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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 한눈 · 제3권
6세기부터 10세기
이슬람교의 등장과 세 세계의 재편
검수용 교정본 · 배포 금지
같은 시대, 서로 다른 믿음은 어떤 역사를 지나왔는가
검수 완료 5 / 5장
차례
- 제1장 6세기의 세계 종교
- 제2장 7세기의 세계 종교
- 제3장 8세기의 세계 종교
- 제4장 9세기의 세계 종교
- 제5장 10세기의 세계 종교
이 책이 다루는 것
- 이슬람교의 등장과 확장
- 비잔틴 기독교
- 서방교회의 성장
- 유대인 공동체의 이동
- 아시아 불교의 발전
이 책은 역사적 사실, 종교 전통의 주장, 학문적 해석을 구분해 씁니다. 확정되지 않은 연대와 논쟁 중인 내용은 그렇게 밝혀 적었고, 특정 종교의 관점만으로 다른 종교를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제1장 6세기의 세계 종교
501년~600년
동로마가 옛 영광을 되찾으려 하고, 서방에서는 수도원이 문명을 떠맡는다.
읽는 글
제6장 6세기의 세계 종교
동로마가 옛 영광을 되찾으려 하고, 서방에서는 수도원이 문명을 떠맡습니다
501년 ~ 600년
여는 장면 — 돔과 규칙
537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하기아 소피아가 세워졌습니다. 거대한 돔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물이었습니다.
같은 시기 이탈리아의 한 산 위에서는 베네딕도가 수도사들을 위한 규칙을 쓰고 있었습니다. 하루의 기도 시간, 노동, 식사, 손님 접대, 원장의 직무를 정한 소박한 문서였습니다.
화려한 돔과 소박한 규칙. 이 세기의 기독교는 이 두 모습으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아라비아에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도시 메카에서 곧 큰 변화가 시작됩니다.
1. 되찾으려는 제국
동로마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옛 로마 영토의 일부를 되찾고 법전을 정비했습니다. 서유럽은 게르만 왕국들의 시대였고, 중국은 589년 수나라로 다시 통일되었습니다.
-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편찬(529~534년)과 이탈리아·북아프리카 재정복.
- 537년 하기아 소피아 완공.
- 541년부터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 지중해를 휩쓸었습니다.
- 589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했습니다.
- 6세기 중반 백제를 통해 일본에 불교가 전해졌습니다.
2. 537년 — 하기아 소피아
폭동으로 옛 성당이 불탄 뒤 유스티니아누스가 전례 없는 규모로 다시 지었습니다. 5년 남짓 만에 거대한 돔을 올린 성당이 완성되었습니다.
동방 기독교 전례의 상징적 공간이 되었습니다. 빛이 돔 아래 창들로 들어와 공간 전체가 떠 있는 듯 보이는 설계였습니다.
돔 구조는 여러 차례 무너지고 보수되었습니다. 지금 모습은 오랜 개축의 결과입니다.
이 건물의 이력은 그 자체로 종교사입니다. 성당으로 지어져, 1453년 이후 모스크가 되었고, 1935년에 박물관이 되었다가, 2020년에 다시 모스크가 되었습니다. 한 건물이 두 종교의 역사를 함께 품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15세기 장과 21세기 장에서 다시 만납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로마법도 집대성했습니다. 유럽 법 전통의 뿌리가 된 이 법전에는 종교 조항도 있습니다.
이 법전은 유대인과 비정통 기독교인의 권리를 제한하는 조항을 함께 담았습니다. 그 방식이 이후 중세 유럽의 모델이 됩니다. 위대한 법전과 차별의 제도화가 같은 문서 안에 있습니다.
3. 529년 — 기도하고 일하라
서로마가 무너진 뒤 수도 생활의 기준이 지역마다 제각각이었습니다.
베네딕도가 온건하고 실행 가능한 공동생활 규칙을 정리했습니다. 극단적 고행이 아니라 기도와 노동의 균형, 순명과 한곳에 머무는 정주를 축으로 삼았습니다.
규칙서에는 이전 문헌(《스승의 규칙》)과 겹치는 부분이 많아 편집의 성격도 있습니다. 규칙이 쓰인 해도 529년으로 못 박기는 어려워, 6세기 중반 어느 무렵으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그의 생애 기록은 거의 전부 반세기 뒤 그레고리우스 1세가 쓴 《대화집》에 의존합니다.
이 규칙이 서유럽 수도원의 표준이 되어 천 년 넘게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가 뜻밖의 것이었습니다. 수도원이 농업·필사·교육의 거점이 되면서, 무너진 사회에서 문헌과 기술이 보존되었습니다. 규칙을 쓴 사람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기도하는 공동체를 만들려던 문서가 문명을 지키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몬테카시노 수도원은 여러 번 파괴되고 다시 지어졌습니다. 지금 산 위에 서 있는 건물은 재건된 것입니다.
4. 590년 — 섬기는 목회
그레고리우스 1세가 로마 주교가 되었습니다.
그는 목회 지침서를 남겼고, 596년 잉글랜드에 선교단을 보냈습니다. 그가 선교사에게 보낸 편지에는 주목할 만한 지침이 있습니다. 현지의 관습을 급히 없애지 말라는 것입니다. 문화 적응 선교의 이른 사례로 인용됩니다.
이 편지(601년, 이른바 「멜리투스에게 보낸 편지」)는 원본이 아니라 백여 년 뒤 베다의 《잉글랜드 교회사》에 실려 전합니다. 편지 자체의 진위를 두고도 견해가 갈립니다. 널리 인용되는 만큼 어디에 실려 전하는지도 함께 적어 둡니다.
서방 교회의 조직과 선교 방식을 정한 인물로 평가됩니다.
한편 동로마 법 아래에서 유대인의 법적 권리는 계속 좁아졌습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이 무렵 큰 틀이 잡혔고, 손질은 그 뒤로도 이어집니다.
5. 538년 또는 552년 — 동아시아 불교권의 완성
한반도의 백제가 야마토 왕권과 교류하며 불상과 경전을 보냈습니다. 이 장면을 전하는 자료는 백오십 년 넘게 뒤인 720년에 엮인 《일본서기》와 《원흥사연기》입니다. 당대의 기록이 아니라 뒤에서 정리한 서술입니다.
일본 왕실 안에서 받아들일 것인가를 두고 다툼이 있었고, 결국 수용 쪽이 힘을 얻었습니다.
전래 연도는 사료마다 538년과 552년으로 갈립니다. 하나로 확정하지 않습니다. 초기 수용이 정치적 동맹의 일부였는지도 논의됩니다.
이로써 인도에서 시작해 중앙아시아와 중국과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이르는 동아시아 불교의 길이 이어졌습니다. 다만 「완성」이라고 적기는 이릅니다. 일본에서 불교가 왕권의 뒷받침을 받아 자리를 잡는 것은 다음 세기의 일이고, 티베트와 베트남으로 가는 길은 아직 열리기 전입니다. 일본에서는 재래 신앙(신도)과 오래 공존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게 됩니다.
중국에서는 천태 등 독자적 교학이 자라났습니다. 인도에서 온 가르침이 중국의 사유 방식으로 다시 조직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6. 두 방향의 기독교
| 동방 교회 | 서방 교회 | 동아시아 불교 | |
|---|---|---|---|
| 중심 | 황제와 총대주교 | 수도원과 로마 주교 | 왕실 후원 |
| 이 세기의 상징 | 하기아 소피아 | 베네딕도 규칙 | 일본 전래 |
| 사회에서의 역할 | 제국 질서의 일부 | 무너진 행정의 대역 | 국가 통합의 매개 |
| 뒤에 무엇이 되었나 | 동방정교회 | 가톨릭교회 | 동아시아 불교권 |
같은 신앙이 다른 정치 환경에서 다른 모양이 되었습니다. 동방에는 제국이 있었고 서방에는 없었습니다. 그 차이가 두 교회의 성격을 갈랐습니다.
그리고 이 세기가 끝날 무렵, 아라비아 반도의 대상 교역 도시 메카가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이슬람교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다음 세기의 무대입니다.
이 장이 남긴 네 문장
- 동방 교회는 황제권과 결합했고, 서방 교회는 수도원을 통해 사회를 떠받쳤습니다.
- 베네딕도 규칙은 이후 천 년 서방 수도 생활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 불교가 일본까지 이르렀습니다. 다만 자리를 잡는 것은 다음 세기의 일입니다.
- 이슬람교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아라비아는 다음 세기의 무대가 됩니다.
생각해 볼 질문
- 수도원이 학문과 농업의 중심이 된 것은 우연이었을까요?
- 황제가 교회를 이끄는 체제와 교회가 사회를 떠받치는 체제는 어떻게 다를까요?
- 종교가 새 땅에 전해질 때 왕실의 결정은 얼마나 중요할까요?
이 장에서 쓴 자료
문헌
- 베네딕도 규칙 (529년경, 라틴어)
-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529~534년, 라틴어)
자료 사진
- 하기아 소피아 내부 (실제 유물) · 몬테카시노 수도원 (실제 유물)
참고
- 프로코피우스 《건축론》
- 그레고리우스 1세 서한집, 베다 《잉글랜드 교회사》
- 《일본서기》 등 동아시아 사서
「종교사 한눈」이 모아 둔 자료로 작성한 원고입니다.
검수 이력
- 1차 · 사실 확인 — 하기아 소피아가 박물관이 된 해를 1935년으로 특정. 그레고리우스 1세의 잉글랜드 선교단 파견을 596년으로 명시. 베네딕도 규칙의 연대가 529년으로 못 박기 어렵다는 점과 그의 생애 기록이 반세기 뒤 《대화집》에 의존한다는 점을 추가. 탈무드 서술을 5세기 장과 같은 기준으로 맞춤.
- 2차 · 관점 검토 — 「현지 관습을 없애지 말라」는 편지가 601년의 것이고 백여 년 뒤 베다의 책에 실려 전한다는 점, 진위 논쟁이 있다는 점을 밝힘. 일본 전래를 전하는 자료가 720년의 《일본서기》임을 명시. 「동아시아 불교권이 완성되었다」는 서술을 고쳐, 일본의 정착이 다음 세기이고 티베트·베트남은 아직임을 밝힘.
- 3차 · 저작권 확인 — 자료 사진 2장의 이용 조건 확인.
- 남은 것 · 외부 검토 — 쓴 쪽과 검수한 쪽이 같습니다. 출판 전 제3자의 확인이 필요합니다.
1. 세기를 여는 한 장면
537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하기아 소피아가 세워졌다. 같은 시기 이탈리아의 한 산 위에서는 베네딕도가 수도사들을 위한 규칙을 썼다. 화려한 돔과 소박한 규칙 — 이 세기의 기독교는 이 두 모습으로 남았다. 그리고 아라비아에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도시 메카에서 곧 큰 변화가 시작된다.
2. 6세기의 세계사 배경
동로마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옛 로마 영토의 일부를 되찾고 법전을 정비했다. 서유럽은 게르만 왕국들의 시대였고, 중국은 589년 수나라로 다시 통일되었다. 일본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해졌다.
-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편찬(529~534년)과 이탈리아·북아프리카 재정복.
- 537년 하기아 소피아 완공.
- 541년부터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 지중해를 휩쓸었다.
- 589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했다.
- 6세기 중반 백제를 통해 일본에 불교가 전해졌다.
3. 한눈에 보는 연대표
| 연도 | 일어난 일 | 관련 종교 |
|---|---|---|
| 529년경 | 베네딕도가 수도 규칙을 정한다. 서방 수도원의 표준이 되지만, 규칙이 쓰인 해는 6세기 중반 어느 무렵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 기독교 |
| 537년 | 하기아 소피아가 완공된다. | 기독교 |
| 553년 |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 기독교 |
| 6세기 | 동로마 법이 유대인의 권리를 더 제한한다. | 유대 |
| 538년 또는 552년 | 일본에 불교가 공식 전래된다. 연대는 사료마다 538년과 552년으로 다르며, 이를 전하는 《일본서기》는 720년에 엮인 후대 기록이다. (학문적 해석) | 불교 |
| 590년 | 그레고리우스 1세가 로마 주교가 된다. 596년 잉글랜드에 선교단을 보내고, 601년 편지에서 현지 관습을 급히 없애지 말라고 지시한다(베다의 책에 실려 전한다). | 기독교 |
| 6세기 말 | 아라비아 반도의 대상 교역 도시 메카가 성장한다. |
4. 유대교
탈무드 시대의 마무리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대체로 지금의 형태를 갖추었다. 동로마와 서방 게르만 왕국 모두에서 유대인의 법적 권리는 점차 좁아졌다.
5. 기독교
돔과 수도 규칙
동방에서는 황제와 교회가 함께 움직이는 체제가 완성되었고, 서방에서는 수도원이 학문·농업·구제의 거점이 되었다. 두 지역 교회의 성격 차이가 더 뚜렷해졌다.
- 베네딕도 규칙은 기도와 노동의 균형을 담았다.
- 그레고리우스 1세는 잉글랜드 선교를 파견하고 로마 교회의 위상을 높였다.
6. 가톨릭
서방 라틴 교회가 수도원과 로마 주교를 축으로 자리를 잡아 갔다.
7. 동방정교회
황제와 총대주교가 함께 다스리는 동방 교회 체제가 완성 단계에 들어섰다.
8. 개신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16세기 종교개혁 과정에서 여러 갈래로 형성되었다.
9. 이슬람교
아라비아 반도에서 다음 세기에 시작된다. 이 시기 메카는 여러 신을 모시는 순례 도시였다.
10. 불교
동아시아 전역으로
중국에서 천태 등 독자적 교학이 자라났고,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까지 불교가 전해졌다. 동아시아 불교권이 이 세기에 완성된다.
11. 종교 간 관계
기독교 ↔ 유대교 — 박해와 차별
동로마 법전은 유대인의 공직·증언·개종 활동을 제한했다. 법으로 지위를 규정하는 방식이 이후 유럽의 모델이 된다.
12. 이 세기의 결정적 사건
베네딕도 규칙의 제정 (529년)
서로마가 무너진 뒤 수도 생활의 기준이 지역마다 제각각이었다.
전개
베네딕도가 온건하고 실행 가능한 공동생활 규칙을 정리했다.
결과
- 기도와 노동, 순명과 정주를 축으로 한 수도 생활이 자리 잡았다
장기적 영향
- 서유럽 수도원의 표준이 되어 천 년 넘게 이어졌다
- 수도원이 농업·필사·교육의 거점이 되면서 문헌과 기술이 보존되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가톨릭 |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기린다. |
| 역사학계 | 규칙서에는 이전 문헌(《스승의 규칙》)과 겹치는 부분이 많아 편집의 성격도 있다. |
하기아 소피아 완공 (537년)
폭동으로 옛 성당이 불탄 뒤 유스티니아누스가 전례 없는 규모로 다시 지었다.
