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사 한눈 · 제4권
11세기부터 15세기
분열과 십자군, 그리고 만남
같은 시대, 서로 다른 믿음은 어떤 역사를 지나왔는가
차례
- 제1장 11세기의 세계 종교
- 제2장 12세기의 세계 종교
- 제3장 13세기의 세계 종교
- 제4장 14세기의 세계 종교
- 제5장 15세기의 세계 종교
이 책이 다루는 것
- 동서 교회 분열
- 십자군 전쟁
- 중세 가톨릭교회
- 이슬람 문명과 학문
- 유대인 공동체의 상황
- 동아시아 불교의 변화
이 책은 역사적 사실, 종교 전통의 주장, 학문적 해석을 구분해 씁니다. 확정되지 않은 연대와 논쟁 중인 내용은 그렇게 밝혀 적었고, 특정 종교의 관점만으로 다른 종교를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제1장 11세기의 세계 종교
1001년~1100년
동과 서의 교회가 갈라서고, 성지를 향한 원정이 시작된다.
1. 세기를 여는 한 장면
1054년 여름, 로마에서 온 사절이 하기아 소피아 제단 위에 파문 문서를 놓고 나갔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그날이 천 년을 가르는 날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십 년 뒤 한 교황이 서방의 기사들에게 동방을 도우라고 호소했고, 그 호소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 세기에 세 종교의 관계가 다시 짜인다.
2. 11세기의 세계사 배경
셀주크 튀르크가 중동을 장악하고 1071년 만지케르트에서 동로마를 크게 이겼다. 서유럽에서는 교황과 황제가 서임권을 두고 다투었고, 노르만인이 잉글랜드와 남이탈리아를 차지했다. 중국은 송, 인도 북부는 가즈니 왕조의 침입을 겪었다.
- 1066년 노르만의 잉글랜드 정복.
-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로 동로마가 소아시아 대부분을 잃었다.
- 1077년 카노사의 굴욕 — 서임권 투쟁의 상징적 장면.
- 1095년 클레르몽 교회회의, 1096~1099년 제1차 십자군.
- 가즈니의 마흐무드가 인도 북서부를 여러 차례 침입했다.
3. 한눈에 보는 연대표
| 연도 | 일어난 일 | 관련 종교 |
|---|---|---|
| 1054년 | 로마 사절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서로를 파문한다. 동서 교회 분열의 상징적 사건. | 가톨릭, 정교회 |
| 1071년 |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가 동로마를 격파한다. | 이슬람, 정교회 |
| 1077년 | 카노사 — 황제가 교황 앞에 굴복한다. | 가톨릭 |
| 1095년 | 우르바노 2세가 클레르몽에서 원정을 호소한다. | 가톨릭 |
| 1096년 | 라인란트에서 십자군 무리가 유대인 공동체를 학살한다. | 유대, 가톨릭 |
| 1099년 |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주민을 학살한다. | 가톨릭, 이슬람, 유대 |
| 11세기 후반 | 라시가 성경과 탈무드 주석을 남긴다. | 유대 |
| 11세기 말 | 가잘리가 신학과 수피 영성을 잇는 저작을 남긴다. | 이슬람 |
| 1042년 | 아티샤가 티베트에 들어가 불교 부흥을 이끈다. | 불교 |
4. 유대교
십자군이 지나간 자리
제1차 십자군이 출발하면서 라인란트의 유대인 공동체가 습격을 받았다. 성지를 향한 원정이 가는 길에 있는 이웃을 죽이는 일로 시작된 것이다. 이 사건은 유럽 유대인 역사에서 오래 기억되는 상처가 되었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라시가 성경과 탈무드 주석을 남겨 이후 유대교 학습의 표준이 되었다.
- 1096년 보름스·마인츠·쾰른 등지에서 학살이 일어났다.
- 일부 주교가 유대인을 보호하려 했으나 막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 라시의 주석은 오늘날까지 유대교 학습의 기본 텍스트다.
5. 기독교
하나의 교회가 둘이 되다
1054년의 상호 파문은 오랫동안 쌓여 온 언어·전례·권위 이해의 차이가 터진 사건이었다. 실제로 두 교회의 관계는 그 후에도 한동안 이어졌고, 결정적으로 벌어진 것은 1204년 이후다. 서방에서는 교황권이 강화되며 십자군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종교 전쟁이 시작되었다.
- 1054년을 ‘분열의 날’로만 가르치면 과정을 놓친다.
- 서임권 투쟁으로 교황권이 세속 권력에 맞설 힘을 얻었다.
- 십자군은 순례·전쟁·속죄가 뒤섞인 복합적 운동이었다.
6. 가톨릭
교황권의 세기
개혁 운동을 거쳐 교황이 서유럽 전체를 향해 발언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클레르몽의 호소가 실제로 수만 명을 움직인 것이 그 힘을 보여 준다.
- 교황이 황제를 파문할 수 있음을 보여 준 카노사 사건.
- 십자군 참가자에게 주어진 영적 보상이 대규모 동원을 가능하게 했다.
7. 동방정교회
도움을 청했다가 더 큰 문제를 얻다
만지케르트 패배 후 동로마 황제는 서방에 용병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도착한 것은 용병이 아니라 독자적인 목표를 가진 대규모 군대였고, 이 어긋남이 이후 두 교회 관계를 결정적으로 악화시킨다.
8. 개신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16세기 종교개혁 과정에서 여러 갈래로 형성되었다.
9. 이슬람교
셀주크의 시대, 가잘리의 종합
셀주크 튀르크가 중동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었고, 마드라사 제도가 확산되며 학문이 제도화되었다. 가잘리는 법학·신학·철학·수피 영성을 잇는 저작으로 이후 수니 이슬람 사상의 방향을 정했다.
