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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 한눈 · 제2권

1세기부터 5세기

초기 기독교와 제국교회의 형성

검수용 교정본 · 배포 금지

같은 시대, 서로 다른 믿음은 어떤 역사를 지나왔는가

검수 완료 5 / 5장

차례

  1. 제1장 1세기의 세계 종교
  2. 제2장 2세기의 세계 종교
  3. 제3장 3세기의 세계 종교
  4. 제4장 4세기의 세계 종교
  5. 제5장 5세기의 세계 종교

이 책이 다루는 것

  • 초기 유대교와 기독교
  • 로마제국과 기독교
  • 초기 불교의 확산
  • 교리와 종교공동체 형성
  • 기독교 공인과 제국교회
  • 각 종교의 관계

이 책은 역사적 사실, 종교 전통의 주장, 학문적 해석을 구분해 씁니다. 확정되지 않은 연대와 논쟁 중인 내용은 그렇게 밝혀 적었고, 특정 종교의 관점만으로 다른 종교를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제1장 1세기의 세계 종교

1년~100년

유대교 안에서 시작된 한 운동이 지중해 전역으로 퍼지고, 성전은 무너진다.

읽는 글

제1장 1세기의 세계 종교

유대교 안에서 시작된 한 운동이 지중해 전역으로 퍼지고, 성전은 무너집니다

1년 ~ 100년


여는 장면 — 붐비는 성전 뜰

절기가 되면 예루살렘은 사람으로 가득 찼습니다. 지중해 곳곳에서 배를 타고, 유프라테스 건너에서 대상을 따라 순례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성전 뜰에서는 환전상의 저울 소리가 났고, 제단에서는 종일 연기가 올랐습니다.

로마 총독은 절기마다 병력을 늘렸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언제 하나님이 개입하실지 이야기했습니다. 어떤 이는 왕 같은 이가 올 것이라 했고, 어떤 이는 제사장 같은 이를, 어떤 이는 예언자 같은 이를 기다렸습니다. 그 기다림은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갈릴리에서 시작된 한 무리의 운동이 이 시대의 기다림 한가운데를 지나갑니다. 그리고 70년, 성전이 불탔습니다. 그 재 위에서 유대교와 기독교는 서로 다른 길로 갈라서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따라가 볼 한 세기의 이야기입니다.


1. 하나로 묶인 세계 — 로마의 평화

1세기의 지중해는 하나의 정치 질서 아래 있었습니다. 로마 제정은 아우구스투스 이후 안정기에 들어섰고, 이 시기를 사람들은 뒤에 '로마의 평화'라 불렀습니다.

이 평화가 종교사에 남긴 것은 무력이 아니라 길과 말이었습니다.

제국은 도로를 깔고 항로를 정비했습니다. 안디옥에서 에페소로, 고린토에서 로마로 가는 데 몇 주면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지중해 동부 어디를 가도 그리스어가 통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가 남긴 코이네 그리스어가 상인과 관리와 학자의 공용어였습니다. 편지 한 통이 바다를 건너 낯선 도시의 공동체에서 읽힐 수 있었던 것은 이 두 가지 덕분이었습니다.

이 세기의 세계는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 아우구스투스 이후 로마 제정이 안정기에 들어섰습니다.
  • 그리스어가 동지중해의 공용어였고, 라틴어는 서방의 행정 언어였습니다.
  • 66년부터 73년까지 유대 전쟁이 이어졌고, 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습니다.
  • 79년 베수비오 화산이 터져 폼페이가 묻혔습니다.
  • 동쪽 끝에서는 중국의 후한과 인도의 쿠샨 왕조가 실크로드 교역을 활성화하고 있었습니다.

기억해 두실 것이 있습니다. 이 세기가 시작될 때, 오늘 우리가 아는 세계 종교 가운데 기독교는 아직 없었고, 이슬람교는 육백 년 뒤의 일이었으며, 가톨릭과 동방정교회라는 이름도, 개신교라는 이름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있었던 것은 유대교와 불교, 그리고 도시마다 다른 수많은 신들이었습니다.


2. 예루살렘 — 하나가 아니었던 유대교

1세기의 유대교를 하나의 종교로 그리면 이 세기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 세력이 있었습니다. 율법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연구하고 구전 전승을 중시한 바리새 계열이 있었습니다. 성전 체제에 동의하지 않고 광야로 물러난 공동체가 있었고, 로마 지배를 무력으로 끝내려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국 곳곳에는 그리스어로 성경을 읽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헤롯이 크게 다시 지은 성전은 당대 세계에서 손꼽히는 규모였습니다. 그러나 그 화려함이 곧 안정을 뜻하지는 않았습니다. 세금은 무거웠고, 총독의 통치는 자주 거칠었습니다. 이 눌림 속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시리라는 기대가 여러 형태로 자랐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기대조차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왕적인 인물을 기다린 이들이 있었고, 제사장적인 인물을, 예언자적인 인물을 기다린 이들이 있었습니다. '1세기 유대인은 모두 같은 메시아를 기다렸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한 종교 안의 다양성을 뭉뚱그리게 됩니다.


3. 갈릴리에서 시작된 운동

한 사람의 처형

기원전 4년 무렵, 헤롯 대왕이 죽기 직전에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것은 복음서의 서술을 바탕으로 학계가 추정한 연대입니다.

그로부터 서른 해 남짓 뒤, 유월절 순례로 붐비던 예루살렘에서 갈릴리 출신의 한 교사가 성전 뜰에서 소동을 일으킨 뒤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유대 지도층에게 넘겨졌다가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인도되었고, 십자가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십자가형은 로마가 반란자와 노예에게 쓰던 처형 방식이었습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당국이 그를 어떤 존재로 취급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를 구분해 말해야 합니다.

확인된 사실

예수라는 인물이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형을 당했다는 것은 역사학계가 매우 높은 확실성으로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로마의 사가 타키투스가 《연대기》 15권에서 이를 언급하고, 유대의 사가 요세푸스도 예수를 언급합니다. 다만 처형 연도가 30년인지 33년인지, 재판이 정확히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자료마다 서술이 달라 논쟁 중입니다.

사료를 조심해서 쓸 것

요세푸스의 이른바 「플라비우스 증언」(《유대 고대사》 18권)은 후대 기독교인의 가필이 섞였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핵심만 진본으로 보는 견해가 다수이고, 통째로 후대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같은 책 20권의 야고보 관련 언급이 사료로서 더 안전합니다. 「타키투스와 요세푸스가 증언한다」고 뭉뚱그리면 증거를 실제보다 세게 말하는 것이 됩니다.

종교 전통의 고백

기독교는 이 죽음과 뒤이은 부활 고백을 구원의 중심 사건으로 믿습니다. 유대교는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으며, 이 사건을 로마 지배기의 여러 처형 가운데 하나로 봅니다. 후대에 등장하는 이슬람교는 예수를 예언자로 존중하되 그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고 서술합니다. 이것들은 각 전통의 신앙 고백이지 역사 기술이 아닙니다.

반드시 덧붙여야 할 것

후대에 이 사건의 책임을 유대인 전체에게 돌리는 서술이 나왔고, 그것이 오랜 세월 반유대주의의 근거로 오용되었습니다. 오늘날 역사학계도, 주요 교단의 공식 입장도 그런 집단 책임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다

처형 이후 제자 공동체는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습니다. 30년대의 예루살렘 공동체는 회당에서 예배했고, 성전에 올라갔으며, 유대교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유대교를 떠났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 밖에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유대교 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문장은 두 종교의 관계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4. 갈림길 — 49년, 예루살렘

운동이 도시로 퍼지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들에게 할례를 요구할 것인가. 음식 규정을 지키게 할 것인가. 이것은 사소한 관습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유대교의 정체성을 이루는 표지를 새 신자에게 요구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49년 무렵, 예루살렘의 지도자들과 안디옥에서 온 대표들이 모여 이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결론은 이방인 신자에게 할례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결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당시에 다 알았을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이것이 결정적인 갈림길이었습니다. 이 결정으로 이 운동은 유대교의 민족적 경계를 넘어 퍼질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유대교와 다른 무엇이 되어 갔습니다.

유대교의 자리에서 보면, 이 지점은 율법 준수의 경계를 넘어선 순간이고, 이 운동이 유대교 밖으로 나간 지점입니다. 기독교의 자리에서 보면,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열린 사건입니다. 같은 결정을 두 전통이 이렇게 다르게 기억합니다.

학문적 논쟁

이 회의에 대한 사도행전의 서술과 갈라디아서의 서술이 서로 달라, 두 기록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는 오랜 논쟁거리입니다.

도시에서 도시로

40년대부터 60년대까지, 바울이라는 사람이 소아시아와 그리스와 로마를 오가며 도시마다 공동체를 세우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의 생몰연도(5년경~65년경)는 서신과 사도행전에서 역산한 추정이며, 로마에서의 순교는 2세기 이후 전승에 근거합니다.

그가 보낸 편지들은 신약성서에서 가장 이른 문헌층에 속합니다. 복음서보다 먼저 쓰인 글입니다. 그 편지들은 신학 논문이 아니라 실제 문제를 다룬 편지였습니다. 누가 함께 식사할 수 있는가, 갈등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죽은 이들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물음들입니다.

최근 연구가 강조하는 것

바울은 평생 자신을 유대인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는 유대교를 떠난 사람이 아니라, 유대교의 하나님이 이제 이방인까지 부르셨다고 믿은 사람이었습니다.

64년, 로마에 큰 불이 났습니다. 타키투스는 네로가 그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려 처벌했다고 전합니다. 다만 기억할 것은, 이 시기의 박해가 제국 전체의 조직적 정책이 아니라 국지적이고 산발적이었다는 점입니다. 제국 차원의 조직적 박해는 두 세기 가까이 뒤인 250년의 일입니다.


5. 70년 — 불타는 성전

66년, 유대 지방에서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원인은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무거운 세금이 있었고, 총독의 실정이 있었으며, 유대 사회 내부의 세력 다툼이 있었고, 하나님이 개입하시리라는 종말론적 기대가 있었습니다. 전쟁의 원인을 종교 하나로 단순화하면 이 사건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70년,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했습니다. 성전이 불탔습니다. 마사다가 떨어지면서 전쟁이 끝났습니다.

학문적 해석

마사다 함락 연도는 73년과 74년이 맞섭니다. 총독 플라비우스 실바의 부임 시기를 근거로 74년으로 보는 견해가 1990년대 이후 힘을 얻었습니다. 이 책은 어느 한쪽을 확정으로 적지 않습니다.

로마에는 이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문이 세워졌습니다. 사건에서 11년쯤 지난 81년경, 티투스가 죽은 뒤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 부조에는 병사들이 일곱 갈래 촛대를 메고 가는 행렬이 새겨져 있습니다. 성전에 있던 메노라의 모습을 전하는 몇 안 되는 당대에 가까운 자료이자, 동시에 승리자 쪽이 남긴 기록입니다. 우리는 이 부조를 두 방향에서 읽어야 합니다.

사료를 읽는 법

주된 사료인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유대 봉기의 지휘관이었다가 로마에 항복한 사람입니다. 동족에게는 배신자였고, 로마에서는 후원을 받는 저술가였습니다. 1세기 유대 역사에서 그만큼 상세한 기록은 없지만, 그의 처지를 감안하지 않고 읽으면 안 됩니다.

성전 파괴는 유대교에 무엇을 뜻했을까요. 제사가 끊겼습니다. 순례가 끊겼습니다. 제사장 제도가 사실상 기능을 멈췄습니다. 종교 생활의 중심축 하나가 통째로 사라진 것입니다.


6. 야브네 — 재의 자리에서

전쟁이 끝난 뒤,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야브네라는 작은 도시에 학자들이 모였습니다.

전승은 요하난 벤 자카이라는 인물이 그 중심에 있었다고 전합니다. 그는 제사를 드릴 성전이 없어도 자비의 행위와 토라 연구로 신앙을 이어갈 수 있다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야브네에서 율법 해석과 절기·기도의 규정이 정리되었습니다. 회당이 예배와 교육과 공동체 생활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랍비 유대교의 기틀이 여기서 마련되었습니다.

바로잡을 것

'야브네 회의에서 유대교 정경이 확정되었다'는 오래된 설명은 현재 학계에서 대체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정경 형성은 한 번의 회의가 아니라 훨씬 긴 과정으로 봅니다.

같은 시기,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무리와의 거리도 벌어졌습니다. 양쪽 모두 성전이 사라진 세계에서 자기 정체성을 다시 정의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서로를 다른 것으로 규정하게 되었습니다.

바로잡을 것

야브네에서 기독교인을 회당에서 몰아내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는 오래된 설명이 있습니다. 근거가 약하다는 것이 오늘날의 견해입니다. 분리는 한 번의 결정이 아니라 지역마다 다른 속도로 진행된 과정이었습니다.

한편 70년에서 100년 사이에, 예수의 활동과 죽음과 부활 고백을 담은 네 편의 이야기 — 마르코(마가)·마태오(마태)·루카(누가)·요한 복음서 — 가 지금 우리가 아는 형태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것은 문헌 내부의 증거와 인용 관계를 근거로 한 학계의 추정이며, 전통적 견해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7. 같은 세기, 동쪽에서는

여기서 시선을 동쪽으로 돌려야 합니다. 같은 세기에 지구 반대편에서도 종교사의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쿠샨 왕조의 후원 아래 간다라와 중앙아시아에서 불교가 번성했습니다. 이 무렵 불상을 만드는 관습이 자리 잡았고, 대승 계열의 경전이 편찬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상인과 승려를 따라 불교가 중국으로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전래 시점에 대해서는 전승과 학계의 추정이 다릅니다.

종교 전통의 주장

중국 전통은 67년에 낙양 백마사가 세워졌다고 전합니다. 불교 전래의 시작을 알리는 이야기입니다.

학문적 해석

학계는 이 기사를 후대에 정리된 전승으로 보고, 실제 전래는 1세기 후반에서 2세기에 걸친 점진적 과정으로 봅니다. 어느 한쪽을 확정으로 말하지 않는 것이 정직한 서술입니다.

세 종교는 이 세기에 서로 만나지 않았습니다. 로마와 한나라를 잇는 교역로는 이어져 있었지만,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와 불교가 접촉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들을 한 장에 놓고 보는 것은 비교를 위한 배치이지, 영향 관계가 아닙니다.

유대교초기 기독교불교
중심 무대예루살렘·디아스포라지중해 도시들인도 서북부·중앙아시아·중국 서역
이 세기의 큰 사건성전 파괴(70년)이방인 선교와 복음서 형성중국 전래의 시작
공동체 형태성전 → 회당가정 교회와 도시 공동체승원과 재가 후원
국가와의 관계로마의 지배와 전쟁국지적 박해쿠샨 왕조의 후원

같은 세기에, 서로 만나지 않은 채, 각자의 전환점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8. 이 세기를 닫으며

1세기가 끝날 무렵의 풍경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성전은 없습니다. 유대교는 회당과 율법 연구를 중심으로 다시 서는 중입니다.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공동체는 지중해 여러 도시에 흩어져 있고, 이제 스스로를 유대교와 다른 무엇으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두 공동체의 분리는 한 사건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친 과정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교회에는 아직 교파가 없었습니다. 지역마다 감독과 장로가 공동체를 이끌었고, 신약 27권의 목록은 확정되지 않았으며, 공동체 사이의 편지 왕래가 통일성을 유지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교회를 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나 개신교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시대착오입니다. 그 이름들은 각각 수백 년, 천오백 년 뒤에 생겨납니다.

그리고 동쪽에서는 불교가 실크로드를 따라 동아시아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세기가 남긴 다섯 문장으로 장을 닫겠습니다.

  1. 기독교는 유대교 밖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유대교 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2. 이방인 신자에게 율법을 요구하지 않기로 한 결정이 두 종교를 가른 큰 갈림길이었습니다.
  3. 70년 성전 파괴는 유대교에는 랍비 유대교로의 재편을, 기독교에는 독자적 정체성 형성을 앞당겼습니다.
  4. 1세기의 박해는 제국 차원의 조직적 정책이 아니라 국지적이고 산발적이었습니다.
  5. 불교는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으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세 종교는 아직 서로 만나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볼 질문

  • 예수 운동이 유대교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두 종교의 관계를 어떻게 다시 볼 수 있게 할까요?
  • 성전이 사라진 뒤 유대교와 기독교가 각각 택한 길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달랐을까요?
  • 제국의 도로와 공용어가 없었다면 초기 기독교의 확산은 어떻게 달랐을까요?