전개
5년 남짓 만에 거대한 돔을 올린 성당이 완성되었다.
결과
- 동방 기독교 전례의 상징적 공간이 되었다
장기적 영향
- 1453년 이후 모스크가 되었고, 20세기에 박물관, 2020년에 다시 모스크가 되었다
- 한 건물이 두 종교의 역사를 함께 품은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동방정교회 | 정교회 전례 미학의 정점으로 기억한다. |
| 이슬람교 | 정복 이후 오스만 건축의 본보기가 되었다. |
| 역사학계 | 돔 구조는 여러 차례 무너지고 보수되었다. 지금 모습은 오랜 개축의 결과다. |
일본 불교 전래 (538년)
한반도의 백제가 야마토 왕권과 교류하며 불상과 경전을 보냈다.
전개
왕실 안에서 받아들일 것인가를 두고 다툼이 있었고, 결국 수용 쪽이 힘을 얻었다.
결과
- 일본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들어왔다
장기적 영향
- 동아시아 불교권이 완성되었다
- 재래 신앙(신도)과 오래 공존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불교 | 새 땅에 종교가 들어갈 때 왕실의 결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 준다. |
| 역사학계 | 전래 연도는 사료마다 538년과 552년으로 갈린다. 하나로 확정하지 않는다. |
학계의 평가
연대뿐 아니라 초기 수용의 성격(정치적 동맹의 일부였는지)이 논의된다.
13. 주요 인물
| 인물 | 생몰 | 활동 | 후대의 평가 |
|---|---|---|---|
| 유스티니아누스 1세 | 482년경 ~ 565년 | 로마법을 집대성했다 / 하기아 소피아를 지었다 / 옛 서방 영토 일부를 되찾았다 | 동로마 최고의 황제로 꼽히지만, 그의 법은 유대인과 비정통 기독교인의 권리를 제한하는 조항도 함께 담았다. |
| 누르시아의 베네딕도 | 480년경 ~ 547년경 | 수도 규칙을 남겼다 /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세웠다 | 서방 수도 생활의 아버지로 불린다. 생애 기록은 대부분 그레고리우스 1세의 서술에 의존한다. |
| 그레고리우스 1세 | 540년경 ~ 604년 | 로마 주교로 일했다 / 잉글랜드에 선교단을 보냈다 / 목회 지침서를 남겼다 | 서방 교회의 조직과 선교 방식을 정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가 잉글랜드 선교사에게 보낸 편지는 문화 적응 선교의 이른 사례로 인용된다. |
14. 주요 문헌과 사상
| 문헌 | 시기 | 언어 | 핵심 내용 |
|---|---|---|---|
| 베네딕도 규칙 | 529년경 | 라틴어 | 하루의 기도 시간, 노동, 식사, 손님 접대, 원장의 직무 등 공동생활의 세부를 정한다. |
|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 529~534년 | 라틴어 | 로마법을 집대성한 법전. 종교에 관한 조항도 다수 포함한다. |
15. 지도와 이동 경로
6세기 — 돔과 규칙, 그리고 동쪽 끝 (501~600년)
| 장소 | 성격 | 설명 |
|---|---|---|
| 콘스탄티노폴리스 | 도시 | 537년 하기아 소피아 완공. |
| 몬테카시노 | 수도원·학교 | 베네딕도 규칙의 자리. |
| 라벤나 | 도시 | 모자이크로 유명한 동로마의 서방 거점. |
| 캔터베리 | 도시 | 597년 잉글랜드 선교의 도착지. |
| 메카 | 도시 | 다음 세기의 무대. 이 시기에는 순례 도시였다. |
| 아스카 | 도시 | 일본 불교 전래의 무대. |
경계 확실성: 대체로 확실
| 경로 | 성격 | 설명 |
|---|---|---|
| 한반도를 거친 일본 전래 | 선교 |
16. 사진과 유물로 보는 역사
17. 핵심 정리
- 동방 교회는 황제권과 결합했고, 서방 교회는 수도원을 통해 사회를 떠받쳤다.
- 베네딕도 규칙은 이후 천 년 서방 수도 생활의 기준이 되었다.
- 불교는 이 세기에 동아시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 이슬람교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아라비아는 다음 세기의 무대가 된다.
18. 비교표
| 동방 교회 | 서방 교회 | 동아시아 불교 | |
|---|---|---|---|
| 중심 | 황제와 총대주교 | 수도원과 로마 주교 | 왕실 후원 |
| 이 세기의 상징 | 하기아 소피아 | 베네딕도 규칙 | 일본 전래 |
| 사회에서의 역할 | 제국 질서의 일부 | 무너진 행정의 대역 | 국가 통합의 매개 |
| 뒤에 무엇이 되었나 | 동방정교회 | 가톨릭교회 | 동아시아 불교권 |
19. 생각해 볼 질문
- 수도원이 학문과 농업의 중심이 된 것은 우연이었을까?
- 황제가 교회를 이끄는 체제와 교회가 사회를 떠받치는 체제는 어떻게 다를까?
- 종교가 새 땅에 전해질 때 왕실의 결정은 얼마나 중요할까?
20. 확인 퀴즈
하기아 소피아가 완공된 해는?
- 330년
- 451년
- 537년
- 1054년
서방 수도 생활의 표준이 된 규칙을 남긴 인물은?
- 베네딕도
- 아우구스티누스
- 그레고리우스 1세
- 구마라집
6세기에 아직 시작되지 않은 종교는?
- 이슬람교
- 불교
- 기독교
- 유대교
정답 1) 3 · 2) 1 · 3) 1
해설
1. 537년 유스티니아누스 때 완공되었다.
2. 베네딕도 규칙은 기도와 노동의 균형을 담았다.
3. 이슬람교는 7세기에 시작된다.
21. 주석과 참고문헌
- 프로코피우스의 저작
- 베네딕도 규칙
- 《일본서기》 등 동아시아 사서
제2장 7세기의 세계 종교
601년~700년
아라비아에서 이슬람교가 시작되어 한 세기 만에 중동의 종교 지형을 바꾼다.
읽는 글
제7장 7세기의 세계 종교
아라비아에서 이슬람교가 시작되어 한 세기 만에 중동의 종교 지형을 바꿉니다
601년 ~ 700년
여는 장면 — 동굴에서 시작된 일
610년 무렵, 메카의 한 상인이 동굴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전했습니다.
처음에는 몇 사람이 따랐습니다. 도시의 지도층은 그를 배척했습니다. 622년 그는 야스리브로 옮겨 갔고, 그곳에서 신앙 공동체가 곧 정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백 년이 못 되어 대서양에서 인더스강까지가 하나의 종교·정치 세계로 묶였습니다.
이 세기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살던 땅의 지도가 다시 그려진 세기입니다.
1. 지친 두 제국
동로마와 사산조 페르시아가 오랜 전쟁으로 지쳐 있을 때 아라비아에서 새로운 세력이 일어났습니다. 사산조는 무너졌고 동로마는 시리아·이집트를 잃었습니다.
- 602~628년 동로마–사산조 대전쟁으로 두 제국이 소모되었습니다.
- 618년 당나라가 세워져 국제적 제국을 이루었습니다.
- 636년 야르무크 전투, 651년 사산조 멸망.
- 이슬람 세력이 시리아·이집트·이란·북아프리카로 확장했습니다.
- 티베트에 통일 왕국이 서고 불교가 전해졌습니다.
두 제국이 서로를 소진시킨 자리에 새 세력이 들어섰습니다. 이것이 이 세기 확장의 정치적 조건입니다.
2. 622년 — 히즈라
메카의 지도층이 무함마드와 그 추종자들을 배척하면서 공동체의 존립이 어려워졌습니다.
야스리브(메디나) 주민들이 중재를 요청하며 그를 초청했습니다. 무함마드와 신자들이 그곳으로 옮겨 가 공동체를 세우고 도시의 여러 집단과 협약을 맺었습니다.
이 해가 이슬람력의 원년이 되었습니다. 무함마드의 출생이나 사망이 아니라 이주가 기점입니다.
이 선택이 뜻하는 바가 큽니다. 이슬람력이 기념하는 것은 한 사람의 생애가 아니라 공동체가 시작된 순간입니다. 신앙 공동체가 정치 공동체의 성격을 함께 갖게 된 것이 이슬람 역사의 특징이 됩니다.
630년 메카가 무슬림 세력에 들어왔고, 632년 무함마드가 사망하면서 칼리프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슬람은 무함마드를 예언자 계보의 마지막으로 믿으며, 쿠란을 그에게 주어진 계시로 신앙합니다.
초기 이슬람사의 사료는 대부분 후대에 정리된 것이라 세부 사실 확인에는 사료 비판이 필요합니다.
버밍엄 대학교에는 아주 이른 쿠란 사본 두 장이 있습니다. 가죽에 아랍어가 쓰인 이 조각은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이른 쿠란 사본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이 잰 것은 글씨가 아니라 가죽입니다. 나온 값(568~645년)은 무함마드의 활동기보다 이른 쪽까지 걸쳐 있어, 이 사본을 두고 지금도 논의가 이어집니다. 「7세기 사본」이라는 말을 「7세기에 쓰였음이 확정되었다」로 읽지 않도록 적어 둡니다.
3. 638년 — 예루살렘이 넘어가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이 차례로 무슬림 세력에 넘어갔습니다. 638년 예루살렘이 포위 끝에 항복 조건을 협상해 넘어갔다고 전합니다.
기독교 주민과 성소의 존속이 인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거주가 다시 허용되었습니다. 동로마 시기에 금지되었던 것입니다.
이슬람 쪽은 항복 조건을 지킨 관대한 접수로 기억합니다. 기독교 쪽에서는 성지 관리권의 상실로 서술되며, 훗날 십자군의 명분과 연결됩니다. 유대교 쪽에서는 거주 금지가 풀린 계기로 기억됩니다.
항복 협정문으로 전해지는 문서의 원형은 후대의 편집을 거쳤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691년 그 자리에 바위 돔이 세워졌습니다. 푸른 타일과 금빛 돔으로 덮인 팔각형 건물입니다. 세 종교의 성지가 한 도시에 겹치는 오늘날의 구도가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4. 정복인가 개종인가
여기서 반드시 구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정복은 대체로 개종 강요가 아니라 세금과 지배 체제의 변화로 진행되었습니다. 주민의 개종은 여러 세대에 걸쳐 서서히 일어났습니다. 초기에는 기독교인·유대인·조로아스터교인이 다수인 지역이 많았습니다.
'정복'과 '개종'을 같은 말로 쓰면 이 세기를 크게 잘못 이해하게 됩니다.
'성서의 백성'으로서 인두세를 내고 자기 종교를 유지하는 딤미 제도가 틀을 잡아 갔습니다. 다만 이 제도가 한 번에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흔히 인용되는 「우마르의 협약」도 문서 형태로 정리된 것은 훨씬 뒤이며, 조건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크게 달랐습니다.
딤미 제도는 보호와 차별을 동시에 담은 제도입니다. 완전한 평등은 아니었지만, 동로마 아래에서보다 제약이 덜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관용의 낙원'도, '끊임없는 억압'도 사실과 다릅니다.
중동 기독교는 이때부터 점차 소수 종교가 됩니다. 다만 콥트·시리아 교회 등은 오히려 동로마의 교리 압박에서 벗어난 면도 있었습니다. 5세기 공의회에서 갈라진 교회들에게는 지배자가 바뀐 것이 반드시 나쁘기만 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5. 680년 — 카르발라
무함마드 사후 공동체 지도자의 자격과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이어졌습니다. 656~661년 제1차 내전이 있었고, 661년 우마이야 왕조가 다마스쿠스에 세워졌습니다.
680년, 무함마드의 외손자 후사인과 소수의 일행이 카르발라에서 우마이야 군에 포위되어 살해되었습니다.
시아 전통은 불의에 맞선 순교로 기억하며 아슈라로 추모합니다. 수니 전통도 후사인의 죽음을 비극으로 봅니다. 다만 그 의미 부여의 무게가 다릅니다.
수니·시아의 분기를 하나의 사건으로 환원하지 않는 것이 최근 연구의 경향입니다.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뿌리이며, 카르발라는 결정적 기억입니다.
6. 같은 세기, 동쪽에서
629년, 현장이라는 승려가 국법을 어기고 출국했습니다. 한역 경전의 번역이 서로 달라 원전을 직접 확인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17년에 걸쳐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의 여러 불교 중심지에서 배우고 돌아왔습니다. 대량의 산스크리트 경전을 가져와 번역 사업을 벌였고, 그 경전을 보관하려고 세운 탑이 시안의 대안탑입니다.
그가 남긴 《대당서역기》는 7세기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지리·풍습·불교 상황을 기록한 책입니다.
이 기록은 인도 고고학 발굴의 실마리를 제공했을 만큼 사료 가치가 높습니다. 인도인이 아닌 사람이 쓴 기록이 인도 고대사 연구의 기본 자료가 된 것입니다.
같은 세기 티베트에 통일 왕국이 섰고, 전승은 이때 불교가 들어왔다고 전합니다. 다만 티베트에 불교가 실제로 뿌리내리는 것은 다음 세기 삼예 사원의 건립(779년경) 이후로 봅니다. 왕실이 받아들인 시점과 자리를 잡은 시점을 구분해 적습니다.
그리고 635년, 동방교회(경교) 선교사가 당의 수도 장안에 도착했습니다. 이 일을 전하는 자료는 백오십 년 뒤인 781년에 세워진 대진경교유행중국비, 곧 그 교회 자신이 남긴 비석입니다. 5세기에 갈라져 나간 그 교회가 이백 년 만에 중국에 이른 것입니다. 당의 국제적 개방성 속에서 여러 종교가 장안에 공존했습니다.
7. 세 종교가 만난 자리
| 유대교 | 기독교 | 이슬람교 | |
|---|---|---|---|
| 이 세기의 처지 | 이슬람 통치 아래 딤미 | 중동에서 소수로, 유럽에서 확장 | 시작과 급속한 확장 |
| 예루살렘 | 638년 이후 거주 재허용 | 성지 관리권 축소 | 638년 점령, 691년 바위 돔 |
| 공통점 | 유일신·아브라함 전통 | 유일신·아브라함 전통 | 유일신·아브라함 전통 |
| 핵심 쟁점 | 계시의 완성 여부 | 예수의 신성 | 예언자 계보의 마지막 |
이슬람교는 아브라함을 공통 조상으로 인정하고 유대인과 기독교인을 '성서의 백성'으로 규정했습니다. 유일신 신앙, 예언자 전통, 율법 중심의 생활에서 겹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관계는 처음부터 가까움과 논쟁을 함께 안고 있었습니다.