- 십자군의 도착은 지역 세력 다툼 속의 한 사건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 마드라사가 학문 교육의 표준 기관이 되었다.
10. 불교
티베트의 후전기
아티샤의 티베트 방문으로 불교가 다시 정비되었고, 여러 종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인도 본토에서는 정치 상황이 나빠지며 불교 교단이 위축되기 시작했다.
11. 종교 간 관계
가톨릭 ↔ 동방정교회 — 교리적 차이와 논쟁
신경의 필리오케 표현, 무교병 사용, 로마 주교의 권위 범위가 쟁점이었다. 언어가 달라 서로의 문헌을 읽지 못한 것도 오해를 키웠다.
가톨릭의 자리에서: 로마 쪽은 베드로의 자리로서 로마 주교의 보편적 관할권을 주장했다.
동방정교회의 자리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쪽은 다섯 총대주교의 동등한 협의 구조를 지켰다고 본다.
기독교 ↔ 이슬람교 — 전쟁과 충돌
제1차 십자군은 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주민을 학살했다. 이 기억은 이후 두 세계의 관계에 오래 그림자를 드리웠다.
기독교의 자리에서: 서방 기록은 이를 성지 회복으로 서술했다.
이슬람교의 자리에서: 이슬람 쪽 기록은 갑작스러운 침입과 학살로 서술한다.
유대교 ↔ 가톨릭 — 박해와 차별
십자군 출발 과정에서 라인란트 유대인 공동체가 학살당했다. 종교적 열정이 가장 가까운 소수자에게 먼저 향한 사례다.
12. 이 세기의 결정적 사건
동서 교회의 상호 파문 (1054년)
언어(라틴어·그리스어), 전례 관습, 신경의 필리오케 표현, 로마 주교의 권위 범위를 둘러싼 차이가 수백 년에 걸쳐 쌓여 있었다.
원인
- 필리오케 논쟁
- 성찬에 쓰는 빵의 종류 등 관습 차이
- 남이탈리아 관할권 다툼
전개
로마에서 온 사절단이 총대주교를 파문하는 문서를 하기아 소피아에 두었고, 총대주교도 사절단을 파문했다.
결과
- 양측 지도부 사이의 공식 단절
장기적 영향
- 실제 관계 단절은 서서히 진행되었고,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로 결정적으로 굳어졌다
- 1965년 두 교회가 이 파문을 철회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가톨릭 | 로마 주교의 보편적 관할권이 인정되지 않은 것을 문제로 보았다. |
| 동방정교회 | 다섯 총대주교의 동등한 협의 구조가 훼손된 것으로 보았다. |
| 역사학계 | 1054년을 ‘분열의 날’로 못 박는 서술은 과정을 지운다는 지적이 많다. |
학계의 평가
당시 사람들이 이 사건을 최종적 분열로 인식했는지 자체가 논쟁거리다.
클레르몽 교회회의와 원정 호소 (1095년)
만지케르트 패배 후 동로마 황제가 서방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전개
교황 우르바노 2세가 회의 말미에 동방을 돕고 성지로 갈 것을 호소했고, 참가자에게 영적 보상을 약속했다.
결과
- 수만 명 규모의 원정이 조직되었다
장기적 영향
- 교황권이 유럽 전체를 동원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 ‘십자군’이라는 형태의 종교 전쟁이 시작되었다
학계의 평가
우르바노 2세가 실제로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남아 있는 다섯 개의 연설 기록은 모두 사건 이후에 쓰였고 내용이 서로 다르다.
라인란트 유대인 학살 (1096년)
제1차 십자군에 참가하려 모인 무리 가운데 일부가 출발 전 유대인 공동체를 습격했다.
원인
- 종교적 열정의 폭력적 표출
- 채무 관계와 경제적 동기
- 지역 권력의 통제 실패
전개
여러 도시에서 유대인 공동체가 개종을 강요당하거나 살해되었다. 일부 주교가 보호를 시도했으나 막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결과
- 여러 공동체가 사실상 소멸했다
장기적 영향
- 유럽 유대인 역사에서 오래 기억되는 상처가 되었고 히브리어 연대기로 기록되었다
- 성지를 향한 원정이 가는 길의 이웃에게 폭력이 된 사례로 남았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유대교 | ‘키두쉬 하솀’(신명을 위한 죽음)의 기억으로 애도 문학에 남았다. |
| 가톨릭 | 당시 교회 지도부의 공식 명령은 아니었으나, 열정을 부추긴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평가가 있다. |
제1차 십자군의 예루살렘 점령 (1099년)
3년에 걸친 원정 끝에 십자군이 예루살렘에 이르렀다.
전개
포위 끝에 도시를 함락하고 무슬림과 유대인 주민을 대규모로 살해했다.