이 장에서 쓴 자료

문헌

  • 바울 서신 (50년대~60년대, 코이네 그리스어) — 신약성서에서 가장 이른 문헌층
  • 복음서 (70~100년경 추정, 코이네 그리스어) — 전승상의 저자명이 붙어 있으나 실제 저자는 논쟁 중
  •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 (75~79년경, 그리스어) — 저자의 처지를 감안해 읽어야 하는 사료. 《유대 고대사》의 예수 관련 대목은 가필 논쟁이 있으므로 그대로 인용하지 않는다

당대 자료 사진

  • 티투스 개선문의 부조 (로마, 실제 유물 · 81년경 건립) — 70년 함락 뒤 성전 기물을 옮기는 행렬
  • 개선문 부조의 메노라 부분 (로마, 실제 유물 · 81년경 건립) — 성전 메노라의 모습을 전하는, 당대에 가까운 자료

참고

  • 타키투스 《연대기》,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유대 고대사》 (1차·근접 사료)
  • 신약성서 본문 (종교 전통 문헌이자 1세기 자료)
  • 초기 기독교와 유대교 분화에 관한 표준 연구서

「종교사 한눈」이 1세기에 모아 둔 자료 — 연대표 11항목, 사건 4건, 인물 4명, 문헌 3종, 지도 1점, 자료 사진 2장 — 를 바탕으로 작성한 원고입니다.

검수 이력

  • 1차 · 사실 확인 — 마사다 함락 연도를 73/74년 병기로 고침. 요세푸스 「플라비우스 증언」의 가필 문제를 명시. 티투스 개선문 건립 시기(81년경)를 밝힘. 「이백 년 뒤」를 「두 세기 가까이 뒤인 250년」으로 바로잡음. 바울 생몰이 추정임을 표시. 백마사 67년 전승을 자료에 등록.
  • 2차 · 관점 검토 — 복음서 이름을 마르코(마가)·마태오(마태)·루카(누가)로 병기. 야브네의 「기독교인 축출설」이 근거가 약하다는 점을 추가. 1세기 사건에 붙은 이슬람 관점이 후대 전통의 서술임을 명시.
  • 3차 · 저작권 확인 — 자료 사진 2장의 이용 조건·소장처·원본 링크 확인(CC BY 2.0 / Public domain).
  • 남은 것 · 외부 검토 — 이 원고는 쓴 쪽과 검수한 쪽이 같습니다. 출판 전 제3자의 확인이 필요합니다.
여기까지가 본문입니다. 아래는 이 장의 자료입니다.

1. 세기를 여는 한 장면

예루살렘 성전 뜰은 순례자로 붐볐다. 로마 총독은 절기마다 병력을 늘렸고, 사람들은 언제 하나님이 개입하실지 이야기했다. 갈릴리에서 시작된 한 무리의 운동이 이 시대의 기다림 한가운데를 지나갔다. 그리고 70년, 성전이 불탔다. 그 재 위에서 유대교와 기독교는 서로 다른 길로 갈라서기 시작한다.

2. 1세기의 세계사 배경

로마 제국이 지중해 세계를 하나의 정치·교통 질서로 묶었다. 이 ‘로마의 평화’ 아래 도로와 항로, 공용어인 그리스어가 사람과 사상을 빠르게 실어 날랐다. 동쪽 끝에서는 후한과 쿠샨 왕조가 실크로드를 이었다.

  • 아우구스투스 이후 로마 제정이 안정기에 들어섰다.
  • 그리스어(코이네)가 동지중해의 공용어였고, 라틴어는 서방의 행정 언어였다.
  • 66~73년 유대 전쟁, 70년 예루살렘 함락과 성전 파괴.
  •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폼페이가 묻혔다.
  • 중국 후한과 인도 쿠샨 왕조가 실크로드 교역을 활성화했다.

3. 한눈에 보는 연대표

연도일어난 일관련 종교
기원전 4년경예수의 출생 시기로 학계가 추정하는 무렵(헤롯 대왕 사망 직전). (학문적 해석)기독교
30년경 또는 33년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형을 당한다.기독교, 유대
30년대예루살렘의 초기 공동체가 형성되고 유대교 회당을 무대로 활동한다.기독교
40년대~60년대바울의 선교 여행과 서신 활동.기독교
49년경예루살렘 회의 — 이방인 신자에게 유대교 관습을 요구할 것인가를 다룬다.기독교, 유대
64년로마 대화재 후 네로가 그리스도인을 처벌했다고 타키투스가 전한다.기독교
66~73/74년유대 전쟁. 70년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되고, 73년 또는 74년에 마사다가 함락된다.유대
70년 이후야브네(얌니아)를 중심으로 랍비 전통이 유대교를 재편한다.유대
81년경로마에 티투스 개선문이 세워진다. 성전 기물을 옮기는 행렬이 새겨져 있다.유대
70~100년경마르코(마가)·마태오(마태)·루카(누가)·요한 복음서가 지금의 형태로 자리 잡는다. (학문적 해석)기독교
67년중국 전통은 이 해에 낙양 백마사가 세워졌다고 전한다. 불교 전래의 시작을 알리는 이야기다. (전통의 주장)불교
1세기 후반실크로드를 따라 불교가 중국에 전해지기 시작한다. (학문적 해석)불교

4. 유대교

성전을 잃고 랍비 유대교로 다시 서다

1세기 유대교는 하나가 아니었다. 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사장 세력, 율법 해석을 중시한 바리새, 광야 공동체, 무장 저항 세력, 그리스어를 쓰는 디아스포라가 함께 있었다. 70년 성전이 파괴되면서 제사 중심의 종교 생활이 끝났고, 회당과 율법 연구를 중심으로 한 랍비 유대교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 성전 파괴로 제사·순례·제사장 제도가 사실상 중단되었다.
  • 야브네의 학자들이 율법 해석 전통을 이어 유대교를 재편했다.
  • 이 재편 과정에서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무리와의 거리도 벌어졌다.
  •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유대교 존속의 기반이 되었다.

5. 기독교

유대교 안의 운동에서 제국의 종교 공동체로

예수를 따르는 무리는 처음에 유대교 안의 한 운동이었다. 그들은 회당에서 예배하고 성전에 올라갔으며 유대교 성경을 읽었다. 그러나 이방인 신자가 늘고 그들에게 할례와 음식 규정을 요구하지 않기로 하면서, 이 운동은 유대교와 다른 경계를 갖게 되었다. 1세기 말이 되면 두 공동체는 서로 다른 정체성으로 갈라지기 시작한다.

  • 예루살렘·안디옥·에페소·로마 등 도시 공동체가 그물처럼 이어졌다.
  • 바울의 서신은 신약성서에서 가장 이른 문헌층에 속한다.
  • 이방인 선교의 조건을 정한 예루살렘 회의가 분기점이 되었다.
  • 박해는 이 시기 제국 전체의 정책이 아니라 국지적·산발적이었다.

6. 초기 기독교

아직 교파가 없던 교회

이 시기 교회를 가톨릭·정교회·개신교로 나눠 부르는 것은 시대착오다. 지역마다 장로와 감독이 공동체를 이끌었고, 예배는 유대교 회당 예배와 공동 식사에서 형태를 얻었다. 후대 전통과의 연속성은 따로 설명해야 할 문제이지, 이 시대의 사실이 아니다.

  • 감독·장로·집사 같은 직분이 지역마다 다른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 정경(신약 27권) 목록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 공동체 사이의 편지 왕래가 통일성을 유지하는 방식이었다.

7. 가톨릭

이 시기 교회는 아직 동방·서방으로 나뉘지 않았다. ‘초기 기독교’ 항목에서 함께 다룬다.

8. 동방정교회

이 시기 교회는 아직 동방·서방으로 나뉘지 않았다. ‘초기 기독교’ 항목에서 함께 다룬다.

9. 개신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16세기 종교개혁 과정에서 여러 갈래로 형성되었다.

10. 이슬람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무함마드의 활동과 함께 7세기 아라비아에서 시작되었다. 622년 히즈라를 이슬람력 원년으로 삼는다.

11. 불교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쿠샨 왕조의 후원 아래 간다라·중앙아시아에서 불교가 번성했고, 상인과 승려를 따라 중국으로 전해지기 시작했다. 불상을 만드는 관습이 이 무렵 자리 잡았고, 대승 경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 중국 전래 시점은 전승(67년 백마사)과 학계 추정이 다르다.
  • 간다라·마투라에서 불상 조각 양식이 발전했다.
  • 대승 계열 경전이 편찬되기 시작했다.

12. 종교 간 관계

유대교 ↔ 기독교 — 공통 기원과 공유 전통

초기 예수 운동은 유대교 성경, 회당 예배, 절기, 메시아 기대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두 종교는 남남이 아니라 같은 뿌리에서 갈라진 가지다.

유대교의 자리에서: 유대교 전통에서 이 운동은 여러 유대교 갈래 가운데 하나로 시작되었다가 경계를 넘어간 것으로 이해된다.

기독교의 자리에서: 기독교 전통에서는 예수 안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이 성취되었다고 고백한다.

유대교 ↔ 기독교 — 교리적 차이와 논쟁

예수를 메시아로 볼 것인가, 이방인 신자에게 율법을 요구할 것인가가 핵심 쟁점이었다. 성전 파괴 이후 양쪽 모두 자기 정체성을 다시 정의하면서 거리가 벌어졌다.

기독교 ↔ 불교 — 문화·학문·예술 교류

두 종교는 이 시기에 만나지 않았다. 다만 로마와 한나라를 잇는 교역로가 이어져 있었다는 점은 기억해 둘 만하다.

13. 이 세기의 결정적 사건

예수의 십자가형 (30년)

로마의 지배 아래 유월절 순례로 붐비던 예루살렘에서, 갈릴리 출신 교사 예수가 성전 뜰에서 소동을 일으킨 뒤 체포되었다.

원인

  • 성전 체제와의 충돌
  • 절기 기간 로마 당국의 치안 우려
  • 메시아 기대가 정치적 불안으로 읽힐 수 있었던 상황

전개

예수는 유대 지도층에게 넘겨졌다가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인도되어 십자가형을 선고받았다. 십자가형은 로마가 반란자와 노예에게 쓰던 처형 방식이다.

결과

  • 제자 공동체의 흩어짐과 재결집
  •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초기 공동체의 형성

장기적 영향

  • 이 사건의 의미를 두고 형성된 신앙 고백이 기독교의 중심이 되었다.
  • 후대에 이 사건의 책임을 유대인 전체에 돌리는 서술이 반유대주의의 근거로 오용되었다.
당사자별 관점
자리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기독교기독교는 이 죽음과 뒤이은 부활 고백을 구원의 중심 사건으로 믿는다. (종교 전통의 주장)
유대교유대교는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으며, 이 사건을 로마 지배기의 여러 처형 가운데 하나로 본다.
이슬람교7세기 이후 이슬람 전통은 예수를 예언자로 존중하되, 쿠란에 따라 그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고 서술한다. (이 시대에는 아직 이슬람교가 없었다. 후대 전통의 서술이다.)
역사학계역사학계는 예수가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형을 당했다는 사실 자체를 매우 높은 확실성으로 인정한다. 다만 근거로 드는 사료를 그대로 받으면 안 된다 — 타키투스 《연대기》 15권의 언급은 대체로 진본으로 보지만,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8권의 이른바 「플라비우스 증언」은 후대 기독교인의 가필이 섞였다는 것이 정설이다(핵심만 진본으로 보는 견해가 다수). 같은 책 20권의 야고보 관련 언급이 사료로서 더 안전하다.

학계의 평가

처형 연도(30년 또는 33년), 재판 절차, 유대 지도층의 관여 정도가 학계의 주요 논쟁점이다. 사료 문제로는 요세푸스 「플라비우스 증언」의 가필 범위가 오래된 쟁점이다. 어느 서술도 후대의 집단 책임론을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것이 현대 학계와 주요 교단의 공식 입장이다.

예루살렘 회의 (49년)

이방인 신자가 늘면서 그들에게 할례와 음식 규정을 요구할 것인지가 공동체의 현안이 되었다.

원인

  • 이방인 신자의 급증
  • 유대교 정체성과 새 공동체 경계의 충돌

전개

예루살렘의 지도자들과 안디옥에서 온 대표들이 모여 논의하고 절충안을 정했다.

결과

  • 이방인 신자에게 할례를 요구하지 않기로 했다

장기적 영향

  • 기독교가 유대교의 민족적 경계를 넘어 확산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 장기적으로 두 종교가 갈라지는 결정적 분기점이 되었다
당사자별 관점
자리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기독교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열린 사건으로 기억한다.
유대교율법 준수의 경계를 넘어선 결정으로, 이 운동이 유대교 밖으로 나간 지점으로 본다.

학계의 평가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의 서술 차이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가 오랜 논쟁거리다.

유대 전쟁과 예루살렘 성전 파괴 (66년~74년)

무거운 세금, 총독의 실정, 종파 간 갈등이 겹쳐 유대 지방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원인

  • 로마 통치에 대한 불만
  • 내부 세력 다툼
  • 종말론적 기대

전개

66년 봉기가 시작되어 70년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성전을 불태웠다. 마사다 함락으로 전쟁이 끝났다.

결과

  • 성전 파괴와 제사 제도의 중단
  • 예루살렘의 파괴와 대규모 인명 손실

장기적 영향

  • 회당과 율법 연구 중심의 랍비 유대교가 자리 잡았다
  • 기독교 공동체가 유대교와 다른 길을 걷는 속도가 빨라졌다
당사자별 관점
자리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유대교성전을 잃은 재앙이자, 성전 없는 신앙을 세워 낸 전환점으로 기억한다.
기독교초기 기독교 문헌은 이 사건을 신학적으로 해석했으나, 그 해석이 유대인에 대한 정죄로 쓰여서는 안 된다.
역사학계요세푸스의 기록이 주요 사료지만 그의 처지(로마 측에 항복한 유대 장군)를 감안해 읽어야 한다.

학계의 평가

마사다 함락 연도는 73년과 74년이 맞선다. 총독 플라비우스 실바의 부임 시기를 근거로 74년으로 보는 견해가 1990년대 이후 힘을 얻었다. 어느 한쪽을 확정으로 적지 않는다.

야브네의 재편 (70년~132년)

성전이 사라진 뒤 유대교는 제사 없이 신앙을 이어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전개

야브네에 모인 학자들이 율법 해석과 절기·기도 규정을 정리하며 유대교의 새로운 중심을 만들었다.

결과

  • 회당과 율법 연구가 종교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장기적 영향

  •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랍비 유대교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당사자별 관점
자리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유대교성전을 잃은 자리에서 유대교가 다시 선 사건으로 기억한다. 요하난 벤 자카이의 이야기는 랍비 문헌이 전하는 전승이다.
기독교같은 시기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무리와의 거리가 벌어졌다. 다만 이 재편을 기독교인 배척을 위한 조치로 단정하는 오래된 설명은 근거가 약하다.
역사학계"야브네 회의"라는 단일 사건이 실제로 있었는지부터 논쟁 대상이다. 한 번의 회의가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친 과정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학계의 평가

‘야브네 회의에서 정경을 확정했다’는 오래된 설명은 현재 학계에서 대체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점진적 과정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14. 주요 인물

인물생몰활동후대의 평가
예수기원전 4년경 ~ 30년경갈릴리와 유대에서 가르치고 병자를 고쳤다고 전한다 / 제자 공동체를 모았다기독교는 그를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다(종교 전통의 주장). 유대교는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슬람교는 그를 위대한 예언자로 존중한다. 역사학계는 그의 존재와 처형을 사실로 인정하며, 가르침의 재구성에는 여러 견해가 있다.
바울5년경(추정) ~ 65년경(전승)지중해 동부 도시에 공동체를 세웠다 / 여러 공동체에 편지를 보냈다기독교 신학의 방향을 정한 인물로 평가된다. 최근 연구는 그가 평생 자신을 유대인으로 이해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생몰연도는 서신과 사도행전에서 역산한 추정이며, 로마에서의 순교는 2세기 이후 전승에 근거한다.
요하난 벤 자카이1세기 초 ~ 1세기 후반성전 파괴 후 야브네에서 학문 공동체를 세웠다고 전한다성전 없는 유대교를 가능하게 한 인물로 기억된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37년경 ~ 100년경《유대 전쟁사》와 《유대 고대사》를 저술했다1세기 유대 역사의 가장 중요한 사료를 남긴 저술가로 평가된다. 그의 처지를 감안해 읽어야 한다.