세 종교의 갈등이 낯설어서가 아니라 많은 것을 공유하기 때문에 격렬해지는 면이 있습니다. 이 세기부터 오늘까지, 이 구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 장이 남긴 여섯 문장
- 이슬람교는 7세기 아라비아에서 시작되어 한 세기 만에 중동·북아프리카·이란을 아우르는 세계로 퍼졌습니다.
- 622년 히즈라가 이슬람력의 기점이며, 신앙 공동체가 정치 공동체가 된 전환점입니다.
- 정복은 대체로 지배 체제의 교체였고, 주민의 개종은 여러 세대에 걸쳐 서서히 일어났습니다.
- 딤미 제도는 유대인·기독교인에게 보호와 차별을 동시에 주었습니다. 한쪽만 강조하지 않습니다.
- 지도자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수니·시아 전통이 갈라지는 뿌리가 되었습니다.
- 같은 세기에 현장이 인도를 다녀왔고 티베트에 불교가 전해졌습니다.
생각해 볼 질문
- 많은 것을 공유하는 종교들 사이의 논쟁이 더 치열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정복'과 '개종'을 같은 말로 쓰면 무엇을 놓치게 될까요?
- 딤미 제도를 관용이라 불러야 할까요, 차별이라 불러야 할까요? 둘 다라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이 장에서 쓴 자료
문헌
- 쿠란 (7세기, 아랍어) — 비르밍엄 사본 등 이른 시기의 사본 조각이 남아 있음
- 현장 《대당서역기》 (646년, 한문)
자료 사진
- 바위 돔 (실제 유물 · 691년) · 버밍엄 쿠란 사본 (실제 유물 · 가죽의 연대는 568~645년으로 측정) · 대안탑 (실제 유물 · 652년 창건, 지금 모습은 후대의 개축)
참고
- 초기 이슬람사 연구서와 사료 비판 연구
- 동로마·시리아어 연대기 (외부 시선의 근접 사료)
「종교사 한눈」이 모아 둔 자료로 작성한 원고입니다.
검수 이력
- 1차 · 사실 확인 — 버밍엄 쿠란 사본의 연대 측정이 글씨가 아니라 가죽을 잰 것이고 그 값(568~645년)이 무함마드의 활동기보다 이른 쪽까지 걸쳐 있다는 점을 밝힘. 티베트 불교의 전래와 정착을 구분해, 뿌리내린 시점을 다음 세기 삼예 사원(779년경) 이후로 적음. 경교 전래를 전하는 자료가 781년 대진경교유행중국비임을 명시.
- 2차 · 관점 검토 — 딤미 제도가 이 세기에 완성된 것처럼 읽히던 대목을 고쳐, 「우마르의 협약」이 훨씬 뒤에 문서로 정리되었고 조건이 시대·지역마다 달랐다는 점을 추가. 딤미를 관용과 차별 어느 한쪽으로만 적지 않는 기존 서술은 유지.
- 3차 · 저작권 확인 — 자료 사진 3장의 이용 조건과 제작 시기 확인.
- 남은 것 · 외부 검토 — 쓴 쪽과 검수한 쪽이 같습니다. 출판 전 제3자의 확인이 필요합니다.
1. 세기를 여는 한 장면
610년 무렵 메카의 한 상인이 동굴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전했다. 처음에는 몇 사람이 따랐고, 도시의 지도층은 그를 배척했다. 622년 그는 야스리브로 옮겨 갔고, 그곳에서 신앙 공동체가 곧 정치 공동체가 되었다. 그로부터 백 년이 못 되어 대서양에서 인더스강까지가 하나의 종교·정치 세계로 묶였다. 이 세기는 유대교·기독교가 살던 땅의 지도가 다시 그려진 세기다.
2. 7세기의 세계사 배경
동로마와 사산조 페르시아가 오랜 전쟁으로 지쳐 있을 때 아라비아에서 새로운 세력이 일어났다. 사산조는 무너졌고 동로마는 시리아·이집트를 잃었다. 동아시아에서는 당나라가 전성기를 열었다.
- 602~628년 동로마–사산조 대전쟁으로 두 제국이 소모되었다.
- 618년 당나라가 세워져 국제적 제국을 이루었다.
- 636년 야르무크 전투, 651년 사산조 멸망.
- 이슬람 세력이 시리아·이집트·이란·북아프리카로 확장했다.
- 티베트에 통일 왕국이 서고 불교가 전해졌다.
3. 한눈에 보는 연대표
| 연도 | 일어난 일 | 관련 종교 |
|---|---|---|
| 610년경 | 무함마드가 계시를 받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전통의 주장) | 이슬람 |
| 622년 | 히즈라 — 무함마드와 신자들이 메디나로 이주한다. 이슬람력의 원년이다. | 이슬람 |
| 630년 | 메카가 무슬림 세력에 들어온다. | 이슬람 |
| 632년 | 무함마드가 사망하고 칼리프 시대가 시작된다. | 이슬람 |
| 636년 | 야르무크 전투로 동로마가 시리아를 잃는다. | 이슬람, 기독교 |
| 638년 | 예루살렘이 무슬림 세력에 넘어간다. | 이슬람, 기독교, 유대 |
| 650년경 | 쿠란 본문이 표준화되었다고 전한다. (전통의 주장) | 이슬람 |
| 656~661년 | 제1차 내전(피트나). 지도자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이어진다. | 이슬람 |
| 661년 | 우마이야 왕조가 다마스쿠스에 세워진다. | 이슬람 |
| 680년 | 카르발라 사건. 후사인이 살해되며 시아 전통의 기억에 결정적 사건이 된다. | 이슬람 |
| 691년 | 예루살렘에 바위 돔이 세워진다. | 이슬람 |
| 629~645년 | 현장이 인도를 다녀와 경전을 가지고 돌아온다. | 불교 |
| 635년 | 동방교회(경교) 선교사가 당의 수도 장안에 도착한다. 이를 전하는 자료는 781년에 세워진 대진경교유행중국비다. | 기독교 |
4. 유대교
새 지배자 아래의 유대인
이슬람 세력의 확장으로 중동 대부분의 유대인이 무슬림 통치 아래 놓였다. ‘성서의 백성’으로서 지즈야(인두세)를 내고 자기 종교를 유지하는 딤미 제도가 자리 잡았다. 완전한 평등은 아니었지만, 동로마 아래에서보다 제약이 덜한 경우가 많았다.
- 638년 이후 유대인의 예루살렘 거주가 다시 가능해졌다.
- 바빌로니아(이라크) 학원들이 계속 유대 학문의 중심이었다.
- 딤미 제도는 보호와 차별을 동시에 담은 제도다. 한쪽만 말하지 않는다.
5. 기독교
중동 기독교가 소수가 되기 시작하다
시리아·이집트·북아프리카의 오래된 기독교 지역이 무슬림 통치 아래 들어갔다. 교회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점차 소수 종교가 되었다. 한편 서방에서는 잉글랜드 선교가 진행되었고, 동방교회는 중앙아시아를 지나 중국까지 이르렀다.
- 콥트·시리아 교회 등은 오히려 동로마의 교리 압박에서 벗어난 면도 있었다.
- 635년 동방교회가 당의 장안에 이르러 경교로 알려졌다.
- 잉글랜드와 게르만 지역 선교가 이어졌다.
6. 가톨릭
서방 라틴 교회가 잉글랜드·프랑크 지역 선교로 기반을 넓혔다. 로마 주교의 지도력이 서방에서 점점 커졌다.
7. 동방정교회
동로마 제국은 시리아·이집트를 잃고 소아시아와 발칸 중심의 제국으로 축소되었다. 교회도 그 판도 안에서 재편되었다.
8. 개신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16세기 종교개혁 과정에서 여러 갈래로 형성되었다.
9. 이슬람교
한 세대 만에 제국이 되다
무함마드의 활동으로 시작된 신앙 공동체는 그의 사후 급속히 확장했다. 유일신 신앙, 예언자 전통, 성서의 백성에 대한 인식 등에서 유대교·기독교와 겹치는 부분이 많았고, 그래서 두 종교와의 관계는 처음부터 가까움과 논쟁을 함께 안고 있었다. 지도자 계승 문제는 수니·시아 전통이 갈라지는 뿌리가 되었다.
- 622년 히즈라가 이슬람력의 기점이다.
- 쿠란은 무함마드에게 주어진 계시를 모은 것으로 신앙된다.
- 656~661년 내전과 680년 카르발라 사건이 수니·시아 분기의 배경이다.
- 정복은 대체로 개종 강요가 아니라 세금과 지배 체제의 변화로 진행되었다. 개종은 여러 세대에 걸쳐 서서히 일어났다.
10. 불교
현장의 여행과 티베트 전래
현장은 17년에 걸쳐 인도를 다녀와 방대한 경전을 번역했고, 그 여행 기록은 인도사 연구의 중요한 사료가 되었다. 티베트에는 이 세기에 불교가 전해져 이후 독자적 전통으로 발전한다.
- 《대당서역기》는 7세기 중앙아시아·인도를 알려 주는 1차 사료다.
- 티베트 불교의 시작이 이 세기다.
- 당의 국제적 개방성 속에서 여러 종교가 장안에 공존했다.
11. 종교 간 관계
유대교 ↔ 이슬람교 — 공통 기원과 공유 전통
이슬람교는 아브라함을 공통 조상으로 인정하고 유대인을 ‘성서의 백성’으로 규정했다. 신학적으로는 유일신 신앙과 율법 중심의 생활에서 닮은 점이 많다.
유대교의 자리에서: 유대교는 이슬람교를 우상숭배가 아닌 유일신 종교로 보는 견해가 후대 랍비 문헌에 나타난다.
이슬람교의 자리에서: 이슬람교는 유대인을 이전 계시를 받은 공동체로 보되, 그 계시가 온전히 지켜지지 않았다고 본다.
기독교 ↔ 이슬람교 — 전쟁과 충돌
동로마와의 전쟁으로 시리아·이집트·북아프리카의 기독교 지역이 이슬람 통치 아래 들어갔다. 군사적 충돌과 함께, 기독교 공동체가 계속 존재하는 공존 구조도 만들어졌다.
기독교의 자리에서: 동로마 쪽 기록은 이를 재앙으로 서술한다.
이슬람교의 자리에서: 이슬람 쪽 기록은 정당한 확장으로 서술한다.
유대교 ↔ 기독교 — 정치적 협력
638년 이후 예루살렘에서 유대인 거주가 다시 허용되면서, 동로마 시기와는 다른 세 종교의 공존 구도가 만들어졌다.
12. 이 세기의 결정적 사건
히즈라(메카에서 메디나로의 이주) (622년)
메카의 지도층이 무함마드와 그 추종자들을 배척하면서 공동체의 존립이 어려워졌다.
원인
- 메카 지도층의 압박
- 야스리브(메디나) 주민들의 초청과 중재 요청
전개
무함마드와 신자들이 메디나로 옮겨 가 공동체를 세우고 도시의 여러 집단과 협약을 맺었다.
결과
- 신앙 공동체가 정치 공동체의 성격을 함께 갖게 되었다
장기적 영향
- 이 해가 이슬람력의 원년이 되었다
- 종교와 정치 공동체가 하나로 출발한 것이 이슬람 역사의 특징이 되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이슬람교 | 신앙 공동체(움마)의 출발점으로 기억한다. |
| 역사학계 | 초기 이슬람사의 사료는 대부분 후대에 정리된 것이라 세부 사실 확인에는 사료 비판이 필요하다. |
현장의 구법 여행 (629년~645년)
한역 경전의 번역이 서로 달라 원전을 직접 확인할 필요가 커졌다.
전개
현장은 국법을 어기고 출국해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의 여러 불교 중심지에서 배우고 돌아왔다.
결과
- 대량의 산스크리트 경전을 가져와 번역 사업을 벌였다
장기적 영향
- 동아시아 불교 교학의 수준을 크게 끌어올렸다
- 《대당서역기》는 7세기 중앙아시아·인도사의 중요한 사료가 되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불교 | 구법의 모범으로 기억된다. |
| 역사학계 | 그의 기록은 인도 고고학 발굴의 실마리를 제공했을 만큼 사료 가치가 높다. |
예루살렘의 무슬림 접수 (638년)
동로마와 사산조의 오랜 전쟁으로 지친 시리아·팔레스타인이 차례로 무슬림 세력에 넘어갔다.
전개
포위 끝에 도시가 항복 조건을 협상해 넘어갔다고 전한다.
결과
- 기독교 주민과 성소의 존속이 인정되었다
- 유대인의 거주가 다시 허용되었다
장기적 영향
- 691년 바위 돔이 세워지며 예루살렘이 이슬람에게도 성지가 되었다
- 세 종교의 성지가 한 도시에 겹치는 오늘날의 구도가 만들어졌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이슬람교 | 항복 조건을 지킨 관대한 접수로 기억한다. |
| 기독교 | 성지 관리권의 상실로 서술되며, 훗날 십자군의 명분과 연결된다. |
| 유대교 | 동로마 시기의 거주 금지가 풀린 계기로 기억된다. |
| 역사학계 | 항복 협정문으로 전해지는 문서의 원형은 후대의 편집을 거쳤다는 견해가 있다. |
카르발라 사건 (680년)
무함마드 사후 공동체 지도자의 자격과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이어졌다.
전개
무함마드의 외손자 후사인과 소수의 일행이 우마이야 군에 포위되어 살해되었다.
결과
- 우마이야 왕조의 지배가 굳어졌다
장기적 영향
- 시아 전통의 정체성과 추모 의례(아슈라)의 중심 기억이 되었다
- 수니·시아 전통이 갈라지는 결정적 사건으로 꼽힌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이슬람교 | 시아 전통은 불의에 맞선 순교로 기억하고, 수니 전통도 후사인의 죽음을 비극으로 본다. 그 의미 부여의 무게가 다르다. |
학계의 평가
수니·시아의 분기를 하나의 사건으로 환원하지 않는 것이 최근 연구의 경향이다.