결과
- 예루살렘 왕국 등 십자군 국가가 세워졌다
장기적 영향
- 이슬람 세계와 유대 공동체의 기억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 1187년 살라딘의 접수 방식과 자주 대비된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가톨릭 | 당대 서방 기록은 성지 회복의 성취로 서술했다. |
| 이슬람교 | 무방비 주민에 대한 학살로 기록되었다. |
| 유대교 | 도시의 유대인 공동체도 함께 희생되었다. |
| 역사학계 | 희생자 수는 사료마다 크게 달라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다. 대규모 학살이 있었다는 점은 여러 계열 사료가 일치한다. |
13. 주요 인물
| 인물 | 생몰 | 활동 | 후대의 평가 |
|---|---|---|---|
| 우르바노 2세 | 1035년경 ~ 1099년 | 1095년 클레르몽에서 원정을 호소했다 / 교회 개혁 정책을 이어 갔다 | 교황권의 동원력을 보여 준 인물로 평가되며, 십자군의 결과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 크게 갈린다. |
| 미카엘 케룰라리오스 | 1000년경 ~ 1059년 |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서 로마 사절과 충돌했다 | 동방 교회의 독자성을 지킨 인물로 보는 시각과, 대립을 키웠다고 보는 시각이 함께 있다. |
| 라시(슐로모 이츠하키) | 1040년 ~ 1105년 | 히브리 성경과 탈무드 전체에 대한 주석을 남겼다 | 오늘날까지 유대교 학습의 기본 텍스트이며, 기독교 성경학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
| 아부 하미드 알가잘리 | 1058년 ~ 1111년 | 《종교학의 부흥》을 비롯한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 철학에 대한 비판서를 썼다 | 수니 이슬람 사상의 방향을 정한 인물로 평가된다. 철학 비판의 영향을 두고는 논쟁이 있다. |
14. 주요 문헌과 사상
| 문헌 | 시기 | 언어 | 핵심 내용 |
|---|---|---|---|
| 라시 주석 | 11세기 후반 | 히브리어·아람어 | 히브리 성경과 탈무드 본문의 뜻을 간결하게 풀이했다. |
| 종교학의 부흥 | 11세기 말~12세기 초 | 아랍어 | 예배와 일상, 마음의 수양을 아우르는 종합적 신앙 안내서. |
15. 지도와 이동 경로
11세기 말, 제1차 십자군의 길 (1096~1099년)
여러 부대가 서로 다른 길로 움직였다. 이 경로는 대표적인 흐름을 단순화한 것이다.
| 장소 | 성격 | 설명 |
|---|---|---|
| 클레르몽 | 회의 | 1095년 원정 호소. |
| 마인츠 | 도시 | 1096년 학살이 일어난 곳. |
| 콘스탄티노폴리스 | 도시 | |
| 니케아 | 전투 | 1097년 공방. |
| 안티오키아 | 전투 | 1098년 공방. |
| 예루살렘 | 전투 | 1099년 점령과 학살. |
| 바그다드 | 도시 | 셀주크의 영향 아래 있던 아바스 칼리프의 자리. |
경계 확실성: 대체로 확실
| 경로 | 성격 | 설명 |
|---|---|---|
| 제1차 십자군의 이동(개략) | 정복 |
16. 사진과 유물로 보는 역사
17. 핵심 정리
- 1054년은 분열의 시작점이 아니라 오래 쌓인 차이가 드러난 상징적 사건이다.
- 십자군은 순례·전쟁·속죄가 섞인 복합적 운동이었고, 종교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 성지로 가는 길에서 유럽 유대인이 먼저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빼놓고 십자군을 말할 수 없다.
- 동로마는 도움을 청했다가 오히려 더 큰 위기를 맞았다.
- 이슬람 세계에서는 가잘리가 신학과 영성을 잇는 종합을 이루었다.
18. 비교표
| 서방 기독교 | 동방 기독교 | 이슬람 | 유대교 | |
|---|---|---|---|---|
| 이 사건은 무엇이었나 | 성지 회복의 원정 | 요청한 것과 다른 군대의 도착 | 갑작스러운 외부 침입 | 가는 길에 닥친 학살 |
| 남은 기억 | 영웅적 순례 | 서방에 대한 불신 | 정복과 학살의 기억 | 순교와 애도의 기록 |
| 장기적 결과 | 교황권 강화 | 동서 관계 악화 | 지역 세력의 재편 | 유럽 내 지위 악화 |
같은 사건도 자리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승자 중심의 서술을 피한다(§7).
19. 생각해 볼 질문
- 천 년을 가른 사건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왜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 종교적 열정이 가장 가까운 이웃에게 폭력으로 향하는 일은 왜 반복될까?
- ‘성지’라는 말은 세 종교에 각각 어떤 뜻일까?
20. 확인 퀴즈
동서 교회의 상호 파문이 있었던 해는?
- 1054년
- 1095년
- 1099년
- 1204년
제1차 십자군의 직접적 계기가 된 사건은?
- 1071년 만지케르트 패배 후 동로마의 지원 요청과 1095년 클레르몽의 호소
- 1054년 상호 파문
-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
-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십자군은 순수하게 종교적 동기로만 일어났다’는 서술의 문제는?
- 문제 없다
- 전쟁의 정치·경제적 원인을 종교 하나로 단순화했다
- 연도가 틀렸다
- 십자군은 없었다
성경과 탈무드 주석으로 유대교 학습의 표준을 세운 11세기 인물은?
- 라시
- 마이모니데스
- 가잘리
- 안셀무스
정답 1) 1 · 2) 1 · 3) 2 · 4) 1
해설
1. 1054년이다.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이 관계를 결정적으로 악화시켰다.
2. 동로마의 요청과 교황의 호소가 겹쳐 원정이 시작되었다.
3. 이 앱의 서술 원칙(§13.3)에 어긋난다. 토지·상업·정치 이해도 함께 작용했다.
4. 마이모니데스는 12세기, 가잘리는 이슬람, 안셀무스는 기독교 신학자다.
21. 주석과 참고문헌
- 십자군 연대기(라틴어·아랍어·히브리어 기록을 함께 볼 것)
- 1054년 관련 문서와 최근 연구
- 라시 주석, 가잘리 저작
제2장 12세기의 세계 종교
1101년~1200년
전쟁 곁에서 번역이 오가고, 세 종교의 철학이 서로를 읽는다.