15. 주요 문헌과 사상

문헌시기언어핵심 내용
바울 서신50년대~60년대코이네 그리스어지중해 여러 도시의 공동체에 보낸 편지들로, 신앙과 공동체 생활의 실제 문제를 다룬다.
복음서70~100년경(학계 추정)코이네 그리스어예수의 활동과 가르침, 죽음과 부활 고백을 담은 네 편의 이야기.
유대 전쟁사75~79년경그리스어유대 봉기와 예루살렘 함락의 경과를 상세히 기록했다.

16. 지도와 이동 경로

1세기 지중해와 초기 기독교 공동체 (1~100년)

도시 위치는 확실하지만 공동체의 규모와 경계는 알 수 없다.

지도에 표시된 곳
장소성격설명
예루살렘성지성전이 있던 곳. 70년 파괴.
안티오키아도시이방인 선교의 거점.
에페소도시
고린토도시
로마도시
알렉산드리아도시큰 디아스포라 유대인 공동체.
야브네수도원·학교성전 파괴 후 율법 연구의 중심.

경계 확실성: 대체로 확실

이동 경로
경로성격설명
바울의 선교 이동(개략)선교사도행전과 서신의 지명을 이은 개략 경로다. 실제 항로와 일정은 재구성된 것이다.

17. 사진과 유물로 보는 역사

일곱 갈래 촛대를 메고 가는 행렬을 새긴 부조
티투스 개선문의 부조 실제 유물·유적 · 81년경 건립 · 70년의 사건을 새김 70년 함락 뒤 성전 기물을 옮기는 장면. 사건 11년 뒤 티투스가 죽은 다음 세워진 개선문이므로, 당대에 가까운 자료이되 현장 기록은 아니다. 승리자 쪽이 남긴 것이다. 로마 · Anthony M. from Rome, Italy · CC BY 2.0
부조에서 촛대 부분을 크게 잡은 사진
개선문 부조의 메노라 부분 실제 유물·유적 · 81년경 건립 · 70년의 사건을 새김 성전에 있던 메노라의 모습을 전하는 몇 안 되는 당대 자료. 로마 · derivative work: Steerpike (talk) Arc_de_Triumph_copy.jpg: user: בית השלום · Public domain

18. 핵심 정리

  • 기독교는 유대교 밖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유대교 안에서 시작되었다.
  • 이방인 신자에게 율법을 요구하지 않기로 한 결정이 두 종교를 가른 큰 갈림길이었다.
  • 70년 성전 파괴는 유대교에는 랍비 유대교로의 재편을, 기독교에는 독자적 정체성 형성을 앞당겼다.
  • 1세기 박해는 제국 차원의 조직적 정책이 아니라 국지적이고 산발적이었다.
  • 불교는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세 종교는 아직 서로 만나지 않았다.

19. 비교표

1세기의 세 자리
유대교초기 기독교불교
중심 무대예루살렘·디아스포라지중해 도시들인도 서북부·중앙아시아·중국 서역
이 세기의 큰 사건성전 파괴(70년)이방인 선교와 복음서 형성중국 전래의 시작
공동체 형태성전 → 회당가정 교회와 도시 공동체승원과 재가 후원
국가와의 관계로마의 지배와 전쟁국지적 박해쿠샨 왕조의 후원

같은 세기에 서로 만나지 않은 채 각자의 전환점을 지나고 있었다.

20. 생각해 볼 질문

  1. 예수 운동이 유대교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두 종교의 관계를 어떻게 바꿔 볼 수 있게 할까?
  2. 성전이 사라진 뒤 유대교와 기독교가 각각 택한 길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달랐을까?
  3. 제국의 도로와 공용어가 없었다면 초기 기독교의 확산은 어떻게 달랐을까?

21. 확인 퀴즈

  1.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군에 의해 파괴된 해는?

    1. 30년
    2. 64년
    3. 70년
    4. 135년
  2. 1세기 기독교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 유대교와 무관한 새 종교로 시작했다
    2. 처음부터 가톨릭과 정교회로 나뉘어 있었다
    3. 유대교 안의 한 운동으로 시작해 점차 독자적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4. 로마 제국의 국교였다
  3. ‘복음서는 70~100년경 지금의 형태로 자리 잡았다’는 서술의 성격은?

    1. 1차 사료로 확정된 연도
    2. 학문적 해석(다수 학설)
    3. 종교 전통의 주장
    4. 근거 없는 추측
  4. 예루살렘 회의(49년경)가 종교사에서 중요한 이유는?

    1. 이방인 신자에게 유대교 관습을 요구하지 않기로 하여 기독교가 유대교 밖으로 넓어질 길이 열렸기 때문
    2. 성전을 재건하기로 했기 때문
    3. 신약 정경을 확정했기 때문
    4. 로마 황제를 개종시켰기 때문

정답 1) 3 · 2) 3 · 3) 2 · 4) 1

해설

1. 70년이다. 135년은 바르 코크바 항쟁의 진압, 64년은 로마 대화재다.

2. 동·서 교회 구분은 훨씬 후대의 일이고, 국교화는 4세기 말의 일이다.

3. 문헌 내부 증거와 인용 관계를 근거로 한 학계의 추정이다. 전통적 견해와 다를 수 있다.

4. 정경 확정과 국교화는 훨씬 후대의 일이다.

22. 주석과 참고문헌

  1. 타키투스 《연대기》,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 (1차·근접 사료)
  2. 신약성서 본문 (종교 전통 문헌이자 1세기 자료)
  3. 초기 기독교와 유대교 분화에 관한 표준 연구서

제2장 2세기의 세계 종교

101년~200년

두 공동체가 서로를 남으로 보기 시작하고, 각자 경계를 그린다.

읽는 글

제2장 2세기의 세계 종교

두 공동체가 서로를 남으로 보기 시작하고, 각자 경계를 긋습니다

101년 ~ 200년


여는 장면 — 들어갈 수 없는 도시

성전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봉기했고, 그 실패 뒤 예루살렘에는 유대인이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도시는 로마식 이름으로 다시 세워졌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제 스스로를 유대교와 다른 무엇으로 설명하기 시작했고, 무엇이 참된 가르침인지를 두고 자기들끼리도 다투었습니다.

이 세기는 두 공동체가 각각 자기 경계를 긋는 세기입니다.


1. 제국의 전성기

로마 제국은 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안토니누스 피우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 이어지는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인도에서는 쿠샨 왕조가 번성했고, 중국 후한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 2세기 초 로마 제국이 최대 판도에 이르렀습니다.
  • 132~135년 바르 코크바 항쟁과 그 진압.
  •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 왕이 불교를 후원했다고 전합니다.
  • 그리스 철학과 종교 사상이 뒤섞인 여러 사조가 제국에 퍼졌습니다.

2. 132~135년 — 마지막 봉기

70년 성전 파괴 이후에도 회복의 기대가 남아 있었습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정책이 갈등을 촉발했습니다.

예루살렘을 로마식 도시로 재건하려는 계획이 있었고, 할례 금지로 해석된 조치가 있었습니다.

시몬 바르 코크바가 이끄는 세력이 한때 넓은 지역을 장악했으나 3년 만에 진압되었습니다. 봉기 세력이 로마 화폐 위에 다시 새겨 만든 동전이 남아 있습니다. 히브리 글자와 성전 정면이 새겨진 그 동전에 성전 회복의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확인된 사실

진압 후 예루살렘은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재건되고 유대인의 출입이 금지되었습니다.

종교 전통의 주장

랍비 전통 안에서도 이 항쟁과 메시아 선언에 대한 평가가 엇갈렸습니다. 랍비 아키바가 바르 코크바를 지지했다고 전하는데, 그 평가는 랍비 문헌 안에서도 갈립니다.

학문적 해석

사료가 적어 규모와 경과의 세부는 추정에 의존합니다. 봉기의 직접적 계기가 도시 재건인지 할례 금지인지도 사료마다 다르게 전해집니다.

이 실패로 유대 지역의 정치적 회복 가능성은 사라졌습니다. 랍비들은 율법 해석과 교육을 통해 성전 없는 시대의 유대교를 세워 갔고, 그 결과가 다음 세기 초 미쉬나로 정리됩니다.

그리고 하나가 더 있습니다.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이들은 이 봉기에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메시아 선언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선택이 두 공동체의 분리를 굳혔습니다.


3. 무엇이 참된 가르침인가

여러 갈래의 가르침이 함께 존재하는 상황에서 교회는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배제할지 정해야 했습니다.

144년, 마르키온이 유대교 성경을 배제하고 축약된 목록만을 내세우자 로마 교회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확인된 사실

이 논쟁을 거치며 교회가 자기 문헌 목록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압력이 생겼습니다. 기독교가 유대교 성경을 계속 자기 경전으로 삼는다는 입장도 굳어졌습니다.

학문적 해석

마르키온이 정경을 '만들게 했다'는 설명은 단순화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목록 형성은 더 긴 과정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세 가지 장치가 자리 잡았습니다. 정경 목록, 신앙의 규범, 그리고 감독의 계승입니다. 리옹의 감독 이레네우스가 《이단 반박》에서 이 틀을 정리했습니다.

학문적 해석

이레네우스의 저작은 사라진 여러 갈래의 가르침을 알려 주는 자료이기도 합니다. 다만 반대편의 서술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동시에 변증가들은 로마 사회를 향해 기독교가 위험하지 않다고 설명했습니다. 유스티누스는 그리스 철학의 언어로 기독교를 설명했고, 모든 사람 안에 진리의 씨앗이 있다는 생각을 폈습니다. 그가 남긴 《트리폰과의 대화》는 두 종교가 갈라서는 시기의 논쟁을 보여 주지만, 유대교를 일방적으로 규정한 서술이라는 비판도 함께 받습니다.

박해는 여전히 국지적이었지만, 순교 기록이 공동체의 기억이 되었습니다.


4. 형상과 번역 — 동쪽에서

시리아의 두라 에우로포스에는 회당 하나가 통째로 남아 있습니다. 그 서쪽 벽 전체가 성경 장면을 그린 벽화로 덮여 있습니다.

반드시 짚을 것

이 회당은 이 장의 세기가 아니라 다음 세기의 것입니다. 벽화는 244/245년에 그려졌고, 256년 도시가 포위될 때 성벽을 보강하느라 흙에 묻히면서 그대로 보존되었습니다. 2세기의 회당이 어땠는지를 직접 보여 주는 자료는 아니지만, 그 흐름이 어디로 갔는지를 가장 가까이서 보여 주는 자료여서 여기에 놓습니다.

형상을 쓰지 않는다는 통념과 달리, 3세기 중반의 한 회당은 성경 장면으로 가득했습니다. 하나의 유적이 통념 하나를 흔듭니다.

한편 간다라에서는 그리스식 옷주름이 표현된 불상이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헬레니즘 조각 양식과 불교가 만난 자리입니다. 카니슈카 왕의 후원 아래 간다라 불교가 번성하고 대승 사상이 확산되었습니다.

학문적 해석

카니슈카의 즉위 연도조차 학계에서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불교 전통은 그를 아쇼카에 견주는 후원자로 기립니다.

그리고 148년경, 안세고 같은 역경승들이 중국 낙양에서 불경을 한문으로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낯선 개념을 옮기느라 도가 용어를 빌려 쓰기도 했습니다.

학문적 해석

초기 한역은 원전과 대조하면 의역과 축약이 많습니다. 번역사 연구의 핵심 자료입니다.

동아시아 불교의 언어와 개념 틀이 이 번역들에서 출발합니다.


5. 각자 경계를 긋다

유대교기독교불교
이 세기의 큰일바르 코크바 항쟁과 그 실패정경·신앙 규범·감독 계승의 정리한문 번역의 시작
무엇을 정했나구전 율법의 정리무엇을 경전으로 받을 것인가낯선 개념을 어떤 말로 옮길 것인가
국가와의 관계정치적 회복의 길이 막힘국지적 박해가 이어짐왕실·귀족의 후원

세 전통이 모두 '무엇이 우리 것인가'를 정하고 있었습니다. 유대교는 구전 율법을, 기독교는 정경을, 불교는 번역어를 정했습니다.


이 장이 남긴 네 문장

  1. 바르 코크바 항쟁의 실패로 유대교는 정치적 회복이 아닌 학문과 교육의 길을 택했습니다.
  2. 기독교는 정경·신앙 규범·감독 계승이라는 장치로 내부 경계를 정리했습니다.
  3. 두 종교의 분리는 한 사건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친 과정이었습니다.
  4. 불교는 중국어라는 완전히 다른 언어권으로 건너가는 번역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생각해 볼 질문

  • '무엇이 참된 가르침인가'를 정하는 일에는 어떤 힘이 작용할까요?
  • 번역은 왜 종교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될까요?
  • 두 공동체가 갈라서는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서술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이 장에서 쓴 자료

문헌

  • 디다케 (1세기 말~2세기 초, 그리스어)
  • 이레네우스 《이단 반박》 (180년경, 그리스어)

자료 사진

  • 두라 에우로포스 회당 벽화 (실제 유물 · 244/245년, 다음 세기의 것) · 간다라 불상 (실제 유물 · 2~3세기) · 바르 코크바 항쟁기의 화폐 (실제 유물 · 132~135년)

참고

  • 카시우스 디오 등 로마 사가의 서술
  • 바르 코크바 문서(무라바앗·나할 헤베르)
  • 초기 한역 불전 연구

「종교사 한눈」이 모아 둔 자료로 작성한 원고입니다.

검수 이력

  • 1차 · 사실 확인 — 두라 에우로포스 회당 벽화를 「이 시기」의 자료처럼 읽히게 둔 것을 고침. 244/245년에 그려져 256년 성벽 보강 때 묻힌 다음 세기의 유적임을 본문에 밝히고, 그럼에도 여기에 놓는 까닭을 적음.
  • 2차 · 관점 검토 — 「형상을 쓰지 않는다는 통념」을 흔드는 근거의 시점을 3세기 중반으로 특정해, 2세기 회당을 직접 보여 주는 자료인 것처럼 읽히지 않게 함.
  • 3차 · 저작권 확인 — 자료 사진 3장의 이용 조건과 제작 시기 확인.
  • 남은 것 · 외부 검토 — 쓴 쪽과 검수한 쪽이 같습니다. 출판 전 제3자의 확인이 필요합니다.
여기까지가 본문입니다. 아래는 이 장의 자료입니다.

1. 세기를 여는 한 장면

성전은 없었다. 유대인들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봉기했고, 그 실패 뒤 예루살렘에는 유대인이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이제 스스로를 유대교와 다른 무엇으로 설명하기 시작했고, 무엇이 참된 가르침인지를 두고 자기들끼리도 다투었다.

2. 2세기의 세계사 배경

로마 제국은 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안토니누스 피우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 이어지는 전성기를 누렸다. 인도에서는 쿠샨 왕조가 번성했고, 중국 후한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 2세기 초 로마 제국이 최대 판도에 이르렀다.
  • 132~135년 바르 코크바 항쟁과 그 진압.
  •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 왕이 불교를 후원했다고 전한다.
  • 그리스 철학과 종교 사상이 뒤섞인 여러 사조가 제국에 퍼졌다.

3. 한눈에 보는 연대표

연도일어난 일관련 종교
132~135년바르 코크바 항쟁. 진압 후 예루살렘은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재건되고 유대인의 출입이 금지된다.유대
2세기 중반미쉬나로 이어질 구전 율법의 정리 작업이 진행된다.유대
2세기유스티누스 등 변증가들이 그리스 철학의 언어로 기독교를 설명한다.기독교
144년마르키온이 유대교 성경을 배제한 목록을 내세우고 배척된다. 정경 논의가 촉발된다.기독교
2세기 후반이레네우스가 ‘신앙의 규범’과 사도적 계승을 내세워 여러 가르침을 정리한다.기독교
2세기카니슈카 왕의 후원 아래 간다라 불교가 번성하고 대승 사상이 확산된다.불교
148년경~안세고 등 역경승이 중국에서 불경을 한문으로 옮기기 시작한다.불교

4. 유대교

율법 해석이 신앙의 중심이 되다

바르 코크바 항쟁의 실패로 유대 지역의 정치적 회복 가능성은 사라졌다. 랍비들은 율법 해석과 교육을 통해 성전 없는 시대의 유대교를 세워 갔고, 그 결과가 다음 세기 초 미쉬나로 정리된다.

