. 브라만교의 제사와 카스트 질서 바깥에서, 스스로의 수행으로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했다. 출가자 공동체(승가)가 만들어지고 재가 신자가 이를 후원하는 구조가 생겨났다.
- 네 가지 진리(사성제)와 여덟 갈래 길(팔정도)이 가르침의 뼈대가 되었다.
- 생몰연도는 전통적 연대(기원전 563~483년경)와 수정 연대(기원전 480~400년경)가 맞선다.
- 같은 시기 자이나교의 마하비라도 비슷한 문제의식으로 활동했다.
- 초기 가르침은 문자가 아니라 암송으로 전해졌다.
11. 종교 간 관계
유대교 ↔ 불교 — 문화·학문·예술 교류
두 전통은 이 시기에 서로 만나지 않았다. 다만 기원전 6세기는 근동과 인도 양쪽에서 기존 종교 질서를 다시 묻는 움직임이 나타난 시기라는 점에서 함께 놓고 볼 만하다.
12. 이 세기의 결정적 사건
예루살렘 함락과 제1성전 파괴 (기원전 586년)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사이에서 줄타기하던 남유다가 바빌로니아에 반기를 들었다.
원인
- 신바빌로니아의 패권
- 유다 왕실의 반기
- 이집트의 지원에 대한 기대
전개
포위 끝에 도성이 무너지고 성전이 불탔으며, 지배층과 기술자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결과
- 제1성전 파괴와 제사 중단
- 유다 왕국의 소멸
- 바빌론 포로기의 시작
장기적 영향
- 성전 없이 신앙을 유지하는 방식(안식일·율법·공동체)이 자리 잡았다
- 디아스포라가 유대교의 상수가 되었다
-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묻는 신학이 깊어졌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유대교 | 티샤 베아브로 해마다 애도하는 재앙이자, 신앙이 새로 태어난 자리이기도 하다. |
| 역사학계 | 바빌론 연대기와 고고학 층위가 성경 기록과 대체로 맞물린다. 끌려간 인원 수는 사료마다 다르다. |
학계의 평가
함락과 성전 파괴의 연도를 587년으로 보는 계산과 586년으로 보는 계산이 갈린다. 유다 왕의 재위 햇수를 어느 달부터 세느냐에 따라 한 해가 어긋나기 때문이다.
키루스 칙령과 귀환 (기원전 538년)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점령하면서 근동의 지배자가 바뀌었다.
원인
- 페르시아의 피지배 민족 종교 존중 정책
- 제국 통치의 실리
전개
유배된 여러 민족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성소를 재건하도록 허용했다.
결과
- 유대인 일부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 성전 재건이 시작되었다
장기적 영향
- 많은 유대인이 바빌론에 남아 학문 중심지를 이뤘다
- 성경은 키루스를 이례적으로 높이 평가한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유대교 | 이방 왕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으로 해석했다. |
| 역사학계 | 키루스 원통은 특정 민족만이 아니라 여러 신전 복구를 말하는 일반 정책 문서다. 성경의 칙령 기사와 곧바로 같은 문서는 아니다. |
학계의 평가
성경이 전하는 칙령 문안의 형태와 키루스 원통의 관계가 논의된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깨달음과 첫 설법 (기원전 528년)
브라만교의 제사와 카스트 질서 바깥에서 수행으로 해탈을 찾는 사문(沙門)들이 활동하던 시대였다.
원인
- 삶의 고통에 대한 물음
- 기존 제사 종교와 극단적 고행 모두에 대한 회의
전개
불교 전통은 그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고, 사르나트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 가르침을 폈다고 전한다.
결과
- 출가 공동체(승가)가 만들어졌다
장기적 영향
- 네 가지 진리와 여덟 갈래 길이 불교 가르침의 뼈대가 되었다
- 인도 밖으로 퍼져 오늘날 세계 종교가 되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불교 | 깨달음의 사건이자 가르침이 세상에 나온 시작으로 기념한다. |
| 역사학계 | 인물의 실재는 대체로 인정되지만 연대는 전통적 연대(기원전 563~483년경)와 수정 연대(기원전 480~400년경)가 맞선다. 이 앱은 어느 한쪽을 확정으로 적지 않는다. |
학계의 평가
생몰연도, 초기 가르침의 원형이 어디까지인지가 계속 연구되고 있다. 이 사건을 기원전 6세기에 놓는 것은 전통 연대를 따를 때이며, 수정 연대를 따르면 기원전 5~4세기의 일이 된다. 이 앱이 적어 둔 -528년은 전통 연대의 값이다.
제2성전 봉헌 (기원전 516년)
귀환자들이 성전 재건을 시작했으나 자금과 이웃 세력의 반대로 오래 지체되었다.
전개
예언자들의 독려와 페르시아 총독의 허가로 공사가 재개되어 봉헌에 이르렀다.
결과
- 제사 제도가 다시 시작되었다
장기적 영향
- 이후 약 6백 년 동안 유대교의 중심 성소가 되었다(기원후 70년까지)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유대교 | 제1성전만 못하다는 아쉬움과 회복의 기쁨이 함께 기록되었다. |
13. 주요 인물
| 인물 | 생몰 | 활동 | 후대의 평가 |
|---|---|---|---|
| 네부카드네자르 2세 | 기원전 634년경 ~ 기원전 562년 |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성전을 파괴했다 / 바빌론을 대규모로 재건했다 | 유대 전통에서는 재앙을 가져온 왕으로, 바빌로니아 사료에서는 위대한 건설자로 기록된다. 같은 인물에 대한 기억이 자리에 따라 정반대다. |
| 키루스 2세 | 기원전 600년경 ~ 기원전 530년 | 아케메네스 제국을 세웠다 / 피지배 민족의 성소 복구를 허용했다 | 히브리 성경이 이례적으로 높이 평가하는 이방 통치자다. ‘관용’이라는 평가는 근대에 다소 이상화된 면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
| 에스겔 | 기원전 6세기 | 포로로 끌려간 공동체 가운데서 예언했다 | 성전 없는 시대의 신앙을 여는 데 결정적인 문헌을 남긴 예언자로 평가된다. |
| 고타마 싯다르타(붓다) | 기원전 563년경 또는 480년경(연대 논쟁) ~ 기원전 483년경 또는 400년경 | 출가해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한다 / 45년간 가르침을 폈다고 전한다 / 출가 공동체를 세웠다 | 불교는 그를 깨달은 이로 존경하되 창조주 신으로 예배하지 않는다. 역사학계는 실재를 인정하되 연대와 생애의 세부는 논쟁 중으로 본다. |
14. 주요 문헌과 사상
| 문헌 | 시기 | 언어 | 핵심 내용 |
|---|---|---|---|
| 키루스 원통 | 기원전 539년경 | 아카드어 | 바빌론 점령을 정당화하고 여러 신전과 주민을 복구·귀환시켰다고 밝히는 왕실 문서다. |
15. 지도와 이동 경로
포로와 귀환, 그리고 붓다의 발자취 (기원전 600~501년)
서쪽과 동쪽에서 각각 일어난 일을 한 지도에 얹었다. 두 사건 사이에 접촉은 없었다.
| 장소 | 성격 | 설명 |
|---|---|---|
| 예루살렘 | 성지 | 기원전 586년 성전 파괴, 516년경 제2성전 봉헌. |
| 바빌론 | 도시 | 포로 공동체가 자리 잡은 곳. |
| 수사 | 도시 | 페르시아의 주요 왕도. |
| 룸비니 | 성지 | 붓다 탄생지로 전한다. |
| 보드가야 | 성지 | 깨달음의 자리로 전한다. |
| 사르나트 | 성지 | 첫 설법의 자리로 전한다. |
| 쿠시나가르 | 성지 | 입멸지로 전한다. |
경계 확실성: 대체로 확실
| 경로 | 성격 | 설명 |
|---|---|---|
| 포로와 귀환 | 이주 |
16. 사진과 유물로 보는 역사
17. 핵심 정리
-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바빌론 포로기는 유대교의 성격을 바꿔 놓았다.
- 성전 없이도 신앙을 유지하는 방식(안식일·율법·공동체)이 이때 자리 잡았다.
-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의 관용 정책으로 귀환과 제2성전 재건이 가능해졌다.
- 같은 세기에 인도에서 불교가 시작되었고, 두 전통은 서로 알지 못한 채 각자의 길을 갔다.
- 붓다의 생몰연도는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 학계의 논쟁거리다.
18. 비교표
| 유대교 | 불교 | |
|---|---|---|
| 이 세기에 일어난 일 | 성전 파괴와 포로, 그리고 귀환 | 붓다의 활동과 승가의 시작 |
| 무엇을 물었나 | 성전 없이 어떻게 신앙을 이어갈 것인가 | 고통은 어디서 오고 어떻게 벗어나는가 |
| 답의 형태 | 안식일·율법·공동체 | 네 가지 진리와 여덟 갈래 길 |
| 연대의 확실성 | 기원전 586·538·516년은 확실 | 붓다의 연대는 학계에서 논쟁 중 |
두 전통은 서로를 알지 못했다. 같은 세기에 놓고 보는 것은 비교를 위한 배치이지 영향 관계가 아니다.
19. 생각해 볼 질문
- 예배할 건물이 사라졌을 때, 사람들은 무엇으로 신앙을 이어갔을까?
- 붓다와 예언자들은 각각 자기 시대의 종교에서 무엇을 문제 삼았을까?
- 정복자가 종교에 관용을 베푸는 것은 왜 정치적으로도 이득이 되었을까?
20. 확인 퀴즈
다음을 시간 순서대로 바르게 늘어놓은 것은?
- 성전 파괴 → 키루스 칙령 → 제2성전 봉헌
- 키루스 칙령 → 성전 파괴 → 제2성전 봉헌
- 제2성전 봉헌 → 성전 파괴 → 키루스 칙령
- 성전 파괴 → 제2성전 봉헌 → 키루스 칙령
붓다의 생몰연도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기원전 563~483년으로 확정되어 있다
- 전통적 연대와 수정 연대가 맞서는 학문적 논쟁 대상이다
- 기원전 480~400년으로 확정되어 있다
- 불교 문헌에 정확한 날짜가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6세기에 활동한 인물이 아닌 사람은?
- 고타마 싯다르타
- 공자
- 마하비라
- 무함마드
정답 1) 1 · 2) 2 · 3) 4
해설
1. 기원전 586년 파괴 → 기원전 538년 칙령 → 기원전 516년경 봉헌 순이다.
2. 두 계열의 연대가 병존한다. 하나로 확정해 가르치면 안 된다.
3. 무함마드는 7세기 사람이다.
21. 주석과 참고문헌
- 히브리 성경 열왕기하·에스라 (전승 자료)
- 바빌론 연대기, 키루스 원통 비문 (1차 사료)
- 초기 불교 팔리 문헌과 연대 논쟁을 다룬 연구서
제3장 기원전 5세기의 세계 종교
기원전 500년~기원전 401년
율법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다시 세우고, 승가가 뿌리를 내린다.
읽는 글
제3장 기원전 5세기의 세계 종교
율법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다시 세우고, 승가가 뿌리를 내립니다
기원전 500년 ~ 기원전 401년
여는 장면 — 광장에서 읽는 책
성전은 다시 섰습니다. 그러나 공동체는 흔들렸습니다.
돌아온 사람들은 적었고, 도성의 성벽은 무너진 채였으며, 주변 세력과의 마찰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우리답게 하는가. 이 물음에 답해야 했습니다.
전승은 한 장면을 전합니다. 광장에 백성이 모였고, 에스라라는 서기관이 토라를 소리 내어 읽었으며, 사람들이 그 뜻을 풀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읽고 해석하고 따르기로 하는 것 — 이 형태가 이 세기에 자리를 잡습니다.
같은 세기에 인도에서는 스승이 떠난 뒤 가르침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가 승가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그리스에서는 사람이 신화 대신 이성으로 세계를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1. 페르시아 제국 아래에서
페르시아 제국이 근동을 지배했습니다. 유다는 그 제국의 작은 지방이었습니다.
그리스는 페르시아 전쟁을 겪은 뒤 아테네가 전성기를 맞았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소모되었습니다. 인도에서는 갠지스 유역의 마가다가 강국으로 떠올랐습니다.
- 기원전 490·480년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페르시아를 막아냈습니다.
- 아테네 민주정과 비극·철학이 꽃피었습니다.
- 기원전 431~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그리스 세계가 소모되었습니다.
- 소크라테스(기원전 469~399년경)가 활동했습니다.
페르세폴리스의 알현전 계단에는 여러 민족의 사절이 줄지어 선 부조가 남아 있습니다. 제국이 여러 민족을 어떻게 다스렸는지, 그리고 유다가 그 가운데 어디쯤에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자료입니다.
2. 책의 종교로 굳어지다
제2성전기의 유다는 제사장 계층이 공동체의 지도력을 쥔 사회였습니다. 성전 제사와 토라 준수라는 두 축으로 움직였습니다.
기원전 445년경 느헤미야가 총독으로 부임해 성벽을 쌓았습니다. 느헤미야서는 쉰이틀 만에 끝냈다고 적습니다(6장 15절). 도성의 형태가 회복되었고, 공동체 규율이 정비되었습니다. 다만 이 기간도, 부임의 경위도, 전하는 자료는 느헤미야 자신의 회고록 하나뿐입니다.
느헤미야 회고록은 1인칭 자료로 사료 가치가 높지만, 자기 변호의 성격도 함께 읽어야 합니다. 에스라의 활동 연대는 기원전 458년설과 398년설이 갈립니다.
이 시기의 성취는 성벽이 아니라 형태였습니다. 토라를 공적으로 낭독하고 그것을 공동체 규범으로 삼는 방식입니다.
이 형태를 회당 예배의 뿌리로 보고, 다시 기독교의 말씀 예배와 이슬람의 낭송 전통까지 이어 읽는 설명이 널리 쓰입니다. 다만 회당이 언제 어디서 생겼는지는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건물로 확인되는 가장 이른 회당은 기원전 3세기 이집트의 것이며, 그 사이를 잇는 자료는 성기게 남아 있습니다. 흐름으로 읽되 직선으로 잇지는 않습니다.