1. 세기를 여는 한 장면
예루살렘을 되찾은 살라딘은 도시를 학살 없이 접수했다. 같은 시기 톨레도에서는 아랍어 책이 라틴어로 옮겨지고 있었다. 전쟁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책과 생각은 국경을 넘었다. 이 세기의 유럽 지식은 이슬람 세계를 거쳐 돌아온 것이다.
2. 12세기의 세계사 배경
십자군 국가들이 시리아·팔레스타인에 자리 잡았다가 살라딘에게 밀렸다. 서유럽에서는 도시와 대학이 성장했고, 이베리아에서는 재정복 운동이 이어졌다. 일본은 무사 정권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 1147~1149년 제2차 십자군 실패.
- 1187년 하틴 전투와 살라딘의 예루살렘 회복.
- 1189~1192년 제3차 십자군.
- 볼로냐·파리 등에서 대학이 형성되었다.
- 톨레도에서 아랍어 문헌의 라틴어 번역이 활발했다.
3. 한눈에 보는 연대표
| 연도 | 일어난 일 | 관련 종교 |
|---|---|---|
| 1146~1147년 | 제2차 십자군 준비 중 다시 유대인 공격 위협이 일어난다. | 유대 |
| 1187년 | 살라딘이 하틴에서 승리하고 예루살렘을 회복한다. | 이슬람, 가톨릭 |
| 1190년 | 잉글랜드 요크에서 유대인 학살이 일어난다. | 유대 |
| 12세기 | 톨레도 번역 학파가 아랍어 학문을 라틴어로 옮긴다. | 이슬람, 가톨릭, 유대 |
| 12세기 후반 | 마이모니데스가 《미쉬네 토라》와 《혼란한 자들을 위한 안내서》를 쓴다. | 유대 |
| 12세기 후반 | 이븐 루시드가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을 남긴다. | 이슬람 |
| 1193년경 | 인도 날란다 등 불교 대사원이 파괴되며 인도 불교가 급격히 쇠퇴한다. | 불교, 이슬람 |
4. 유대교
학문의 절정과 폭력의 확산
마이모니데스는 유대 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철학과 신앙을 잇는 저작을 남겼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십자군 열기와 함께 유대인에 대한 폭력과 헛소문이 퍼졌다.
- 마이모니데스는 이슬람 세계(안달루시아·이집트)에서 활동했다.
- ‘의례 살인’ 같은 근거 없는 고발이 이 시기부터 퍼졌다.
5. 기독교
대학과 스콜라의 시작
도시의 성장과 함께 대학이 생기고,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이 라틴어로 들어오면서 신학이 새로운 방법을 얻었다. 동시에 이단 심문과 통제도 강화되기 시작했다.
6. 가톨릭
시토회 개혁, 대학 성립, 십자군의 계속 — 교황권이 유럽 전체를 조율하는 시대였다.
7. 동방정교회
동로마는 일시적으로 회복했지만 서방과의 불신은 깊어졌고, 다음 세기 큰 타격을 입는다.
8. 개신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16세기 종교개혁 과정에서 여러 갈래로 형성되었다.
9. 이슬람교
살라딘과 철학자들
살라딘의 예루살렘 회복은 관용적 처리로 기억된다. 사상 면에서는 이븐 루시드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이 유럽 스콜라 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 1187년 예루살렘 접수는 1099년과 달리 학살 없이 이뤄졌다.
- 이븐 루시드는 유럽에서 ‘아베로에스’로 알려졌다.
10. 불교
인도에서 사라지다
정치적 혼란과 대사원 파괴로 인도 본토의 불교 교단이 사실상 끊겼다. 다만 티베트·동남아시아·동아시아에서는 계속 발전했다. 인도 불교의 쇠퇴를 한 사건으로만 설명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11. 종교 간 관계
기독교 ↔ 이슬람교 — 문화·학문·예술 교류
톨레도와 시칠리아에서 아랍어 문헌이 라틴어로 옮겨졌다. 유대인 학자들이 중간 언어를 다루며 이 작업에 참여했다. 전쟁과 번역이 같은 세기에 나란히 일어났다.
기독교 ↔ 이슬람교 — 전쟁과 충돌
제2차·제3차 십자군이 이어졌다. 1187년 살라딘의 예루살렘 접수는 1099년과 대비되어 자주 언급된다.
불교 ↔ 이슬람교 — 전쟁과 충돌
북인도의 정치 변동 속에서 불교 대사원이 파괴되었다. 다만 인도 불교의 쇠퇴는 이전부터 진행된 여러 요인이 겹친 결과라는 것이 학계의 설명이다.
12. 이 세기의 결정적 사건
톨레도 번역 학파 (1130년~1200년)
1085년 톨레도가 기독교 왕국에 넘어가면서 아랍어 장서가 그대로 남았다.
원인
- 아랍어 학문에 대한 유럽의 갈증
- 세 언어를 다룰 수 있는 사람들이 한 도시에 모여 있던 조건
전개
유대인·모사라베·라틴 성직자가 함께 아랍어 문헌을 카스티야어를 거쳐 라틴어로 옮겼다.
결과
- 아리스토텔레스·의학·수학·천문학 문헌이 라틴 유럽에 들어왔다
장기적 영향
- 13세기 스콜라 신학과 대학 교육의 내용이 바뀌었다
- 아랍어를 거쳐 보존된 그리스 학문이 유럽으로 되돌아왔다
- 전쟁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지식이 오갔음을 보여 준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가톨릭 | 새 지식이 신학에 도전이자 자원이 되었다. |
| 이슬람교 | 아바스 번역 운동의 성과가 다시 서쪽으로 흘러간 것이다. |
| 유대교 | 유대인 학자들이 중간 언어를 다루는 핵심 역할을 했다. |
하틴 전투와 살라딘의 예루살렘 회복 (1187년)
십자군 국가들이 내부 분열을 겪는 사이 살라딘이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합했다.