  • 예루살렘 출입 금지로 유대교의 중심이 갈릴리와 디아스포라로 옮겨졌다.
  • 구전 율법의 체계적 정리가 진행되었다.
  • 회당이 예배·교육·공동체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5. 기독교

무엇이 참된 가르침인가

여러 갈래의 가르침이 함께 존재하는 상황에서 교회는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배제할지 정해야 했다. 정경 목록, 신앙 규범, 감독의 계승이라는 세 가지 장치가 이 과정에서 자리 잡았다. 동시에 변증가들은 로마 사회를 향해 기독교가 위험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 마르키온과 여러 영지주의 계열에 대한 논쟁이 정경 논의를 앞당겼다.
  • 박해는 여전히 국지적이었지만 순교 기록이 공동체의 기억이 되었다.
  • 그리스 철학의 개념이 신학 언어로 쓰이기 시작했다.

6. 초기 기독교

감독을 중심으로 한 지역 교회

각 도시의 감독이 공동체의 가르침과 예배를 책임지는 형태가 자리 잡았다. 로마·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 같은 큰 도시의 교회가 자연스럽게 영향력을 갖게 되었지만, 아직 하나의 중앙 조직은 없었다.

7. 가톨릭

이 시기 교회는 아직 동방·서방으로 나뉘지 않았다. ‘초기 기독교’ 항목에서 함께 다룬다.

8. 동방정교회

이 시기 교회는 아직 동방·서방으로 나뉘지 않았다. ‘초기 기독교’ 항목에서 함께 다룬다.

9. 개신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16세기 종교개혁 과정에서 여러 갈래로 형성되었다.

10. 이슬람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무함마드의 활동과 함께 7세기 아라비아에서 시작되었다. 622년 히즈라를 이슬람력 원년으로 삼는다.

11. 불교

한문으로 옮겨지기 시작한 경전

중앙아시아 출신 승려들이 중국에 와서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번역은 낯선 개념을 중국의 말로 바꾸는 일이었고, 이 과정에서 도가 용어를 빌려 쓰기도 했다.

  • 안세고·지루가참 등이 초기 한역 작업을 이끌었다.
  • 간다라 불상 양식이 정착했다.

12. 종교 간 관계

유대교 ↔ 기독교 — 교리적 차이와 논쟁

두 공동체는 이제 서로를 다른 종교로 여기며 논쟁했다. 기독교 변증가들은 유대교 성경을 자기 방식으로 읽었고, 유대교 쪽은 그 해석을 인정하지 않았다.

유대교의 자리에서: 유대교 쪽에서는 성경 해석의 권위가 랍비 전통에 있다고 보았다.

기독교의 자리에서: 기독교 쪽에서는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를 향한다고 읽었다.

기독교 ↔ 불교 — 문화·학문·예술 교류

직접 접촉의 증거는 없다. 다만 두 종교 모두 이 세기에 ‘번역’이라는 같은 과제를 만났다는 점은 비교해 볼 만하다.

13. 이 세기의 결정적 사건

바르 코크바 항쟁 (132년~135년)

70년 성전 파괴 이후에도 회복의 기대가 남아 있었고,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정책이 갈등을 촉발했다.

원인

  • 예루살렘을 로마식 도시로 재건하려는 계획
  • 할례 금지로 해석된 조치
  • 성전 회복에 대한 기대

전개

시몬 바르 코크바가 이끄는 세력이 한때 넓은 지역을 장악했으나 3년 만에 진압되었다.

결과

  • 막대한 인명 피해와 파괴
  • 유대인의 예루살렘 출입이 금지되고 도시가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재건되었다

장기적 영향

  • 유대 지역의 정치적 회복 가능성이 사라지고 학문과 율법 해석이 중심이 되었다
  • 메시아 선언을 받아들이지 않은 예수 추종 무리와의 거리가 더 벌어졌다
당사자별 관점
자리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유대교랍비 전통 안에서도 이 항쟁과 메시아 선언에 대한 평가가 엇갈렸다.
기독교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이들은 이 봉기에 함께하지 않았고, 그것이 분리를 굳혔다.
역사학계사료가 적어 규모와 경과의 세부는 추정에 의존한다. 최근에는 문서 발견으로 재구성이 진전되었다.

학계의 평가

봉기의 직접적 계기(도시 재건인가 할례 금지인가)가 사료마다 다르게 전해진다.

마르키온 논쟁과 정경 논의 (144년)

여러 갈래의 가르침이 함께 존재하는 상황에서 무엇을 받아들일지 정해야 할 필요가 커졌다.

원인

  • 유대교 성경의 지위를 둘러싼 이견
  • 구원과 창조를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

전개

마르키온이 유대교 성경을 배제하고 축약된 목록만을 내세우자 로마 교회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과

  • 교회가 자기 문헌 목록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압력이 생겼다

장기적 영향

  • 신약 정경 형성이 앞당겨졌다
  • 기독교가 유대교 성경을 계속 자기 경전으로 삼는다는 입장이 굳어졌다
당사자별 관점
자리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기독교정경과 신앙 규범이라는 틀이 이 논쟁을 거치며 자리 잡았다.
유대교기독교가 유대교 성경을 계속 읽되 자기 방식으로 해석하는 구도가 이때 확정된다.
역사학계마르키온이 정경을 ‘만들게 했다’는 설명은 단순화라는 지적이 있다. 목록 형성은 더 긴 과정이었다.

불경 한역의 시작 (148년)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 출신 승려들이 중국에 들어왔다.

전개

안세고와 지루가참 등이 낙양에서 경전을 한문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낯선 개념을 옮기느라 도가 용어를 빌려 쓰기도 했다.

결과

  • 중국어로 읽을 수 있는 불교 문헌이 생겼다

장기적 영향

  • 동아시아 불교의 언어와 개념 틀이 이 번역들에서 출발한다
  • 번역어 선택이 뒤에 교학의 방향에 영향을 주었다
당사자별 관점
자리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불교가르침이 전혀 다른 문명권으로 건너간 첫 대규모 시도였다.
역사학계초기 한역은 원전과 대조하면 의역과 축약이 많다. 번역사 연구의 핵심 자료다.

14. 주요 인물

인물생몰활동후대의 평가
랍비 아키바50년경 ~ 135년경율법 해석의 체계를 세웠다 / 바르 코크바를 지지했다고 전한다미쉬나로 이어지는 해석 전통의 기틀을 놓은 인물로 기려진다. 항쟁 지지에 대한 평가는 랍비 문헌 안에서도 갈린다.
유스티누스100년경 ~ 165년경황제에게 보내는 변증서를 썼다 / 유대인 트리폰과의 대화를 남겼다 / 로마에서 순교했다철학과 신앙을 잇는 시도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트리폰과의 대화》는 두 종교가 갈라서는 시기의 논쟁을 보여 주지만, 유대교를 일방적으로 규정한 서술이라는 비판도 함께 받는다.
이레네우스130년경 ~ 202년경《이단 반박》을 썼다 / 리옹의 감독으로 일했다정통과 이단의 경계를 정리한 초기 신학자로 평가된다. 그의 저작은 사라진 여러 갈래의 가르침을 알려 주는 자료이기도 하다(다만 반대편의 서술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카니슈카2세기쿠샨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 불교를 후원했다고 전한다불교 전통은 그를 아쇼카에 견주는 후원자로 기린다. 즉위 연도조차 학계에서 여러 견해가 있다.
안세고2세기낙양에서 불경을 한문으로 옮겼다중국 불교 번역사의 첫머리에 놓이는 인물이다. 생애 기록은 후대 승전에 의존한다.

15. 주요 문헌과 사상

문헌시기언어핵심 내용
디다케(열두 사도의 가르침)1세기 말~2세기 초그리스어두 길의 윤리 교훈, 세례와 성찬, 예언자를 대하는 법 등 초기 공동체의 실제 규범을 담았다.
이단 반박180년경그리스어(라틴어 번역으로 주로 전함)여러 갈래의 가르침을 소개하고 반박하면서 신앙의 규범과 사도적 계승을 제시한다.

16. 지도와 이동 경로

2세기 — 갈라지는 두 공동체와 동쪽으로 가는 길 (101~200년)

지도에 표시된 곳
장소성격설명
아일리아 카피톨리나(예루살렘)도시135년 이후 유대인 출입 금지.
야브네·갈릴리수도원·학교율법 연구의 중심이 옮겨 간 곳.
로마도시마르키온 논쟁의 무대.
리옹도시이레네우스가 일한 곳.
간다라(페샤와르)유적불상 조각 양식이 발전한 곳.
낙양도시불경 한역이 시작된 곳.

경계 확실성: 대체로 확실

이동 경로
경로성격설명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선교

17. 사진과 유물로 보는 역사

히브리 글자와 성전 정면이 새겨진 옛 동전
바르 코크바 항쟁기의 화폐 실제 유물·유적 · 132~135년 봉기 세력이 로마 화폐 위에 다시 새겨 만든 것. 성전 회복의 기대가 담겨 있다. 여러 소장처 · http://en.wikipedia.org/wiki/User:IsraelXKV8R Tallenna tiedosto – Wikimedia Commons · CC BY-SA 3.0
성경 장면을 그린 벽화로 뒤덮인 회당 벽
두라 에우로포스 회당 벽화 실제 유물·유적 · 244/245년(다음 세기) 이 장의 세기가 아니라 3세기 중반의 회당이다. 244/245년에 벽화가 그려지고 256년 성벽 보강 때 묻히면서 보존되었다. 형상을 쓰지 않는다는 통념과 달리 성경 장면이 가득 그려져 있다. 다마스쿠스 국립박물관 · Yale University Art Gallery · CC0
그리스식 옷주름이 표현된 서 있는 불상
간다라 불상 실제 유물·유적 · 2~3세기 헬레니즘 조각 양식과 불교가 만난 자리. 불상을 만드는 관습이 이 무렵 자리 잡았다. 도쿄국립박물관 · World Imaging · Public domain

18. 핵심 정리

  • 바르 코크바 항쟁의 실패로 유대교는 정치적 회복이 아닌 학문과 교육의 길을 택했다.
  • 기독교는 정경·신앙 규범·감독 계승이라는 장치로 내부 경계를 정리했다.
  • 두 종교의 분리는 한 사건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친 과정이었다.
  • 불교는 중국어라는 완전히 다른 언어권으로 건너가는 번역 작업을 시작했다.

19. 비교표

2세기, 각자 경계를 긋다
유대교기독교불교
이 세기의 큰일바르 코크바 항쟁과 그 실패정경·신앙 규범·감독 계승의 정리한문 번역의 시작
무엇을 정했나구전 율법의 정리(미쉬나로 이어짐)무엇을 경전으로 받을 것인가낯선 개념을 어떤 말로 옮길 것인가
국가와의 관계정치적 회복의 길이 막힘국지적 박해가 이어짐왕실·귀족의 후원

20. 생각해 볼 질문

  1. ‘무엇이 참된 가르침인가’를 정하는 일에는 어떤 힘이 작용할까?
  2. 번역은 왜 종교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될까?
  3. 두 공동체가 갈라서는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서술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21. 확인 퀴즈

  1. 바르 코크바 항쟁이 진압된 해는?

    1. 70년
    2. 135년
    3. 313년
    4. 325년
  2. 2세기에 신약 정경 논의가 활발해진 계기로 흔히 꼽히는 것은?

    1. 마르키온의 목록 제시
    2. 니케아 공의회
    3. 성전 파괴
    4. 밀라노 칙령
  3. 2세기 중국에서 불경 한역을 이끈 인물로 알려진 사람은?

    1. 안세고
    2. 현장
    3. 구마라집
    4. 달마

정답 1) 2 · 2) 1 · 3) 1

해설

1. 135년이다. 이후 유대인은 예루살렘 출입이 금지되었다.

2. 마르키온의 주장에 대응하면서 교회가 목록을 분명히 하게 되었다.

3. 현장은 7세기, 구마라집은 4~5세기 인물이다.

22. 주석과 참고문헌

  1. 카시우스 디오 등 로마 사가의 서술
  2. 이레네우스 《이단 반박》
  3. 초기 한역 불전 연구

제3장 3세기의 세계 종교

201년~300년

제국이 흔들리는 동안 신학이 깊어지고, 박해가 제국 전체로 확대된다.

읽는 글

제3장 3세기의 세계 종교

제국이 흔들리는 동안 신학이 깊어지고, 박해가 제국 전체로 확대됩니다

201년 ~ 300년


여는 장면 — 증명서 한 장

3세기 로마는 황제가 자주 바뀌고 국경이 무너지는 위기의 세기였습니다.

불안한 제국은 신들의 노여움을 걱정했습니다. 250년, 황제는 모든 주민에게 제사를 드리고 증명서를 받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종이 한 장이 없으면 처벌을 받았습니다.

같은 세기에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성경을 철학의 언어로 읽는 깊은 신학이 자라났고, 갈릴리에서는 구전 율법이 한 권의 책으로 정리되었습니다.

밖에서는 압박이 커지고, 안에서는 학문이 깊어진 세기입니다.


1. 3세기의 위기

군인 황제들의 교체, 국경 침입, 화폐 가치 하락. 로마는 흔들렸습니다.

  • 군인 황제 시대의 정치 불안과 경제난.
  • 224년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세워졌습니다.
  • 3세기 중반 마니교가 페르시아에서 시작되어 동서로 퍼졌습니다.
  • 중국은 삼국시대의 분열기였습니다.

2. 200년경 — 미쉬나가 완성되다

성전이 사라진 뒤 구전으로 이어지던 율법 해석이 흩어질 위험이 있었습니다.

유다 하나시가 주제별로 정리해 여섯 편의 묶음으로 편집했습니다. 농사·절기·혼인·손해·성물·정결입니다. 구전 율법이 문헌으로 고정되었습니다.

학문적 해석

편집자가 여러 견해를 나란히 남겨 두었다는 점이 이 문헌의 특징입니다. 하나의 결론만 적지 않고 '누구는 이렇게 말했고 누구는 저렇게 말했다'를 함께 실었습니다.

이 편집 방식 자체가 유대교 학습의 성격을 정했습니다. 결론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논쟁을 따라가며 배우는 방식입니다.

미쉬나는 이후 예루살렘 탈무드와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자라날 뿌리가 되었고, 오늘날까지 유대교 법과 학습의 기본 문헌입니다. 바빌로니아의 유대인 학원들도 이 시기에 중심지로 성장했습니다.


3. 250년 — 제국이 조직적으로 박해하다

데키우스 황제의 칙령으로 모든 주민에게 제사가 요구되었습니다. 거부한 그리스도인이 처벌받았습니다.

확인된 사실

처음으로 제국 전체 규모의 조직적 박해가 이뤄졌습니다. 이집트에서 발견된 제사 증명서 파피루스가 이 조치의 실제 시행을 보여 줍니다.

257~260년 발레리아누스 박해가 이어졌습니다. 카르타고의 감독 키프리아누스가 이때 처형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박해가 남긴 가장 큰 문제는 순교가 아니었습니다. 많은 이가 제사에 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박해가 끝난 뒤 그들이 돌아왔습니다. 다시 받아들일 것인가, 받아들인다면 어떤 조건으로 할 것인가. 이 물음은 '교회란 무엇인가'를 묻는 신학 논쟁이 되었습니다. 순결한 사람들의 모임인가, 아니면 무너진 사람도 돌아올 수 있는 곳인가.

종교 전통의 주장

순교의 기억과 함께 다수가 굴복했다는 사실도 함께 기록되었습니다. 이 정직함이 초기 교회 문헌의 특징입니다.


4. 성경을 여러 층으로 읽다

오리게네스는 알렉산드리아와 카이사레아에서 방대한 성경 주석을 남겼습니다.

그는 성경을 문자·도덕·영적 층위로 읽는 방법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어 본문과 여러 그리스어 번역을 여섯 단으로 나란히 배열한 《헥사플라》를 만들었습니다. 본문 비평의 이른 시도입니다.

학문적 해석

오리게네스는 성경학의 개척자로 평가되지만, 일부 사변적 주장은 그가 죽고 삼백 년 뒤인 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배척되었습니다. 살아 있을 때가 아니라 후대에 정죄된 인물이라는 점이 평가를 더 갈리게 합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의 성경 해석 방식이 갈리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입니다. 이 차이가 5세기 그리스도론 논쟁의 밑바탕이 됩니다.