13. 주요 인물
| 인물 | 생몰 | 활동 | 후대의 평가 |
|---|---|---|---|
| 무함마드 | 570년경 ~ 632년 | 메카에서 유일신 신앙을 전했다 / 메디나에서 신앙 공동체를 세우고 이끌었다 | 이슬람은 그를 예언자 계보의 마지막으로 믿는다(종교 전통의 주장). 역사학계는 초기 사료가 대부분 후대 정리본이라는 점을 감안해 연구한다. |
| 우마르 이븐 알카타브 | 584년경 ~ 644년 | 제2대 칼리프로서 급속한 영토 확장을 지휘했다 / 행정과 조세 제도를 정비했다 | 수니 전통에서 모범적 통치자로 기억되지만, 시아 전통의 평가는 다르다. |
| 후사인 이븐 알리 | 626년 ~ 680년 | 우마이야 왕조의 계승에 반대하다 카르발라에서 살해되었다 | 시아 전통에서 불의에 맞선 순교의 상징으로 기억되며, 아슈라 추모의 중심이다. |
| 현장 | 602년경 ~ 664년 | 17년간 인도를 여행하고 경전을 가져와 번역했다 / 《대당서역기》를 남겼다 | 동아시아 불교 교학의 수준을 끌어올린 인물이자, 인도사 연구의 중요한 기록자로 평가된다. |
14. 주요 문헌과 사상
| 문헌 | 시기 | 언어 | 핵심 내용 |
|---|---|---|---|
| 쿠란 | 7세기 | 아랍어 | 유일신 신앙, 예언자 전통, 최후의 심판, 공동체의 법과 윤리를 담고 있다. |
| 대당서역기 | 646년 | 한문 | 중앙아시아와 인도 여러 나라의 지리·풍습·불교 상황을 기록했다. |
15. 지도와 이동 경로
7세기 이슬람 세력의 확장 (622~700년)
경계는 해마다 달라졌다. 이 지도는 세기 말의 대략적 범위를 보여 준다.
| 장소 | 성격 | 설명 |
|---|---|---|
| 메카 | 성지 | |
| 메디나 | 성지 | 622년 히즈라의 목적지. |
| 예루살렘 | 성지 | 638년 무슬림 세력에 넘어가고 691년 바위 돔이 세워졌다. |
| 다마스쿠스 | 도시 | 우마이야 왕조의 수도. |
| 카르발라 | 전투 | 680년 후사인이 살해된 곳. |
| 콘스탄티노폴리스 | 도시 | |
| 장안(시안) | 도시 | 현장의 귀환지이자 경교가 전해진 곳. |
경계 확실성: 대체로 확실
| 경로 | 성격 | 설명 |
|---|---|---|
| 히즈라 (메카 → 메디나) | 이주 | |
| 현장의 구법 여행(개략) | 순례 | 《대당서역기》의 지명을 이은 개략 경로다. |
16. 사진과 유물로 보는 역사
17. 핵심 정리
- 이슬람교는 7세기 아라비아에서 시작되어 한 세기 만에 중동·북아프리카·이란을 아우르는 세계로 퍼졌다.
- 622년 히즈라가 이슬람력의 기점이며, 신앙 공동체가 정치 공동체가 된 전환점이다.
- 정복은 대체로 지배 체제의 교체였고, 주민의 개종은 여러 세대에 걸쳐 서서히 일어났다.
- 딤미 제도는 유대인·기독교인에게 보호와 차별을 동시에 주었다. 한쪽만 강조하지 않는다.
- 지도자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수니·시아 전통이 갈라지는 뿌리가 되었다.
- 같은 세기에 현장이 인도를 다녀왔고 티베트에 불교가 전해졌다.
18. 비교표
| 유대교 | 기독교 | 이슬람교 | |
|---|---|---|---|
| 이 세기의 처지 | 이슬람 통치 아래 딤미 | 중동에서 소수로, 유럽에서 확장 | 시작과 급속한 확장 |
| 예루살렘 | 638년 이후 거주 재허용 | 성지 관리권 축소 | 638년 점령, 691년 바위 돔 |
| 공통점 | 유일신·아브라함 전통 | 유일신·아브라함 전통 | 유일신·아브라함 전통 |
| 핵심 쟁점 | 계시의 완성 여부 | 예수의 신성 | 예언자 계보의 마지막 |
세 종교의 갈등은 낯설어서가 아니라 많은 것을 공유하기 때문에 격렬해지는 면이 있다.
19. 생각해 볼 질문
- 많은 것을 공유하는 종교들 사이의 논쟁이 더 치열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 ‘정복’과 ‘개종’을 같은 말로 쓰면 무엇을 놓치게 될까?
- 딤미 제도를 관용이라 불러야 할까, 차별이라 불러야 할까? 둘 다라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20. 확인 퀴즈
이슬람력의 원년이 되는 사건은?
- 무함마드의 출생
- 622년 히즈라
- 630년 메카 정복
- 632년 무함마드의 사망
수니와 시아 전통이 갈라진 근본 쟁점은?
- 쿠란의 본문
- 예배 방향
- 공동체 지도자의 계승 문제
- 라마단 단식
‘이슬람 정복지의 주민은 곧바로 모두 개종했다’는 서술의 문제는?
- 문제 없다
- 실제로는 여러 세대에 걸쳐 서서히 개종이 진행되었다
- 연도가 틀렸다
- 정복이 없었다
17년에 걸쳐 인도를 여행하고 《대당서역기》를 남긴 인물은?
- 현장
- 구마라집
- 법현
- 의정
정답 1) 2 · 2) 3 · 3) 2 · 4) 1
해설
1. 메디나로의 이주(히즈라)가 기점이다.
2.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뿌리이며, 680년 카르발라 사건이 결정적 기억이 되었다.
3. 초기에는 기독교인·유대인·조로아스터교인이 다수인 지역이 많았다.
4. 현장의 기록은 7세기 인도사의 중요한 사료다.
21. 주석과 참고문헌
- 초기 이슬람사 연구서와 사료 비판 연구
- 동로마·시리아어 연대기 (외부 시선의 근접 사료)
- 현장 《대당서역기》
제3장 8세기의 세계 종교
701년~800년
이슬람 세계가 학문의 중심이 되고, 기독교 세계는 그림 문제로 다툰다.
읽는 글
제8장 8세기의 세계 종교
이슬람 세계가 학문의 중심이 되고, 기독교 세계는 그림 문제로 다툽니다
701년 ~ 800년
여는 장면 — 정복에서 학문으로
750년 바그다드로 중심이 옮겨 가면서 이슬람 세계는 정복의 시대에서 학문의 시대로 넘어갔습니다.
같은 시기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성상을 놓고 황제와 수도사들이 부딪쳤고, 서방에서는 프랑크 왕국과 로마 교회가 손을 잡았습니다.
각자의 세계가 자기 모양을 갖춰 가는 세기입니다.
1. 세 개의 정치 세계
우마이야 왕조가 무너지고 아바스 왕조가 바그다드를 세웠습니다. 서유럽에서는 카롤루스 왕조가 일어나 800년 대관식으로 이어졌습니다.
- 711년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에 진출했습니다.
-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
- 750년 아바스 왕조 성립, 762년 바그다드 건설.
- 800년 카롤루스가 로마에서 황제로 대관했습니다.
- 755~763년 안사의 난으로 당이 흔들렸습니다.
2. 711년 — 이베리아
서고트 왕국 내부의 왕위 다툼으로 방어가 흔들리던 때, 지브롤터를 건넌 군대가 몇 해 만에 반도 대부분을 장악했습니다.
이로써 약 8백 년에 걸친 무슬림·기독교·유대인의 공존과 갈등이 시작됩니다.
이슬람 쪽은 알안달루스라는 이름의 문명이 시작된 자리로 봅니다. 후대 스페인 역사 서술은 이를 '상실'로, 재정복을 '회복'으로 그렸습니다. 유대인 공동체에게는 서고트 왕국의 강제 개종 압박에서 벗어난 시기로 기록됩니다.
'관용의 낙원'과 '끊임없는 억압' 두 극단 모두 실제와 다르다는 것이 오늘날의 정리입니다. 공존(콘비벤시아)의 실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오랜 쟁점입니다.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가 있었습니다.
이 전투를 「유럽을 지킨 결전」으로 그리는 서술은 후대, 특히 19세기 이후의 것입니다. 오늘의 연구는 당시 원정의 규모가 크지 않았고, 무슬림 세력이 갈리아 남부에서 완전히 물러난 것도 759년 나르본을 잃은 뒤였다고 봅니다. 경계는 한 전투가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정해졌습니다.
3. 726년부터 — 그림을 둘러싼 다툼
동로마에서 성상을 공경하는 것이 우상숭배인가를 두고 크게 다투었습니다.
황제의 명령으로 성상이 제거되고 옹호자가 박해받았습니다.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가 성상 공경을 인정했습니다.
이 공의회로 논쟁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815년 성상 파괴가 다시 시작되어 843년에야 최종적으로 가라앉습니다. 정교회가 「정교의 승리」로 기념하는 것은 787년이 아니라 843년입니다. 한 세기 넘게 두 차례에 걸친 다툼이었습니다.
이 논쟁을 신학적으로 정리한 사람은 다마스쿠스의 요한입니다. 그의 논증은 성육신에 근거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게 되셨으므로 형상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형상에 대한 공경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구분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무슬림 통치 지역에 살았습니다. 황제의 손이 닿지 않아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었다는 점이 자주 지적됩니다. 그는 이슬람에 관한 이른 기독교 서술도 남겼습니다.
이슬람의 형상 금지가 이 논쟁에 영향을 주었는가는 확정되지 않은 가설입니다. 제국 내부의 정치 — 황제권과 수도원의 힘겨루기 — 로 설명하는 견해가 유력합니다.
형상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는 이유 없는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 동방 교회 | 서방 교회 | 이슬람 | |
|---|---|---|---|
| 입장 | 논쟁 끝에 공경을 인정(787년) | 형상 사용을 유지, 공경의 정도는 신중 | 예배 공간에서 형상을 쓰지 않음 |
| 근거 | 성육신 —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게 되셨다 | 가르치는 그림으로서의 쓰임 | 유일신 신앙과 우상 금지 |
| 대신 발달한 것 | 이콘 전통 | 조각과 스테인드글라스 | 서예와 기하 문양 |
각각의 신학적 강조점이 달랐고, 그 차이가 각기 다른 예술 전통을 낳았습니다. 이 쟁점은 칠백여 년 뒤 종교개혁기에 다시 돌아옵니다.
4. 750년 — 번역이 시작되다
아랍인 우대 정책에 대한 비아랍 무슬림의 불만이 쌓여 있었습니다. 호라산에서 시작된 봉기가 우마이야를 무너뜨렸고, 새 왕조가 바그다드를 세웠습니다.
정치 중심이 시리아에서 이라크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리스·페르시아·인도의 학문을 아랍어로 옮기는 번역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의학·수학·천문학·철학이 아랍어로 들어왔습니다.
이 번역 운동에는 시리아어를 쓰는 기독교인 학자들이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리스어를 아는 기독교인이 무슬림 후원자를 위해 그리스 학문을 아랍어로 옮긴 것입니다.
번역 운동은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수요가 만든 사업이었다는 설명이 유력합니다.
이 성과가 4백 년 뒤 12세기에 유럽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리스에서 시리아어로, 시리아어에서 아랍어로, 아랍어에서 라틴어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유럽에 돌아오는 데 이 긴 길을 거쳤습니다.
같은 시기 이슬람 법학의 주요 학파가 형성되었습니다. 아부 하니파는 법을 정할 때 이성적 판단과 공익을 함께 고려하는 방법을 세웠고, 그의 이름을 딴 하나피 학파는 수니 네 법학파 가운데 가장 널리 퍼졌습니다. 하디스 수집과 검증 작업도 본격화되었습니다.
5. 800년 — 새 황제
교황이 동로마 대신 프랑크 왕국을 후원자로 택하는 흐름이 이어져 왔습니다.
800년 성탄절 미사에서 교황이 카롤루스에게 황제의 관을 씌웠습니다. 서방에 별도의 '황제'가 생겼습니다.
가톨릭 쪽에서는 교회가 정치 질서를 승인하는 자리에 섰음을 보여 줍니다. 동로마 쪽에서는 정통 로마 황제는 하나뿐이라는 입장이었습니다.
누가 이 대관을 기획했는지(교황인가 카롤루스인가)가 사료마다 다르게 읽힙니다.
이 사건으로 동로마와의 관계가 껄끄러워졌고, 서유럽에서 교황과 세속 권력의 오랜 협력·갈등 구도가 시작되었습니다. 훗날 신성로마제국으로 이어집니다.
카롤루스는 학문 부흥의 후원자로 기려지지만, 작센 지역에 대한 강제 개종과 학살도 그의 통치의 일부입니다.
6. 동쪽에서
일본에서는 752년 도다이지 대불이 완성되었습니다. 국가가 대사찰을 세우는 국가 불교의 전성기입니다.
티베트에서는 779년경 삼예 사원이 세워지며 불교가 자리를 잡았고, 792~794년 그곳에서 인도계와 중국계 불교의 논쟁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이 논쟁의 결과를 두 쪽이 서로 다르게 적습니다. 티베트 쪽 기록은 인도계가 이겼다고 하고, 돈황에서 나온 한문 문서는 중국계가 이겼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티베트 불교가 인도계 전통을 따라간 것은 분명하지만, 「그때 그 자리에서 누가 이겼는가」는 기록하는 쪽에 따라 갈립니다.
파드마삼바바는 티베트에 밀교 전통을 전했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생애 기록은 대부분 후대의 전기 문학이며, 역사적 재구성은 제한적입니다.
이 장이 남긴 네 문장
- 아바스 왕조의 번역 운동은 세계 학문사에서 손꼽히는 사건입니다.
- 성상 논쟁은 신학·정치·문화가 얽힌 문제였습니다.
- 교황과 프랑크의 동맹은 서유럽의 정치·종교 질서를 새로 짰습니다.
- 이슬람 법학과 하디스 학문이 이 시기에 틀을 갖추었습니다.
생각해 볼 질문
- 형상을 만드는 것과 만들지 않는 것, 각각 어떤 신앙 이해가 담겨 있을까요?
- 번역이 문명을 옮긴다는 말은 어떤 뜻일까요?
- 교회가 특정 정치 세력과 손잡을 때 얻는 것과 잃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장에서 쓴 자료
문헌
- 다마스쿠스의 요한 《정통신앙론》 (8세기 전반, 그리스어)
자료 사진
- 코르도바 대모스크 내부 (실제 유물) · 대진경교유행중국비 (실제 유물) · 도다이지 대불전 (실제 유물)
참고
- 아바스 시대 번역 운동 연구
- 제2차 니케아 공의회 문서
- 아인하르트 《카롤루스 전기》
「종교사 한눈」이 모아 둔 자료로 작성한 원고입니다.