원인
- 십자군 국가의 내분
- 휴전 파기와 대상 습격
- 살라딘의 세력 통합
전개
물 없는 고지에서 십자군 주력이 궤멸했고, 몇 달 뒤 예루살렘이 항복 조건을 협상해 넘어갔다.
결과
- 예루살렘이 88년 만에 무슬림 통치로 돌아갔다
- 제3차 십자군이 소집되었다
장기적 영향
- 1099년의 학살과 대비되어 자주 함께 이야기된다
- 유대인의 예루살렘 거주가 다시 허용되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이슬람교 | 성지 회복이자 절제 있는 처리로 기억한다. |
| 가톨릭 | 충격적 패배였고 새 원정의 명분이 되었다. |
| 유대교 | 십자군 시기 금지되었던 거주가 다시 가능해졌다. |
| 역사학계 | 살라딘의 관대함은 당대 유럽 문헌도 인정했다. 다만 몸값을 내지 못한 이들은 노예가 되었다는 사실도 함께 기록된다. |
요크 유대인 학살 (1190년)
제3차 십자군 준비 열기 속에 잉글랜드 여러 도시에서 유대인 공격이 이어졌다.
원인
- 십자군 열기
- 채무 관계와 경제적 동기
- 왕권의 보호가 미치지 못한 공백
전개
피신한 공동체가 성탑에 갇혔고, 다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살해되었다.
결과
- 요크의 유대인 공동체가 사실상 소멸했다
장기적 영향
- 채무 기록이 함께 불태워진 정황이 지적된다
- 1290년 잉글랜드에서 유대인이 추방되는 흐름으로 이어진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유대교 | 히브리어 애도 문학에 기록되어 오래 기억되었다. |
| 가톨릭 | 교회 지도부의 공식 명령은 아니었으나, 열기를 부추긴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
| 역사학계 | 종교적 적대와 부채 문제가 함께 작용한 전형적 사례로 분석된다. |
인도 불교 대사원의 파괴 (1193년)
북인도의 정치 질서가 무너지고 새 세력이 갠지스 유역으로 들어왔다.
전개
날란다·비크라마실라 등 대사원이 습격을 받아 파괴되었다.
결과
- 인도 본토 불교 교단의 학문 중심이 무너졌다
장기적 영향
- 많은 학승이 티베트와 네팔로 피신해 그곳 전통이 풍성해졌다
- 인도 본토에서 불교는 사실상 명맥이 끊겼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불교 | 큰 상실로 기억된다. 동시에 티베트로의 전승이 이어진 계기이기도 하다. |
| 이슬람교 | 당시 기록은 요새 공격의 맥락에서 서술한다. |
| 역사학계 | 인도 불교의 쇠퇴를 이 사건 하나로 설명하지 않는다. 왕실 후원의 이동, 힌두 전통과의 관계, 도시 경제의 변화가 오래 겹쳐 온 결과다. |
학계의 평가
쇠퇴의 원인 비중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계속 논쟁된다.
13. 주요 인물
| 인물 | 생몰 | 활동 | 후대의 평가 |
|---|---|---|---|
| 살라딘 | 1137년 ~ 1193년 |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합했다 / 1187년 예루살렘을 회복했다 / 제3차 십자군과 맞섰다 | 이슬람 세계에서 성지 회복의 상징이고, 유럽 문학에서도 기사도의 본보기로 그려졌다. 근현대에는 정치적으로 여러 방식으로 소환되었다. |
| 마이모니데스(람밤) | 1138년 ~ 1204년 | 《미쉬네 토라》로 유대 법을 체계화했다 / 《혼란한 자들을 위한 안내서》를 썼다 / 궁정 의사로 일했다 | 유대 사상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남긴 인물로 꼽힌다. 그의 철학은 당대에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고, 기독교 스콜라 신학에도 읽혔다. |
| 이븐 루시드(아베로에스) | 1126년 ~ 1198년 |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에 방대한 주석을 달았다 / 철학과 종교법이 충돌하지 않는다고 논증했다 / 재판관으로 일했다 | 라틴 유럽에서 ‘주석가’로 불리며 큰 영향을 주었다. 정작 이슬람 세계에서는 그의 영향이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다는 점이 자주 지적된다. |
|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 1090년 ~ 1153년 | 시토회 개혁을 이끌었다 / 제2차 십자군을 설교로 촉구했다 / 라인란트에서 유대인 공격을 막으려 개입했다 | 영성 저술로 높이 평가되는 동시에, 십자군을 설교한 책임이 함께 논의된다. 같은 인물이 유대인 보호에 나선 사실도 함께 기록해야 한다. |
14. 주요 문헌과 사상
| 문헌 | 시기 | 언어 | 핵심 내용 |
|---|---|---|---|
| 미쉬네 토라 | 1170~1180년 | 히브리어 | 탈무드의 법을 주제별로 재편해 결론만 명료하게 제시한 법전. |
| 혼란한 자들을 위한 안내서 | 1190년경 | 유대·아랍어 | 철학을 배운 이들이 성경과 신앙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를 다룬다. |
| 아리스토텔레스 주석 | 12세기 후반 | 아랍어 | 아리스토텔레스 저작 대부분에 대한 소·중·대 주석. |
15. 지도와 이동 경로
12세기 — 전쟁의 길과 번역의 길 (1101~1200년)
같은 세기에 한쪽에서는 군대가, 다른 쪽에서는 책이 국경을 넘었다.