동시에 그늘도 있었습니다. 공동체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과정에서 사마리아 사람들과의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대목의 자료는 에스라·느헤미야서, 곧 예루살렘 쪽 기록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이 갈라져 나간 쪽이 아니라 본래 자리를 지킨 쪽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심 산의 성소는 발굴로 기원전 5~4세기에 이미 있었음이 확인되었고, 두 공동체가 완전히 갈라선 것은 훨씬 뒤인 기원전 2세기의 일로 봅니다.
경계를 긋는 일은 언제 힘이 되고 언제 벽이 되는가 — 이 세기가 남긴 물음입니다.
한편 이집트 남쪽 엘레판티네에는 유대인 주둔군 공동체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남긴 아람어 파피루스 문서가 오늘날까지 전합니다. 결혼과 재산과 소송 문서, 그리고 그곳에 있던 유대인 성소의 재건을 요청하는 편지입니다.
예루살렘 이외의 곳에 유대인 성전이 서 있었고, 거기서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이 성전은 기원전 410년 현지 신관들의 손에 무너졌고, 공동체는 유다 총독과 사마리아 쪽 지도자들에게 나란히 재건을 청원했습니다. 예루살렘 대제사장에게 보낸 편지에는 답이 없었다고 그들 자신이 적고 있습니다.
같은 문서들에는 이 공동체가 야훼(YHW) 곁에 아나트야후 같은 다른 신의 이름도 함께 불렀음이 드러납니다. 이 시기의 유대교가 어디서나 한 모습이 아니었음을 보여 주는 자료입니다. 성경 밖에서 제2성전기 디아스포라의 실제 생활을 보여 주는 드문 1차 사료입니다.
3. 가르침을 기억하는 공동체
붓다의 입멸 후 승가는 가르침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라는 과제를 안았습니다.
문자가 아니라 함께 외우는 방식으로 경(가르침)과 율(규율)이 정리되었다고 전합니다. 불교 전통은 오백 명의 제자가 라자그리하에 모여 함께 외워 확인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붓다를 오래 시봉했다는 아난다가 가르침을 외워 전했다는 것도 이 전승의 일부입니다.
제1차 결집은 가르침이 온전히 보존되었음을 보증하는 사건으로 전해집니다.
이 기사는 후대 문헌의 전승입니다. 결집의 규모와 실제 여부, 시점이 모두 논쟁 대상이며,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다루지 않습니다. 이 일을 기원전 5세기에 놓는 것도 붓다의 전통 연대를 따를 때이며, 수정 연대를 따르면 한두 세기 뒤로 내려갑니다.
확실한 것은 결과입니다. 출가 공동체와 재가 신자의 관계가 제도로 자리 잡았고, 가르침은 여러 지방어로 암송되어 전해졌습니다.
4. 같은 과제, 다른 답
이 세기의 두 전통은 서로 만나지 않았지만, 같은 크기의 과제를 만났습니다. 스승이 떠난 뒤, 혹은 성전이 무너진 뒤, 무엇으로 전통을 이어갈 것인가.
| 유대교 | 불교 | |
|---|---|---|
| 보존 수단 | 글로 적힌 토라를 읽고 해석 | 함께 외워 확인하는 결집 |
| 중심 인물 | 에스라·느헤미야 | 제자 공동체 |
| 공동체의 경계 | 혼인·안식일 규정으로 분명히 함 | 출가자와 재가자의 역할 구분 |
| 자료의 성격 | 성경 기사 + 엘레판티네 1차 사료 | 후대 문헌의 전승 |
한쪽은 글을 택했고, 다른 한쪽은 기억을 택했습니다. 두 선택 모두 장점과 위험이 있었습니다. 글은 고정되지만 해석이 갈리고, 기억은 살아 있지만 흩어질 수 있습니다.
이 장이 남긴 네 문장
- 제2성전기 유대교는 성전 제사와 토라 준수라는 두 축으로 움직였습니다.
- 느헤미야의 성벽과 에스라의 율법 낭독은 공동체의 경계를 다시 그은 사건입니다.
- 불교는 붓다 이후 '가르침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답을 만들어 갔습니다.
- 이 세기 그리스의 이성적 사유는 훗날 기독교 신학이 빌려 쓰게 되는 언어를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당사자들은 물론 그럴 뜻이 없었습니다.
생각해 볼 질문
- 공동체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일은 언제 힘이 되고 언제 벽이 될까요?
- 문자 없이 가르침을 전하는 방식에는 어떤 장점과 위험이 있을까요?
- 제국의 작은 지방으로 사는 것이 유대교의 형태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이 장에서 쓴 자료
문헌
- 엘레판티네 파피루스 (기원전 5세기, 아람어) — 베를린·브루클린 등지에 분산 소장
자료 사진
- 페르세폴리스 알현전 부조 (실제 유물) · 엘레판티네 파피루스 (실제 유물)
참고
- 에스라·느헤미야서 (전승 자료)
- 엘레판티네 파피루스 (1차 사료)
- 제2성전기 유대교 연구서, 초기 불교사 개설서
「종교사 한눈」이 모아 둔 자료로 작성한 원고입니다.
검수 이력
- 1차 · 사실 확인 — 성벽 재건의 근거가 느헤미야 회고록 하나뿐임을 밝히고 쉰이틀(6장 15절)이라는 출처를 명시. 엘레판티네 성전의 파괴 연도(기원전 410년)와 청원의 실제 수신처, 예루살렘의 무응답을 추가. 회당의 기원이 확정되지 않았고 건물로 확인되는 가장 이른 회당이 기원전 3세기임을 밝힘.
- 2차 · 관점 검토 — 사마리아와의 갈라섬을 예루살렘 쪽 기록만으로 적지 않고, 그리심 산 발굴과 사마리아인의 자기 이해를 함께 실음. 엘레판티네 문서에 야훼 곁의 다른 신 이름이 나온다는 점을 추가해 「이 시기 유대교는 한 모습이었다」는 인상을 걷어냄. 제1차 결집의 연대가 붓다의 전통 연대에 기댄 것임을 밝힘.
- 3차 · 저작권 확인 — 자료 사진 2장의 이용 조건 확인.
- 남은 것 · 외부 검토 — 쓴 쪽과 검수한 쪽이 같습니다. 출판 전 제3자의 확인이 필요합니다.
1. 세기를 여는 한 장면
성전은 다시 섰지만 공동체는 흔들렸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성벽을 쌓고 율법을 읽어 주며 ‘무엇이 우리를 우리답게 하는가’를 다시 정했다. 같은 세기에 인도에서는 붓다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전하는 일이 승가의 과제가 되었고, 그리스에서는 사람이 신화 대신 이성으로 세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2. 기원전 5세기의 세계사 배경
페르시아 제국이 근동을 지배했고, 그리스는 페르시아 전쟁을 겪은 뒤 아테네가 전성기를 맞았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소모되었다. 인도에서는 마가다가 강국으로 떠올랐다.
- 기원전 490·480년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페르시아를 막아냈다.
- 아테네 민주정과 비극·철학이 꽃피었다.
- 기원전 431~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그리스 세계가 소모되었다.
- 소크라테스(기원전 469~399년경)가 활동했다.
- 인도 갠지스 유역에서 마가다가 세력을 넓혔다.
3. 한눈에 보는 연대표
| 연도 | 일어난 일 | 관련 종교 |
|---|---|---|
| 기원전 5세기 전반 | 페르시아의 지방 행정 아래 유다 공동체가 재정비된다. | 유대 |
| 기원전 458년 또는 398년 | 에스라의 활동. 연대는 학계에서 논쟁 중이다. (학문적 해석) | 유대 |
| 기원전 445년경 |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다. | 유대 |
| 기원전 5세기 | 율법(토라) 낭독과 준수가 공동체의 중심이 된다. (학문적 해석) | 유대 |
| 기원전 5세기 | 이집트 엘레판티네에 유대인 주둔군 공동체와 그들의 성전이 있었음이 파피루스로 확인된다. 이 성전은 기원전 410년 현지 신관들의 손에 무너지고, 공동체는 유다와 사마리아 양쪽에 재건을 청원한다. | 유대 |
| 붓다 입멸 직후(전통) | 라자그리하 1차 결집으로 가르침을 함께 외워 정리했다고 전한다. 이 일을 기원전 5세기에 놓는 것은 붓다의 전통 연대를 따를 때다. 전통 연대로는 기원전 483년 무렵의 일이 된다. (전통의 주장) | 불교 |
4. 유대교
책의 종교로 굳어지다
제2성전기의 유다는 페르시아 제국의 작은 지방이었다. 이 시기에 토라를 공적으로 낭독하고 그것을 공동체 규범으로 삼는 형태가 굳어졌다. 사마리아 사람들과의 거리도 이 무렵부터 벌어지기 시작한다.
-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과 에스라의 율법 낭독이 상징적 사건으로 전해진다.
- 제사장 계층이 공동체의 지도력을 쥐었다.
- 엘레판티네 파피루스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실제 생활을 보여 주는 1차 사료다.
- ‘유대인’이라는 이름이 이 시기를 거치며 자리 잡는다.
5. 기독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1세기 유대교 안의 예수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6. 가톨릭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라틴어를 쓰는 서방교회 전통이 로마 주교를 중심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서서히 형성되었다. 특정 연도를 창립일로 삼기 어렵다.
7. 동방정교회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그리스어를 쓰는 동방교회 전통. 1054년은 분열을 상징하는 사건이지 시작점이 아니다.
8. 개신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16세기 종교개혁 과정에서 여러 갈래로 형성되었다.
9. 이슬람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무함마드의 활동과 함께 7세기 아라비아에서 시작되었다. 622년 히즈라를 이슬람력 원년으로 삼는다.
10. 불교
가르침을 기억하는 공동체
붓다의 입멸 후 승가는 가르침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라는 과제를 안았다. 문자가 아니라 함께 외우는 방식으로 경(가르침)과 율(규율)이 정리되었다고 전한다. 마가다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후원을 받으며 승원이 자리 잡았다.
- 1차 결집은 불교 전통의 서술이며, 그 역사성은 학계에서 논의된다.
- 출가 공동체와 재가 신자의 관계가 제도로 자리 잡았다.
- 가르침은 여러 지방어로 암송되어 전해졌다.
11. 종교 간 관계
유대교 ↔ 불교 — 문화·학문·예술 교류
두 전통은 여전히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세기에 양쪽 모두 ‘스승이 떠난 뒤 가르침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라는 같은 과제를 만났다. 유대교는 글로 적힌 토라를 읽고 해석하는 길을, 불교는 함께 외워 확인하는 길을 택했다.
12. 이 세기의 결정적 사건
제1차 결집 (기원전 483년)
붓다의 입멸 후 가르침과 규율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가 승가의 과제가 되었다.
전개
불교 전통은 오백 명의 제자가 모여 가르침(경)과 규율(율)을 함께 외워 확인했다고 전한다.
결과
- 구전으로 전해질 가르침의 틀이 정해졌다고 전한다
장기적 영향
- 이후의 결집과 경전 편찬의 출발점으로 이야기된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불교 | 가르침이 온전히 보존되었음을 보증하는 사건으로 전해진다. |
| 역사학계 | 이 기사는 후대 문헌의 전승이며,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다루지 않는다. |
학계의 평가
결집의 규모와 실제 여부, 시점이 모두 논쟁 대상이다. 이 일을 기원전 5세기에 놓는 것도 붓다의 전통 연대를 따를 때이며, 수정 연대에서는 한두 세기 뒤로 내려간다.
에스라의 율법 낭독 (기원전 458년)
제사장이자 서기관인 에스라가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왔다고 전한다.
전개
백성 앞에서 토라를 소리 내어 읽고 뜻을 풀어 주었으며, 공동체가 이를 따르기로 했다고 전한다.
결과
- 토라가 공동체의 공적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장기적 영향
- ‘책을 읽고 해석하는’ 예배 형태가 회당 예배의 뿌리가 되었다
- 이 형태는 훗날 기독교 예배와 이슬람의 낭송 전통에도 이어진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유대교 | 토라 중심 유대교가 세워진 자리로 본다. |
| 역사학계 | 에스라의 활동 연대(기원전 458년설과 398년설)가 학계에서 갈린다. |
학계의 평가
에스라가 가져온 ‘율법책’이 오늘의 오경과 같은 것인지가 논의된다.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성벽 재건 (기원전 445년)
귀환 이후에도 예루살렘은 성벽이 무너진 채였고 공동체는 흔들렸다.
원인
- 도성의 방어 부재
- 주변 세력과의 갈등
- 공동체 규율의 이완
전개
페르시아 왕의 허가를 받은 느헤미야가 총독으로 부임해 짧은 기간에 성벽을 쌓았다.
결과
- 도성의 형태가 회복되고 공동체 규율이 정비되었다
장기적 영향
- 안식일 준수와 혼인 규정 등 공동체의 경계가 분명해졌다
- 그 경계 짓기가 사마리아 공동체와의 거리도 넓혔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유대교 | 흩어진 공동체를 다시 세운 지도력으로 기억된다. |
| 역사학계 | 느헤미야 회고록은 1인칭 자료로 사료 가치가 높지만, 자기 변호의 성격도 함께 읽어야 한다. |
13. 주요 인물
| 인물 | 생몰 | 활동 | 후대의 평가 |
|---|---|---|---|
| 에스라 | 기원전 5세기 | 율법을 백성 앞에서 읽고 풀이했다고 전한다 / 공동체 규범을 정비했다 | 랍비 전통은 그를 토라를 다시 세운 인물로 높인다. 활동 연대는 학계에서 두 가지 견해가 맞선다. |
| 느헤미야 | 기원전 5세기 | 페르시아 왕의 술 맡은 관원이었다고 전한다 / 총독으로 부임해 성벽을 재건했다 | 실무적 지도력의 본보기로 자주 인용된다. |
| 아난다 | 기원전 5세기 | 붓다를 오래 시봉했다고 전한다 / 제1차 결집에서 가르침을 외워 전했다고 전한다 | ‘많이 들은 이’로 불리며 경전 전승의 상징이 되었다. 그의 생애 기사는 전통 문헌의 서술이다. |
14. 주요 문헌과 사상
| 문헌 | 시기 | 언어 | 핵심 내용 |
|---|---|---|---|
| 엘레판티네 파피루스 | 기원전 5세기 | 아람어 | 결혼·재산·소송 문서와 함께, 그곳에 있던 유대인 성소의 재건을 예루살렘에 요청하는 편지가 남아 있다. |
15. 지도와 이동 경로
페르시아 제국 안의 유다와 디아스포라 (기원전 500~401년)
| 장소 | 성격 | 설명 |
|---|---|---|
| 예루살렘 | 성지 | |
| 엘레판티네 | 유적 | 유대인 주둔군과 성소가 있던 곳. |
| 바빌론 | 도시 | |
| 수사 | 도시 | |
| 라지기르 | 회의 | 제1차 결집의 자리로 전한다. |
경계 확실성: 대체로 확실
16. 사진과 유물로 보는 역사
17. 핵심 정리
- 제2성전기 유대교는 성전 제사와 토라 준수라는 두 축으로 움직였다.