검수 이력
- 1차 · 사실 확인 — 성상 논쟁이 787년에 정리되었다는 서술을 고침. 815년 다시 시작되어 843년에 끝나며, 정교회가 「정교의 승리」로 기념하는 해는 843년입니다. 삼예 사원 건립(779년경)을 본문에 넣어 티베트 불교의 정착 시점을 밝힘. 「8백 년 뒤 종교개혁」을 칠백여 년으로 고침.
- 2차 · 관점 검토 — 투르–푸아티에 전투를 「경계를 정한 결전」으로 적은 것을 고쳐, 그 서술이 후대의 것이며 실제 철수는 759년까지 이어졌다는 점을 밝힘. 삼예 논쟁의 결과를 티베트 쪽 기록과 돈황 한문 문서가 서로 다르게 적는다는 점을 추가.
- 3차 · 저작권 확인 — 자료 사진 3장의 이용 조건 확인.
- 남은 것 · 외부 검토 — 쓴 쪽과 검수한 쪽이 같습니다. 출판 전 제3자의 확인이 필요합니다.
1. 세기를 여는 한 장면
750년 바그다드로 중심이 옮겨 가면서 이슬람 세계는 정복의 시대에서 학문의 시대로 넘어갔다. 같은 시기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성상을 놓고 황제와 수도사들이 부딪쳤고, 서방에서는 프랑크 왕국과 로마 교회가 손을 잡았다. 각자의 세계가 자기 모양을 갖춰 가는 세기다.
2. 8세기의 세계사 배경
우마이야 왕조가 무너지고 아바스 왕조가 바그다드를 세웠다. 서유럽에서는 카롤루스 왕조가 일어나 800년 대관식으로 이어졌다. 당은 안사의 난으로 흔들렸고, 일본은 나라 시대를 맞았다.
- 711년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에 진출했다.
-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
- 750년 아바스 왕조 성립, 762년 바그다드 건설.
- 800년 카롤루스가 로마에서 황제로 대관했다.
- 755~763년 안사의 난으로 당이 흔들렸다.
3. 한눈에 보는 연대표
| 연도 | 일어난 일 | 관련 종교 |
|---|---|---|
| 711년 | 무슬림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간다. | 이슬람, 기독교 |
| 726년경~ | 동로마에서 성상 파괴 논쟁이 시작된다. | 기독교, 정교회 |
| 732년 | 투르–푸아티에 전투. 이를 「유럽을 지킨 결전」으로 그리는 서술은 후대의 것이며, 무슬림 세력이 갈리아에서 물러난 것은 759년이다. (학문적 해석) | |
| 750년 | 아바스 왕조가 우마이야를 무너뜨린다. | 이슬람 |
| 752년 | 일본 도다이지 대불이 완성된다. | 불교 |
| 787년 | 제2차 니케아 공의회가 성상 공경을 인정한다. 다만 815년 성상 파괴가 다시 시작되어 843년에야 끝난다. | 기독교 |
| 779년경 창건, 792~794년 논쟁 | 티베트 삼예사가 세워지고, 그곳에서 인도계와 중국계 불교의 논쟁이 있었다고 전한다. 결과를 티베트 쪽 기록과 돈황 한문 문서가 서로 다르게 적는다. (전통의 주장) | 불교 |
| 800년 | 카롤루스가 로마에서 황제로 대관한다. | 가톨릭 |
| 8세기 | 바그다드에서 그리스·인도 학문의 번역 운동이 시작된다. | 이슬람 |
4. 유대교
두 세계에 걸쳐 살다
이슬람 세계와 기독교 세계 양쪽에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고, 처지는 지역마다 달랐다. 이슬람 통치 지역에서는 상업과 학문에서 활동 폭이 넓은 편이었다.
5. 기독교
성상 논쟁과 프랑크 동맹
성상을 공경하는 것이 우상숭배인가를 두고 동방 교회가 크게 다투었다. 이 논쟁은 신학 문제이면서 황제권과 수도원의 힘겨루기이기도 했다. 서방에서는 교황과 프랑크 왕국이 손잡으며 새로운 정치 질서가 만들어졌다.
-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가 성상 공경을 인정했다.
- 성상 논쟁은 이슬람의 형상 금지와 무관하지 않다는 견해가 있다(학문적 해석).
- 800년 대관식은 동로마와의 관계를 껄끄럽게 만들었다.
6. 가톨릭
교황과 황제의 동맹
로마 교회는 동로마 대신 프랑크 왕국을 후원자로 택했다. 이 선택이 이후 서유럽에서 교황권이 갖는 위치를 결정했다.
7. 동방정교회
성상 논쟁의 무대
황제의 정책과 수도원의 저항이 부딪히며 동방 교회의 신학과 전례가 다듬어졌다.
8. 개신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16세기 종교개혁 과정에서 여러 갈래로 형성되었다.
9. 이슬람교
정복에서 학문으로
아바스 왕조는 바그다드를 세우고 그리스·페르시아·인도의 학문을 아랍어로 번역했다. 이 번역 운동은 이후 유럽이 고대 학문을 되찾는 통로가 된다. 이베리아에서는 이슬람 문화권이 자리 잡았다.
- 번역 운동으로 의학·수학·천문학·철학이 발전했다.
- 이슬람 법학(피크흐)의 주요 학파가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 하디스 수집과 검증 작업이 본격화되었다.
10. 불교
국가 불교와 티베트의 선택
일본에서는 국가가 대사찰을 세우는 국가 불교가 전성기를 맞았고, 티베트는 인도계 불교를 받아들이는 방향을 택했다.
11. 종교 간 관계
기독교 ↔ 이슬람교 — 문화·학문·예술 교류
이베리아와 지중해에서 두 세계는 전쟁만 한 것이 아니라 교역하고 배웠다. 아바스의 번역 운동은 훗날 유럽으로 되돌아온다.
기독교 ↔ 이슬람교 — 전쟁과 충돌
711년 이베리아 진출과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는 두 세계의 경계가 정해지는 과정이었다.
12. 이 세기의 결정적 사건
무슬림 세력의 이베리아 진출 (711년)
서고트 왕국 내부의 왕위 다툼으로 방어가 흔들리던 때였다.
원인
- 서고트 내부 분열
- 북아프리카를 장악한 세력의 확장
전개
지브롤터를 건넌 군대가 몇 해 만에 반도 대부분을 장악했다.
결과
- 이베리아에 이슬람 통치가 시작되었다
장기적 영향
- 약 8백 년에 걸친 무슬림·기독교·유대인의 공존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 유대인 공동체는 서고트 시기보다 활동 폭이 넓어졌다
- 북쪽의 기독교 왕국들이 이후 재정복 운동을 이어 간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이슬람교 | 알안달루스라는 이름의 문명이 시작된 자리로 본다. |
| 기독교 | 후대 스페인 역사 서술은 이를 ‘상실’로, 재정복을 ‘회복’으로 그렸다. |
| 유대교 | 서고트 왕국의 강제 개종 압박에서 벗어난 시기로 기록된다. |
| 역사학계 | ‘관용의 낙원’과 ‘끊임없는 억압’ 두 극단 모두 실제와 다르다는 것이 오늘날의 정리다. |
학계의 평가
공존(콘비벤시아)의 실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가 오랜 쟁점이다.
성상 파괴 논쟁 (726년~787년)
성상 공경이 우상숭배인가를 두고 황제와 수도원 세력이 부딪쳤다.
원인
- 형상 사용에 대한 신학적 이견
- 황제권과 수도원의 힘겨루기
- 이슬람의 형상 금지와의 관계라는 학문적 논점
전개
황제의 명령으로 성상이 제거되고 옹호자가 박해받았으며,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가 공경을 인정했다.
결과
- 성상 공경이 신학적으로 정당화되었다
장기적 영향
- 정교회 전례에서 이콘이 중심 자리를 굳혔다
- 843년에 최종적으로 회복되어 ‘정교회의 승리’로 기념된다
- 형상을 대하는 태도는 뒤에 종교개혁기에 다시 쟁점이 된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동방정교회 | 성육신을 근거로 형상을 정당화한 신학이 확립되었다. |
| 이슬람교 | 형상을 쓰지 않는 전통과 대비되어 자주 함께 논의된다. |
| 역사학계 | 이슬람의 영향 여부는 확정되지 않은 가설이다. 제국 내부의 정치로 설명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
학계의 평가
787년 공의회로 끝나지 않았다. 815년 다시 시작되어 843년에야 가라앉으며, 정교회가 「정교의 승리」로 기념하는 해는 843년이다. 이슬람의 영향 여부는 확정되지 않은 가설이고, 제국 내부의 정치로 설명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아바스 혁명과 바그다드 건설 (750년~762년)
아랍인 우대 정책에 대한 비아랍 무슬림의 불만이 쌓여 있었다.
원인
- 비아랍 무슬림의 차별
- 가문 간 정통성 다툼
- 동부 지역의 반발
전개
호라산에서 시작된 봉기가 우마이야를 무너뜨렸고, 새 왕조가 바그다드를 세웠다.
결과
- 정치 중심이 시리아에서 이라크로 옮겨졌다
장기적 영향
- 그리스·페르시아·인도 학문을 아랍어로 옮기는 번역 운동이 시작되었다
- 이 성과가 12세기 유럽의 라틴어 번역으로 되돌아간다
- 이베리아에는 살아남은 우마이야 가문이 별도의 정권을 세웠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이슬람교 | 아랍 중심에서 여러 민족이 함께하는 문명으로 넓어진 전환점으로 본다. |
| 기독교 | 번역 운동에는 시리아어를 쓰는 기독교인 학자들이 크게 기여했다. |
| 역사학계 | 번역 운동은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수요가 만든 사업이었다는 설명이 유력하다. |
카롤루스의 황제 대관 (800년)
교황이 동로마 대신 프랑크 왕국을 후원자로 택하는 흐름이 이어져 왔다.
전개
성탄절 미사에서 교황이 카롤루스에게 황제의 관을 씌웠다.
결과
- 서방에 별도의 ‘황제’가 생겼다
장기적 영향
- 동로마와의 관계가 껄끄러워졌다
- 서유럽에서 교황과 세속 권력의 오랜 협력·갈등 구도가 시작되었다
- 훗날 신성로마제국으로 이어진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가톨릭 | 교회가 정치 질서를 승인하는 자리에 섰음을 보여 준다. |
| 동방정교회 | 동로마 쪽에서는 정통 로마 황제는 하나뿐이라는 입장이었다. |
| 역사학계 | 누가 이 대관을 기획했는지(교황인가 카롤루스인가)가 사료마다 다르게 읽힌다. |
13. 주요 인물
| 인물 | 생몰 | 활동 | 후대의 평가 |
|---|---|---|---|
| 다마스쿠스의 요한 | 675년경 ~ 749년경 | 성상 공경을 옹호하는 글을 썼다 / 《정통신앙론》으로 교리를 정리했다 | 무슬림 통치 지역에 살았기에 황제의 손이 닿지 않아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었다는 점이 자주 지적된다. 이슬람에 관한 이른 기독교 서술을 남기기도 했다. |
| 카롤루스 대제 | 748년경 ~ 814년 | 서유럽 대부분을 통합했다 / 교육과 필사 사업을 후원했다 / 800년 황제로 대관했다 | 학문 부흥의 후원자로 기려지지만, 작센 지역에 대한 강제 개종과 학살은 함께 기록해야 할 사실이다. |
| 아부 하니파 | 699년경 ~ 767년 | 법 추론의 방법을 세웠다 / 그의 이름을 딴 하나피 학파가 형성되었다 | 수니 이슬람 네 법학파 가운데 가장 널리 퍼진 학파의 시조로 꼽힌다. 오스만 제국과 남아시아에서 특히 영향이 컸다. |
| 파드마삼바바 | 8세기 | 티베트에 밀교 전통을 전했다고 전한다 / 삼예사 건립에 관여했다고 전한다 | 티베트 불교 닝마파에서 ‘제2의 붓다’로 존경받는다. 생애 기록은 대부분 후대의 전기 문학이며, 역사적 재구성은 제한적이다. |
14. 주요 문헌과 사상
| 문헌 | 시기 | 언어 | 핵심 내용 |
|---|---|---|---|
| 정통신앙론 | 8세기 전반 | 그리스어 | 그때까지의 교부 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교의서. |
15. 지도와 이동 경로
8세기 — 세 개의 정치·종교 세계 (701~800년)
| 장소 | 성격 | 설명 |
|---|---|---|
| 코르도바 | 도시 | 이베리아 우마이야의 중심. |
| 푸아티에 | 전투 | 732년. |
| 아헨 | 도시 | 카롤루스의 궁정. |
| 로마 | 회의 | 800년 대관. |
| 콘스탄티노폴리스 | 도시 | 성상 논쟁의 무대. |
| 니케아 | 회의 | 787년 제2차 공의회. |
| 바그다드 | 도시 | 762년 건설, 번역 운동의 중심. |
| 삼예사 | 수도원·학교 | 티베트 최초의 사원으로 전한다. |
| 나라 도다이지 | 유적 | 752년 대불 완성. |
경계 확실성: 대체로 확실
16. 사진과 유물로 보는 역사
17. 핵심 정리
- 아바스 왕조의 번역 운동은 세계 학문사에서 손꼽히는 사건이다.
- 성상 논쟁은 신학·정치·문화가 얽힌 문제였다.
- 교황과 프랑크의 동맹은 서유럽의 정치·종교 질서를 새로 짰다.
- 이슬람 법학과 하디스 학문이 이 시기에 틀을 갖추었다.
18. 비교표
| 동방 교회 | 서방 교회 | 이슬람 | |
|---|---|---|---|
| 입장 | 논쟁 끝에 공경을 인정(787년) | 형상 사용을 유지, 공경의 정도는 신중 | 예배 공간에서 형상을 쓰지 않음 |
| 근거 | 성육신 —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게 되셨다 | 가르치는 그림으로서의 쓰임 | 유일신 신앙과 우상 금지 |
| 대신 발달한 것 | 이콘 전통 | 조각과 스테인드글라스 | 서예와 기하 문양 |
어느 쪽도 이유 없는 선택이 아니었다. 신학의 강조점이 달랐다.
19. 생각해 볼 질문
- 형상을 만드는 것과 만들지 않는 것, 각각 어떤 신앙 이해가 담겨 있을까?
- 번역이 문명을 옮긴다는 말은 어떤 뜻일까?
- 교회가 특정 정치 세력과 손잡을 때 얻는 것과 잃는 것은 무엇일까?
20. 확인 퀴즈
아바스 왕조가 세워진 해는?
- 661년
- 750년
- 800년
- 1055년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은?
- 성상 파괴를 명령했다
- 성상 공경을 인정했다
- 교황을 폐위했다
- 십자군을 선포했다
8세기 바그다드 번역 운동의 종교사적 의의로 가장 적절한 것은?