5. 섞이는 종교 — 마니교

240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 마니가 자신을 예언자 계보의 마지막으로 내세우며 가르침을 폈습니다.

조로아스터교·기독교·불교의 요소가 함께 흐르던 이란과 메소포타미아가 무대였습니다. 빛과 어둠의 대립을 축으로 한 이 가르침은 여러 언어로 기록되어 로마에서 중앙아시아까지 퍼졌습니다.

확인된 사실

20세기 이후 투르판과 이집트에서 발견된 문헌으로 이 종교의 자기 서술을 직접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니교는 여러 지역에서 박해를 받았습니다. 다만 「곧 사라졌다」고 적으면 사실과 어긋납니다. 로마 쪽에서는 6세기 무렵 자취를 감췄지만, 중앙아시아에서는 위구르 제국의 국교가 되기도 했고, 중국 동남부에서는 훨씬 뒤인 14세기 이후까지 사원과 신자가 남아 있었습니다. 서쪽에서 사라진 것을 세계에서 사라진 것으로 적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한때 몸담았던 것으로 유명하며, '마니교적'이라는 말이 선악 이분법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오늘까지 쓰입니다.

종교의 요소가 섞이는 과정을 보여 주는 사례로 오늘날 연구됩니다.

한편 분열기 중국에서 불교는 외래 종교로서 자리를 찾아갔습니다. 도가 사상의 용어를 빌려 개념을 설명하는 방식이 쓰였고, 왕실과 귀족의 후원이 늘었습니다.


6. 같은 제국, 다른 처지

유대교기독교
이 세기의 성취미쉬나 편집성경 해석학의 발전
이 세기의 시련로마 지배 아래 소수 종교제국 규모의 조직적 박해
남은 물음구전 전승의 권위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무너진 사람을 어떻게 다시 받을 것인가
국가와의 관계오래 쌓인 관례와 특권(황제 제사 면제 등)그런 관례가 없어 제사 명령의 표적이 됨

같은 제국 안에서도 두 종교의 처지는 달랐습니다. 유대인은 황제 제사를 면제받는 등 오래 쌓인 관례와 특권을 누렸고,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데키우스의 제사 명령에서도 유대인은 대상에서 빠진 것으로 봅니다. 이 차이가 3세기 박해의 방향을 정했습니다.

학문적 해석

흔히 쓰는 「공인 종교(religio licita)」라는 표현은 테르툴리아누스의 한 구절에서 나온 말이며, 로마에 그런 법적 범주가 실제로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오늘의 다수 견해입니다. 제도가 아니라 개별 관례의 축적으로 읽는 편이 사실에 가깝습니다.


이 장이 남긴 네 문장

  1. 미쉬나 편집으로 랍비 유대교의 뼈대가 완성되었습니다.
  2. 3세기 박해는 처음으로 제국 정책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3. 박해 이후의 용서 문제는 '교회란 무엇인가'를 묻는 신학 논쟁이 되었습니다.
  4. 불교는 중국에서 낯선 개념을 자기 말로 옮기는 오랜 작업을 이어 갔습니다.

생각해 볼 질문

  • 위기의 시대에 왜 소수 종교가 표적이 될까요?
  • 신앙을 버렸다가 돌아온 사람을 공동체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 다른 사상의 언어를 빌려 자기 신앙을 설명하는 일에는 어떤 위험이 있을까요?

이 장에서 쓴 자료

문헌

  • 미쉬나 (200년경, 히브리어) — 유다 하나시 편집
  • 헥사플라 (3세기 전반, 히브리어·그리스어) — 원본은 전하지 않고 단편과 인용으로만 알려짐

자료 사진

  • 두라 에우로포스 가정교회 벽화 (실제 유물) · 카우프만 미쉬나 사본 (후대 필사본) · 마니교 문헌 단편 (실제 유물)

참고

  • 에우세비우스 《교회사》, 키프리아누스 서한
  • 제사 증명서 파피루스
  • 콥트어 마니교 문헌, 투르판 출토 문서

「종교사 한눈」이 모아 둔 자료로 작성한 원고입니다.

검수 이력

  • 1차 · 사실 확인 — 마니교가 「결국 소멸했다」는 서술을 고침. 서방에서는 6세기 무렵 사라졌으나 위구르 제국의 국교가 되었고 중국 동남부에서는 14세기 이후까지 이어졌습니다. 오리게네스 정죄를 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로 특정. 지명 표기를 「카이사리아」에서 자료와 같은 「카이사레아」로 통일.
  • 2차 · 관점 검토 — 「유대교는 법적 지위를 인정받았다」는 서술을 관례·특권의 축적으로 고치고, 「공인 종교(religio licita)」라는 틀이 후대의 정리라는 점을 밝힘. 데키우스 제사 명령에서 유대인이 대상에서 빠진 것으로 본다는 점을 추가.
  • 3차 · 저작권 확인 — 자료 사진 3장의 이용 조건 확인. 미쉬나 사본이 본문보다 훨씬 뒤의 필사본임은 이미 표시되어 있음.
  • 남은 것 · 외부 검토 — 쓴 쪽과 검수한 쪽이 같습니다. 출판 전 제3자의 확인이 필요합니다.
여기까지가 본문입니다. 아래는 이 장의 자료입니다.

1. 세기를 여는 한 장면

3세기 로마는 황제가 자주 바뀌고 국경이 무너지는 위기의 세기였다. 불안한 제국은 신들의 노여움을 걱정했고,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이 표적이 되었다. 같은 세기에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성경을 철학의 언어로 읽는 깊은 신학이 자라났다.

2. 3세기의 세계사 배경

3세기의 위기라 불리는 혼란기에 로마는 군인 황제들의 교체, 국경 침입, 경제난을 겪었다. 페르시아에서는 사산 왕조가 일어났고, 인도에서는 쿠샨이 쇠퇴했다.

  • 군인 황제 시대의 정치 불안과 화폐 가치 하락.
  • 224년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세워졌다.
  • 3세기 중반 마니교가 페르시아에서 시작되어 동서로 퍼졌다.
  • 중국은 삼국시대의 분열기였다.

3. 한눈에 보는 연대표

연도일어난 일관련 종교
200년경유다 하나시가 미쉬나를 편집한다.유대
3세기 전반오리게네스가 알렉산드리아·카이사레아에서 성경 주석과 신학 저술을 남긴다. 그의 일부 주장은 삼백 년 뒤인 553년 공의회에서 정죄된다.기독교
250년데키우스 황제의 칙령으로 제국 전체 규모의 박해가 일어난다. 유대인은 대상에서 빠진 것으로 본다.기독교
240년경메소포타미아에서 마니가 가르침을 펴기 시작한다. 이 종교는 서방에서 6세기 무렵 사라지지만 중앙아시아와 중국에서는 훨씬 오래 이어진다.
257~260년발레리아누스 박해.기독교
3세기박해 때 신앙을 버린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두고 교회가 논쟁한다.기독교
3세기중국에서 한역 경전이 늘고 승단이 자리를 잡는다.불교

4. 유대교

미쉬나가 완성되다

구전으로 이어지던 율법 해석이 미쉬나로 정리되었다. 이 책은 이후 예루살렘 탈무드와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바탕이 되며, 랍비 유대교의 기본 틀을 놓았다.

  • 미쉬나는 주제별로 배열된 율법 해석 모음이다.
  • 바빌로니아의 유대인 학원들이 중심지로 성장했다.

5. 기독교

박해와 신학, 두 가지 시험

제국 차원의 박해가 처음으로 조직적으로 시행되었다. 동시에 오리게네스 같은 학자들이 성경을 여러 층위로 읽는 방법을 발전시켰다. 박해 뒤 배교자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문제는 교회의 성격을 묻는 논쟁이 되었다.

  • 데키우스·발레리아누스 박해는 제국 정책 차원의 박해였다.
  • 배교자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교회론을 발전시켰다.
  •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의 성경 해석 방식이 갈렸다.

6. 초기 기독교

지역 교회들이 감독 회의를 통해 공동 문제를 논의하는 관행이 자리 잡았다.

7. 가톨릭

이 시기 교회는 아직 동방·서방으로 나뉘지 않았다. ‘초기 기독교’ 항목에서 함께 다룬다.

8. 동방정교회

이 시기 교회는 아직 동방·서방으로 나뉘지 않았다. ‘초기 기독교’ 항목에서 함께 다룬다.

9. 개신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16세기 종교개혁 과정에서 여러 갈래로 형성되었다.

10. 이슬람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무함마드의 활동과 함께 7세기 아라비아에서 시작되었다. 622년 히즈라를 이슬람력 원년으로 삼는다.

11. 불교

중국 땅에 뿌리내리기

분열기 중국에서 불교는 외래 종교로서 자리를 찾아갔다. 도가 사상의 용어를 빌려 개념을 설명하는 방식(격의)이 쓰였고, 왕실과 귀족의 후원이 늘었다.

12. 종교 간 관계

유대교 ↔ 기독교 — 박해와 차별

이 시기 두 종교 모두 로마 제국 안에서 취약했지만 처지는 달랐다. 유대교는 오래된 민족 종교로 일정한 법적 지위를 인정받은 반면, 기독교는 그런 지위가 없었다.

13. 이 세기의 결정적 사건

미쉬나 편집 (200년)

성전이 사라진 뒤 구전으로 이어지던 율법 해석이 흩어질 위험이 있었다.

전개

유다 하나시가 주제별로 정리해 여섯 편의 묶음으로 편집했다.

결과

  • 구전 율법이 문헌으로 고정되었다

장기적 영향

  • 예루살렘 탈무드와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이 책의 주석으로 자라났다
  • 랍비 유대교의 기본 틀이 완성되었다
당사자별 관점
자리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유대교글로 적힌 토라와 함께 전해진 구전 토라의 결실로 이해한다.
역사학계편집자가 여러 견해를 나란히 남겨 두었다는 점이 이 문헌의 특징으로 주목된다.

마니교의 등장 (240년)

조로아스터교·기독교·불교의 요소가 함께 흐르던 이란과 메소포타미아가 무대였다.

전개

마니가 자신을 예언자 계보의 마지막으로 내세우며 가르침을 폈고, 여러 언어로 전파되었다.

결과

  • 로마에서 중앙아시아까지 퍼진 국제적 종교가 되었다

장기적 영향

  • 여러 지역에서 박해를 받으며 결국 소멸했다
  • 아우구스티누스가 한때 몸담았던 것으로 유명하며, 기독교 신학의 논쟁 상대가 되었다
  • ‘마니교적’이라는 말이 선악 이분법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남았다
당사자별 관점
자리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기독교이단으로 규정하고 배척했다.
역사학계20세기 이후 투르판·이집트에서 발견된 문헌으로 이 종교의 자기 서술을 직접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학계의 평가

서방에서는 6세기 무렵 자취를 감췄으나 중앙아시아에서는 위구르 제국의 국교가 되었고, 중국 동남부에서는 14세기 이후까지 이어졌다. 「곧 소멸한 종교」로 적으면 사실과 어긋난다.

데키우스 박해 (250년)

3세기의 위기 속에서 제국의 결속을 신들에 대한 제사로 다지려 했다.

원인

  • 국경 침입과 정치 불안
  • 전통 종교 회복을 통한 통합 시도

전개

모든 주민에게 제사를 드리고 증명서를 받도록 명령했고, 거부한 그리스도인이 처벌받았다.

결과

  • 처음으로 제국 전체 규모의 조직적 박해가 이뤄졌다
  • 많은 이가 제사에 응해 배교자로 분류되었다

장기적 영향

  • 배교자를 다시 받아들일 것인가를 두고 교회론 논쟁이 일어났다
  • 순교자와 고백자에 대한 존경이 교회 안에 자리 잡았다
당사자별 관점
자리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기독교순교의 기억과 함께, 다수가 굴복했다는 사실도 함께 기록되었다.
역사학계이집트에서 발견된 제사 증명서 파피루스가 이 조치의 실제 시행을 보여 준다.

14. 주요 인물

인물생몰활동후대의 평가
유다 하나시135년경 ~ 217년경미쉬나를 편집했다 / 유대 공동체의 지도자로 로마 당국과 교섭했다랍비 유대교의 기틀을 문헌으로 남긴 인물로 평가된다.
오리게네스185년경 ~ 253년경성경 주석을 방대하게 남겼다 / 히브리어 본문과 여러 그리스어 번역을 대조한 《헥사플라》를 만들었다성경학의 개척자로 평가되지만, 일부 사변적 주장은 후대 공의회에서 배척되었다. 평가가 갈리는 대표적 인물이다.
키프리아누스200년경 ~ 258년카르타고의 감독으로 박해기를 지도했다 / 배교자 문제를 다룬 글을 남겼다 / 발레리아누스 박해 때 처형되었다교회론을 실제 위기 속에서 다듬은 인물로 평가된다.
마니216년 ~ 274년경마니교를 창시했다 / 자기 가르침을 여러 언어로 기록하게 했다기독교와 조로아스터교 양쪽에서 배척당했다. 오늘날에는 종교 간 요소가 섞이는 과정을 보여 주는 사례로 연구된다.

15. 주요 문헌과 사상

문헌시기언어핵심 내용
미쉬나200년경히브리어농사·절기·혼인·손해·성물·정결의 여섯 편으로 나뉜 구전 율법의 정리.
헥사플라3세기 전반히브리어·그리스어히브리어 본문과 여러 그리스어 번역본을 여섯 단으로 나란히 배열한 대조본.

16. 지도와 이동 경로

3세기 — 박해와 학문의 지도 (201~300년)

지도에 표시된 곳
장소성격설명
갈릴리(찌포리·티베리아)수도원·학교미쉬나 편집의 자리.
알렉산드리아수도원·학교오리게네스의 학교.
카이사리아수도원·학교오리게네스의 후반 활동지.
카르타고도시키프리아누스의 감독좌.
크테시폰도시사산조의 수도, 마니교의 출발점.

경계 확실성: 대체로 확실

17. 사진과 유물로 보는 역사

병자를 고치는 장면을 그린 옛 벽화
두라 에우로포스 가정교회 벽화 실제 유물·유적 · 232년경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이른 기독교 예배 공간의 그림 가운데 하나다. 예일대학교 미술관 · Yale University Art Gallery · Public domain
여러 줄로 필사된 옛 문서 조각
마니교 문헌 단편 실제 유물·유적 · 3세기 이후 여러 종교의 요소를 엮어 국제적으로 퍼졌던 마니교의 자기 기록. 프랑스 국립도서관 · Unknown authorUnknown author · Public domain
히브리어가 단정하게 필사된 양피지
카우프만 미쉬나 사본 후대의 그림·상상도 · 본문은 200년경, 사본은 중세 미쉬나의 대표 사본. 본문은 3세기지만 이 사본 자체는 훨씬 뒤에 쓰였다. 후대에 만들어진 자료입니다. 당시의 실제 모습을 담은 기록이 아닙니다. 헝가리 과학아카데미 · kaufmann.mtak.hu · Public domain

18. 핵심 정리

  • 미쉬나 편집으로 랍비 유대교의 뼈대가 완성되었다.
  • 3세기 박해는 처음으로 제국 정책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시행되었다.
  • 박해 이후의 용서 문제는 ‘교회란 무엇인가’를 묻는 신학 논쟁이 되었다.
  • 불교는 중국에서 낯선 개념을 자기 말로 옮기는 오랜 작업을 이어 갔다.

19. 비교표

3세기, 위기가 만든 것
유대교기독교
이 세기의 성취미쉬나 편집성경 해석학의 발전
이 세기의 시련로마 지배 아래 소수 종교제국 규모의 조직적 박해
남은 물음구전 전승의 권위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무너진 사람을 어떻게 다시 받을 것인가
법적 지위오래된 민족 종교로 일정한 인정법적 지위 없음

같은 제국 안에서도 두 종교의 처지는 달랐다.

20. 생각해 볼 질문

  1. 위기의 시대에 왜 소수 종교가 표적이 될까?
  2. 신앙을 버렸다가 돌아온 사람을 공동체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3. 다른 사상의 언어를 빌려 자기 신앙을 설명하는 일에는 어떤 위험이 있을까?

21. 확인 퀴즈

  1. 미쉬나가 편집된 시기는?

    1. 기원전 2세기
    2. 1세기
    3. 200년경
    4. 500년경
  2. 3세기 로마의 제국 규모 박해가 일어난 배경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1. 제국의 위기 속에서 전통 신들에 대한 제사를 통해 결속을 다지려 했기 때문
    2. 기독교가 국교였기 때문
    3. 유대교가 로마를 공격했기 때문
    4. 이슬람교가 등장했기 때문
  3. 3세기 알렉산드리아·카이사레아에서 활동한 기독교 학자는?