- 느헤미야의 성벽과 에스라의 율법 낭독은 공동체의 경계를 다시 그은 사건이다.
- 불교는 붓다 이후 ‘가르침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답을 만들어 갔다.
- 이 세기 그리스의 이성적 사유는 훗날 기독교 신학이 사용할 언어를 준비하고 있었다.
18. 비교표
| 유대교 | 불교 | |
|---|---|---|
| 보존 수단 | 글로 적힌 토라를 읽고 해석 | 함께 외워 확인하는 결집 |
| 중심 인물 | 에스라·느헤미야 | 제자 공동체 |
| 공동체의 경계 | 혼인·안식일 규정으로 분명히 함 | 출가자와 재가자의 역할 구분 |
| 자료의 성격 | 성경 기사 + 엘레판티네 1차 사료 | 후대 문헌의 전승 |
19. 생각해 볼 질문
- 공동체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일은 언제 힘이 되고 언제 벽이 될까?
- 문자 없이 가르침을 전하는 방식에는 어떤 장점과 위험이 있을까?
- 제국의 작은 지방으로 사는 것이 유대교의 형태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20. 확인 퀴즈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인물은?
- 에스라
- 느헤미야
- 스룹바벨
- 요시야
기원전 5세기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생활을 보여 주는 1차 사료는?
- 엘레판티네 파피루스
- 사해문서
- 탈무드
- 요세푸스의 저작
‘1차 결집이 붓다 입멸 직후 열렸다’는 서술의 성격은?
- 1차 사료로 확인된 사실
- 불교 전통의 전승이며 역사성은 논의 중
- 고고학이 입증한 사실
- 현대 학계의 합의
정답 1) 2 · 2) 1 · 3) 2
해설
1. 느헤미야다. 에스라는 율법 낭독으로, 스룹바벨은 제2성전 재건으로 기억된다.
2. 사해문서는 기원전 2세기 이후, 탈무드는 훨씬 후대, 요세푸스는 1세기 사람이다.
3. 결집 기사는 후대 문헌의 전승이다. 사실처럼 단정하지 않는다.
21. 주석과 참고문헌
- 에스라·느헤미야서 (전승 자료)
- 엘레판티네 파피루스 (1차 사료)
- 제2성전기 유대교 연구서, 초기 불교사 개설서
제4장 기원전 4세기의 세계 종교
기원전 400년~기원전 301년
알렉산드로스가 지나간 자리에 그리스어의 세계가 열린다.
읽는 글
제4장 기원전 4세기의 세계 종교
알렉산드로스가 지나간 자리에 그리스어의 세계가 열립니다
기원전 400년 ~ 기원전 301년
여는 장면 — 한 언어가 세계를 덮다
한 젊은 왕이 십여 년 만에 그리스에서 인도까지 달려갔습니다.
그가 죽은 뒤 제국은 갈라졌습니다. 그러나 그가 퍼뜨린 것은 남았습니다. 그리스어와 도시 문화입니다.
유대인은 이제 그리스어로 생각하고 말하는 세계 안에서 자기 신앙을 설명해야 했습니다. 그 언어가 훗날 성경이 번역될 언어가 되고, 다시 복음서가 쓰일 언어가 됩니다.
이 세기의 종교사적 사건은 전쟁이 아니라 언어입니다.
1. 십여 년의 원정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인도 서북부까지 진출했습니다. 그의 사후 제국은 프톨레마이오스·셀레우코스 등으로 갈라져 헬레니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 기원전 336년 즉위, 334년 동방 원정 시작, 323년 죽음.
- 기원전 323년 그의 죽음 이후 후계 장군들이 제국을 나눴습니다.
- 그리스어(코이네)가 지중해 동부의 공용어가 되었습니다.
- 기원전 322년경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인도 통일 왕조를 세웠습니다.
- 알렉산드리아 같은 새 도시가 학문 중심지로 성장했습니다.
나폴리 국립고고학박물관에는 폼페이에서 나온 큰 모자이크가 있습니다. 말을 탄 알렉산드로스가 창을 들고 다리우스를 향해 달려드는 장면입니다.
이 모자이크는 기원전 100년 무렵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그린 장면보다 이백 년 넘게 뒤의 그림입니다. 더 이른 그리스 그림을 옮긴 것으로 보지만 원본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당대의 기록이 아니라 후대의 그림으로 읽어야 합니다.
알렉산드로스가 예루살렘을 직접 방문했다는 후대의 이야기는 사실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가 우세합니다.
2. 그리스어 세계 속의 유대인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가 팔레스타인 지역을 지나 이집트로 향했습니다. 그가 죽은 뒤 이 땅의 주인은 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 사이를 여러 차례 오갔고, 기원전 301년 입소스 전투 뒤에야 프톨레마이오스 쪽으로 굳어집니다. 이 장이 끝나는 자리가 마침 그 지점입니다.
유대인은 헬레니즘 문화와 마주했습니다. 그리스어를 쓰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늘었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는 큰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안에서도 긴장이 생겼습니다. 헬레니즘을 어디까지 받아들일 것인가. 옷과 이름과 교육과 체육관, 그리고 사고방식까지. 이 물음은 다음 두 세기에 걸쳐 커지다가 기원전 2세기에 폭발합니다.
같은 시기 사마리아 공동체와 예루살렘 공동체의 분리도 뚜렷해졌습니다. 사마리아 공동체는 자기들의 오경을 경전으로 삼았는데, 예배 장소를 그리심산으로 지시하는 대목 등에서 유대교 본문과 차이가 있습니다.
사마리아 오경 본문 전통의 형성 시기는 기원전 4~2세기로 논의됩니다. 사마리아 공동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유대교와 별개의 전통으로 다뤄야 합니다.
3. 승가가 갈라지기 시작하다
붓다 입멸 후 백 년쯤 지나, 계율의 세부 해석을 두고 견해가 갈렸다고 전합니다. 이 「백 년쯤」을 기원전 4세기로 옮겨 놓는 것도 붓다의 전통 연대를 따를 때이며, 수정 연대에서는 한두 세기 뒤가 됩니다.
바이샬리에 모여 열 가지 쟁점을 논의했고, 결론에 승복하지 않은 쪽이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좌부 계열과 대중부 계열의 갈래로 이어졌다고 이야기됩니다.
전통마다 이 사건의 서술과 책임 소재가 다릅니다.
분열의 시점과 원인(계율인가 교리인가)이 계속 논쟁되고 있습니다. '제2차 결집'과 근본 분열이 같은 사건인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바이샬리에는 지금도 들판에 돌기둥과 벽돌 탑이 서 있습니다. 기둥은 다음 세기 아쇼카 때 세워진 것입니다.
한편 기원전 322년경 찬드라굽타가 마가다를 장악하고 북인도 대부분을 아우르는 마우리아 왕조를 세웠습니다. 왕실이 자이나교·불교·브라만 전통을 함께 후원하는 구조가 나타났고, 이것이 다음 세기 아쇼카의 후원 아래 불교가 국제적으로 퍼질 정치적 기반이 됩니다.
4. 두 세계의 재편
| 지중해·근동 | 인도 | |
|---|---|---|
| 정치 | 알렉산드로스의 정복과 헬레니즘 왕국들 | 마우리아 왕조의 성립 |
| 종교에 미친 영향 | 그리스어가 공용어가 됨 → 훗날 성경 번역의 조건 | 왕실 후원 구조 → 훗날 아쇼카의 전법 |
| 내부의 변화 | 유대인의 헬레니즘 수용을 둘러싼 긴장 | 승가의 계율 해석 분화 |
두 세계 모두 정치의 재편이 종교의 조건을 바꿨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으로 지중해와 인도가 하나의 교역·문화 통로로 이어졌고, 그 길 위에서 다음 세기의 번역과 전법이 일어납니다.
이 시기에 유대교와 불교가 서로를 알았음을 보여 주는 확실한 자료는 없습니다. 그러나 두 세계를 잇는 길이 이때 열렸습니다.
이 장이 남긴 네 문장
- 헬레니즘은 이후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가 놓이게 될 언어·문화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 그리스어(코이네)는 훗날 70인역과 신약성서의 언어가 됩니다.
- 불교는 승가 내부의 해석 차이로 갈래가 나뉘기 시작했습니다.
- 마우리아 왕조의 등장은 불교가 국가 규모로 퍼질 기반이 되었습니다.
생각해 볼 질문
-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과 신앙을 지키는 것은 어떻게 함께 갈 수 있을까요?
- 공용어가 생기면 종교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 규율의 해석 차이가 공동체를 나눌 만큼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장에서 쓴 자료
문헌
- 사마리아 오경 (본문 전통 형성은 기원전 4~2세기로 논의, 히브리어·사마리아 문자)
자료 사진
- 알렉산드로스 모자이크 (후대의 그림 · 기원전 100년경 로마 시대) · 바이샬리의 탑과 돌기둥 (실제 유물 · 기둥은 다음 세기의 것)
참고
- 헬레니즘 시대 개설서
- 제2성전기 유대교 연구
- 초기 불교 부파 형성에 관한 연구
「종교사 한눈」이 모아 둔 자료로 작성한 원고입니다.
검수 이력
- 1차 · 사실 확인 — 원정 연도를 즉위(336년)와 동방 원정 시작(334년)으로 나눠 자료와 맞춤. 유다가 프톨레마이오스 지배로 굳어지는 시점을 기원전 301년 입소스 전투로 특정. 제2차 결집의 연대가 붓다의 전통 연대에 기댄 것임을 밝힘.
- 2차 · 관점 검토 — 알렉산드로스 모자이크가 그린 장면보다 이백 년 넘게 뒤의 로마 시대 작품임을 본문에 밝히고, 자료 표시를 「당대 시각자료」에서 「후대의 그림」으로 고침. 「두 종교의 만남」이라는 모호한 표현을 유대교·불교로 특정.
- 3차 · 저작권 확인 — 자료 사진 2장의 이용 조건 확인.
- 남은 것 · 외부 검토 — 쓴 쪽과 검수한 쪽이 같습니다. 출판 전 제3자의 확인이 필요합니다.
1. 세기를 여는 한 장면
한 젊은 왕이 십여 년 만에 그리스에서 인도까지 달려갔다. 그가 죽은 뒤 제국은 갈라졌지만, 그가 퍼뜨린 그리스어와 도시 문화는 남았다. 유대인은 이제 그리스어로 생각하고 말하는 세계 안에서 자기 신앙을 설명해야 했다. 그 언어가 훗날 복음서가 쓰일 언어가 된다.
2. 기원전 4세기의 세계사 배경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인도 서북부까지 진출했다. 그의 사후 제국은 프톨레마이오스·셀레우코스 등으로 갈라져 헬레니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인도에서는 마우리아 왕조가 일어났다.
- 기원전 336~323년 알렉산드로스의 원정.
- 기원전 323년 그의 죽음 이후 후계 장군들이 제국을 나눴다.
- 그리스어(코이네)가 지중해 동부의 공용어가 되었다.
- 기원전 322년경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인도 통일 왕조를 세웠다.
- 알렉산드리아 같은 새 도시가 학문 중심지로 성장했다.
3. 한눈에 보는 연대표
| 연도 | 일어난 일 | 관련 종교 |
|---|---|---|
| 기원전 334년 | 알렉산드로스가 동방 원정을 시작한다. | |
| 기원전 332년 | 알렉산드로스가 팔레스타인 지역을 지나 이집트로 향한다. | 유대 |
| 기원전 4세기 후반 | 알렉산드로스 사후 이 땅의 주인이 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 사이를 오가다, 기원전 301년 입소스 전투 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로 굳어진다. | 유대 |
| 기원전 4세기 | 사마리아 공동체와 예루살렘 공동체의 분리가 뚜렷해진다. (학문적 해석) | 유대 |
| 기원전 4세기(전통 연대로 383년경) | 바이샬리 2차 결집으로 승가의 계율 해석이 갈렸다고 전한다. (전통의 주장) | 불교 |
| 기원전 322년경 | 마우리아 왕조가 세워진다. | 불교 |
4. 유대교
그리스어 세계 속의 유대인
알렉산드로스 이후 유대인은 헬레니즘 문화와 마주했다. 그리스어를 쓰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늘었고, 예루살렘 안에서도 헬레니즘을 받아들일 것인가를 두고 긴장이 생겼다. 이 긴장은 다음 두 세기에 걸쳐 커진다.
- 제사장 가문이 정치적 지도력을 함께 쥐고 있었다.
-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큰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 헬레니즘 수용을 둘러싼 내부 갈등의 씨앗이 뿌려졌다.
5. 기독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1세기 유대교 안의 예수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6. 가톨릭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라틴어를 쓰는 서방교회 전통이 로마 주교를 중심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서서히 형성되었다. 특정 연도를 창립일로 삼기 어렵다.
7. 동방정교회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그리스어를 쓰는 동방교회 전통. 1054년은 분열을 상징하는 사건이지 시작점이 아니다.