| 장소 | 성격 | 설명 |
|---|---|---|
| 톨레도 | 수도원·학교 | 아랍어 문헌의 라틴어 번역. |
| 코르도바 | 도시 | 마이모니데스와 이븐 루시드의 고향. |
| 요크 | 도시 | 1190년 학살. |
| 클레르보 | 수도원·학교 | |
| 하틴 | 전투 | 1187년. |
| 예루살렘 | 성지 | 1187년 살라딘이 접수. |
| 카이로 | 도시 | 마이모니데스의 후반 활동지. |
| 날란다 | 유적 | 1193년경 파괴. |
경계 확실성: 대체로 확실
| 경로 | 성격 | 설명 |
|---|---|---|
| 아랍어 학문이 라틴 유럽으로 | 번역·학문 |
16. 사진과 유물로 보는 역사
17. 핵심 정리
- 번역은 이 세기 유럽 지성사의 가장 큰 사건이다.
- 1187년 살라딘의 예루살렘 접수와 1099년 십자군의 점령은 자주 비교된다.
- 유대인에 대한 근거 없는 고발이 이 시기 유럽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 인도 불교의 쇠퇴는 한 가지 원인으로 설명할 수 없다.
18. 비교표
| 전쟁으로 만남 | 책으로 만남 | |
|---|---|---|
| 무대 | 시리아·팔레스타인 | 톨레도·시칠리아 |
| 누가 | 기사와 군대 | 유대인·모사라베·라틴 성직자 |
| 결과 | 예루살렘의 주인이 두 번 바뀜 | 아리스토텔레스가 유럽에 돌아옴 |
| 오래 남은 것 | 서로에 대한 불신의 기억 | 대학과 스콜라 신학 |
두 흐름은 같은 세기에 동시에 있었다. 하나만 보면 12세기를 반만 아는 것이다.
19. 생각해 볼 질문
- 전쟁 중에도 지식이 오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 같은 도시를 두 번 점령한 두 사건의 차이는 무엇이 만들었을까?
- 소문이 폭력이 되는 과정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20. 확인 퀴즈
1187년 예루살렘을 회복한 인물은?
- 살라딘
- 우르바노 2세
- 리처드 1세
- 가잘리
12세기 톨레도 번역 학파의 종교사적 의의는?
- 아랍어로 보존된 그리스 학문이 라틴 유럽에 전해져 스콜라 신학의 바탕이 되었다
- 쿠란이 처음 편찬되었다
- 십자군이 시작되었다
-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인도 불교는 외부 침입 하나 때문에 사라졌다’는 서술의 문제는?
- 문제 없다
- 여러 요인이 겹친 과정을 하나로 단순화했다
- 불교는 사라지지 않았다
- 연도가 틀렸다
정답 1) 1 · 2) 1 · 3) 2
해설
1. 하틴 전투 승리 후 예루살렘을 접수했다.
2. 아리스토텔레스 수용이 13세기 신학을 바꿔 놓는다.
3. 후원 구조의 변화, 힌두 전통과의 관계 등 여러 요인이 함께 작용했다.
21. 주석과 참고문헌
- 아랍어·라틴어 십자군 연대기
- 마이모니데스 저작
- 톨레도 번역 학파 연구
제3장 13세기의 세계 종교
1201년~1300년
같은 편끼리 도시를 약탈하고, 유럽은 소수자에게 표식을 붙인다.
1. 세기를 여는 한 장면
1204년, 성지로 가야 할 군대가 같은 기독교 도시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했다. 사흘 동안 성당과 도서관이 털렸다. 동방 교회 사람들에게 이 사건은 1054년보다 훨씬 깊은 상처로 남았다. 같은 세기 서유럽에서는 공의회가 유대인에게 표식을 달게 했다.
2. 13세기의 세계사 배경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를 가로질렀고 1258년 바그다드를 함락했다. 서유럽에서는 대학과 탁발수도회가 성장했다. 인도에는 델리 술탄국이, 일본에는 가마쿠라 막부가 섰다.
- 1204년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
- 1206년 델리 술탄국 성립, 몽골 제국의 팽창.
- 1258년 몽골이 바그다드를 함락하고 아바스 칼리프조가 끝났다.
- 1291년 아크레 함락으로 십자군 국가가 소멸했다.
- 대학과 탁발수도회(프란치스코회·도미니코회)가 성장했다.
3. 한눈에 보는 연대표
| 연도 | 일어난 일 | 관련 종교 |
|---|---|---|
| 1204년 |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한다. | 가톨릭, 정교회 |
| 1209년·1216년 |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가 인가된다. | 가톨릭 |
| 1215년 | 제4차 라테란 공의회가 유대인·무슬림에게 구별되는 복장을 요구한다. | 유대, 이슬람, 가톨릭 |
| 1258년 | 몽골이 바그다드를 함락한다. | 이슬람 |
| 1265~1274년 |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대전》을 집필한다. | 가톨릭 |
| 13세기 | 일본에서 정토종·정토진종·선종·일련종 등 새로운 불교 종파가 일어난다. | 불교 |
| 13세기 말 | 카발라 문헌 《조하르》가 이베리아에서 나타난다. | 유대 |
4. 유대교
표식과 추방의 시대가 열리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의 결정으로 유대인은 옷차림으로 구별되어야 했다. 탈무드가 불태워지고 공개 논쟁이 강요되기도 했다. 동시에 신비주의 전통인 카발라가 이 시기에 문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5. 기독교
신학의 절정과 통제의 강화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 기독교 신학을 체계화했다. 탁발수도회는 도시에서 설교하고 가르쳤지만, 동시에 이단 심문의 실무를 맡기도 했다.