- 고대 그리스 학문이 아랍어로 보존되어 훗날 유럽에 전해졌다
- 쿠란이 처음 기록되었다
- 십자군이 시작되었다
- 동서 교회가 분열했다
정답 1) 2 · 2) 2 · 3) 1
해설
1. 750년이며 762년 바그다드를 건설했다.
2. 성상 공경이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정리했다.
3. 12세기 유럽의 라틴어 번역 운동으로 이어진다.
21. 주석과 참고문헌
- 아바스 시대 번역 운동 연구
- 제2차 니케아 공의회 문서
- 일본 나라 시대 사료
제4장 9세기의 세계 종교
801년~900년
슬라브 세계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중국은 불교를 억누른다.
읽는 글
제9장 9세기의 세계 종교
슬라브 세계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중국은 불교를 억누릅니다
801년 ~ 900년
여는 장면 — 받아들이는 곳과 밀어내는 곳
두 형제가 슬라브 사람들의 말을 적을 글자를 만들었습니다. 낯선 말로 예배하고 성경을 읽게 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같은 세기 중국에서는 황제가 사찰을 헐고 승려를 환속시켰습니다.
종교를 받아들이는 세기와 밀어내는 세기가 지구 반대편에서 함께 흘렀습니다. 두 사건을 나란히 놓으면, 국가 권력이 종교에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가 한눈에 보입니다.
1. 흔들리는 제국들
카롤루스 제국이 분열하며 서유럽의 윤곽이 잡혔습니다. 바이킹의 이동이 유럽을 흔들었고, 아바스 왕조는 정치적으로 약해졌지만 학문은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당은 쇠퇴기에 접어들었습니다.
-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카롤루스 제국이 나뉘었습니다.
- 바이킹의 침입과 정착이 이어졌습니다.
- 바그다드에서 번역·연구가 절정에 달했습니다.
- 845년 당 무종의 회창폐불.
2. 843년 — 성상 논쟁의 끝
787년 공의회 이후에도 성상 파괴 정책이 815년에 다시 살아나 한 세대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843년 황후 테오도라의 결정으로 성상 공경이 회복되었고, 이를 기념하는 주일이 정해졌습니다. 정교회는 지금도 사순절 첫 주일에 '정교회의 승리'로 기념합니다.
이콘이 정교회 신앙 생활의 중심 요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3. 863년 — 자기 말로 예배하다
모라비아의 군주가 자기 말로 가르칠 선교사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요청했습니다. 현지어 교육이 필요했고, 프랑크 교회의 영향력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판단도 있었습니다.
테살로니키 출신의 두 형제,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가 갔습니다. 그들은 슬라브어를 적을 문자를 만들고 성경과 전례서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라틴어·그리스어·히브리어만 거룩한 언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메토디오스는 프랑크 성직자들의 반대로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슬라브어로 예배하고 성경을 읽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들이 만든 문자가 오늘날 키릴 문자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글라골 문자와 키릴 문자의 관계, 창제 과정은 계속 연구되는 주제입니다.
이 결정의 무게는 종교를 넘어섭니다. 동유럽 문화와 문자 생활 전체가 여기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이 선택이 서방과의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동방은 현지어 예배를 택했고, 서방은 라틴어를 고수했습니다. 그 차이가 이후 천 년 동안 두 문화권의 성격을 갈랐습니다.
두 형제는 동·서방 교회가 함께 기리는 드문 인물입니다. 교황이 슬라브어 전례를 승인한 일이 있었고, 오늘날 그들은 유럽의 공동 수호성인입니다.
4. 845년 — 사찰이 헐리다
사찰이 소유한 토지와 인력이 국가 재정과 병력에 부담이 된다는 인식이 커졌습니다. 도교를 우대한 황제의 성향도 있었고, 외래 종교에 대한 반발도 있었습니다.
수천 곳의 사찰이 헐리고 승려가 환속했습니다. 《구당서》는 사찰 4,600여 곳을 헐고 승려·비구니 26만여 명을 환속시켰다고 적습니다. 다만 이 숫자는 조치를 시행한 쪽이 스스로 적어 남긴 것이므로, 규모의 짐작으로 읽되 정확한 집계로 다루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불교만이 아니라 경교·마니교·조로아스터교도 함께 금지되었습니다.
종교 탄압이자 재정·사회 정책이었습니다. 한 가지 동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결과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중국 불교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다만 사찰 경제에 덜 의존하는 선종이 상대적으로 힘을 얻었습니다. 이후 중국 불교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둘째, 635년 이후 이어지던 동방교회의 중국 선교가 여기서 끊겼습니다. 5세기에 갈라져 나가 이백 년에 걸쳐 동쪽 끝까지 갔던 그 교회의 중국 공동체가 사실상 무너졌습니다.
뤄양의 룽먼 석굴에는 675년에 완성된 거대한 석불이 있습니다. 절벽을 깎아 만든 그 규모가, 폐불의 배경이 된 사찰 경제의 크기를 짐작하게 합니다.
5. 전승의 권위를 묻다
유대교 안에서 탈무드 전승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성경만을 따르려는 카라이파가 세력을 얻었습니다.
카라이파 학자들은 성경 본문 연구와 히브리어 문법 연구를 발전시키며 랍비 진영과 논쟁했습니다.
랍비 전통은 이를 이탈로 보았고, 카라이파는 성경으로 돌아가는 개혁으로 이해했습니다.
이 논쟁의 결과가 흥미롭습니다. 랍비 유대교는 구전 전승의 근거를 이론적으로 설명해야 했습니다. 그전까지 당연했던 것을 논증해야 하게 된 것입니다. 그 응답이 본격적으로 나오는 것은 다음 세기입니다. 사아디아 가온(882~942년)이 카라이파를 논박하며 유대 철학과 히브리어 문법 연구의 틀을 세웁니다.
반대가 있으면 자기 근거를 다듬게 됩니다. 카라이파 공동체는 규모는 작지만 오늘날까지 이어집니다.
6. 학문의 절정과 정리
칼리프의 실질 권력이 약해지는 동안 이슬람 세계의 학문은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의학·수학·천문학의 성과가 뒤에 유럽으로 전해집니다.
부하리는 방대한 하디스를 수집하고 진위를 검증해 모음집을 냈습니다. 전승 경로를 따져 신뢰도를 가리는 방법이 이 과정에서 정교해졌습니다.
《사히흐 알부하리》는 수니 이슬람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하디스 모음집으로 꼽힙니다. 시아 전통은 다른 모음집을 따릅니다.
일본에서는 최징과 공해가 당에서 배워 와 천태종과 진언종을 열었습니다. 공해는 고야산에 수행 도량을 세웠고, 서예와 문학, 교육 사업으로도 기억됩니다.
한편 슬라브 선교의 관할권과 신경의 표현(필리오케)을 둘러싸고 동서 교회가 부딪쳤습니다. 863~867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포티오스와 교황 니콜라오 1세가 서로를 파문하는 데까지 갔습니다. 뒤에 회복되기는 했지만, 1054년 이전에 이미 갈라섬을 예행연습한 셈입니다.
7. 같은 세기, 정반대의 일
| 동유럽 | 중국 | |
|---|---|---|
| 일어난 일 | 슬라브 선교와 문자 창제 | 회창폐불 |
| 국가의 태도 | 군주가 요청하고 받아들임 | 황제가 사찰을 헐고 승려를 환속시킴 |
| 동기 | 자기 말로 가르치고 외부 영향을 조절 | 재정·인력 확보와 외래 종교 배척 |
| 장기적 결과 | 동유럽 문자 문화의 출발 | 선종 중심으로 재편 |
국가 권력은 종교를 퍼뜨리기도 하고 꺾기도 합니다. 같은 세기의 두 사례가 그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 국가의 동기는 순수하게 종교적이지 않았습니다.
이 장이 남긴 네 문장
- 현지어 선교와 라틴어 고수는 이후 동·서 유럽 문화의 큰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 1054년의 분열은 갑작스러운 사건이 아니라 이런 갈등이 쌓인 결과입니다.
- 845년 폐불은 국가 권력이 종교를 억누른 대표적 사례입니다.
- 이슬람 세계의 학문은 정치적 분열과 무관하게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생각해 볼 질문
- 예배를 어떤 말로 드리느냐가 왜 그렇게 중요한 문제였을까요?
- 국가가 종교를 억누를 때 어떤 종파가 살아남을까요?
- 정치가 약해져도 학문이 꽃필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요?
이 장에서 쓴 자료
문헌
- 《사히흐 알부하리》 (9세기 중반, 아랍어)
- 고대 교회 슬라브어 성경·전례서 (9세기 후반)
자료 사진
- 글라골 문자 단편 (실제 유물 · 10~11세기 사본, 창제보다 뒤의 것) · 켈스의 서 (실제 유물 · 800년경) · 룽먼 석굴 봉선사 대불 (실제 유물 · 675년 완성, 폐불보다 이전의 것)
참고
- 《키릴로스 전기》·《메토디오스 전기》
- 《구당서》, 엔닌의 일기
- 아바스 학문사 연구
「종교사 한눈」이 모아 둔 자료로 작성한 원고입니다.
검수 이력
- 1차 · 사실 확인 — 성상 파괴가 되살아난 해를 815년으로 특정. 회창폐불의 규모를 《구당서》의 숫자로 적되 그것이 시행한 쪽의 기록임을 밝힘. 카라이파에 대한 랍비 진영의 응답이 다음 세기 사아디아 가온(882~942년)에게서 본격화된다는 점으로 시점을 바로잡음. 863~867년 포티오스와 니콜라오 1세의 상호 파문을 넣어 「갈등이 쌓였다」를 사건으로 특정.
- 2차 · 관점 검토 — 자료 사진 세 점의 제작 시기를 목록에 밝힘. 글라골 문자 단편이 창제보다 뒤인 10~11세기 사본이고, 룽먼 대불이 폐불보다 이전의 것임을 표시.
- 3차 · 저작권 확인 — 자료 사진 3장의 이용 조건 확인.
- 남은 것 · 외부 검토 — 쓴 쪽과 검수한 쪽이 같습니다. 출판 전 제3자의 확인이 필요합니다.
1. 세기를 여는 한 장면
두 형제가 슬라브 사람들의 말을 적을 글자를 만들었다. 낯선 말로 예배하고 성경을 읽게 하려는 시도였다. 같은 세기 중국에서는 황제가 사찰을 헐고 승려를 환속시켰다. 종교를 받아들이는 세기와 밀어내는 세기가 지구 반대편에서 함께 흘렀다.
2. 9세기의 세계사 배경
카롤루스 제국이 분열하며 서유럽의 윤곽이 잡혔다. 바이킹의 이동이 유럽을 흔들었고, 아바스 왕조는 정치적으로 약해졌지만 학문은 절정에 이르렀다. 당은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카롤루스 제국이 나뉘었다.
- 바이킹의 침입과 정착이 이어졌다.
- 바그다드의 지혜의 집에서 번역·연구가 절정에 달했다.
- 845년 당 무종의 회창폐불.
3. 한눈에 보는 연대표
| 연도 | 일어난 일 | 관련 종교 |
|---|---|---|
| 843년 | 동로마에서 성상 공경이 최종적으로 회복된다(정교회의 승리). | 정교회 |
| 863년경 |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가 슬라브 선교를 시작하고 글라골 문자를 만든다. | 정교회 |
| 845년 | 당 무종의 폐불로 중국 불교가 큰 타격을 입는다. 《구당서》는 사찰 4,600여 곳, 환속 26만여 명이라 적는다(시행한 쪽의 기록). 경교·마니교·조로아스터교도 함께 금지된다. | 불교 |
| 9세기(830년경부터) | 유대교 안에서 구전 전승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카라이파가 세력을 얻는다. 랍비 진영의 본격적인 응답은 다음 세기 사아디아 가온(882~942년)에게서 나온다. | 유대 |
| 9세기 | 바그다드에서 그리스 철학·의학의 아랍어 번역이 절정에 이른다. | 이슬람 |
| 9세기 | 일본에서 최징·공해가 천태종과 진언종을 연다. | 불교 |
| 863~867년 | 총대주교 포티오스와 교황 니콜라오 1세가 서로를 파문한다. 뒤에 회복되지만 1054년 이전의 갈라섬으로 기록된다. |
4. 유대교
전승의 권위를 묻다
탈무드 전승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성경만을 따르려는 카라이파가 등장하면서, 랍비 유대교는 자기 전통의 근거를 다시 설명해야 했다. 이 논쟁은 유대 사상에 철학적 언어를 끌어들였다.
5. 기독교
새 언어로 예배하다
슬라브 선교는 현지어로 성경을 옮기고 예배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 결정은 동유럽 문화사 전체에 영향을 주었고, 라틴어를 고수한 서방과 대비된다.
6. 가톨릭
카롤루스 제국의 분열 속에서 교황권과 세속 권력의 관계가 복잡해졌다.
7. 동방정교회
슬라브 세계로
성상 논쟁이 끝나고 전례가 정비되었으며, 슬라브 선교를 통해 동방 교회의 영향권이 크게 넓어졌다.
8. 개신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16세기 종교개혁 과정에서 여러 갈래로 형성되었다.
9. 이슬람교
학문의 절정, 정치의 분열
칼리프의 실질 권력이 약해지는 동안 학문은 절정에 이르렀다. 의학·수학·천문학의 성과가 뒤에 유럽으로 전해진다.
10. 불교
폐불의 충격
845년 당의 폐불로 중국 불교는 큰 타격을 입었고, 이후 선종처럼 사찰 경제에 덜 의존하는 흐름이 상대적으로 힘을 얻었다.
11. 종교 간 관계
가톨릭 ↔ 동방정교회 — 교리적 차이와 논쟁
슬라브 선교의 관할권과 신경의 표현(필리오케)을 둘러싸고 동서 교회가 부딪쳤다. 1054년 이전에 이미 갈등이 쌓이고 있었다.
불교 ↔ 기독교 — 박해와 차별
845년 당의 폐불은 불교만이 아니라 경교·마니교 등 외래 종교 전반을 겨냥했다.
12. 이 세기의 결정적 사건
카라이파의 대두 (830년)
탈무드 전승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성경만을 따르려는 흐름이 세력을 얻었다.
전개
카라이파 학자들이 성경 본문 연구와 히브리어 문법 연구를 발전시키며 랍비 진영과 논쟁했다.