8. 개신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16세기 종교개혁 과정에서 여러 갈래로 형성되었다.
9. 이슬람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무함마드의 활동과 함께 7세기 아라비아에서 시작되었다. 622년 히즈라를 이슬람력 원년으로 삼는다.
10. 불교
승가가 갈라지기 시작하다
계율의 세부 해석을 두고 승가 안에서 견해가 갈리며 상좌부와 대중부 계열의 분화가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마우리아 왕조의 등장은 다음 세기 불교 확산의 정치적 조건이 되었다.
- 2차 결집 기사는 전통의 서술이며, 분열 시점은 학계에서 논의된다.
- 부파불교로 이어지는 갈래가 이 무렵부터 나타난다.
11. 종교 간 관계
유대교 ↔ 불교 — 문화·학문·예술 교류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으로 지중해와 인도가 하나의 교역·문화 통로로 이어졌다. 두 종교의 직접 만남을 보여 주는 확실한 자료는 없지만, 이후 세기의 접촉을 가능하게 한 길이 이때 열렸다.
12. 이 세기의 결정적 사건
제2차 결집과 승가의 분화 (기원전 383년)
붓다 입멸 후 백 년쯤 지나 계율의 세부 해석을 두고 견해가 갈렸다고 전한다.
원인
- 지역마다 달라진 관행
- 계율 해석의 엄격함을 둘러싼 이견
전개
바이샬리에 모여 열 가지 쟁점을 논의했고, 결론에 승복하지 않은 쪽이 갈라졌다고 전한다.
결과
- 상좌부 계열과 대중부 계열의 갈래가 나타났다고 전한다
장기적 영향
- 부파불교로 이어지는 여러 학파가 형성되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불교 | 전통마다 이 사건의 서술과 책임 소재가 다르다. |
| 역사학계 | 분열의 시점과 원인(계율인가 교리인가)이 계속 논쟁되고 있다. |
학계의 평가
‘제2차 결집’과 근본 분열이 같은 사건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알렉산드로스의 근동 정복 (기원전 334~323년)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아우른 마케도니아가 페르시아 원정에 나섰다.
원인
- 마케도니아의 군사적 우위
- 페르시아 제국의 내부 약화
전개
십여 년 만에 소아시아에서 인도 서북부까지 이르렀고, 곳곳에 그리스식 도시를 세웠다.
결과
- 아케메네스 제국이 무너지고 헬레니즘 세계가 열렸다
장기적 영향
- 코이네 그리스어가 지중해 동부의 공용어가 되었다
- 유대인이 헬레니즘 문화와 마주하게 되었다
- 이 언어가 훗날 70인역과 신약성서의 언어가 된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유대교 | 새 문화를 어디까지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오랜 물음이 이때 시작되었다. |
| 역사학계 | 그가 예루살렘을 직접 방문했다는 후대의 이야기는 사실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
마우리아 왕조의 성립 (기원전 322년)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으로 인도 서북부의 정치 질서가 흔들린 뒤였다.
전개
찬드라굽타가 마가다를 장악하고 북인도 대부분을 아우르는 왕조를 세웠다.
결과
- 인도 아대륙 대부분이 하나의 통치 아래 놓였다
장기적 영향
- 다음 세기 아쇼카의 후원 아래 불교가 국제적으로 퍼질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
- 왕실이 자이나교·불교·브라만 전통을 함께 후원하는 구조가 나타났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불교 | 왕권의 후원이 종교 확산에 어떤 힘을 갖는지 보여 주는 첫 사례가 된다. |
13. 주요 인물
| 인물 | 생몰 | 활동 | 후대의 평가 |
|---|---|---|---|
| 알렉산드로스 3세 | 기원전 356년 ~ 기원전 323년 |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렸다 / 그리스식 도시를 여러 곳에 세웠다 | 종교사에서는 정복자보다 ‘그리스어 세계를 만든 사람’으로서 더 중요하다. 그가 없었다면 70인역도 신약성서의 언어도 달랐을 것이다. |
|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 기원전 4세기 ~ 기원전 297년경 | 마우리아 왕조를 세웠다 | 자이나교 전통은 그가 말년에 출가했다고 전한다. 이 이야기의 역사성은 확인하기 어렵다. |
14. 주요 문헌과 사상
| 문헌 | 시기 | 언어 | 핵심 내용 |
|---|---|---|---|
| 사마리아 오경 | 본문 전통의 형성은 기원전 4~2세기로 논의된다 | 히브리어(사마리아 문자) | 사마리아 공동체가 경전으로 삼는 오경. 예배 장소를 그리심산으로 지시하는 대목 등에서 유대교 본문과 차이가 있다. |
15. 지도와 이동 경로
알렉산드로스의 원정과 헬레니즘 세계 (기원전 334~323년)
경로는 대표적인 흐름을 단순화한 것이다.
| 장소 | 성격 | 설명 |
|---|---|---|
| 펠라 | 도시 | 마케도니아의 수도. |
| 이수스 | 전투 | 기원전 333년. |
| 예루살렘 | 성지 | |
| 알렉산드리아 | 도시 | 훗날 70인역이 번역되는 곳. |
| 바빌론 | 도시 |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곳. |
| 탁실라 | 도시 | 그리스 문화와 불교가 만나는 지점이 된다. |
| 파탈리푸트라 | 도시 | 마우리아 왕조의 수도. |
경계 확실성: 대체로 확실
| 경로 | 성격 | 설명 |
|---|---|---|
| 알렉산드로스의 원정(개략) | 정복 |
16. 사진과 유물로 보는 역사
17. 핵심 정리
- 헬레니즘은 이후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가 놓이게 될 언어·문화 환경을 만들었다.
- 그리스어(코이네)는 훗날 70인역과 신약성서의 언어가 된다.
- 불교는 승가 내부의 해석 차이로 갈래가 나뉘기 시작했다.
- 마우리아 왕조의 등장은 불교가 국가 규모로 퍼질 기반이 되었다.
18. 비교표
| 지중해·근동 | 인도 | |
|---|---|---|
| 정치 | 알렉산드로스의 정복과 헬레니즘 왕국들 | 마우리아 왕조의 성립 |
| 종교에 미친 영향 | 그리스어가 공용어가 됨 → 훗날 성경 번역의 조건 | 왕실 후원 구조 → 훗날 아쇼카의 전법 |
| 내부의 변화 | 유대인의 헬레니즘 수용을 둘러싼 긴장 | 승가의 계율 해석 분화 |
19. 생각해 볼 질문
-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과 신앙을 지키는 것은 어떻게 함께 갈 수 있을까?
- 공용어가 생기면 종교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 규율의 해석 차이가 공동체를 나눌 만큼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20. 확인 퀴즈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이 종교사에 남긴 가장 큰 영향은?
- 지중해 동부에 그리스어가 공용어로 자리 잡은 것
-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것
- 이슬람교가 시작된 것
- 불교가 중국에 전해진 것
마우리아 왕조가 세워진 시기는?
- 기원전 6세기
- 기원전 4세기 후반
- 기원전 2세기
- 기원후 1세기
기원전 4세기에 이미 존재한 종교는?
- 유대교와 불교
- 기독교와 불교
- 이슬람교와 유대교
- 가톨릭과 정교회
정답 1) 1 · 2) 2 · 3) 1
해설
1. 코이네 그리스어는 70인역과 신약성서의 언어가 되었다.
2. 기원전 322년경 찬드라굽타가 세웠다.
3. 기독교는 1세기, 이슬람교는 7세기, 가톨릭·정교회 구분은 훨씬 후대의 일이다.
21. 주석과 참고문헌
- 헬레니즘 시대 개설서
- 제2성전기 유대교 연구
- 초기 불교 부파 형성에 관한 연구
제5장 기원전 3세기의 세계 종교
기원전 300년~기원전 201년
성경이 그리스어로 옮겨지고, 아쇼카가 불교를 국경 밖으로 보낸다.
읽는 글
제5장 기원전 3세기의 세계 종교
성경이 그리스어로 옮겨지고, 아쇼카가 불교를 국경 밖으로 보냅니다
기원전 300년 ~ 기원전 201년
여는 장면 — 번역과 파견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성경을 그리스어로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인도에서는 전쟁의 참혹함을 본 한 왕이 무력 대신 법(다르마)으로 다스리겠다고 바위에 새겼습니다.
번역과 파견. 이 세기의 두 사건은 종교가 자기 땅을 넘어가는 두 가지 방식을 보여 줍니다. 하나는 언어를 옮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을 보내는 것입니다.
1. 헬레니즘 왕국들과 마우리아 제국
헬레니즘 왕국들이 지중해 동부를 나눠 다스렸고, 서쪽에서는 로마가 카르타고와 겨루며 강대국으로 떠올랐습니다. 인도에서는 마우리아 왕조가 최대 판도를 이뤘습니다.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을, 셀레우코스 왕조가 시리아를 다스렸습니다.
-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학문 활동이 융성했습니다.
- 기원전 264~146년 로마와 카르타고의 포에니 전쟁이 이어졌습니다.
- 아쇼카 왕(재위 기원전 268~232년경)이 인도 대부분을 다스렸습니다.
2. 성경이 번역되다
이집트의 유대인 공동체는 일상에서 그리스어를 썼고 히브리어를 잘 읽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그리스어로 옮겼습니다.
오경이 먼저 번역되고,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 나머지 책들이 옮겨졌습니다. 이것이 70인역입니다.
번역은 단순한 언어 옮기기가 아니었습니다. 신앙을 다른 문화 속에서 설명하는 일이었습니다. 어떤 히브리어 낱말을 어떤 그리스어로 옮길 것인가를 정하는 순간, 그 낱말이 그리스어 세계에서 지니는 뜻이 함께 따라 들어옵니다. 이 과정에서 정해진 용어들이 훗날 신학 언어의 바탕이 됩니다.
유대교에서 이 번역은 필요에서 나온 것이었고, 후대에는 그 권위를 두고 평가가 엇갈렸습니다. 랍비 전통 가운데는 이 번역이 이루어진 날을 애도의 날로 적어 둔 기록까지 있습니다. 같은 번역을 기독교가 자기 성경으로 삼게 되면서 평가가 더 갈렸습니다.
초기 기독교가 읽고 인용한 성경은 대체로 이 번역본이었습니다. 신약성서의 구약 인용 상당수가 70인역을 따릅니다. 오늘날 가톨릭·정교회의 구약 범위와도 관련이 깊습니다.
'일흔두 명이 각각 번역했는데 모두 똑같았다'는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이야기는 전설적 서술로 봅니다. 번역의 시기와 범위, 사용된 히브리어 원본의 형태는 계속 연구되고 있습니다.
70인역이 없었다면 초기 기독교의 확산은 달랐을 것입니다. 유대교와 기독교를 잇는 다리가 이 번역이었습니다.
3. 왕이 전법을 후원하다
아쇼카는 아직 복속시키지 못한 칼링가를 정복했습니다. 격전 끝에 이겼으나 막대한 인명 피해가 났습니다.
그 뒤 그는 무력 정복을 그만두고 다르마에 따른 통치를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바위와 돌기둥에 새겨 남겼습니다.
아쇼카 칙령은 실물로 남아 있는 1차 사료입니다. 칙령 자체가 칼링가 전쟁의 참상을 언급하며 뉘우침을 밝힙니다. 인도 아대륙과 아프가니스탄 여러 곳에 남아 있고,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그리스어·아람어로 새긴 판도 발견되었습니다.
칙령이 스스로 밝힌 뉘우침은 사료로서 무게가 있습니다. 다만 정치적 통합의 수단이라는 측면도 함께 읽습니다.
칙령이 말하는 것은 비폭력과 생명 존중, 통치자의 책임으로서 백성의 복리, 그리고 여러 종교 집단에 대한 존중입니다. 특정 종파만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사르나트에서 나온 돌기둥의 머리 부분 — 네 마리 사자가 등을 맞대고 앉은 조각 — 은 오늘날 인도의 국장이 되었습니다.
아쇼카는 여러 지역에 전법사를 보냈다고 전합니다. 스리랑카 왕실이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승원이 세워졌다는 것이 섬의 연대기가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마하왕사》 등 스리랑카 연대기는 이 전래를 건국 서사처럼 전합니다.
연대기는 후대에 편찬된 것이라 사료 비판이 필요합니다. 전래 자체는 널리 인정됩니다.
이 전래로 스리랑카는 상좌부 전통의 중심지가 되고, 두 세기 뒤인 기원전 1세기(29년경)에 이곳에서 팔리 경전이 처음 문자로 기록됩니다.
4. 종교가 밖으로 나가는 두 길
| 번역(유대교) | 파견(불교) | |
|---|---|---|
| 무엇을 옮겼나 | 경전의 언어 | 사람과 가르침 |
| 누가 움직였나 | 디아스포라 공동체 스스로 | 왕실의 후원을 받은 전법사 |
| 남은 자료 | 70인역 본문 | 아쇼카 칙령(실물 비문) |
| 장기적 결과 | 기독교가 읽을 성경이 마련됨 | 상좌부 전통의 해외 거점이 생김 |
한쪽은 아래에서 시작했고, 다른 한쪽은 위에서 시작했습니다.
번역은 필요에 몰린 공동체가 스스로 한 일이었습니다. 파견은 왕이 후원한 사업이었습니다. 두 방식은 각각 다른 힘과 다른 위험을 가졌습니다. 국가의 후원은 종교를 널리 퍼뜨리지만, 종교의 성격도 바꿉니다. 이 물음은 이후 이 책 전체를 관통합니다.
이 장이 남긴 네 문장
- 70인역은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를 잇는 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 아쇼카의 후원은 불교를 지역 종교에서 국제 종교로 바꾼 계기가 되었습니다.
- 번역과 파견은 종교가 다른 문화로 건너가는 두 가지 방식입니다.
- 국가권력의 후원은 종교를 널리 퍼뜨리기도 하고 성격을 바꾸기도 합니다.
생각해 볼 질문
- 성경을 다른 언어로 옮길 때 반드시 잃는 것과 얻는 것은 무엇일까요?