    1. 오리게네스
    2. 아우구스티누스
    3. 토마스 아퀴나스
    4. 유다 하나시

정답 1) 3 · 2) 1 · 3) 1

해설

1. 유다 하나시가 200년경 편집했다.

2. 황제 숭배와 국가 제사를 거부하는 것이 국가 안보 문제로 여겨졌다.

3. 아우구스티누스는 4~5세기, 아퀴나스는 13세기 인물이다.

22. 주석과 참고문헌

  1. 에우세비우스 《교회사》
  2. 미쉬나 본문
  3. 3세기 로마사 연구

제4장 4세기의 세계 종교

301년~400년

박해받던 종교가 황제의 종교가 되고, 신앙 고백의 언어가 정해진다.

읽는 글

제4장 4세기의 세계 종교

박해받던 종교가 황제의 종교가 되고, 신앙 고백의 언어가 정해집니다

301년 ~ 400년


여는 장면 — 한 세기 만에 뒤집힌 것

한 세기 만에 모든 것이 뒤집혔습니다.

세기가 시작될 때 그리스도인은 잡혀갔습니다. 교회 건물이 헐리고 성경이 불태워졌습니다. 세기가 끝날 때 그들은 궁정에 드나들었고, 황제가 그들의 회의를 소집했으며, 다른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가 법으로 금지되었습니다.

자유는 곧 새로운 문제를 낳았습니다. 이제 무엇을 믿는지 한 문장으로 정해야 했고, 그 문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제국 안에서 설 자리를 잃었습니다.

이 세기의 이야기는 승리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환의 이야기입니다.


1. 제국의 재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과 대박해를 지나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을 다시 통합했습니다.

  •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대박해.
  • 313년 이른바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되었습니다(형식과 발표지를 두고는 논쟁이 있습니다).
  • 330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천도.
  • 380년 테살로니카 칙령, 392년 이교 제사 금지로 기독교가 사실상 국교가 되었습니다.
  • 395년 제국의 동서 분할 통치.
  • 인도 굽타 왕조에서 힌두 전통이 융성하고 불교도 후원을 받았습니다.

2. 303년 — 마지막 대박해

제국을 재정비하던 황제가 전통 종교 질서 회복을 함께 추진했습니다. 교회 건물 파괴, 성경 압수와 소각, 성직자 체포와 제사 강요가 이어졌습니다.

학문적 해석

가장 규모가 큰 박해였으나 지역마다 시행 강도가 크게 달랐습니다. 서방은 상대적으로 약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박해는 기독교를 없애지 못했습니다. 311년 갈레리우스의 관용령으로 큰 줄기가 끝났습니다. 다만 동방에서는 막시미누스 다이아 아래 313년까지 다시 이어졌습니다. 「311년에 끝났다」고 한 줄로 적으면 그 두 해를 지운 것이 됩니다.

그러나 상처는 남았습니다. 성경을 넘겨준 성직자를 어떻게 볼 것인가. 북아프리카에서 이 문제로 분열이 일어났고, 오래 이어졌습니다. 3세기의 배교자 문제가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3. 313년과 380년 — 다른 두 사건

313년 밀라노에서 제국의 두 통치자가 종교 정책을 조정했습니다.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의 자유로운 예배를 허용하고, 몰수 재산을 돌려주기로 했습니다.

학문적 해석

'칙령'이라는 형식과 밀라노에서 발표되었는지 자체가 논쟁됩니다. 311년 관용령의 연장선으로 보기도 합니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315년, 밀라노 칙령 두 해 뒤에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이 문에는 기독교 상징이 하나도 없습니다. 조각의 상당수는 앞선 황제들의 기념물에서 떼어다 붙인 것이고, 새겨진 문구는 승리를 「신적인 힘의 감화로」라고만 적습니다. 어느 신인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공인이 곧 제국의 얼굴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 문 하나가 보여 줍니다.

380년 테살로니카 칙령은 다른 사건입니다. 니케아 신앙을 제국의 공식 신앙으로 선포했고, 392년에는 전통 종교의 제사를 금했습니다.

공인과 국교화는 다릅니다. 313년은 '금지하지 않는다'였고, 380년은 '이것만 옳다'였습니다. 67년 사이에 벌어진 이 간격이 이 세기의 핵심입니다.

시점기독교의 법적 지위교리 논쟁의 무대다른 종교
303년박해 대상지역 교회 회의국가 제사가 기준
313년공인된 종교여전히 교회 내부모두 허용
325년황제의 관심 대상황제가 소집한 공의회허용
380~392년제국의 공식 신앙국가 정책과 결합전통 제사 금지, 유대교 제한 시작
학문적 해석

실제 사회의 종교 변화는 법령보다 훨씬 느리게 진행되었습니다. 법이 바뀌었다고 사람들이 곧바로 바뀐 것은 아닙니다.


4. 325년 — 황제가 소집한 회의

아리우스의 주장을 둘러싼 논쟁이 동방 교회 전체로 번졌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의 관계를 어떻게 말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황제가 니케아에 각지의 감독을 불러 모았습니다. 회의는 신경을 채택했고 아리우스의 주장을 배척했습니다.

확인된 사실

니케아 신경은 오늘날까지 가톨릭·정교회·개신교 대부분이 공유하는 고백입니다.

학문적 해석

이 회의가 성경 목록을 정했다거나 예수의 신성을 '표결로 만들었다'는 통속적 서술은 사실이 아닙니다. 참석자 수와 진행 과정의 세부는 사료마다 다릅니다. 논쟁은 이 회의로 끝나지 않고 4세기 내내 이어졌습니다.

주목할 것은 내용만이 아닙니다. 황제가 소집했다는 사실입니다. 교리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 국가의 권위가 동원되었습니다. 이 관행이 이후 여러 세기 동안 이어집니다.

아리우스의 저작은 대부분 전하지 않고 반대편의 인용으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주장을 그대로 재구성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가 지키려 했던 것이 하나님의 유일성이었다는 점은 함께 기억할 만합니다.

니케아 신앙을 옹호한 아타나시우스는 다섯 차례 유배되었습니다. 그리고 367년 부활절 편지에서 신약 27권을 오늘날의 목록대로 적었습니다. 그것이 그 목록의 가장 이른 기록입니다.


5. 사막으로 간 사람들

같은 세기에 반대 방향의 흐름도 있었습니다.

이집트 사막에서 안토니우스가 홀로 수행하며 수도 생활의 본을 세웠습니다. 소유를 버리고 기도에 힘쓰는 삶입니다. 아타나시우스가 쓴 그의 전기가 서방에까지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교회가 제국과 결합하는 바로 그때, 제도화된 교회를 떠나 사막으로 가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이 두 흐름은 우연히 같은 세기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한편 히에로니무스는 382년 로마에서 복음서의 라틴어 본문을 손보는 일로 시작해, 386년 이후 베들레헴에 자리 잡고 구약을 히브리어 원문에서 옮겼습니다. 70인역이 아니라 히브리어에서 옮겨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당대에 큰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를 걱정하며 보낸 편지도 남아 있습니다. 이 번역(불가타)이 서방 교회가 천 년 넘게 읽은 성경이 됩니다.


6. 좁아진 자리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유대인의 법적 지위는 점차 제한되었습니다.

회당은 유지되었지만 제약을 담은 법령이 이 세기 후반부터 쌓이기 시작해, 새 회당 건축과 공직 진출을 막는 조항으로 5세기에 뚜렷해집니다. 학문의 중심은 팔레스타인에서 바빌로니아로 옮겨 갔습니다.

양쪽의 자리에서

기독교 쪽 문헌에는 유대교를 대체된 종교로 보는 서술이 늘어납니다. 유대교 쪽에서는 자기 전통의 보존과 학문 계승에 힘을 쏟았습니다.

박해받던 종교가 다른 신앙을 제한하는 자리로 옮겨 갔습니다. 이 구도가 이후 유럽사에서 오래 이어집니다.

동·서방 교회의 언어와 관습 차이가 뚜렷해지기 시작한 것도 이 세기입니다. 라틴어를 쓰는 서방과 그리스어를 쓰는 동방. 다만 이 시기를 '가톨릭'과 '동방정교회'로 부르는 것은 후대의 이름을 앞당겨 붙이는 일입니다.


이 장이 남긴 다섯 문장

  1. 313년 공인과 380년 국교화는 다른 사건입니다. 둘을 섞지 않습니다.
  2. 니케아 신경은 오늘날까지 대부분의 기독교 전통이 공유하는 고백입니다.
  3. 국가의 후원은 교회를 보호했지만 동시에 권력의 논리 안으로 끌어들였습니다.
  4. 기독교의 부상은 유대교에게 법적·사회적 지위의 축소를 뜻했습니다.
  5. 동·서방 교회의 언어와 관습 차이가 이 세기부터 뚜렷해집니다.

생각해 볼 질문

  • 박해받던 종교가 권력을 갖게 되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 믿음을 한 문장으로 정하는 일은 왜 필요했고, 어떤 대가를 치렀을까요?
  • 수도원으로 떠난 사람들은 무엇에서 벗어나려 했을까요?

이 장에서 쓴 자료

문헌

  • 니케아 신경 (325년, 381년 보완, 그리스어)
  • 불가타 (382~405년, 라틴어) — 히에로니무스
  • 에우세비우스 《교회사》 (4세기 초, 그리스어) — 저자가 콘스탄티누스에 우호적이었음을 감안해 읽을 것

자료 사진

  • 시나이 사본 (실제 유물 · 4세기) ·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부조 (실제 유물 · 315년, 조각 상당수는 앞선 시대의 것) · 니케아의 성벽 (실제 유물 · 공의회보다 뒤의 축조)

참고

  • 락탄티우스, 에우세비우스 《콘스탄티누스의 생애》
  • 테오도시우스 법전
  • 4세기 교리사 연구

「종교사 한눈」이 모아 둔 자료로 작성한 원고입니다.

검수 이력

  • 1차 · 사실 확인 — 박해가 311년에 끝났다는 서술을 고쳐, 동방에서 막시미누스 다이아 아래 313년까지 이어진 사실을 밝힘. 히에로니무스의 번역이 베들레헴에서 시작된 것처럼 적힌 것을 382년 로마 → 386년 이후 베들레헴으로 바로잡음. 유대인 제약 법령이 뚜렷해지는 시점을 5세기로 미룸.
  • 2차 · 관점 검토 —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에 기독교 상징이 없다는 점을 본문에 넣어, 이 세기를 「황제의 회심」 한 줄로 읽지 않게 함. 밀라노 칙령의 명칭·형식 논쟁을 세계사 항목에도 표시.
  • 3차 · 저작권 확인 — 자료 사진 3장의 이용 조건과 제작 시기 확인. 니케아 성벽이 공의회보다 뒤의 축조임을 자료 목록에 표시.
  • 남은 것 · 외부 검토 — 쓴 쪽과 검수한 쪽이 같습니다. 출판 전 제3자의 확인이 필요합니다.
여기까지가 본문입니다. 아래는 이 장의 자료입니다.

1. 세기를 여는 한 장면

한 세기 만에 모든 것이 뒤집혔다. 잡혀가던 사람들이 궁정에 드나들었고, 황제가 공의회를 소집했다. 자유는 곧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이제 무엇을 믿는지 한 문장으로 정해야 했고, 그 문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제국 안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2. 4세기의 세계사 배경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과 대박해를 지나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을 다시 통합했다. 330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새 수도가 되었고, 395년 제국은 동서로 나뉘어 다스려졌다. 인도에서는 굽타 왕조가 일어났다.

  •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대박해.
  •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되었다.
  • 330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천도.
  • 380년 테살로니카 칙령, 392년 이교 제사 금지로 기독교가 사실상 국교가 되었다.
  • 395년 제국의 동서 분할 통치.
  • 인도 굽타 왕조에서 힌두 전통이 융성하고 불교도 후원을 받았다.

3. 한눈에 보는 연대표

연도일어난 일관련 종교
303~311년디오클레티아누스의 대박해. 311년 갈레리우스 관용령으로 큰 줄기가 끝나지만 동방에서는 313년까지 이어진다.기독교
313년밀라노 칙령 —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다.기독교
325년니케아 공의회. 아리우스 논쟁을 다루고 신경을 채택한다.기독교
381년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신경이 보완된다.기독교
380년테살로니카 칙령으로 니케아 신앙이 제국의 공식 신앙이 된다.기독교
4세기이집트·시리아에서 수도원 운동이 퍼진다.기독교
4세기 말히에로니무스가 라틴어 성경(불가타) 번역을 시작한다. 382년 로마에서 복음서 개정으로 시작해 386년 이후 베들레헴에서 히브리어 원문 번역을 이어 간다.기독교
4세기유대인의 법적 지위를 제한하는 법령이 쌓이기 시작한다. 새 회당 건축과 공직 진출을 막는 조항은 5세기에 뚜렷해진다.유대
4세기중국 북부에서 불교가 크게 성장하고, 도안·혜원 등이 교단을 세운다.불교
367년아타나시우스의 부활절 편지가 신약 27권을 오늘의 목록대로 적는다. 그 목록의 가장 이른 기록이다.

4. 유대교

제국이 기독교가 되면서 좁아진 자리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유대인의 법적 지위는 점차 제한되었다. 회당은 유지되었지만 새 회당 건축이나 공직 진출이 어려워졌다. 학문의 중심은 팔레스타인에서 바빌로니아로 옮겨 갔다.

  • 예루살렘 탈무드가 이 시기에 정리되기 시작했다.
  • 바빌로니아 학원들이 유대 학문의 중심이 되었다.

5. 기독교

공인, 국교화, 그리고 신경

밀라노 칙령으로 박해가 끝나고 국가와의 관계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황제가 공의회를 소집해 교리 문제를 정리했고, 니케아 신경은 이후 대부분의 기독교 전통이 공유하는 고백이 되었다. 동시에 제국의 후원은 교회를 권력 구조 안으로 끌어들였다.

  • 니케아 공의회는 황제가 소집했다. 교회와 국가의 새로운 관계를 보여 준다.
  • ‘정통’과 ‘이단’의 경계가 국가 권력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 수도원 운동은 제도화된 교회에 대한 대안적 흐름이기도 했다.

6. 초기 기독교

이 시기부터 동방(그리스어)과 서방(라틴어) 교회의 언어·관습 차이가 뚜렷해지기 시작한다. 아직 분열은 아니다.

7. 가톨릭

라틴어를 쓰는 서방교회 전통이 로마 주교를 중심으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지금의 가톨릭교회로 이어지지만, 이 시기를 ‘가톨릭’이라 부르는 것은 후대의 이름을 앞당겨 붙이는 일이다.

8. 동방정교회

그리스어를 쓰는 동방교회 전통이 콘스탄티노폴리스·안티오키아·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역시 후대의 이름으로 이 시기를 규정하지 않는다.

9. 개신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16세기 종교개혁 과정에서 여러 갈래로 형성되었다.

10. 이슬람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무함마드의 활동과 함께 7세기 아라비아에서 시작되었다. 622년 히즈라를 이슬람력 원년으로 삼는다.

11. 불교

중국 불교의 성장기

북중국의 여러 왕조가 불교를 후원하며 사찰과 석굴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남중국에서는 지식인 사회와 결합한 불교가 발전했다.

12. 종교 간 관계

기독교 ↔ 유대교 — 박해와 차별

제국의 종교가 된 기독교와 소수가 된 유대교 사이의 힘의 균형이 완전히 뒤집혔다. 이 구도가 이후 유럽사에서 오래 이어진다.

기독교의 자리에서: 기독교 쪽 문헌에는 유대교를 대체된 종교로 보는 서술이 늘어난다.

유대교의 자리에서: 유대교 쪽에서는 자기 전통의 보존과 학문 계승에 힘을 쏟았다.

13. 이 세기의 결정적 사건

디오클레티아누스 대박해 (303년~311년)

제국을 재정비하던 황제가 전통 종교 질서 회복을 함께 추진했다.

전개

교회 건물 파괴, 성경 압수와 소각, 성직자 체포와 제사 강요가 이어졌다.