결과
- 유대교 안에 뚜렷한 두 갈래가 생겼다
장기적 영향
- 랍비 유대교가 구전 전승의 근거를 이론적으로 설명해야 했다
- 이 논쟁이 유대 철학과 성경 문법 연구를 자극했다
- 카라이파 공동체는 규모는 작지만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유대교 | 랍비 전통은 이를 이탈로 보았고, 카라이파는 성경으로 돌아가는 개혁으로 이해했다. |
| 역사학계 | 카이로 게니자 문서 발견 이후 이 운동의 실제 모습이 크게 보완되었다. |
성상 공경의 최종 회복 (843년)
787년 공의회 이후에도 성상 파괴 정책이 한 차례 되살아났다.
전개
황후 테오도라의 결정으로 성상 공경이 회복되었고, 이를 기념하는 주일이 정해졌다.
결과
- 성상 논쟁이 끝났다
장기적 영향
- 이콘이 정교회 신앙 생활의 중심 요소로 자리 잡았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동방정교회 | ‘정교회의 승리’ 주일로 사순절 첫 주일에 지금도 기념한다. |
회창폐불 (845년)
사찰이 소유한 토지와 인력이 국가 재정과 병력에 부담이 된다는 인식이 커졌다.
원인
- 국가 재정 문제
- 도교를 우대한 황제의 성향
- 외래 종교에 대한 반발
전개
수천 곳의 사찰이 헐리고 승려가 환속했으며, 경교·마니교·조로아스터교도 함께 금지되었다.
결과
- 중국 불교가 큰 타격을 입었다
- 중국의 경교 공동체가 사실상 무너졌다
장기적 영향
- 사찰 경제에 덜 의존하는 선종이 상대적으로 힘을 얻었다
- 국가 권력이 종교를 억누른 대표 사례로 인용된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불교 | ‘법난’으로 기억한다. 이후 중국 불교의 성격이 달라진다. |
| 기독교 | 635년 이후 이어지던 동방교회의 중국 선교가 여기서 끊긴다. |
| 역사학계 | 종교 탄압이자 재정·사회 정책이었다. 한 가지 동기로 설명하지 않는다. |
슬라브 선교와 문자 창제 (863년)
모라비아의 군주가 자기 말로 가르칠 선교사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요청했다.
원인
- 현지어 교육의 필요
- 프랑크 교회의 영향력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판단
전개
두 형제가 슬라브어를 적을 문자를 만들고 성경과 전례서를 옮겼다. 라틴어·그리스어·히브리어만 거룩한 언어라는 주장과 부딪혔다.
결과
- 슬라브어로 예배하고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장기적 영향
- 이 문자가 오늘날 키릴 문자의 바탕이 되었다
- 동유럽 문화와 문자 생활 전체의 출발점이 되었다
- 현지어 예배를 택한 동방과 라틴어를 고수한 서방의 차이가 뚜렷해졌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동방정교회 | ‘슬라브인의 사도’로 기린다. |
| 가톨릭 | 교황이 슬라브어 전례를 승인한 일이 있었고, 오늘날 두 형제는 유럽의 공동 수호성인이다. |
| 역사학계 | 글라골 문자와 키릴 문자의 관계, 창제 과정은 계속 연구되는 주제다. |
13. 주요 인물
| 인물 | 생몰 | 활동 | 후대의 평가 |
|---|---|---|---|
| 키릴로스(콘스탄티노스) | 826년경 ~ 869년 | 슬라브 문자를 만들었다 / 성경과 전례서를 슬라브어로 옮겼다 | 동·서방 교회가 함께 기리는 드문 인물이다. |
| 메토디오스 | 815년경 ~ 885년 | 동생과 함께 슬라브 선교를 이끌었다 / 성경 번역을 이어 완성했다 | 프랑크 성직자들의 반대와 투옥을 겪으면서도 슬라브어 전례를 지켜 냈다. |
| 부하리 | 810년 ~ 870년 | 방대한 하디스를 수집하고 진위를 검증해 모음집을 냈다 | 수니 이슬람에서 쿠란 다음으로 권위 있는 문헌으로 꼽히는 모음집을 남겼다. 시아 전통은 다른 모음집을 따른다. |
| 공해(구카이) | 774년 ~ 835년 | 당에서 밀교를 배워 와 진언종을 열었다 / 고야산에 수행 도량을 세웠다 | 일본 불교와 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남겼다. 서예와 문학, 교육 사업으로도 기억된다. |
14. 주요 문헌과 사상
| 문헌 | 시기 | 언어 | 핵심 내용 |
|---|---|---|---|
| 사히흐 알부하리 | 9세기 중반 | 아랍어 | 무함마드의 말과 행동에 관한 전승을 주제별로 모아 검증해 실은 모음집. |
| 고대 교회 슬라브어 성경·전례서 | 9세기 후반 | 고대 교회 슬라브어 | 복음서와 전례서를 슬라브어로 옮긴 번역. |
15. 지도와 이동 경로
9세기 — 받아들이는 곳과 밀어내는 곳 (801~900년)
| 장소 | 성격 | 설명 |
|---|---|---|
| 테살로니키 | 도시 | 두 형제의 고향. |
| 대모라비아 | 도시 | 슬라브 선교의 무대. |
| 콘스탄티노폴리스 | 도시 | 843년 성상 공경 회복. |
| 바그다드 | 수도원·학교 | 번역 운동의 절정. |
| 장안 | 도시 | 845년 폐불. |
| 고야산 | 수도원·학교 | 진언종의 도량. |
경계 확실성: 대체로 확실
| 경로 | 성격 | 설명 |
|---|---|---|
| 슬라브 선교의 길 | 선교 |
16. 사진과 유물로 보는 역사
17. 핵심 정리
- 현지어 선교와 라틴어 고수는 이후 동·서 유럽 문화의 큰 차이를 만들었다.
- 1054년의 분열은 갑작스러운 사건이 아니라 이런 갈등이 쌓인 결과다.
- 845년 폐불은 국가 권력이 종교를 억누른 대표적 사례다.
- 이슬람 세계의 학문은 정치적 분열과 무관하게 절정에 이르렀다.
18. 비교표
| 동유럽 | 중국 | |
|---|---|---|
| 일어난 일 | 슬라브 선교와 문자 창제 | 회창폐불 |
| 국가의 태도 | 군주가 요청하고 받아들임 | 황제가 사찰을 헐고 승려를 환속시킴 |
| 동기 | 자기 말로 가르치고 외부 영향을 조절 | 재정·인력 확보와 외래 종교 배척 |
| 장기적 결과 | 동유럽 문자 문화의 출발 | 선종 중심으로 재편 |
국가 권력은 종교를 퍼뜨리기도 하고 꺾기도 한다. 같은 세기의 두 사례가 그것을 보여 준다.
19. 생각해 볼 질문
- 예배를 어떤 말로 드리느냐가 왜 그렇게 중요한 문제였을까?
- 국가가 종교를 억누를 때 어떤 종파가 살아남을까?
- 정치가 약해져도 학문이 꽃필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20. 확인 퀴즈
슬라브 선교와 문자 창제로 알려진 형제는?
-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 베드로와 바울
- 최징과 공해
- 베네딕도와 그레고리우스
당 무종의 폐불이 일어난 해는?
- 645년
- 751년
- 845년
- 907년
9세기 동서 교회 갈등의 쟁점이 아닌 것은?
- 슬라브 선교의 관할권
- 신경의 필리오케 표현
- 전례 관습의 차이
- 종교개혁의 칭의론
정답 1) 1 · 2) 3 · 3) 4
해설
1. 이들이 만든 문자는 훗날 키릴 문자의 바탕이 되었다.
2. 845년 회창폐불이다.
3. 칭의론 논쟁은 16세기의 일이다.
21. 주석과 참고문헌
- 《슬라브인의 사도》 전기 자료
- 당 회창폐불 관련 사서
- 아바스 학문사 연구
제5장 10세기의 세계 종교
901년~1000년
북방과 동유럽이 기독교로 들어오고, 이슬람 세계는 여러 중심으로 나뉜다.
읽는 글
제10장 10세기의 세계 종교
북방과 동유럽이 기독교로 들어오고, 이슬람 세계는 여러 중심으로 나뉩니다
901년 ~ 1000년
여는 장면 — 한 사람의 세례
988년, 키예프의 대공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한 사람의 결정이 나라 전체의 종교를 바꾸는 일이 이 세기에 여러 번 일어났습니다. 폴란드가 966년에, 루스가 988년에, 헝가리가 세기 말에 기독교를 받아들였습니다.
같은 시기 이슬람 세계는 바그다드·카이로·코르도바 세 중심으로 나뉘었고, 코르도바에서는 유대인 학문이 황금기를 맞았습니다.
이 세기에 유럽의 종교 지도가 거의 완성됩니다.
1. 세 개의 칼리프, 하나의 유럽
서유럽에서 신성로마제국이 세워지고 봉건 질서가 자리 잡았습니다. 이슬람 세계는 아바스·파티마·후우마이야로 나뉘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송이 통일을 이루고 인쇄술이 발전했습니다.
- 909년 파티마 왕조, 929년 코르도바 칼리프국 선포.
- 962년 오토 1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었습니다.
- 966년 폴란드, 988년 키예프 루스가 기독교를 받아들였습니다.
- 960년 송 건국, 971~983년 대장경 목판 인쇄.
- 910년 클뤼니 수도원 설립과 수도원 개혁 운동.
2. 910년 — 간섭에서 벗어나기
지역 영주가 수도원장을 임명하고 교회 재산을 좌우하는 관행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클뤼니 수도원의 설립자는 수도원을 교황에게 직속시켜 지역 영주의 간섭에서 떼어 냈습니다. 이 방식이 퍼지면서 개혁된 수도원 연합망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클뤼니 자체도 방대한 토지를 소유한 대영주가 되었다는 점이 함께 지적됩니다. 간섭에서 벗어나려던 조직이 스스로 큰 권력이 되는 일은 종교사에서 반복됩니다.
이 흐름이 다음 세기 교황권 강화와 서임권 투쟁의 밑바탕이 됩니다. 지금 프랑스 클뤼니에 남은 건물은 일부입니다. 대부분은 혁명기에 헐렸습니다.
3. 929년 — 코르도바
이베리아를 다스리던 우마이야 가문이 바그다드·카이로와 대등함을 내세우려 스스로 칼리프를 칭했습니다.
코르도바가 유럽 최대 규모의 도시이자 학문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 유대인 학자·관리·시인이 활약했습니다. 하스다이 이븐 샤프루트는 칼리프의 의사이자 외교 담당으로 일하며 유대 학문을 후원했습니다. 히브리어 시문학이 되살아났고 철학과 성경 주석이 발전했습니다.
이슬람 쪽은 알안달루스 문명의 절정으로 기억합니다. 유대교 쪽은 히브리어 시문학과 철학이 되살아난 황금기로 평가합니다. 기독교인 공동체(모사라베)는 세금을 내며 존속했습니다.
'세 종교의 공존'은 평등이 아니라 위계 아래의 공존이었습니다. 이상화하지 않되 실제 성취는 인정합니다. 하스다이 같은 인물은 예외적인 개인의 사례라는 점도 함께 봐야 합니다.
이 시기의 학문이 뒤에 12세기 톨레도 번역 학파로 이어집니다.
한편 사아디아 가온은 성경을 아랍어로 옮기고, 카라이파에 맞서 랍비 전통을 옹호했으며, 창조·계시·자유의지를 이성적 논증으로 다룬 책을 썼습니다. 체계적인 유대 신학서로는 가장 이른 것으로 꼽힙니다. 중세 유대 철학의 문이 여기서 열립니다.
4. 988년 — 루스의 세례
루스의 대공이 이웃 여러 종교를 살핀 끝에 동방 기독교를 택했다고 연대기는 전합니다. 동로마와의 정치적·혼인 동맹이 배경에 있었고, 통치를 위한 종교적 통합의 필요도 있었습니다.
대공이 세례를 받고 백성에게도 세례를 명했습니다.
《원초 연대기》의 종교 선택 이야기는 12세기에 정리된 서술이라 문학적 각색이 섞여 있습니다. 사건보다 백 년 이상 뒤에 편찬되었으므로 사료 비판이 필요합니다.
정교회는 '루스의 세례'로 기념합니다. 다만 오늘날 이 유산을 누가 잇는가를 두고 교회들 사이에 다툼이 있습니다.
이 결정으로 슬라브어 전례와 문자가 함께 들어왔고,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 문화의 방향이 정해졌습니다. 1453년 이후 모스크바가 정교 신앙의 계승을 자처하는 배경도 여기에 있습니다.
키이우의 성 소피아 대성당은 이 개종의 자취로 자주 소개됩니다. 다만 「직후」는 아닙니다. 창건은 다음 세기인 1011년 또는 1037년으로, 두 연대가 갈립니다. 개종한 대공의 대가 아니라 그 아들 대의 건물입니다. 이름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그 성당에서 따온 데서, 이 나라가 어느 쪽을 스승으로 삼았는지가 드러납니다.
5. 어느 문으로 들어갔나
| 나라 | 언제 | 어느 교회를 통해 | 무엇이 함께 들어왔나 |
|---|---|---|---|
| 폴란드 | 966년 | 서방(라틴) | 라틴 문자와 서유럽 문화권 |
| 키예프 루스 | 988년 | 동방(그리스) | 슬라브 문자와 정교회 전례 |
| 헝가리 | 10세기 말~11세기 초 | 서방(라틴) | 라틴 문자와 서유럽 문화권 |
어느 문으로 들어갔느냐가 그 나라의 문자·미술·법·정치 문화를 천 년 동안 갈랐습니다.
동유럽 각 민족이 어느 쪽 교회를 통해 기독교를 받아들이는가를 두고 두 교회가 경쟁했습니다. 그 경쟁의 결과가 오늘날 유럽의 문화 경계선과 상당히 겹칩니다.
한 사람의 개종이 나라 전체를 바꾸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이 시기 통치자의 결정이 곧 공동체의 결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위에서 내린 결정이 아래까지 스며드는 데 여러 세대가 걸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6. 인쇄된 경전
송에서 목판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방대한 경전을 대량으로 찍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971년부터 983년까지 국가 사업으로 13만 장에 이르는 목판을 새겨 대장경을 인쇄했습니다.
세계 인쇄사에서 가장 이른 대규모 출판 사업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고려대장경 등 이후 여러 판본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인쇄가 종교에 어떤 변화를 주는지 보여 주는 이른 사례입니다. 5백 년 뒤 유럽에서 같은 일이 일어나고, 그 결과는 훨씬 더 극적입니다. 이 두 사건을 비교해 보는 것이 15세기 장의 물음이 됩니다.
이 장이 남긴 다섯 문장
- 10세기에 유럽의 종교 지도가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 어느 교회를 통해 개종했는가가 이후 문화권을 갈랐습니다.