- 왕이 종교를 후원하면 그 종교에는 어떤 변화가 생길까요?
- 아쇼카의 칙령이 다른 종교를 존중하라고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장에서 쓴 자료
문헌
- 70인역 (기원전 3~2세기, 코이네 그리스어) — 바티칸·시나이 사본 등에 실려 전함
- 아쇼카 칙령 (기원전 3세기 중반, 프라크리트·일부 그리스어·아람어 병기)
자료 사진
- 아쇼카 돌기둥의 사자 기둥머리 (실제 유물) · 산치 대탑 (실제 유물) · 칼시 바위 칙령 (실제 유물)
참고
- 아쇼카 칙령 비문 (1차 사료)
- 70인역 성립에 관한 연구
- 헬레니즘 유대교 연구서
「종교사 한눈」이 모아 둔 자료로 작성한 원고입니다.
검수 이력
- 1차 · 사실 확인 — 팔리 경전의 문자화를 「다음 세기」로 적은 것을 바로잡음. 자료에 기원전 29년으로 등록되어 있으므로 두 세기 뒤가 맞습니다.
- 2차 · 관점 검토 — 70인역에 대한 유대교 쪽의 평가를 「엇갈렸다」로만 두지 않고, 애도의 날로 기억한 랍비 전통과 기독교의 수용이 평가를 갈라놓은 사정을 함께 적음.
- 3차 · 저작권 확인 — 자료 사진 3장의 이용 조건 확인.
- 남은 것 · 외부 검토 — 쓴 쪽과 검수한 쪽이 같습니다. 출판 전 제3자의 확인이 필요합니다.
1. 세기를 여는 한 장면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성경을 그리스어로 옮기기 시작했다. 인도에서는 전쟁의 참혹함을 본 한 왕이 무력 대신 법(다르마)으로 다스리겠다고 바위에 새겼다. 번역과 파견 — 이 세기의 두 사건은 종교가 자기 땅을 넘어가는 방식을 보여 준다.
2. 기원전 3세기의 세계사 배경
헬레니즘 왕국들이 지중해 동부를 나눠 다스렸고, 서쪽에서는 로마가 카르타고와 겨루며 강대국으로 떠올랐다. 인도에서는 마우리아 왕조가 최대 판도를 이뤘다.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을, 셀레우코스 왕조가 시리아를 다스렸다.
-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학문 활동이 융성했다.
- 기원전 264~146년 로마와 카르타고의 포에니 전쟁이 이어졌다.
- 아쇼카 왕(재위 기원전 268~232년경)이 인도 대부분을 다스렸다.
3. 한눈에 보는 연대표
| 연도 | 일어난 일 | 관련 종교 |
|---|---|---|
| 기원전 3세기(280년경 시작) | 알렉산드리아에서 히브리 성경의 그리스어 번역(70인역)이 시작된다. | 유대 |
| 기원전 261년경 | 아쇼카가 칼링가 전쟁 후 무력 통치를 뉘우치고 다르마 통치를 선언한다. | 불교 |
| 기원전 3세기 중반 | 아쇼카의 바위·돌기둥 칙령이 여러 지역에 새겨진다. | 불교 |
| 기원전 247년경 | 아쇼카가 스리랑카 등지로 전법사를 보냈다고 전한다. 스리랑카 불교의 출발점이 되며, 두 세기 뒤인 기원전 29년경 이곳에서 팔리 경전이 문자로 기록된다. (전통의 주장) | 불교 |
| 기원전 250년경 | 파탈리푸트라 3차 결집이 열렸다고 전한다. (전통의 주장) | 불교 |
4. 유대교
성경이 번역되다
이집트의 유대인 공동체는 히브리어를 잘 읽지 못했다. 그래서 성경을 그리스어로 옮겼고, 이 번역본(70인역)은 이후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초기 기독교인이 함께 읽는 성경이 된다. 번역은 단순한 언어 옮기기가 아니라 신앙을 다른 문화 속에서 설명하는 일이었다.
- 70인역이라는 이름은 번역자 수에 관한 전승에서 왔다.
- 번역 과정에서 쓰인 그리스어 용어가 훗날 신학 용어의 바탕이 된다.
-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공동체는 헬레니즘 학문과 활발히 접촉했다.
5. 기독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1세기 유대교 안의 예수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6. 가톨릭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라틴어를 쓰는 서방교회 전통이 로마 주교를 중심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서서히 형성되었다. 특정 연도를 창립일로 삼기 어렵다.
7. 동방정교회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그리스어를 쓰는 동방교회 전통. 1054년은 분열을 상징하는 사건이지 시작점이 아니다.
8. 개신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16세기 종교개혁 과정에서 여러 갈래로 형성되었다.
9. 이슬람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무함마드의 활동과 함께 7세기 아라비아에서 시작되었다. 622년 히즈라를 이슬람력 원년으로 삼는다.
10. 불교
왕이 전법을 후원하다
아쇼카는 정복 전쟁의 참혹함을 겪은 뒤 다르마에 따른 통치를 내세웠고, 그 내용을 바위와 돌기둥에 새겨 남겼다. 이 칙령들은 인도사에서 손꼽히는 1차 사료다. 그의 후원 아래 불교는 인도 밖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 아쇼카 칙령은 실물로 남아 있는 1차 사료다.
- 칙령은 특정 종파만이 아니라 여러 종교 집단에 대한 존중을 말한다.
- 스리랑카 전래는 이후 상좌부 전통의 중심축이 된다.
11. 종교 간 관계
유대교 ↔ 불교 — 선교와 전파
이 세기에 두 전통은 각각 자기 땅 밖으로 나가는 방법을 찾았다. 유대교는 경전을 그리스어로 옮겼고, 불교는 왕의 후원으로 전법사를 보냈다. 번역과 파견 — 종교가 국경을 넘는 두 가지 방식이 같은 세기에 나타났다.
유대교의 자리에서: 번역은 공동체 스스로의 필요에서 나왔다.
불교의 자리에서: 파견은 국가 권력의 후원과 함께 이뤄졌다.
12. 이 세기의 결정적 사건
히브리 성경의 그리스어 번역(70인역) (기원전 280년)
이집트의 유대인 공동체는 일상에서 그리스어를 썼고 히브리어를 잘 읽지 못했다.
원인
-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언어 변화
- 왕실 도서관의 수집 정책이라는 전승
전개
오경이 먼저 번역되고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 나머지 책들이 옮겨졌다.
결과
- 그리스어를 쓰는 유대인이 자기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장기적 영향
- 초기 기독교가 읽고 인용한 성경이 대체로 이 번역본이었다
- 번역 과정에서 정해진 그리스어 용어가 신학 언어의 바탕이 되었다
- 훗날 유대교는 히브리어 본문을 기준으로 삼는 쪽으로 기울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유대교 | 필요에서 나온 번역이었고, 후대에는 그 권위를 두고 평가가 엇갈렸다. 랍비 전통 가운데는 번역이 이루어진 날을 애도의 날로 적어 둔 기록도 있다. |
| 기독교 | 신약성서의 구약 인용 상당수가 이 번역본을 따른다. |
| 역사학계 | ‘일흔두 명이 똑같이 번역했다’는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는 전설적 서술로 본다. |
학계의 평가
번역의 시기와 범위, 사용된 히브리어 원본의 형태가 계속 연구되고 있다.
칼링가 전쟁과 아쇼카의 전환 (기원전 261년)
마우리아 제국이 아직 복속시키지 못한 칼링가를 정복하려 했다.
전개
격전 끝에 정복했으나 막대한 인명 피해가 났다.
결과
- 아쇼카가 무력 정복을 그만두고 다르마에 따른 통치를 선언했다
장기적 영향
- 국가가 불교를 후원하는 최초의 큰 사례가 되었다
- 칙령을 바위와 기둥에 새겨 정책을 공표하는 방식이 자리 잡았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불교 | 폭력을 그친 왕의 회심으로 기려 왔다. |
| 역사학계 | 칙령이 스스로 밝힌 뉘우침은 1차 사료로서 무게가 있다. 다만 정치적 통합의 수단이라는 측면도 함께 읽는다. |
스리랑카 전래 (기원전 247년)
아쇼카가 여러 지역에 전법사를 보냈다고 전한다.
전개
스리랑카 왕실이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승원이 세워졌다고 전한다.
결과
- 섬 전체에 불교가 자리 잡았다
장기적 영향
- 상좌부 전통의 중심지가 되었고 팔리 경전이 이곳에서 문자로 기록된다
- 동남아시아 상좌부 불교의 뿌리가 되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불교 | 《마하왕사》 등 섬의 연대기가 이 전래를 건국 서사처럼 전한다. |
| 역사학계 | 연대기는 후대에 편찬된 것이라 사료 비판이 필요하다. 전래 자체는 널리 인정된다. |
13. 주요 인물
| 인물 | 생몰 | 활동 | 후대의 평가 |
|---|---|---|---|
| 아쇼카 | 기원전 304년경 ~ 기원전 232년경 | 칼링가 전쟁 후 다르마 통치를 선언했다 / 바위와 돌기둥에 칙령을 새겨 남겼다 / 여러 지역에 전법사를 보냈다고 전한다 | 불교 전통은 이상적 통치자의 본보기로 기린다. 현대 인도는 그의 돌기둥 사자상을 국장으로 삼았다. |
| 마힌다 | 기원전 3세기 | 스리랑카에 가르침을 전했다고 전한다 | 스리랑카 불교의 시작을 여는 인물로 기려진다. 그가 아쇼카의 아들이라는 서술은 섬의 연대기 전승이다. |
14. 주요 문헌과 사상
| 문헌 | 시기 | 언어 | 핵심 내용 |
|---|---|---|---|
| 70인역 | 기원전 3~2세기 | 코이네 그리스어 | 히브리 성경을 그리스어로 옮긴 번역본. 책의 순서와 범위가 히브리어 성경과 다르다. |
| 아쇼카 칙령 | 기원전 3세기 중반 | 프라크리트(일부 그리스어·아람어 병기) | 다르마에 따른 통치, 생명 존중, 다른 종교 집단에 대한 존중, 관리의 의무 등을 새긴 공표문. |
15. 지도와 이동 경로
번역과 전법 — 종교가 국경을 넘는 두 방식 (기원전 300~201년)
| 장소 | 성격 | 설명 |
|---|---|---|
| 알렉산드리아 | 도시 | 70인역 번역의 자리. |
| 예루살렘 | 성지 | |
| 파탈리푸트라 | 도시 | 아쇼카의 수도. |
| 칼링가 | 전투 | 기원전 261년경. |
| 산치 | 유적 | 아쇼카 시대에 시작된 대탑. |
| 칸다하르 | 유적 | 그리스어·아람어 칙령이 발견된 곳. |
| 아누라다푸라 | 성지 | 스리랑카 전래의 중심. |
경계 확실성: 대체로 확실
| 경로 | 성격 | 설명 |
|---|---|---|
| 아쇼카의 전법 파견(전승) | 선교 | 칙령과 연대기를 근거로 한 개략 경로다. |
16. 사진과 유물로 보는 역사
17. 핵심 정리
- 70인역은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를 잇는 다리 역할을 했다.
- 아쇼카의 후원은 불교를 지역 종교에서 국제 종교로 바꾼 계기가 되었다.
- 번역과 파견은 종교가 다른 문화로 건너가는 두 가지 방식이다.
- 국가권력의 후원은 종교를 널리 퍼뜨리기도 하고 성격을 바꾸기도 한다.
18. 비교표
| 번역(유대교) | 파견(불교) | |
|---|---|---|
| 무엇을 옮겼나 | 경전의 언어 | 사람과 가르침 |
| 누가 움직였나 | 디아스포라 공동체 스스로 | 왕실의 후원을 받은 전법사 |
| 남은 자료 | 70인역 본문 | 아쇼카 칙령(실물 비문) |
| 장기적 결과 | 기독교가 읽을 성경이 마련됨 | 상좌부 전통의 해외 거점이 생김 |
19. 생각해 볼 질문
- 성경을 다른 언어로 옮길 때 반드시 잃는 것과 얻는 것은 무엇일까?
- 왕이 종교를 후원하면 그 종교에는 어떤 변화가 생길까?
- 아쇼카의 칙령이 다른 종교를 존중하라고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20. 확인 퀴즈
아쇼카 시대를 알려 주는 대표적인 1차 사료는?
- 아쇼카 바위·돌기둥 칙령
- 후대의 왕조 연대기
- 현대 복원도
- 불전 설화집
히브리 성경의 그리스어 번역이 시작된 세기는?
- 기원전 6세기
- 기원전 3세기
- 기원후 1세기
- 기원후 4세기
아쇼카가 다르마 통치를 내세우게 된 직접적 계기로 칙령이 밝히는 사건은?
- 칼링가 전쟁
- 포에니 전쟁
- 펠로폰네소스 전쟁
- 마카비 항쟁
정답 1) 1 · 2) 2 · 3) 1
해설
1. 실물 비문으로 남아 있어 사료 가치가 매우 높다.
2. 기원전 3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되었다.
3. 칙령 자체가 칼링가 전쟁의 참상을 언급한다.
21. 주석과 참고문헌
- 아쇼카 칙령 비문 (1차 사료)
- 70인역 성립에 관한 연구
- 헬레니즘 유대교 연구서
제6장 기원전 2세기의 세계 종교
기원전 200년~기원전 101년
신앙을 지키려는 항쟁이 일어나고, 유대교 안에 여러 갈래가 생긴다.
읽는 글
제6장 기원전 2세기의 세계 종교
신앙을 지키려는 항쟁이 일어나고, 유대교 안에 여러 갈래가 생깁니다
기원전 200년 ~ 기원전 101년
여는 장면 — 성전에 들어선 다른 제단
왕이 성전에 다른 신의 제단을 세웠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게 했고, 할례를 금했습니다.
시골 제사장 가문이 무기를 들었습니다. 게릴라전으로 세력을 넓혀 예루살렘을 되찾고, 성전을 정화해 다시 봉헌했습니다. 하누카는 이 성전 정화를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뒷부분이 있습니다. 그 뒤에 세워진 하스몬 왕조는 제사장직과 왕권을 함께 쥐면서 다시 권력의 논리로 움직였고, 그 갈등 속에서 유대교 안의 여러 갈래가 자기 자리를 분명히 했습니다.