결과

  • 가장 규모가 큰 박해였으나 기독교를 없애지는 못했다

장기적 영향

  • 311년 관용령으로 사실상 끝났고 313년 공인으로 이어졌다
  • 성경을 넘겨준 성직자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두고 북아프리카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당사자별 관점
자리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기독교순교자 전승이 크게 형성되었고, 동시에 배교 문제로 교회가 갈라지는 계기도 되었다.
역사학계지역마다 시행 강도가 크게 달랐다. 서방은 상대적으로 약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밀라노 칙령 (313년)

박해가 실패로 끝나고 제국의 두 통치자가 종교 정책을 조정했다.

전개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의 자유로운 예배를 허용하고 몰수 재산을 돌려주기로 했다.

결과

  • 기독교가 합법 종교가 되었다

장기적 영향

  • 교회가 재산과 법적 지위를 갖게 되었다
  • 80년 뒤 국교화로 이어지지만, 공인과 국교화는 다른 사건이다
당사자별 관점
자리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기독교박해의 끝으로 기념되어 왔다.
역사학계‘칙령’이라는 형식과 밀라노에서 발표되었는지 자체가 논쟁된다. 311년 관용령의 연장선으로 보기도 한다.

학계의 평가

문서의 성격과 명칭이 학계에서 다시 검토되고 있다.

니케아 공의회 (325년)

아리우스의 주장을 둘러싼 논쟁이 동방 교회 전체로 번졌다.

원인

  •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의 관계를 어떻게 말할 것인가
  • 제국의 통합을 원한 황제의 개입

전개

황제가 소집한 회의에 각지의 감독이 모여 신경을 채택하고 부활절 날짜 문제도 다루었다.

결과

  • 니케아 신경이 채택되고 아리우스의 주장이 배척되었다

장기적 영향

  • 오늘날까지 대부분의 기독교 전통이 이 신경을 공유한다
  • 황제가 교리 회의를 소집하는 관행이 시작되었다
  • 논쟁은 이 회의로 끝나지 않고 4세기 내내 이어졌다
당사자별 관점
자리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가톨릭보편 공의회의 첫 사례로 본다.
동방정교회일곱 보편 공의회의 첫째로 꼽는다.
개신교대부분의 교단이 이 신경을 신앙의 기준으로 받아들인다.
역사학계회의가 성경 목록을 정했다거나 예수의 신성을 ‘표결로 만들었다’는 통속적 서술은 사실이 아니다.

학계의 평가

회의 참석자 수와 진행 과정의 세부는 사료마다 다르다.

테살로니카 칙령과 국교화 (380년~392년)

니케아 신앙과 다른 계열의 대립이 이어지는 가운데 황제가 한쪽을 국가의 신앙으로 정했다.

전개

380년 니케아 신앙을 제국의 공식 신앙으로 선포하고, 392년에는 전통 종교의 제사를 금했다.

결과

  • 기독교가 사실상 국교가 되었다
  • 전통 종교의 공적 제사가 금지되었다

장기적 영향

  • ‘정통’의 경계가 국가 권력과 직접 연결되었다
  • 유대인의 법적 지위가 점차 제한되기 시작했다
  • 박해받던 종교가 다른 신앙을 제한하는 자리로 옮겨 갔다
당사자별 관점
자리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기독교보호를 얻은 대가로 권력의 논리 안에 들어간 전환점으로 자주 반성적으로 언급된다.
유대교이때부터 유럽에서의 오랜 제약이 시작된다.
역사학계실제 사회의 종교 변화는 법령보다 훨씬 느리게 진행되었다.

14. 주요 인물

인물생몰활동후대의 평가
콘스탄티누스 1세272년경 ~ 337년기독교를 공인했다 /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했다 /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새 수도로 세웠다정교회는 그를 성인으로 기린다. 한편 교회가 권력과 결합한 출발점으로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도 오래 있어 왔다. 그의 개인적 신앙의 성격은 계속 논쟁 대상이다.
아리우스256년경 ~ 336년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났으므로 시작이 있다고 주장했다니케아 공의회에서 배척되었다. 그의 저작은 대부분 전하지 않고 반대편의 인용으로만 알려져 있어, 그의 주장을 그대로 재구성하기는 어렵다.
아타나시우스296년경 ~ 373년니케아 신앙을 옹호했다 / 다섯 차례 유배되었다 / 367년 부활절 편지에 신약 27권 목록을 적었다동·서방 교회 모두가 존경하는 신학자다. 신약 27권을 오늘날의 목록대로 적은 가장 이른 기록을 남겼다.
안토니우스251년경 ~ 356년사막에서 홀로 수행하며 수도 생활의 본을 세웠다수도원 운동의 아버지로 불린다. 아타나시우스가 쓴 전기가 서방에까지 큰 영향을 주었다. 제국과 결합한 교회에 대한 대안적 흐름으로도 읽힌다.
히에로니무스347년경 ~ 420년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했다(불가타) / 히브리어를 배워 원문에서 옮겼다서방 교회가 천 년 넘게 읽은 성경을 만든 사람이다. 히브리어 본문을 기준으로 삼자는 그의 주장은 당대에 논쟁을 일으켰다.

15. 주요 문헌과 사상

문헌시기언어핵심 내용
니케아 신경325년, 381년 보완그리스어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대한 신앙을 짧은 문장으로 고백한다.
불가타382~405년라틴어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원문에서 옮긴 라틴어 성경.
교회사4세기 초그리스어사도 시대부터 콘스탄티누스 시대까지 교회의 역사를 정리하고 여러 문서를 인용했다.

16. 지도와 이동 경로

4세기 — 공의회와 제국의 도시들 (301~400년)

지도에 표시된 곳
장소성격설명
니케아회의325년 공의회.
콘스탄티노폴리스도시330년 새 수도, 381년 공의회.
밀라노도시313년 종교 자유 합의.
로마도시
알렉산드리아도시아리우스 논쟁의 발원지.
이집트 사막(니트리아)수도원·학교수도원 운동의 요람.
베들레헴성지히에로니무스의 번역 작업실.

경계 확실성: 대체로 확실

17. 사진과 유물로 보는 역사

둥근 부조가 새겨진 개선문의 일부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부조 실제 유물·유적 · 315년 기독교를 공인한 황제의 개선문이지만 기독교 상징이 하나도 없다. 조각의 상당수는 앞선 시대 기념물에서 떼어다 붙였고, 명문은 승리를 「신적인 힘의 감화로」라고만 적는다. 로마 · Jebulon · CC0
허물어진 옛 성벽과 성문
니케아의 성벽 실제 유물·유적 · 4세기 이후 325년 공의회가 열린 도시. 오늘날의 이즈니크다. 남아 있는 성벽은 공의회보다 뒤에 쌓은 것이다. 튀르키예 이즈니크 · Carole Raddato from Frankfurt, Germany · CC BY-SA 2.0
네 단으로 나뉜 그리스어 대문자 성경 사본
시나이 사본 실제 유물·유적 · 4세기 신·구약을 함께 담은 가장 이른 성경 사본 가운데 하나. 대영도서관 외 · Unknown authorUnknown author · Public domain

18. 핵심 정리

  • 313년 공인과 380년 국교화는 다른 사건이다. 둘을 섞지 않는다.
  • 니케아 신경은 오늘날까지 대부분의 기독교 전통이 공유하는 고백이다.
  • 국가의 후원은 교회를 보호했지만 동시에 권력의 논리 안으로 끌어들였다.
  • 기독교의 부상은 유대교에게 법적·사회적 지위의 축소를 뜻했다.
  • 동·서방 교회의 언어와 관습 차이가 이 세기부터 뚜렷해진다.

19. 비교표

4세기, 기독교의 지위가 바뀐 과정
시점법적 지위교리 논쟁의 무대다른 종교
303년박해 대상지역 교회 회의국가 제사가 기준
313년공인된 종교여전히 교회 내부모두 허용
325년황제의 관심 대상황제가 소집한 공의회허용
380~392년제국의 공식 신앙국가 정책과 결합전통 제사 금지, 유대교 제한 시작

한 세기 만에 처지가 완전히 뒤집혔다. 그 대가가 무엇이었는지가 이 세기의 물음이다.

20. 생각해 볼 질문

  1. 박해받던 종교가 권력을 갖게 되면 무엇이 달라질까?
  2. 믿음을 한 문장으로 정하는 일은 왜 필요했고, 어떤 대가를 치렀을까?
  3. 수도원으로 떠난 사람들은 무엇에서 벗어나려 했을까?

21. 확인 퀴즈

  1. 기독교를 공인한 밀라노 칙령의 해는?

    1. 303년
    2. 313년
    3. 325년
    4. 380년
  2.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한 사람은?

    1. 로마 주교
    2. 콘스탄티누스 황제
    3. 아리우스
    4. 아타나시우스
  3. ‘4세기에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가 갈라졌다’는 서술의 문제는?

    1. 문제 없다
    2. 후대의 교파 이름을 이 시대에 앞당겨 적용했다
    3. 연도가 틀렸다
    4. 동방교회가 없었다

정답 1) 2 · 2) 2 · 3) 2

해설

1. 313년 공인, 325년 니케아 공의회, 380년 국교화로 구분해 기억한다.

2. 황제가 소집했다는 점이 교회–국가 관계의 전환을 보여 준다.

3. 언어·관습 차이는 커졌지만 분열은 아니었다. 1054년도 분열의 상징적 사건이지 시작점이 아니다.

22. 주석과 참고문헌

  1. 에우세비우스 《콘스탄티누스의 생애》
  2. 니케아 신경 본문
  3. 후기 로마 제국 연구서

제5장 5세기의 세계 종교

401년~500년

서방 제국이 무너지고, 동방에서는 그리스도론 논쟁이 교회를 갈라놓는다.

읽는 글

제5장 5세기의 세계 종교

서방 제국이 무너지고, 동방에서는 그리스도론 논쟁이 교회를 갈라놓습니다

401년 ~ 500년


여는 장면 — 한 문장이 교회를 나누다

476년,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가 물러났습니다. 서방에서는 게르만 왕국들이 들어섰고, 교회는 무너진 행정의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했습니다.

동방에서는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있는가'라는 물음이 공의회를 거치며 교회를 실제로 갈라놓았습니다.

한 문장의 표현 차이가 교회를 나눌 만큼 중요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이 세기를 읽는 열쇠입니다.


1. 무너지는 서방, 버티는 동방

서로마 제국이 게르만 이동 속에서 해체되고 여러 왕국이 세워졌습니다. 동로마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존속했습니다.

  • 410년 서고트의 로마 약탈, 476년 서로마 황제 폐위.
  • 게르만 여러 왕국이 서유럽에 세워졌습니다.
  • 동로마 제국은 계속 존속하며 스스로를 로마라 불렀습니다.
  • 굽타 시대 인도에서 힌두 전통이 융성했습니다.

2. 410년 — 로마가 약탈당하다

서고트가 로마를 사흘 동안 약탈했습니다. 80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학문적 해석

약탈의 실제 피해 규모는 사료가 전하는 것보다 제한적이었다는 견해가 많습니다.

그러나 충격은 물리적 피해보다 컸습니다. 제국의 무적 신화가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비난이 나왔습니다. '기독교를 받아들여서 로마가 망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으로 답했습니다. 지상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를 구분하고, 제국의 흥망과 신앙의 운명을 같은 것으로 보지 않는 역사 이해입니다.

제국과 신앙을 동일시하지 않는 신학이 이 충격에서 자라났습니다. 이 구분이 이후 천 년 서방 사상의 바탕이 됩니다.

학문적 해석

아우구스티누스는 서방 신학 전체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로 꼽히며, 종교개혁자들도 그를 근거로 삼았습니다. 다만 이단 강제 진압을 정당화한 논리는 오늘날 비판적으로 검토됩니다.


3. 431년과 451년 — 갈라지는 교회들

마리아를 '하나님을 낳은 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이 물음을 두고 알렉산드리아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충돌했습니다.

431년 에페소 공의회는 진행 자체가 파행을 겪었고, 네스토리우스가 파면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낳은 이' 호칭이 승인되었습니다.

에페소 이후에도 대립이 이어졌습니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는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고, 두 본성이 혼합되지도 변화하지도 분할되지도 분리되지도 않는다는 정의문을 채택했습니다.

학문적 해석

분열에는 신학만이 아니라 언어·지역·제국 정치가 함께 작용했습니다. 두 총대주교좌의 주도권 다툼도 컸습니다. 또한 네스토리우스가 실제로 무엇을 주장했는지는 20세기에 그의 변론서가 발견되면서 재평가되고 있습니다. 이름이 붙은 학설과 본인의 주장이 같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 두 회의의 결과로 교회가 갈라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짚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갈라진 교회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갈래언제 갈라졌나오늘날 이름지금 어디에 있나
동방 교회에페소 431년 이후아시리아 동방교회이라크·이란·인도·디아스포라
비칼케돈 교회칼케돈 451년 이후오리엔트 정교회이집트·에티오피아·아르메니아·시리아·인도
칼케돈 교회(동방)—동방정교회그리스·동유럽·러시아 등
칼케돈 교회(서방)—가톨릭교회서유럽에서 시작해 전 세계

네 갈래 모두 오늘날 살아 있는 교회입니다. '분열'을 '사라짐'으로 서술하면 사실을 틀리게 말하는 것입니다.

화해의 소식

20세기 후반의 대화에서, 서로의 신앙이 실은 같은 것을 다른 말로 표현했다는 공동 선언이 잇따랐습니다. 가톨릭과 오리엔트 정교회 사이에서 1970~80년대에, 가톨릭과 아시리아 동방교회 사이에서 1994년에 그런 선언이 나왔습니다. 천오백 년이 걸렸습니다.

반드시 짚을 것

오리엔트 정교회를 오래 「단성론」이라 불러 왔지만, 당사자들은 이 이름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합성론(미아피시스)」이라 설명합니다. 남이 붙인 이름과 자기가 쓰는 이름이 다를 때, 이 책은 자기가 쓰는 이름을 함께 적습니다.

그리고 갈라져 나간 교회들은 각자의 방향으로 뻗어 갔습니다. 아시리아 동방교회는 페르시아를 거쳐 중앙아시아로, 그리고 다음 세기에는 중국까지 선교를 넓힙니다.


4. 두 개의 표준 문헌

같은 세기에 두 전통이 각각 자기 표준 문헌을 엮어 갔습니다. 「완성」이라고 적기는 이릅니다. 어느 쪽도 이 세기 안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 바빌로니아의 학원들에서 미쉬나에 대한 방대한 토론이 정리되어 묶였습니다. 큰 틀은 5~6세기에 잡혔지만 손질은 그 뒤로도 두 세기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법과 이야기와 논쟁을 함께 담은 이 문헌은 이후 유대교 학문과 생활의 중심이 됩니다. 사산조 페르시아 아래의 유대인 공동체가 학문 중심지였습니다.

구마라집의 한역. 쿠차 출신 승려 구마라집이 전란 중에 중국으로 옮겨 와, 국가의 지원 아래 대규모 번역단을 꾸려 대승 경전을 옮겼습니다. 《묘법연화경》 《금강경》 등이 이때 나왔습니다.

학문적 해석

그의 번역은 의역이 많아 원전 연구에서는 다른 번역과 대조해 읽습니다. 그러나 문체가 유려해 널리 읽혔고, 그것이 동아시아 불교의 표준 본문이 되었습니다.

읽히는 번역이 가르침의 확산을 결정합니다. 그의 문체는 뒤에 중국 문학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5. 무너진 자리를 대신하다

서방에서는 제국 행정이 무너지면서 교회가 그 기능을 떠맡기 시작했습니다. 로마 주교의 위상이 높아졌고, 레오 1세가 칼케돈 공의회에 보낸 신학 서한이 회의에서 받아들여졌습니다. 뒷날 로마 주교의 권위를 말할 때 자주 인용되는 대목입니다.

반드시 짚을 것

같은 공의회가 채택한 28조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좌를 로마 다음가는 자리로 올렸고, 로마는 이 조항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한 회의가 서방에는 「로마의 권위가 인정된 자리」로, 동방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올라선 자리」로 기억됩니다. 어느 한쪽만 적으면 절반만 적는 것이 됩니다.

동방에서는 동로마 황제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축으로 한 체제가 자리 잡았습니다.

두 지역 교회의 성격 차이가 이 세기에 더 뚜렷해졌습니다. 서방은 무너진 사회를 떠받치는 교회가 되었고, 동방은 제국 질서의 일부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장이 남긴 네 문장

  1. 5세기 공의회 논쟁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여러 교회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2. '갈라져 나간 교회'를 사라진 교회로 서술하면 안 됩니다. 그들은 지금도 존재합니다.
  3. 서로마의 붕괴는 교회가 사회를 떠받치는 역할을 맡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4. 바빌로니아 탈무드와 구마라집의 한역은 각 전통의 표준 문헌을 만든 작업입니다.