6. 가톨릭
교황권이 절정에 이르렀고 신학·법·조직이 정교해졌다. 그 힘은 통제로도 쓰였다.
7. 동방정교회
약탈당한 도시
1204년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반세기 넘게 라틴 세력의 지배를 받았다. 이 경험은 동방 교회가 서방과의 재결합을 거부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8. 개신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16세기 종교개혁 과정에서 여러 갈래로 형성되었다.
9. 이슬람교
칼리프조의 종말과 새로운 중심
몽골의 바그다드 함락으로 아바스 칼리프조가 끝났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는 무너지지 않았고, 이집트 맘루크 왕조와 이후 몽골계 지배자들의 개종을 통해 새 중심이 만들어졌다.
- 정복자가 오히려 피정복 종교로 개종한 대표적 사례다.
- 델리 술탄국을 통해 이슬람이 인도 아대륙에 자리 잡았다.
10. 불교
일본 불교의 대전환
민중이 실천할 수 있는 형태의 신앙(염불·좌선·제목)을 내세운 새 종파들이 나타나 일본 불교의 성격을 바꿨다.
11. 종교 간 관계
가톨릭 ↔ 동방정교회 — 전쟁과 충돌
1204년 약탈은 두 교회 관계에서 1054년보다 더 결정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2001년 교황이 이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가톨릭의 자리에서: 서방 쪽에서는 정치적 사고이자 통제되지 않은 군대의 문제로 설명해 왔다.
동방정교회의 자리에서: 동방 쪽에서는 형제 교회에 대한 배신으로 기억한다.
유대교 ↔ 가톨릭 — 박해와 차별
복장 규정, 탈무드 소각, 강제 논쟁이 이어졌다. 제도가 차별을 공식화한 시기다.
이슬람교 ↔ 불교 — 정치적 협력
몽골 제국 아래에서 여러 종교가 한 정치 질서 안에 놓였다. 지배층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불교·이슬람·기독교를 각각 후원하기도 했다.
12. 이 세기의 결정적 사건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 (1204년)
성지로 향하던 원정이 뱃삯 문제와 동로마 왕위 다툼에 얽혀 방향을 잃었다.
원인
- 베네치아에 진 빚
- 동로마 황위 계승 개입
- 지휘 체계의 부재
전개
사흘 동안 도시가 약탈당했고 성당과 도서관, 성유물이 털렸다.
결과
- 라틴 제국이 세워져 반세기 넘게 도시를 지배했다
장기적 영향
- 동방 교회가 서방과의 재결합을 거부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 동로마가 회복 뒤에도 힘을 되찾지 못해 1453년으로 이어진다
- 2001년 교황이 이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동방정교회 | 형제 교회에 대한 배신으로 기억한다. 1054년보다 깊은 상처로 꼽는다. |
| 가톨릭 | 당시 교황도 이 사태를 승인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
| 역사학계 | 종교적 동기보다 경제와 정치의 연쇄가 만든 결과라는 설명이 유력하다. |
학계의 평가
‘의도된 침공인가 우연한 표류인가’가 오랜 논쟁이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 (1215년)
교황권이 절정에 이른 시기에 교회 전반의 규율을 정비하려 했다.
전개
성사와 고해, 성직자 규율, 이단 대응, 소수자 규정 등을 폭넓게 결정했다.
결과
- 해마다 고해와 영성체를 하도록 정했다
- 유대인과 무슬림에게 구별되는 복장을 요구했다
장기적 영향
- 가톨릭 신앙 생활의 기본 틀이 오래 유지되었다
- 소수자 차별이 교회법으로 제도화되어 유럽 전역에 퍼졌다
- 이 규정이 훗날 여러 차별 표식의 선례로 인용된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가톨릭 | 교회 개혁과 신앙 생활의 정비라는 면과, 소수자 규정이라는 면을 함께 봐야 한다. |
| 유대교 | 유럽에서의 법적 차별이 본격화된 분기점으로 기억한다. |
| 역사학계 | 규정의 실제 시행은 지역마다 크게 달랐다. |
일본 가마쿠라 신불교의 등장 (1224년)
전란과 기근으로 말세 의식이 퍼졌고, 기존 대사찰은 귀족 중심이었다.
전개
염불, 좌선, 제목 등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단순한 수행을 내세운 새 종파들이 잇따라 일어났다.
결과
- 정토종·정토진종·선종·일련종 등이 자리 잡았다
장기적 영향
- 불교가 귀족의 종교에서 민중의 종교로 넓어졌다
- 오늘날 일본 불교 종파 구성의 기틀이 되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불교 | 실천을 단순화해 문턱을 낮춘 개혁으로 이해된다. |
| 역사학계 | ‘가마쿠라 신불교’라는 묶음 자체가 근대에 만들어진 틀이라는 비판도 있다. |
몽골의 바그다드 함락 (1258년)
몽골이 서쪽으로 진격하며 이란과 이라크를 차례로 장악했다.
전개
포위 끝에 도시가 함락되고 칼리프가 처형되었으며 도서관이 파괴되었다.