종교의 자유를 위한 싸움이 권력 다툼으로 바뀌는 지점은 어디인가. 이 세기가 남긴 물음입니다.
1. 셀레우코스와 로마 사이에서
셀레우코스 왕조가 팔레스타인을 지배했고, 로마는 지중해의 최강국으로 떠올랐습니다. 인도에서는 마우리아 왕조가 무너진 뒤 여러 왕조가 섰고, 중앙아시아에는 인도-그리스 왕국이 있었습니다. 중국 한 무제 때 서역으로 길이 열렸습니다.
- 기원전 200~198년 파니온 전투를 거쳐 셀레우코스 왕조가 팔레스타인을 차지했습니다.
- 기원전 146년 로마가 카르타고와 코린토스를 무너뜨렸습니다.
- 인도-그리스 왕 메난드로스 1세가 불교와 접촉했다고 전합니다.
- 한 무제 때 장건의 서역 사행으로 동서 교역로가 열렸습니다.
2. 기원전 167년 — 탄압과 항쟁
안티오코스 4세가 유대교 관습을 금하고 성전을 훼손했습니다.
이 조치가 순수한 종교 탄압인지, 반란 진압의 성격이 강했는지가 논쟁됩니다. 예루살렘 내부의 헬레니즘 수용파와 반대파의 다툼, 대제사장직을 둘러싼 갈등, 셀레우코스의 재정 압박이 함께 작용했습니다. '종교 박해'라는 틀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 최근 연구의 강조점입니다.
항쟁은 기원전 164년 성전 정화로 결실을 맺었습니다.
유대교는 하누카로 해마다 기념합니다. 다만 랍비 전통은 군사적 승리보다 성전 정화와 등불에 무게를 둡니다.
하루치 기름이 여드레를 갔다는 등불 이야기는 당대의 기록인 마카베오서에는 없습니다. 수백 년 뒤 탈무드에 처음 나옵니다. 절기가 무엇을 기념하는지가 시간이 지나며 옮겨 간 사례로 읽을 수 있습니다.
마카베오서 두 권의 서술 관점이 서로 달라 비교해 읽어야 합니다.
기원전 141년경 하스몬 왕조가 사실상 독립 왕조로 자리 잡았습니다. 한 세기 가까이 독립이 유지되었지만, 그 왕조가 제사장직과 왕권을 함께 쥔 것에 대한 내부 비판이 커졌습니다.
3. 유대교 안의 여러 갈래
이 세기에 유대교 내부의 갈래가 뚜렷해졌습니다.
바리새는 구전 전승과 율법 해석을 중시했습니다. 사두개는 성전 제사와 성문 율법을 중시했고 제사장 계층에 기반을 두었습니다. 에세네 계열은 성전 체제를 비판하며 광야 공동체를 이뤘다는 견해가 유력합니다.
이 세 갈래를 나란히 소개하는 자료는 기원후 1세기에 쓴 요세푸스와 신약성서입니다. 둘 다 이 세기보다 이백 년 가까이 뒤의 글이고, 각각 자기 자리에서 씁니다. 바리새를 「구전 전승 중시」로 설명하는 것도 상당 부분 더 뒤의 랍비 문헌에 기댄 정리입니다. 이 세기의 갈래를 그린 그림은 뒤에서 되돌아본 그림입니다.
사해 서북안의 쿰란에 공동체가 자리 잡았습니다. 하스몬 왕조의 성전 운영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물러났다는 설명이 유력합니다. 그들은 독자적 달력과 규율을 지녔고, 성경 사본과 해석 문헌을 남겼습니다.
1947년 이후 발견된 사해문서로 제2성전기 유대교의 다양성이 드러났습니다. 성경 본문이 이 시기에 여러 형태로 존재했음도 확인되었습니다.
공동체를 에세네파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지만 이견도 있습니다. 문헌의 저자 집단과 유적의 성격을 두고 여러 학설이 맞섭니다. 초기 기독교와의 유사점이 논의되었으나 직접적 연결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박물관에 있는 대이사야 두루마리는 이 시기의 것입니다. 히브리어가 빼곡한 가죽 두루마리 한 장이, 제2성전기에 성경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다니엘서의 최종 형태가 이 시기 상황과 연결된다는 것이 다수 학설입니다. 저작 시기에 대해 전통적 견해(기원전 6세기)와 학계 다수설(기원전 2세기)이 맞섭니다.
4. 그리스 왕과 승려가 마주 앉다
중앙아시아와 인도 서북부에서 불교는 그리스계 통치자·주민과 접촉했습니다.
《밀린다왕문경》은 인도-그리스 왕 메난드로스와 승려 나가세나의 문답 형식으로 불교 교리를 설명합니다. 헬레니즘 세계와 불교가 만난 자리를 보여 주는 문헌으로 널리 인용됩니다.
메난드로스가 실제로 불교 신자가 되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문헌의 원형이 팔리어였는지도 논의됩니다.
간다라 지역이 불교와 헬레니즘 문화가 만나는 접점이 되었습니다. 이 문화 접촉은 훨씬 뒤인 기원후 1~2세기부터 나타나는 간다라 불상 양식으로 이어집니다. 사람 모습의 붓다상은 이 세기에는 아직 없었습니다. 부파불교의 여러 학파도 각자의 논서를 발전시켰습니다.
5. 눌림과 만남
| 유대교 | 불교 | |
|---|---|---|
| 이 세기의 경험 | 탄압과 무장 저항, 독립 왕조 | 다른 문화권 통치자와의 대화 |
| 남긴 것 | 하누카 절기, 사해문서, 종파의 분화 | 《밀린다왕문경》, 간다라 문화 |
| 국가와의 관계 | 저항 뒤 스스로 왕조가 됨 | 이방 왕의 후원과 관심 |
| 오늘 남은 물음 | 종교의 자유를 위한 싸움은 어디까지인가 | 다른 문화의 말로 신앙을 설명할 수 있는가 |
두 종교는 여전히 직접 만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 세기에 지중해–중앙아시아–인도를 잇는 교역로가 활발해지면서, 종교가 상인과 함께 이동하는 구조가 자리 잡았습니다.
이 장이 남긴 네 문장
- 마카비 항쟁은 종교 탄압에 맞선 저항이자 정치적 독립 운동이었습니다.
- 종교 항쟁의 결과가 반드시 종교적인 통치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 이 시기에 형성된 유대교 내부의 갈래들이 1세기의 배경이 됩니다.
- 불교는 중앙아시아에서 헬레니즘 문화와 만나며 새로운 표현을 얻었습니다.
생각해 볼 질문
- 종교의 자유를 위한 싸움이 권력 다툼으로 바뀌는 지점은 어디일까요?
- 한 종교 안에 여러 갈래가 생기는 것은 약함일까요, 힘일까요?
- 종교가 교역로를 따라 퍼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 장에서 쓴 자료
문헌
- 사해문서 (기원전 3세기~기원후 1세기, 히브리어·아람어·그리스어) — 이스라엘 박물관 등
- 다니엘서 (최종 형태는 기원전 2세기 중반으로 보는 견해가 다수)
- 밀린다왕문경 (기원전 2세기~기원후 초, 팔리어)
자료 사진
- 대이사야 두루마리 (실제 유물) · 쿰란 동굴 (실제 유물) · 메난드로스 1세의 화폐 초상 (실제 유물)
참고
- 마카베오서,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전승·후대 서술)
- 사해문서 (1차 사료)
「종교사 한눈」이 모아 둔 자료로 작성한 원고입니다.
검수 이력
- 1차 · 사실 확인 — 셀레우코스의 팔레스타인 장악을 파니온 전투(기원전 200~198년)로 특정. 간다라 불상 양식이 이 세기가 아니라 기원후 1~2세기부터임을 밝히고, 이 세기에는 사람 모습의 붓다상이 없었다는 점을 추가.
- 2차 · 관점 검토 — 하누카의 등불 이야기가 마카베오서가 아니라 수백 년 뒤 탈무드에 처음 나온다는 점을 추가. 바리새·사두개·에세네를 나란히 소개하는 자료가 이백 년 가까이 뒤의 요세푸스와 신약성서뿐이라는 점, 「구전 전승 중시」라는 설명이 더 뒤의 랍비 문헌에 기댄 정리라는 점을 밝힘.
- 3차 · 저작권 확인 — 자료 사진 3장의 이용 조건 확인.
- 남은 것 · 외부 검토 — 쓴 쪽과 검수한 쪽이 같습니다. 출판 전 제3자의 확인이 필요합니다.
1. 세기를 여는 한 장면
왕이 성전에 다른 신의 제단을 세우자 시골 제사장 가문이 무기를 들었다. 마카비 항쟁은 종교의 자유를 위한 싸움으로 기억되지만, 그 뒤에 세워진 하스몬 왕조는 다시 권력의 논리로 움직였다. 같은 세기 유대교 안에는 바리새·사두개·에세네 같은 갈래가 뚜렷해졌다.
2. 기원전 2세기의 세계사 배경
셀레우코스 왕조가 팔레스타인을 지배했고, 로마는 지중해의 최강국으로 떠올랐다. 인도에서는 마우리아 왕조가 무너진 뒤 여러 왕조가 섰고, 중앙아시아에서는 인도-그리스 왕국이 있었다. 중국 한나라가 서역으로 길을 열었다.
- 기원전 2세기 초 셀레우코스 왕조가 팔레스타인을 차지했다.
- 기원전 146년 로마가 카르타고와 코린토스를 무너뜨렸다.
- 인도-그리스 왕 메난드로스 1세가 불교와 접촉했다고 전한다.
- 한 무제 때 장건의 서역 사행으로 동서 교역로가 열렸다.
3. 한눈에 보는 연대표
| 연도 | 일어난 일 | 관련 종교 |
|---|---|---|
| 기원전 200~198년 | 파니온 전투를 거쳐 셀레우코스 왕조가 팔레스타인을 차지한다. | |
| 기원전 167년 | 안티오코스 4세가 유대교 관습을 금하고 성전을 훼손한다. | 유대 |
| 기원전 167~164년 | 마카비 항쟁이 일어나 성전을 되찾는다. 하누카 절기의 기원이 된다. | 유대 |
| 기원전 141년경 | 하스몬 왕조가 사실상 독립 왕조로 자리 잡는다. | 유대 |
| 기원전 2세기 | 바리새·사두개·에세네 등 유대교 내부의 갈래가 뚜렷해진다. 다만 이 세 갈래를 나란히 전하는 자료는 기원후 1세기의 요세푸스와 신약성서로, 이 세기보다 훨씬 뒤의 글이다. (학문적 해석) | 유대 |
| 기원전 2세기(150년경부터) | 쿰란 공동체가 형성되고 훗날 사해문서로 발견될 문헌들이 쓰이기 시작한다. | 유대 |
| 기원전 2세기 | 《밀린다왕문경》의 배경이 되는 인도-그리스 왕과 불교 승려의 대화 전승. (전통의 주장) | 불교 |
4. 유대교
박해가 만든 항쟁, 항쟁이 만든 왕조
셀레우코스의 종교 탄압에 맞선 마카비 항쟁은 유대교사에서 신앙의 자유를 지킨 사건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 결과로 세워진 하스몬 왕조는 제사장직과 왕권을 함께 쥐면서 내부 비판을 받았고, 그 갈등 속에서 여러 종파가 자기 자리를 분명히 했다.
- 하누카는 성전 정화를 기념하는 절기다.
- 바리새는 구전 전승과 율법 해석을, 사두개는 성전 제사와 성문 율법을 중시했다.
- 에세네 계열은 성전 체제를 비판하며 광야 공동체를 이뤘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 다니엘서의 최종 형태가 이 시기 상황과 연결된다는 것이 다수 학설이다.
5. 기독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1세기 유대교 안의 예수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6. 가톨릭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라틴어를 쓰는 서방교회 전통이 로마 주교를 중심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서서히 형성되었다. 특정 연도를 창립일로 삼기 어렵다.
7. 동방정교회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그리스어를 쓰는 동방교회 전통. 1054년은 분열을 상징하는 사건이지 시작점이 아니다.
8. 개신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16세기 종교개혁 과정에서 여러 갈래로 형성되었다.
9. 이슬람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무함마드의 활동과 함께 7세기 아라비아에서 시작되었다. 622년 히즈라를 이슬람력 원년으로 삼는다.
10. 불교
그리스 왕과 승려가 마주 앉다
중앙아시아와 인도 서북부에서 불교는 그리스계 통치자·주민과 접촉했다. 《밀린다왕문경》은 그 만남을 문답 형식으로 전한다. 이 지역의 문화 접촉은 훗날 불상 조각 양식에도 영향을 준다.
- 간다라 지역이 불교와 헬레니즘 문화가 만나는 접점이 되었다.
- 부파불교의 여러 학파가 각자의 논서를 발전시켰다.
11. 종교 간 관계
유대교 ↔ 불교 — 문화·학문·예술 교류
두 종교는 여전히 직접 만나지 않았다. 다만 이 세기에 지중해–중앙아시아–인도를 잇는 교역로가 활발해지면서, 종교가 상인과 함께 이동하는 구조가 자리 잡았다.
12. 이 세기의 결정적 사건
안티오코스 4세의 유대교 금지 (기원전 167년)
예루살렘 내부의 헬레니즘 수용파와 반대파의 갈등에 왕권이 개입하면서 상황이 격해졌다.
원인
- 대제사장직을 둘러싼 내부 다툼
- 셀레우코스의 재정 압박
-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읽힌 저항
전개
안식일 준수와 할례를 금하고 성전에 다른 제사를 들였다.
결과
- 유대교 예배가 중단되고 저항이 촉발되었다
장기적 영향
- 종교의 자유를 위한 무장 저항이라는 기억이 만들어졌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유대교 | 신앙을 지키기 위한 순교와 저항의 원형으로 기억한다. |
| 역사학계 | 이 조치가 순수한 종교 탄압인지, 반란 진압의 성격이 강했는지가 논쟁된다. 유대 내부의 파벌 다툼도 함께 봐야 한다. |
학계의 평가
‘종교 박해’라는 틀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 최근 연구의 강조점이다.