- 이슬람 세계의 정치적 분열은 문화적 다중심으로 이어졌습니다.
- 이베리아의 유대 황금기는 공존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동시에 조건부였다는 점도 기억해야 합니다.
- 인쇄된 대장경은 경전 보급의 성격을 바꿨습니다.
생각해 볼 질문
- 지도자 한 사람의 개종이 나라 전체를 바꾸는 일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 여러 종교가 함께 사는 사회는 어떤 조건에서 가능할까요?
- 인쇄술은 종교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요? (16세기와 비교해 보세요)
이 장에서 쓴 자료
문헌
- 사아디아 가온 《신념과 견해》 (933년, 유대·아랍어)
- 《원초 연대기》 (12세기 초 편찬, 고대 교회 슬라브어)
자료 사진
- 키이우 성 소피아 대성당 (실제 유물 · 1011년 또는 1037년 창건, 다음 세기의 것) · 클뤼니 수도원의 남은 건물 (실제 유물 · 대부분은 혁명기에 헐림)
참고
- 아랍어 연대기, 알안달루스 연구
- 클뤼니 문서고, 중세 수도원사 연구
- 송 대장경 인쇄 연구
「종교사 한눈」이 모아 둔 자료로 작성한 원고입니다.
검수 이력
- 1차 · 사실 확인 — 키이우 성 소피아 대성당을 「988년 개종 직후」로 적은 것을 고침. 창건은 다음 세기(1011년 또는 1037년, 두 연대가 갈림)이며, 개종한 대공이 아니라 그 아들 대의 건물입니다. 자료 쪽 설명도 함께 고침. 사아디아 가온의 저작을 「최초의」에서 「가장 이른 것으로 꼽히는」으로 낮춤.
- 2차 · 관점 검토 — 알안달루스의 공존을 위계 아래의 공존으로 적고 이상화하지 않는 기존 서술은 유지. 자료 사진의 제작 시기를 목록에 밝힘.
- 3차 · 저작권 확인 — 자료 사진 2장의 이용 조건 확인.
- 남은 것 · 외부 검토 — 쓴 쪽과 검수한 쪽이 같습니다. 출판 전 제3자의 확인이 필요합니다.
1. 세기를 여는 한 장면
988년 키예프의 대공이 세례를 받았다. 한 사람의 결정이 나라 전체의 종교를 바꾸는 일이 이 세기에 여러 번 일어났다. 같은 시기 이슬람 세계는 바그다드·카이로·코르도바 세 중심으로 나뉘었고, 코르도바에서는 유대인 학문이 황금기를 맞았다.
2. 10세기의 세계사 배경
서유럽에서 신성로마제국이 세워지고 봉건 질서가 자리 잡았다. 이슬람 세계는 아바스·파티마·후우마이야로 나뉘었다. 중국에서는 송이 통일을 이루고 인쇄술이 발전했다.
- 909년 파티마 왕조, 929년 코르도바 칼리프국 선포.
- 962년 오토 1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었다.
- 966년 폴란드, 988년 키예프 루스가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 960년 송 건국, 971~983년 대장경 목판 인쇄.
- 910년 클뤼니 수도원 설립과 수도원 개혁 운동.
3. 한눈에 보는 연대표
| 연도 | 일어난 일 | 관련 종교 |
|---|---|---|
| 910년 | 클뤼니 수도원이 세워져 수도원 개혁 운동이 시작된다. | 가톨릭 |
| 929년 | 코르도바 칼리프국이 선포된다. | 이슬람 |
| 966년 | 폴란드가 기독교를 받아들인다. | 가톨릭 |
| 988년 | 키예프 루스가 동방 기독교를 받아들인다. 키이우 성 소피아 대성당은 그 직후가 아니라 다음 세기(1011년 또는 1037년)에 세워진다. | 정교회 |
| 10세기 | 이베리아에서 유대 학문·시문학의 황금기가 시작된다. | 유대, 이슬람 |
| 971~983년 | 송에서 대장경이 목판으로 인쇄된다. | 불교 |
4. 유대교
이베리아의 황금기
무슬림 통치의 이베리아에서 유대인은 궁정 관리·의사·시인·철학자로 활동했다. 히브리어 시문학이 되살아났고 철학과 성경 주석이 발전했다. 이 시기를 이상화하지 않되, 실제로 예외적인 시기였다는 점도 함께 말해야 한다.
5. 기독교
새 민족들이 들어오다
북유럽과 동유럽의 여러 민족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유럽의 종교 지도가 거의 완성되었다. 어느 쪽 교회를 통해 받아들였는가가 이후 그 지역의 문화권을 결정했다.
6. 가톨릭
수도원 개혁의 시작
클뤼니를 중심으로 한 개혁 운동은 세속 권력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흐름이었고, 다음 세기 교황권 강화로 이어진다.
7. 동방정교회
루스의 세례
988년 키예프의 개종으로 동방 기독교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지역으로 뻗어 나갔다. 이 결정이 동유럽 문화의 방향을 정했다.
8. 개신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16세기 종교개혁 과정에서 여러 갈래로 형성되었다.
9. 이슬람교
세 개의 중심
바그다드의 아바스, 카이로의 파티마, 코르도바의 후우마이야가 각각 칼리프를 칭하며 경쟁했다. 정치적 분열은 오히려 여러 도시에서 문화가 꽃피는 조건이 되기도 했다.
10. 불교
인쇄된 경전
송에서 대장경을 목판으로 인쇄하면서 경전 보급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동아시아 불교 문헌의 표준이 마련되었다.
11. 종교 간 관계
유대교 ↔ 이슬람교 — 문화·학문·예술 교류
이베리아에서 유대인·무슬림·기독교인이 함께 살며 학문과 문학을 주고받았다. 완전한 평등은 아니었지만 상호 영향은 뚜렷했다.
가톨릭 ↔ 동방정교회 — 선교와 전파
동유럽 각 민족이 어느 쪽 교회를 통해 기독교를 받아들이는가를 두고 두 교회가 경쟁했다. 폴란드는 서방, 루스는 동방을 택했다.
12. 이 세기의 결정적 사건
클뤼니 수도원 설립과 개혁 운동 (910년)
지역 영주가 수도원장을 임명하고 교회 재산을 좌우하는 관행이 널리 퍼져 있었다.
원인
- 세속 권력의 교회 인사 개입
- 수도 생활의 이완
전개
설립자가 수도원을 교황에게 직속시켜 지역 영주의 간섭에서 떼어 냈다.
결과
- 개혁된 수도원 연합망이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장기적 영향
- 11세기 교황권 강화와 서임권 투쟁의 밑바탕이 되었다
- 전례와 학문, 순례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가톨릭 | 교회가 세속 권력에서 독립하려는 오랜 노력의 출발점으로 본다. |
| 역사학계 | 클뤼니 자체도 방대한 토지를 소유한 대영주가 되었다는 점이 함께 지적된다. |
코르도바 칼리프국 선포 (929년)
이베리아를 다스리던 우마이야 가문이 바그다드·카이로와 대등함을 내세우려 했다.
전개
스스로 칼리프를 칭하고 궁정과 학문을 크게 후원했다.
결과
- 코르도바가 유럽 최대 규모의 도시이자 학문 중심지가 되었다
장기적 영향
- 유대인 학자·관리·시인이 활약하는 이른바 황금기가 열렸다
- 이 시기의 학문이 뒤에 톨레도 번역 학파로 이어진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이슬람교 | 알안달루스 문명의 절정으로 기억한다. |
| 유대교 | 히브리어 시문학과 철학이 되살아난 시기로 평가한다. |
| 기독교 | 모사라베라 불린 기독교인 공동체가 세금을 내며 존속했다. |
| 역사학계 | ‘세 종교의 공존’은 평등이 아니라 위계 아래의 공존이었다. 이상화하지 않되 실제 성취는 인정한다. |
대장경 목판 인쇄 (971년~983년)
목판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방대한 경전을 대량으로 찍을 수 있게 되었다.
전개
국가 사업으로 13만 장에 이르는 목판을 새겨 대장경을 인쇄했다.
결과
- 경전을 대량으로 보급할 수 있게 되었다
장기적 영향
- 동아시아 불교 문헌의 표준이 마련되었다
- 고려대장경 등 이후 여러 판본의 바탕이 되었다
- 인쇄가 종교에 어떤 변화를 주는지 보여 주는 이른 사례다(16세기 유럽과 비교할 만하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불교 | 가르침을 널리 퍼뜨리는 공덕의 사업으로 여겨졌다. |
| 역사학계 | 세계 인쇄사에서 가장 이른 대규모 출판 사업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
키예프 루스의 개종 (988년)
루스의 대공이 이웃 여러 종교를 살핀 끝에 동방 기독교를 택했다고 연대기는 전한다.
원인
- 동로마와의 정치적·혼인 동맹
- 통치를 위한 종교적 통합의 필요
전개
대공이 세례를 받고 백성에게도 세례를 명했다.
결과
- 루스가 동방 기독교권에 들어갔다
장기적 영향
-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 문화의 방향이 정해졌다
- 슬라브어 전례와 문자가 함께 들어왔다
- 1453년 이후 모스크바가 정교 신앙의 계승을 자처하는 배경이 된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동방정교회 | ‘루스의 세례’로 기념한다. 다만 오늘날 이 유산을 누가 잇는가를 두고 교회들 사이에 다툼이 있다. |
| 역사학계 | 《원초 연대기》의 종교 선택 이야기는 12세기에 정리된 서술이라 문학적 각색이 섞여 있다. |
학계의 평가
개종의 실제 동기와 과정, 연대기 기사의 신뢰도가 논의된다.
13. 주요 인물
| 인물 | 생몰 | 활동 | 후대의 평가 |
|---|---|---|---|
| 사아디아 가온 | 882년 ~ 942년 | 성경을 아랍어로 옮겼다 / 카라이파에 맞서 랍비 전통을 옹호했다 / 히브리어 문법과 사전 작업을 했다 | 중세 유대 철학의 문을 연 인물로 평가된다. |
| 블라디미르 1세 | 958년경 ~ 1015년 | 동방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나라에 도입했다 | 정교회가 성인으로 기린다. 개종 이전의 통치와 개종 이후의 변화가 연대기에 대비되어 서술된다. |
| 하스다이 이븐 샤프루트 | 915년경 ~ 970년경 | 칼리프의 의사이자 외교 담당으로 일했다 / 유대 학문을 후원했다 | 무슬림 통치 아래에서 유대인이 오를 수 있었던 자리를 보여 주는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다만 예외적인 개인의 사례라는 점도 함께 봐야 한다. |
14. 주요 문헌과 사상
| 문헌 | 시기 | 언어 | 핵심 내용 |
|---|---|---|---|
| 신념과 견해 | 933년 | 유대·아랍어 | 창조·계시·자유의지·부활 등을 이성적 논증으로 다룬 최초의 체계적 유대 신학서. |
| 원초 연대기 | 12세기 초 편찬 | 고대 교회 슬라브어 | 루스의 기원부터 12세기 초까지를 다루며, 988년 개종 기사를 담고 있다. |
15. 지도와 이동 경로
10세기 — 개종의 물결과 세 개의 칼리프 (901~1000년)
| 장소 | 성격 | 설명 |
|---|---|---|
| 클뤼니 | 수도원·학교 | 910년 설립. |
| 그니에즈노(폴란드) | 도시 | 966년 개종. |
| 키이우 | 도시 | 988년 개종. |
| 코르도바 | 도시 | 929년 칼리프국 선포. |
| 카이로 | 도시 | 파티마 왕조의 새 수도. |
| 바그다드 | 도시 | 아바스 칼리프의 자리. |
| 청두 | 도시 | 대장경 목판 인쇄. |
경계 확실성: 대체로 확실
16. 사진과 유물로 보는 역사
17. 핵심 정리
- 10세기에 유럽의 종교 지도가 거의 완성되었다.
- 어느 교회를 통해 개종했는가가 이후 문화권을 갈랐다.
- 이슬람 세계의 정치적 분열은 문화적 다중심으로 이어졌다.
- 이베리아의 유대 황금기는 공존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동시에 조건부였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 인쇄된 대장경은 경전 보급의 성격을 바꿨다.
18. 비교표
| 나라 | 언제 | 어느 교회를 통해 | 무엇이 함께 들어왔나 |
|---|---|---|---|
| 폴란드 | 966년 | 서방(라틴) | 라틴 문자와 서유럽 문화권 |
| 키예프 루스 | 988년 | 동방(그리스) | 슬라브 문자와 정교회 전례 |
| 헝가리 | 10세기 말~11세기 초 | 서방(라틴) | 라틴 문자와 서유럽 문화권 |
어느 문으로 들어갔느냐가 그 나라의 문자·미술·법·정치 문화를 천 년 동안 갈랐다.
19. 생각해 볼 질문
- 지도자 한 사람의 개종이 나라 전체를 바꾸는 일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 여러 종교가 함께 사는 사회는 어떤 조건에서 가능할까?
- 인쇄술은 종교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16세기와 비교해 보자)
20. 확인 퀴즈
키예프 루스가 동방 기독교를 받아들인 해는?
- 966년
- 988년
- 1054년
- 1204년
10세기 이슬람 세계의 세 중심이 아닌 곳은?
- 바그다드
- 카이로
- 코르도바
- 델리
클뤼니 수도원 개혁 운동의 목표로 가장 적절한 것은?
- 세속 권력의 간섭에서 벗어나 수도 생활을 바로 세우는 것
- 십자군을 조직하는 것
- 성경을 각 나라 말로 번역하는 것
- 교황을 폐지하는 것
정답 1) 2 · 2) 4 · 3) 1
해설
1. 988년 블라디미르 대공의 세례로 전한다.
2. 델리 술탄국은 13세기에 세워진다.
3. 이 흐름이 11세기 교황권 강화로 이어진다.
21. 주석과 참고문헌
- 《원초 연대기》(루스 개종 기사)
- 이베리아 유대 문학 연구
- 송 대장경 인쇄 연구
참고문헌
- 프로코피우스의 저작
- 베네딕도 규칙
- 《일본서기》 등 동아시아 사서
- 초기 이슬람사 연구서와 사료 비판 연구
- 동로마·시리아어 연대기 (외부 시선의 근접 사료)
- 현장 《대당서역기》
- 아바스 시대 번역 운동 연구
- 제2차 니케아 공의회 문서
- 일본 나라 시대 사료
- 《슬라브인의 사도》 전기 자료
- 당 회창폐불 관련 사서
- 아바스 학문사 연구
- 《원초 연대기》(루스 개종 기사)
- 이베리아 유대 문학 연구
- 송 대장경 인쇄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