생각해 볼 질문

  • 한 문장의 표현 차이가 교회를 나눌 만큼 중요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 국가가 무너졌을 때 종교 기관이 그 역할을 대신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 번역자가 고른 단어 하나가 천 년의 신앙을 바꿀 수 있을까요?

이 장에서 쓴 자료

문헌

  •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413~426년, 라틴어)
  • 바빌로니아 탈무드 (5~6세기에 대체로 완성, 히브리어·아람어)
  • 칼케돈 정의 (451년, 그리스어)

자료 사진

  • 라벤나 산비탈레 성당의 모자이크 (실제 유물 · 6세기 제작, 다음 세기의 것) · 알렉산드리아 사본 (실제 유물 · 5세기)

참고

  • 칼케돈 공의회 문서, 레오 1세 서한
  • 《헤라클레이데스의 서》 (네스토리우스의 변론)
  • 동아시아 불교 번역사 연구

「종교사 한눈」이 모아 둔 자료로 작성한 원고입니다.

검수 이력

  • 1차 · 사실 확인 — 두 표준 문헌을 이 세기에 「완성」했다는 서술을 고침.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손질이 그 뒤로도 두 세기 가까이 이어졌음을 밝힘. 화해 선언의 시기를 1970~80년대(오리엔트 정교회)와 1994년(아시리아 동방교회)으로 특정. 라벤나 모자이크가 6세기 제작임을 자료 목록에 표시.
  • 2차 · 관점 검토 — 레오 1세의 서한만 적고 같은 공의회 28조를 빠뜨린 것을 고쳐, 칼케돈이 서방과 동방에 각각 다르게 기억된다는 점을 실음. 「단성론」이라는 이름을 당사자들이 거부한다는 점과 그들이 쓰는 이름을 함께 적음.
  • 3차 · 저작권 확인 — 자료 사진 2장의 이용 조건과 제작 시기 확인.
  • 남은 것 · 외부 검토 — 쓴 쪽과 검수한 쪽이 같습니다. 출판 전 제3자의 확인이 필요합니다.
여기까지가 본문입니다. 아래는 이 장의 자료입니다.

1. 세기를 여는 한 장면

476년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가 물러났다. 서방에서는 게르만 왕국들이 들어섰고, 교회는 무너진 행정의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동방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있는가’라는 물음이 공의회를 거치며 교회를 실제로 갈라놓았다.

2. 5세기의 세계사 배경

서로마 제국이 게르만 이동 속에서 해체되고 여러 왕국이 세워졌다. 동로마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존속했다. 인도 굽타 왕조가 전성기를 지나 쇠퇴하기 시작했다.

  • 410년 서고트의 로마 약탈, 476년 서로마 황제 폐위.
  • 게르만 여러 왕국이 서유럽에 세워졌다.
  • 동로마 제국은 계속 존속하며 스스로를 로마라 불렀다.
  • 굽타 시대 인도에서 힌두 전통이 융성했다.

3. 한눈에 보는 연대표

연도일어난 일관련 종교
410년서고트가 로마를 약탈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을 쓰는 계기가 된다.기독교
431년에페소 공의회. 이후 동방교회(이른바 네스토리우스 계열)가 갈라진다.기독교
451년칼케돈 공의회. 이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은 교회들이 오리엔트 정교회로 이어진다. 같은 회의의 28조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로마 다음가는 주교좌로 올렸고 로마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기독교
476년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폐위된다.
5세기바빌로니아 탈무드 편집이 진행된다. 큰 틀은 5~6세기에 잡히지만 손질은 그 뒤로도 이어진다.유대
5세기중국에서 구마라집의 번역으로 대승 경전이 널리 읽힌다.불교
5세기동방교회가 페르시아를 거쳐 중앙아시아로 선교를 넓힌다.기독교
401~413년구마라집이 장안에서 국가의 지원 아래 대승 경전을 한문으로 옮긴다.

4. 유대교

탈무드의 세기

바빌로니아의 학원들에서 미쉬나에 대한 방대한 토론이 정리되어 바빌로니아 탈무드로 묶였다. 이 책은 이후 유대교 학문과 생활의 중심 문헌이 된다.

  • 탈무드는 법과 이야기, 논쟁을 함께 담은 문헌이다.
  • 사산조 페르시아 아래의 유대인 공동체가 학문 중심지였다.

5. 기독교

한 공의회가 여러 교회를 만들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를 두고 공의회가 이어졌고, 그 결정에 동의하지 않은 교회들이 갈라져 나갔다. 오늘날의 아시리아 동방교회와 오리엔트 정교회(콥트·시리아·아르메니아 등)가 여기서 비롯한다. 서방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이 이후 천 년의 서방 사상을 형성했다.

  • 에페소(431)·칼케돈(451) 공의회가 분기점이 되었다.
  • 갈라진 교회들은 사라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 서방에서는 교회가 무너진 행정 기능을 떠맡기 시작했다.

6. 초기 기독교

이 세기를 끝으로 ‘하나의 초기 교회’라는 서술은 더 이상 정확하지 않게 된다.

7. 가톨릭

서방에서 로마 주교의 위상이 높아졌고, 무너진 제국 행정 대신 교회가 지역 사회를 유지하는 역할을 맡았다.

8. 동방정교회

동로마 황제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축으로 한 동방 교회 체제가 자리 잡았다.

9. 개신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16세기 종교개혁 과정에서 여러 갈래로 형성되었다.

10. 이슬람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무함마드의 활동과 함께 7세기 아라비아에서 시작되었다. 622년 히즈라를 이슬람력 원년으로 삼는다.

11. 불교

구마라집의 번역

구마라집의 유려한 한역으로 대승 경전이 중국 지식인에게 널리 읽혔다. 이 번역들은 이후 동아시아 불교의 표준 본문이 된다.

12. 종교 간 관계

기독교 ↔ 유대교 — 박해와 차별

기독교 로마법 아래 유대인의 활동 제한이 이어졌다. 다만 사산조 페르시아 지역의 유대인 공동체는 다른 조건에서 학문을 이어 갔다.

13. 이 세기의 결정적 사건

구마라집의 한역 사업 (401년~413년)

쿠차 출신 승려 구마라집이 전란 중에 중국으로 옮겨 왔다.

전개

국가의 지원 아래 대규모 번역단을 꾸려 대승 경전을 옮겼다.

결과

  • 《묘법연화경》 《금강경》 등 널리 읽히는 한역본이 나왔다

장기적 영향

  • 그의 번역문이 동아시아 불교의 표준 본문이 되었다
  • 번역의 문체가 뒤에 중국 문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당사자별 관점
자리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불교읽히는 번역이 가르침의 확산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사례다.
역사학계그의 번역은 의역이 많아 원전 연구에서는 다른 번역과 대조해 읽는다.

서고트의 로마 약탈 (410년)

게르만 여러 집단이 제국 안으로 이동하는 가운데 서고트가 이탈리아로 들어왔다.

전개

사흘에 걸쳐 도시가 약탈당했다. 80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결과

  • 제국의 무적 신화가 무너졌다

장기적 영향

  • ‘기독교를 받아들여서 로마가 망했다’는 비난이 나왔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으로 답했다
  • 지상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를 구분하는 사고가 서방 신학에 깊이 새겨졌다
당사자별 관점
자리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기독교제국과 신앙을 동일시하지 않는 신학이 이 충격에서 자라났다.
역사학계약탈의 실제 피해 규모는 사료가 전하는 것보다 제한적이었다는 견해가 많다.

에페소 공의회 (431년)

마리아를 ‘하나님을 낳은 이’라 부를 수 있는가를 두고 알렉산드리아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충돌했다.

원인

  • 그리스도 안의 신성과 인성을 설명하는 방식의 차이
  • 두 총대주교좌의 주도권 다툼

전개

회의 진행 자체가 파행을 겪었고, 네스토리우스가 파면되었다.

결과

  • ‘하나님을 낳은 이’ 호칭이 승인되었다

장기적 영향

  • 이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은 교회가 동방(아시리아) 교회로 이어졌다
  • 그 교회는 페르시아를 거쳐 중앙아시아와 중국까지 선교를 넓혔다
당사자별 관점
자리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기독교그리스도를 어떻게 말할 것인가라는 물음이 교회를 실제로 나눈 첫 사례다.
역사학계네스토리우스가 실제로 무엇을 주장했는지는 20세기 문헌 발견 이후 재평가되고 있다.

학계의 평가

‘네스토리우스주의’라는 이름이 그의 실제 입장과 얼마나 맞는지가 논쟁된다.

칼케돈 공의회 (451년)

에페소 이후에도 그리스도 안의 두 본성을 설명하는 방식을 두고 대립이 이어졌다.

전개

황제가 소집한 회의에서 두 본성이 혼합되지도 분리되지도 않는다는 정의문을 채택했다.

결과

  • 칼케돈 정의가 채택되었다

장기적 영향

  • 이 정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교회들이 오리엔트 정교회(콥트·시리아·아르메니아·에티오피아 등)로 이어진다
  • 그 교회들은 오늘날까지 존재한다. 사라진 것이 아니다
  • 20세기 이후 대화에서 서로의 신앙이 실은 같은 것을 다른 말로 표현했다는 공동 선언이 나왔다
당사자별 관점
자리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가톨릭레오 1세의 서한이 회의에서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동방정교회네 번째 보편 공의회로 받아들인다.
역사학계분열에는 신학만이 아니라 언어·지역·제국 정치가 함께 작용했다.

학계의 평가

분열에는 신학만이 아니라 언어·지역·제국 정치가 함께 작용했다. 같은 회의의 28조를 두고 동방과 서방의 기억이 갈린다. 오리엔트 정교회를 「단성론」이라 부르는 것은 당사자들이 거부하는 이름이며, 그들은 스스로를 「합성론(미아피시스)」이라 설명한다. 1970~80년대와 1994년의 공동 선언에서 표현의 차이였다는 데 이르렀다.

14. 주요 인물

인물생몰활동후대의 평가
아우구스티누스354년 ~ 430년《고백록》과 《신국론》을 썼다 / 히포의 감독으로 일했다 / 여러 논쟁에 글로 개입했다서방 신학 전체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로 꼽힌다. 종교개혁자들도 그를 근거로 삼았다. 다만 이단 강제 진압을 정당화한 논리는 오늘날 비판적으로 검토된다.
키릴로스(알렉산드리아)376년경 ~ 444년에페소 공의회를 주도했다 / 그리스도의 하나 됨을 강조하는 신학을 폈다정교회와 오리엔트 정교회가 함께 존경하는 신학자다. 동시에 그의 정치적 수완과 알렉산드리아에서 벌어진 폭력 사건에 대한 책임은 비판적으로 논의된다.
네스토리우스386년경 ~ 451년경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지냈다 / 마리아 호칭 문제를 제기했다오랫동안 이단의 이름으로 불렸으나, 20세기에 그의 변론서가 발견되면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이름이 붙은 학설과 본인의 주장이 같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레오 1세461년칼케돈 공의회에 신학 서한을 보냈다 / 훈족과 교섭했다고 전한다서방에서 교황권의 신학적 근거를 세운 인물로 평가된다.
구마라집344년경 ~ 413년경대승 경전을 한문으로 옮겼다 / 번역단을 조직해 공동 작업을 했다동아시아 불교의 언어를 만든 사람으로 평가된다.

15. 주요 문헌과 사상

문헌시기언어핵심 내용
신국론413~426년라틴어로마 약탈의 충격에 답하며 지상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를 구분해 역사를 해석한다.
바빌로니아 탈무드5~6세기에 대체로 완성히브리어·아람어미쉬나에 대한 방대한 토론(게마라)으로, 법과 이야기와 논쟁이 함께 실려 있다.
칼케돈 정의451년그리스어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고, 두 본성이 혼합·변화·분할·분리되지 않는다고 정한다.

16. 지도와 이동 경로

5세기 — 갈라진 교회들이 향한 곳 (401~500년)

공의회에서 갈라진 교회들은 사라지지 않고 각자의 방향으로 뻗어 나갔다.

지도에 표시된 곳
장소성격설명
에페소회의431년.
칼케돈회의451년.
로마도시
히포도시아우구스티누스의 감독좌.
니시비스수도원·학교동방교회 신학교.
수라·품베디타(바빌로니아)수도원·학교탈무드가 정리된 학원들.
장안도시구마라집의 번역장.

경계 확실성: 대체로 확실

이동 경로
경로성격설명
동방교회의 동진선교

17. 사진과 유물로 보는 역사

두 단으로 필사된 그리스어 성경
알렉산드리아 사본 실제 유물·유적 · 5세기 5세기의 대표적 성경 사본. 대영도서관 · Unknown authorUnknown author · Public domain
금빛 바탕에 인물이 늘어선 모자이크
라벤나 산비탈레 성당의 모자이크 실제 유물·유적 · 6세기 동로마의 미술이 서방에 남긴 자취. 제작 시기는 6세기지만 5세기 이후 흐름을 함께 보여 준다. 이탈리아 라벤나 · Petar Milošević · CC BY-SA 4.0

18. 핵심 정리

  • 5세기 공의회 논쟁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여러 교회 전통을 만들었다.
  • ‘갈라져 나간 교회’를 사라진 교회로 서술하면 안 된다. 그들은 지금도 존재한다.
  • 서로마의 붕괴는 교회가 사회를 떠받치는 역할을 맡게 된 계기가 되었다.
  • 바빌로니아 탈무드와 구마라집의 한역은 각 전통의 표준 문헌을 만든 작업이다.

19. 비교표

5세기 공의회가 만든 교회의 갈래
갈래언제 갈라졌나오늘날 이름지금 어디에 있나
동방(아시리아) 교회에페소 431년 이후아시리아 동방교회이라크·이란·인도·디아스포라
비칼케돈 교회칼케돈 451년 이후오리엔트 정교회이집트·에티오피아·아르메니아·시리아·인도
칼케돈 교회(동방)—동방정교회그리스·동유럽·러시아 등
칼케돈 교회(서방)—가톨릭교회서유럽에서 시작해 전 세계

‘분열’을 사라짐으로 서술하지 않는다. 네 갈래 모두 오늘날 살아 있는 교회다.

20. 생각해 볼 질문

  1. 한 문장의 표현 차이가 교회를 나눌 만큼 중요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2. 국가가 무너졌을 때 종교 기관이 그 역할을 대신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3. 번역자가 고른 단어 하나가 천 년의 신앙을 바꿀 수 있을까?

21. 확인 퀴즈

  1. 칼케돈 공의회가 열린 해는?

    1. 325년
    2. 381년
    3. 431년
    4. 451년
  2. 칼케돈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은 교회들의 오늘날 이름은?

    1. 오리엔트 정교회
    2. 동방정교회
    3. 가톨릭교회
    4. 개신교
  3. 5세기 중국에서 대승 경전을 한문으로 옮긴 대표적 역경승은?

    1. 구마라집
    2. 안세고
    3. 현장
    4. 의정

정답 1) 4 · 2) 1 · 3) 1

해설

1. 451년이다. 431년은 에페소 공의회다.

2. 콥트·시리아·아르메니아 정교회 등이 여기에 속한다. 동방정교회와는 다른 계열이다.

3. 구마라집의 번역은 동아시아 불교의 표준이 되었다.

22. 주석과 참고문헌

  1. 칼케돈 공의회 문서
  2.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3. 바빌로니아 탈무드
  4. 동아시아 불교 번역사 연구

참고문헌

  1. 타키투스 《연대기》,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 (1차·근접 사료)
  2. 신약성서 본문 (종교 전통 문헌이자 1세기 자료)
  3. 초기 기독교와 유대교 분화에 관한 표준 연구서
  4. 카시우스 디오 등 로마 사가의 서술
  5. 이레네우스 《이단 반박》
  6. 초기 한역 불전 연구
  7. 에우세비우스 《교회사》
  8. 미쉬나 본문
  9. 3세기 로마사 연구
  10. 에우세비우스 《콘스탄티누스의 생애》
  11. 니케아 신경 본문
  12. 후기 로마 제국 연구서
  13. 칼케돈 공의회 문서
  14.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15. 바빌로니아 탈무드
  16. 동아시아 불교 번역사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