마카비 항쟁과 성전 정화 (기원전 167~164년)
탄압에 맞서 시골 제사장 가문이 무장 저항을 일으켰다.
전개
게릴라전으로 세력을 넓혀 예루살렘을 되찾고 성전을 정화해 다시 봉헌했다.
결과
- 성전 예배가 회복되었다
- 하누카 절기의 기원이 되었다
장기적 영향
- 하스몬 왕조가 세워져 한 세기 가까이 독립을 유지했다
- 그 왕조가 제사장직과 왕권을 함께 쥐면서 내부 비판이 커졌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유대교 | 하누카로 해마다 기념한다. 랍비 전통은 군사적 승리보다 성전 정화와 등불에 무게를 둔다. 다만 등불 기적 이야기는 마카베오서에 없고 수백 년 뒤 탈무드에 처음 나온다. |
| 역사학계 | 마카베오서 두 권의 서술 관점이 서로 달라 비교해 읽어야 한다. |
쿰란 공동체의 형성 (기원전 150년)
하스몬 왕조의 성전 운영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광야로 물러났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전개
사해 서북안에 공동체가 자리 잡고 규율과 성경 사본, 해석 문헌을 남겼다.
결과
- 독자적 달력과 규율을 지닌 공동체가 유지되었다
장기적 영향
- 1947년 이후 발견된 사해문서로 제2성전기 유대교의 다양성이 드러났다
- 성경 본문이 이 시기에 여러 형태로 존재했음이 확인되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유대교 | 당시 유대교가 하나가 아니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로 이해된다. |
| 기독교 | 초기 기독교와의 유사점이 논의되었으나, 직접적 연결은 확인되지 않았다. |
| 역사학계 | 공동체를 에세네파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지만 이견도 있다. |
학계의 평가
문헌의 저자 집단과 유적의 성격을 두고 여러 학설이 맞선다.
13. 주요 인물
| 인물 | 생몰 | 활동 | 후대의 평가 |
|---|---|---|---|
|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 기원전 215년경 ~ 기원전 164년 | 유대교 관습을 금하고 성전을 훼손했다 | 유대 전통에서 박해자의 대명사가 되었고, 다니엘서의 상징 해석과 연결되어 왔다. 그리스계 사료의 평가는 다르다. |
| 유다 마카비 | 기원전 160년 | 항쟁을 이끌어 예루살렘과 성전을 되찾았다 | 신앙을 지킨 영웅으로 기억되지만, 이후 하스몬 왕조의 행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
| 메난드로스 1세 | 기원전 2세기 | 인도 서북부를 다스렸다 / 불교 승려와 문답을 나눴다고 전한다 | 《밀린다왕문경》의 주인공으로 알려졌다. 그가 실제로 불교 신자가 되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
14. 주요 문헌과 사상
| 문헌 | 시기 | 언어 | 핵심 내용 |
|---|---|---|---|
| 사해문서 | 기원전 3세기~기원후 1세기 | 히브리어·아람어·그리스어 | 성경 사본, 성경 해석서, 공동체 규율, 찬송과 종말론 문헌이 함께 들어 있다. |
| 다니엘서 | 최종 형태는 기원전 2세기 중반으로 보는 견해가 다수 | 히브리어·아람어 | 바빌론 궁정 이야기와 종말 환상을 함께 담고 있다. |
| 밀린다왕문경 | 기원전 2세기~기원후 초 | 팔리어(원형은 다른 언어일 가능성) | 그리스계 왕과 승려 나가세나의 문답 형식으로 불교 교리를 설명한다. |
15. 지도와 이동 경로
마카비 항쟁의 무대와 동쪽의 접촉 (기원전 200~101년)
| 장소 | 성격 | 설명 |
|---|---|---|
| 예루살렘 | 성지 | 성전 훼손과 정화. |
| 모데인 | 도시 | 항쟁이 시작된 마을로 전한다. |
| 쿰란 | 유적 | 사해문서가 발견된 곳. |
| 안티오키아 | 도시 |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도. |
| 사갈라(시알코트) | 도시 | 《밀린다왕문경》의 무대로 전한다. |
경계 확실성: 대체로 확실
16. 사진과 유물로 보는 역사
17. 핵심 정리
- 마카비 항쟁은 종교 탄압에 맞선 저항이자 정치적 독립 운동이었다.
- 종교 항쟁의 결과가 반드시 종교적인 통치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 이 시기에 형성된 유대교 내부의 갈래들이 1세기의 배경이 된다.
- 불교는 중앙아시아에서 헬레니즘 문화와 만나며 새로운 표현을 얻었다.
18. 비교표
| 유대교 | 불교 | |
|---|---|---|
| 이 세기의 경험 | 탄압과 무장 저항, 독립 왕조 | 다른 문화권 통치자와의 대화 |
| 남긴 것 | 하누카 절기, 사해문서, 종파의 분화 | 《밀린다왕문경》, 간다라 문화 |
| 국가와의 관계 | 저항 뒤 스스로 왕조가 됨 | 이방 왕의 후원과 관심 |
| 오늘 남은 물음 | 종교의 자유를 위한 싸움은 어디까지인가 | 다른 문화의 말로 신앙을 설명할 수 있는가 |
19. 생각해 볼 질문
- 종교의 자유를 위한 싸움이 권력 다툼으로 바뀌는 지점은 어디일까?
- 한 종교 안에 여러 갈래가 생기는 것은 약함일까 힘일까?
- 종교가 교역로를 따라 퍼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20. 확인 퀴즈
마카비 항쟁의 직접적 계기는?
- 로마의 예루살렘 점령
- 안티오코스 4세의 유대교 관습 금지와 성전 훼손
- 바빌론 포로
- 헤롯의 성전 증축
바리새와 사두개의 차이로 옳은 것은?
- 바리새는 구전 전승과 율법 해석을, 사두개는 성전 제사와 성문 율법을 중시했다
- 바리새는 로마인, 사두개는 그리스인이었다
- 바리새는 불교, 사두개는 유대교였다
- 둘은 같은 집단의 다른 이름이다
쿰란 공동체의 문헌(사해문서)이 쓰이기 시작한 시기는?
- 기원전 6세기
- 기원전 2세기
- 기원후 4세기
- 기원후 11세기
정답 1) 2 · 2) 1 · 3) 2
해설
1. 기원전 167년의 탄압이 항쟁을 촉발했다.
2. 두 집단은 율법 이해와 사회적 기반이 달랐다.
3.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쓰였다.
21. 주석과 참고문헌
- 마카베오서,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전승·후대 서술)
- 사해문서 (1차 사료)
- 《밀린다왕문경》 (불교 전승 문헌)
제7장 기원전 1세기의 세계 종교
기원전 100년~기원전 1년
로마가 들어오고, 헤롯이 성전을 키우고, 세상은 1세기를 기다린다.
읽는 글
제7장 기원전 1세기의 세계 종교
로마가 들어오고, 헤롯이 성전을 키우고, 세상은 1세기를 기다립니다
기원전 100년 ~ 기원전 1년
여는 장면 — 무대가 차려지다
기원전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에 들어왔습니다. 이제 유대 땅은 로마의 질서 안에 있었습니다.
헤롯 대왕은 성전을 웅장하게 다시 지었지만 백성의 마음은 얻지 못했습니다.
세금과 점령, 메시아를 기다리는 여러 목소리. 1세기의 무대는 이미 이 세기에 다 차려졌습니다.
이 장을 「아무 일도 시작되지 않은 세기」라고 부르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 쪽에서 볼 때만 그렇습니다. 같은 세기에 스리랑카에서는 불교 경전이 처음 문자로 옮겨졌고, 예루살렘에서는 훗날 랍비 유대교의 뼈대가 될 율법 해석 학파가 서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시작」으로 부를지가 이미 하나의 관점입니다.
1. 로마의 평화가 만들어지다
로마 공화정이 내전을 거쳐 제정으로 바뀌었습니다. 지중해 전체가 한 정치 질서 아래 묶였고, 도로와 항로가 정비되었습니다.
-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했습니다.
- 기원전 37~기원전 4년 헤롯 대왕이 유대를 다스렸습니다.
-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가 사실상 제정을 열었습니다.
- 제국의 도로망과 해상 교역로가 정비되었습니다.
바티칸 박물관에 있는 프리마 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 상은 갑옷을 입고 손을 뻗은 모습입니다. 종교사에서 이 인물이 중요한 이유는 신앙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정비한 길과 질서 위에서 다음 세기 기독교가 퍼지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황제 숭배의 확산은 뒤에 그리스도인과의 충돌 지점이 됩니다.
2. 기원전 63년 — 지성소에 들어선 장군
하스몬 왕조 형제 사이의 왕위 다툼에 로마가 중재자로 끌려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중재는 점령이 되었습니다.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에 들어가 성전 지성소까지 들어갔다고 전합니다.
지성소 침입은 큰 모독으로 기억되었고, 당대 문헌에 그 충격이 남아 있습니다.
요세푸스와 로마 측 기록이 세부에서 다릅니다.
하스몬의 독립은 사실상 끝났습니다. 점령에 대한 반감이 이후 여러 형태의 저항과 종말 기대로 이어집니다.
3. 헤롯의 성전
로마의 후원으로 왕이 된 헤롯은 대규모 건축으로 정통성을 보이려 했습니다.
기원전 20년경부터 성전 산을 크게 확장하고 성전을 화려하게 다시 지었습니다. 공사는 그의 사후에도 이어졌습니다. 당대 세계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성소가 되었습니다.
성전 산 옹벽과 주변 발굴이 문헌 기록과 잘 맞물립니다. 거대한 돌을 쌓아 올린 그 옹벽의 서쪽 면 일부가 오늘날의 통곡의 벽입니다.
성전의 화려함과 헤롯에 대한 반감이 함께 전해집니다.
헤롯은 마사다에 요새도 지었습니다. 사막 한가운데 솟은 평평한 바위산 위의 그 요새는, 기원후 73년 또는 74년, 유대 전쟁의 마지막 무대가 됩니다.
요세푸스는 헤롯의 건축 업적과 잔혹함을 함께 기록했습니다. 복음서의 유아 학살 기사는 그의 통치 성격을 보여 주는 서술로 인용되지만, 다른 사료에서 확인되지는 않습니다.
이 건물이 다음 세기 복음서 이야기의 배경이 됩니다. 그리고 기원후 70년에 불탑니다.
4. 커지는 기다림
로마의 지배와 헤롯의 통치 아래서 유대 사회는 크게 흔들렸습니다.
성전은 화려해졌지만 세금과 정치적 억압은 무거웠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해 주시기를 바라는 종말론적 기대가 여러 형태로 퍼졌습니다.
성전 세력, 율법 해석 학파, 광야 공동체, 무장 저항 세력이 공존했습니다. 힐렐과 샴마이의 학파가 형성되어 율법 해석의 두 태도를 보여 주었습니다. 힐렐에 대해서는 '네가 싫어하는 것을 이웃에게 하지 말라 — 나머지는 그 풀이다'라는 말이 전합니다.
이 말이 실린 곳은 당대의 기록이 아니라 대여섯 세기 뒤에 엮인 바빌로니아 탈무드입니다(샤바트 31a). 힐렐 학파가 주류가 되었다는 서술도 그 전통 자신이 뒤에서 정리한 것입니다. 이 세기의 인물을 우리는 대부분 후대 문헌을 통해 만납니다.
메시아 기대는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왕적·제사장적·예언자적 형태로 다양했습니다. '기원전 1세기 유대인은 모두 같은 메시아를 기다렸다'는 서술은 한 종교 안의 다양성을 하나로 일반화하는 것입니다.
그리스어를 쓰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제국 곳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다음 세기 초기 선교가 회당에서 시작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5. 같은 세기, 동쪽에서
스리랑카에서 구전으로 이어지던 불교 가르침이 문자로 기록되었다고 전합니다. 기근과 전란으로 구전 전승이 끊길 위험이 있었다는 것이 연대기의 설명입니다.
가르침을 지켜 낸 결정적 사건으로 기립니다.
이 기사는 후대 연대기의 서술입니다. 실제 기록 과정은 여러 단계였을 것으로 봅니다.
율장·경장·논장의 세 묶음으로 이뤄진 팔리 삼장이 상좌부 불교의 표준 경전이 됩니다. 다만 현존 형태가 곧 붓다의 육성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인도 서북부와 중앙아시아에서는 대승 사상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고, 실크로드를 따라 불교가 동쪽으로 향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6. 다음 세기를 위한 무대
| 무엇이 갖춰졌나 | 1세기에 어떻게 쓰였나 |
|---|---|
| 코이네 그리스어가 공용어 | 복음서와 서신이 이 말로 쓰였습니다 |
| 로마의 도로와 항로 | 선교와 편지 왕래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
| 제국 곳곳의 디아스포라 공동체 | 초기 선교가 회당에서 시작되었습니다 |
| 여러 형태의 메시아 기다림 | 예수 운동이 그 한복판에서 일어났습니다 |
| 팔리 경전의 문자화 | 불교가 실크로드를 따라 동진할 준비 |
역사는 준비된 조건 위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조건이 결과를 정하지는 않습니다. 이 무대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다음 장의 이야기입니다.
이 장이 남긴 다섯 문장
- 로마의 지배는 1세기 종교사의 정치적 무대를 만들었습니다.
- 헤롯 성전은 1세기 복음서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건물입니다.
- 메시아 기대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었습니다.
- 제국의 도로와 언어는 훗날 기독교 확산의 통로가 됩니다.
- 불교는 경전 문자화와 대승 사상의 태동으로 다음 단계를 준비했습니다.
생각해 볼 질문
- 점령당한 사회에서 종교는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요?
-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말이 사람마다 다른 뜻이었다면, 무엇이 달랐을까요?
- 제국의 도로와 공용어는 종교에 축복이었을까요, 시험이었을까요?
이 장에서 쓴 자료
문헌
- 팔리 삼장 (구전 전승, 기원전 1세기에 문자화되었다고 전함, 팔리어)
자료 사진
- 마사다 (실제 유물 · 헤롯이 지은 요새) · 예루살렘 성전 산의 헤롯 시대 석축 (실제 유물) · 프리마 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 (실제 유물 · 바티칸 박물관)
참고
-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유대 고대사》
- 헤롯 성전 관련 고고학 보고
- 제2성전기 종말론 연구
「종교사 한눈」이 모아 둔 자료로 작성한 원고입니다.
검수 이력
- 1차 · 사실 확인 — 마사다 함락 연도를 1세기 장과 같이 73/74년 병기로 맞춤(자료도 함께 고침). 힐렐의 말이 실린 곳이 대여섯 세기 뒤의 바빌로니아 탈무드(샤바트 31a)임을 밝힘.
- 2차 · 관점 검토 — 「아무 일도 시작되지 않은 세기」라는 여는 문장이 기독교 쪽에서 볼 때만 성립한다는 점을 밝히고, 같은 세기 스리랑카의 경전 문자화와 율법 해석 학파의 형성을 나란히 놓음. 힐렐 학파가 주류가 되었다는 서술이 그 전통 자신의 정리임을 표시.
- 3차 · 저작권 확인 — 자료 사진 3장의 이용 조건과 소장처 확인.
- 남은 것 · 외부 검토 — 쓴 쪽과 검수한 쪽이 같습니다. 출판 전 제3자의 확인이 필요합니다.
1. 세기를 여는 한 장면
기원전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에 들어왔다. 이제 유대 땅은 로마의 질서 안에 있었다. 헤롯 대왕은 성전을 웅장하게 다시 지었지만 백성의 마음은 얻지 못했다. 세금과 점령, 메시아를 기다리는 여러 목소리 — 1세기의 무대는 이미 이 세기에 다 차려졌다.
2. 기원전 1세기의 세계사 배경
로마 공화정이 내전을 거쳐 제정으로 바뀌었다. 지중해 전체가 한 정치 질서 아래 묶였고, 도로와 항로가 정비되었다. 인도와 중앙아시아에서는 불교가 계속 퍼졌고, 스리랑카에서는 경전이 문자로 기록되었다.
-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 기원전 37~기원전 4년 헤롯 대왕이 유대를 다스렸다.
-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가 사실상 제정을 열었다(로마의 평화).
- 제국의 도로망과 해상 교역로가 정비되었다.
- 기원전 1세기 스리랑카에서 팔리 경전이 문자로 기록되었다고 전한다.
3. 한눈에 보는 연대표
| 연도 | 일어난 일 | 관련 종교 |
|---|---|---|
| 기원전 63년 | 로마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유대가 로마의 영향권에 들어간다. | 유대 |
| 기원전 37년 | 헤롯이 로마의 후원으로 유대 왕이 된다. | 유대 |
| 기원전 20년경~ | 헤롯의 제2성전 대규모 증축이 시작된다. | 유대 |
| 기원전 1세기 | 힐렐과 샴마이 학파의 율법 해석 전통이 형성된다. 두 학파에 관한 서술은 대부분 수백 년 뒤의 랍비 문헌에 실린 것이다. (전통의 주장) | 유대 |
| 기원전 27년 | 아우구스투스가 로마 제정을 연다. | |
| 기원전 1세기(29년경) | 팔리 삼장이 스리랑카에서 문자로 기록되었다고 전한다. (전통의 주장) | 불교 |
4. 유대교
점령 아래서 커지는 기다림
로마의 지배와 헤롯의 통치 아래서 유대 사회는 크게 흔들렸다. 성전은 화려해졌지만 세금과 정치적 억압은 무거웠고, 하나님이 개입해 주시기를 바라는 종말론적 기대가 여러 형태로 퍼졌다. 메시아에 대한 기대도 하나로 통일된 것이 아니라 집단마다 달랐다.
- 헤롯 성전은 당시 세계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성소였다.
- 성전 세력, 율법 해석 학파, 광야 공동체, 무장 저항 세력이 공존했다.
- 메시아 기대는 왕적·제사장적·예언자적 형태로 다양했다.
- 그리스어를 쓰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제국 곳곳에 살고 있었다.
5. 기독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1세기 유대교 안의 예수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6. 가톨릭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라틴어를 쓰는 서방교회 전통이 로마 주교를 중심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서서히 형성되었다. 특정 연도를 창립일로 삼기 어렵다.
7. 동방정교회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그리스어를 쓰는 동방교회 전통. 1054년은 분열을 상징하는 사건이지 시작점이 아니다.
8. 개신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16세기 종교개혁 과정에서 여러 갈래로 형성되었다.
9. 이슬람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무함마드의 활동과 함께 7세기 아라비아에서 시작되었다. 622년 히즈라를 이슬람력 원년으로 삼는다.
10. 불교
경전이 글자가 되다
스리랑카에서 구전으로 이어지던 가르침이 문자로 기록되었다고 전한다. 인도 서북부와 중앙아시아에서는 대승 사상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고, 실크로드를 따라 불교가 동쪽으로 향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문자화는 가르침의 보존 방식을 바꾼 큰 전환이다.
- 대승 계열 경전의 형성은 기원 전후로 이어진다.
11. 종교 간 관계
유대교 ↔ 기독교 — 공통 기원과 공유 전통
기독교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그러나 1세기 예수 운동이 놓이게 될 자리 — 로마의 점령, 성전 체제, 여러 갈래의 메시아 기대, 그리스어를 쓰는 디아스포라 — 가 이 세기에 모두 갖춰졌다.
유대교 ↔ 불교 — 문화·학문·예술 교류
로마와 인도를 잇는 해상·육상 교역로가 이 무렵 활발해졌다. 두 종교의 직접 접촉을 보여 주는 자료는 없지만, 사람과 물자가 오가는 길이 열려 있었다는 점은 다음 세기들을 이해하는 배경이 된다.
12. 이 세기의 결정적 사건
폼페이우스의 예루살렘 점령 (기원전 63년)
하스몬 왕조 형제 사이의 왕위 다툼에 로마가 중재자로 끌려 들어왔다.
원인
- 하스몬 내부의 계승 분쟁
- 동방으로 뻗던 로마의 세력
전개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에 들어가 성전 지성소까지 들어갔다고 전한다.
결과
- 유대가 로마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 하스몬의 독립이 사실상 끝났다
장기적 영향
- 로마의 지배가 1세기 종교사의 정치적 배경이 된다
- 점령에 대한 반감이 여러 형태의 저항과 종말 기대로 이어졌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유대교 | 지성소 침입은 큰 모독으로 기억되었고, 당대 문헌에 그 충격이 남아 있다. |
| 역사학계 | 요세푸스와 로마 측 기록이 세부에서 다르다. |
팔리 삼장의 문자화 (기원전 29년)
기근과 전란으로 구전 전승이 끊길 위험이 있었다고 연대기는 전한다.
전개
승려들이 모여 그때까지 외워 오던 가르침을 나뭇잎에 적었다고 전한다.
결과
- 팔리 삼장이 문자로 고정되었다고 전한다
장기적 영향
- 상좌부 전통의 표준 경전이 마련되었다
- 가르침의 보존 방식이 기억에서 문서로 바뀌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불교 | 가르침을 지켜 낸 결정적 사건으로 기린다. |
| 역사학계 | 이 기사는 후대 연대기의 서술이다. 실제 기록 과정은 여러 단계였을 것으로 본다. |
헤롯의 제2성전 증축 (기원전 20년~63년)
로마의 후원으로 왕이 된 헤롯은 대규모 건축으로 정통성을 보이려 했다.
전개
성전 산을 크게 확장하고 성전을 화려하게 다시 지었으며, 공사는 그의 사후에도 이어졌다.
결과
- 당대 세계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성소가 되었다
장기적 영향
- 복음서와 1세기 문헌이 배경으로 삼는 건물이 되었다
- 기원후 70년에 파괴되고, 서쪽 옹벽 일부가 오늘날의 통곡의 벽으로 남았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유대교 | 성전의 화려함과 헤롯에 대한 반감이 함께 전해진다. |
| 역사학계 | 성전 산 옹벽과 주변 발굴이 문헌 기록과 잘 맞물린다. |
13. 주요 인물
| 인물 | 생몰 | 활동 | 후대의 평가 |
|---|---|---|---|
| 헤롯 대왕 | 기원전 73년경 ~ 기원전 4년 | 로마의 후원으로 유대 왕이 되었다 / 성전과 항구 도시 카이사리아 등을 지었다 | 위대한 건설자이자 의심 많은 통치자로 평가된다. 복음서의 유아 학살 기사는 그의 통치 성격을 보여 주는 서술로 인용되지만, 다른 사료에서 확인되지는 않는다. |
| 힐렐 | 기원전 1세기 ~ 기원후 1세기 초 | 율법 해석 학파를 이끌었다 | 그의 학파가 랍비 유대교의 주류 전통으로 이어졌다. 샴마이 학파와의 대조는 해석의 두 태도를 보여 주는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
| 아우구스투스 | 기원전 63년 ~ 기원후 14년 | 로마 제정을 열었다 / 제국의 도로와 행정을 정비했다 | 종교사에서는 ‘로마의 평화’를 만든 사람으로 중요하다. 그가 정비한 길과 질서 위에서 다음 세기 기독교가 퍼진다. 황제 숭배의 확산은 뒤에 그리스도인과의 충돌 지점이 된다. |
14. 주요 문헌과 사상
| 문헌 | 시기 | 언어 | 핵심 내용 |
|---|---|---|---|
| 팔리 삼장 | 구전 전승, 기원전 1세기에 문자화되었다고 전한다 | 팔리어 | 율장(규율), 경장(가르침), 논장(교학)의 세 묶음으로 이뤄져 있다. |
15. 지도와 이동 경로
로마의 질서와 동방의 길 (기원전 100~1년)
다음 세기 기독교 확산의 통로가 이 시기에 갖춰진다.
| 장소 | 성격 | 설명 |
|---|---|---|
| 로마 | 도시 | |
| 예루살렘 | 성지 | 헤롯의 성전 증축. |
| 카이사리아 | 도시 | 헤롯이 세운 항구 도시. |
| 알렉산드리아 | 도시 | |
| 알루비하라 | 수도원·학교 | 팔리 삼장 문자화의 자리로 전한다. |
경계 확실성: 대체로 확실
| 경로 | 성격 | 설명 |
|---|---|---|
| 지중해 교역·통행로(개략) | 교역 |
16. 사진과 유물로 보는 역사
17. 핵심 정리
- 로마의 지배는 1세기 종교사의 정치적 무대를 만들었다.
- 헤롯 성전은 1세기 복음서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건물이다.
- 메시아 기대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었다.
- 제국의 도로와 언어는 훗날 기독교 확산의 통로가 된다.
- 불교는 경전 문자화와 대승 사상의 태동으로 다음 단계를 준비했다.
18. 비교표
| 무엇이 갖춰졌나 | 1세기에 어떻게 쓰였나 | |
|---|---|---|
| 언어 | 코이네 그리스어가 공용어 | 복음서와 서신이 이 말로 쓰였다 |
| 길 | 로마의 도로와 항로 | 선교와 편지 왕래의 통로가 되었다 |
| 도시 | 제국 곳곳의 디아스포라 공동체 | 초기 선교가 회당에서 시작되었다 |
| 기대 | 여러 형태의 메시아 기다림 | 예수 운동이 그 한복판에서 일어났다 |
| 동쪽 | 팔리 경전의 문자화 | 불교가 실크로드를 따라 동진할 준비 |
19. 생각해 볼 질문
- 점령당한 사회에서 종교는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
-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말이 사람마다 다른 뜻이었다면, 무엇이 달랐을까?
- 제국의 도로와 공용어는 종교에 축복이었을까, 시험이었을까?
20. 확인 퀴즈
로마가 예루살렘을 처음 점령한 해는?
- 기원전 167년
- 기원전 63년
- 기원후 70년
- 기원후 135년
제2성전을 대규모로 증축한 인물은?
- 헤롯 대왕
- 느헤미야
- 유다 마카비
- 폼페이우스
‘기원전 1세기 유대인은 모두 같은 메시아를 기다렸다’는 서술의 문제는?
- 문제 없다
- 집단마다 기대가 달랐다는 사실을 하나로 일반화했다
- 연도가 틀렸다
- 메시아 개념은 이 시기에 없었다
정답 1) 2 · 2) 1 · 3) 2
해설
1.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의 점령이다. 70년은 성전 파괴다.
2. 헤롯 대왕이 기원전 20년경부터 증축을 시작했다.
3. 한 종교 안의 다양성을 하나로 뭉뚱그리지 않는 것이 이 앱의 원칙이다(§13.3).
21. 주석과 참고문헌
-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유대 고대사》
- 헤롯 성전 관련 고고학 보고
- 제2성전기 종말론 연구
참고문헌
- 이스라엘 왕국사 관련 표준 개설서와 고고학 보고
- 고대 근동 문헌 자료집(함무라비 법전, 아시리아 연대기 등)
- 히브리 성경 본문(전승 자료로 표기)
- 히브리 성경 열왕기하·에스라 (전승 자료)
- 바빌론 연대기, 키루스 원통 비문 (1차 사료)
- 초기 불교 팔리 문헌과 연대 논쟁을 다룬 연구서
- 에스라·느헤미야서 (전승 자료)
- 엘레판티네 파피루스 (1차 사료)
- 제2성전기 유대교 연구서, 초기 불교사 개설서
- 헬레니즘 시대 개설서
- 제2성전기 유대교 연구
- 초기 불교 부파 형성에 관한 연구
- 아쇼카 칙령 비문 (1차 사료)
- 70인역 성립에 관한 연구
- 헬레니즘 유대교 연구서
- 마카베오서,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전승·후대 서술)
- 사해문서 (1차 사료)
- 《밀린다왕문경》 (불교 전승 문헌)
-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유대 고대사》
- 헤롯 성전 관련 고고학 보고
- 제2성전기 종말론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