결과
- 5백 년 이어진 아바스 칼리프조가 끝났다
장기적 영향
- 이슬람 세계의 정치 중심이 이집트 맘루크와 다른 지역으로 옮겨졌다
- 몽골 지배층이 뒤에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정복자가 피정복 종교를 받아들이는 일이 일어났다
- 학문 중심지의 파괴는 오래 회자되었으나 그 규모는 재검토되고 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이슬람교 | 문명의 재앙으로 기억되어 왔다. |
| 기독교 | 동방교회 일부는 몽골과의 협력에 기대를 걸기도 했다. |
| 역사학계 | ‘도서관의 물이 잉크로 검게 물들었다’ 같은 서술은 문학적 과장으로 본다. |
13. 주요 인물
| 인물 | 생몰 | 활동 | 후대의 평가 |
|---|---|---|---|
|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 1181년경 ~ 1226년 | 가난을 택하고 탁발 형제회를 시작했다 / 제5차 십자군 중 이집트로 건너가 술탄을 만났다 | 가톨릭 안팎에서 가장 널리 사랑받는 인물 가운데 하나다. 술탄 알카밀과의 만남은 오늘날 종교 간 대화의 상징으로 자주 인용된다(만남의 내용은 사료가 제한적이다). |
| 토마스 아퀴나스 | 1225년경 ~ 1274년 | 《신학대전》을 썼다 / 파리 대학에서 가르쳤다 | 가톨릭 신학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그의 작업은 아랍어를 거쳐 들어온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이모니데스·이븐 시나 등 다른 전통의 사상가들을 읽은 결과이기도 하다. |
| 잘랄 앗딘 루미 | 1207년 ~ 1273년 | 《마스나비》 등 방대한 시를 남겼다 / 수피 전통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시인 가운데 하나다. 다만 서구에서 그의 시가 이슬람적 맥락을 지운 채 소비된다는 비판도 있다. |
| 신란 | 1173년 ~ 1263년 | 정토진종의 가르침을 폈다 / 승려의 결혼과 육식을 감추지 않았다 | 일본에서 가장 신자가 많은 종파의 뿌리가 되었다. 자기 부족함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는 신앙 이해가 자주 주목된다. |
14. 주요 문헌과 사상
| 문헌 | 시기 | 언어 | 핵심 내용 |
|---|---|---|---|
| 신학대전 | 1265~1274년 | 라틴어 | 하나님·인간·그리스도를 다루며 질문과 반론, 답변의 형식으로 신학을 정리한다. |
| 조하르 | 13세기 후반 | 아람어 | 토라를 신비적으로 풀이한 주석 모음. |
| 마스나비 | 13세기 후반 | 페르시아어 | 이야기와 비유로 영적 여정을 노래한 장편 시. |
15. 지도와 이동 경로
13세기 — 몽골의 세기와 유럽의 통제 (1201~1300년)
| 장소 | 성격 | 설명 |
|---|---|---|
| 콘스탄티노폴리스 | 도시 | 1204년 약탈. |
| 로마(라테란) | 회의 | 1215년 공의회. |
| 파리 | 수도원·학교 | 아퀴나스가 가르친 대학. |
| 아시시 | 도시 | |
| 바그다드 | 도시 | 1258년 함락. |
| 코니아 | 도시 | 루미의 활동지. |
| 아크레 | 전투 | 1291년 함락으로 십자군 국가 소멸. |
| 가마쿠라 | 도시 | 일본 신불교의 무대. |
경계 확실성: 대체로 확실
16. 사진과 유물로 보는 역사
17. 핵심 정리
-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은 동서 교회 관계를 결정적으로 갈라놓았다.
- 제4차 라테란 공의회는 유럽에서 종교적 소수자 차별을 제도화했다.
- 몽골의 정복은 이슬람 세계의 중심을 옮겼지만 이슬람을 없애지 못했다.
- 일본에서는 민중이 실천할 수 있는 불교가 자리 잡았다.
18. 비교표
| 무엇이 절정이었나 | 그 힘으로 한 일 | 그 힘이 남긴 그늘 | |
|---|---|---|---|
| 가톨릭교회 | 교황권 | 공의회로 신앙 생활을 정비, 대학과 탁발수도회 | 소수자 복장 규정, 이단 심문 |
| 몽골 제국 | 군사력 | 유라시아를 하나의 교통망으로 이음 | 바그다드 함락과 도시 파괴 |
| 일본 무가 정권 | 무사 권력 | 민중이 실천할 불교의 확산 | 기존 대사찰과의 충돌 |
19. 생각해 볼 질문
- 같은 종교 안의 상처가 다른 종교와의 갈등보다 깊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 표식을 달게 하는 제도는 사회에 무엇을 남길까?
- 정복자가 피정복지의 종교를 받아들이는 일은 왜 일어날까?
20. 확인 퀴즈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한 해는?
- 1054년
- 1099년
- 1204년
- 1453년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가 유대인에게 요구한 것은?
- 개종
- 구별되는 복장
- 추방
- 세금 면제
1258년 바그다드 함락의 결과로 옳은 것은?
- 아바스 칼리프조가 끝났지만 이슬람 세계는 새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 이슬람교가 사라졌다
- 기독교가 중동을 되찾았다
- 불교가 중동에 전해졌다
정답 1) 3 · 2) 2 · 3) 1
해설
1. 1204년이다.
2. 옷차림으로 구별하게 한 결정이 이후 차별의 제도적 기반이 되었다.
3. 정치 중심은 무너졌지만 종교는 오히려 정복자에게 퍼졌다.
21. 주석과 참고문헌
- 제4차 십자군 연대기
- 제4차 라테란 공의회 문서
- 몽골 시대 이슬람사 연구
제4장 14세기의 세계 종교
1301년~1400년
역병이 유럽을 휩쓸고, 교회는 교황이 둘·셋인 시대를 맞는다.
1. 세기를 여는 한 장면
1347년부터 몇 해 사이 유럽 인구의 삼분의 일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이유를 찾았고, 그 화살이 유대인에게 향했다. 같은 시기 교회에는 교황이 둘, 한때는 셋이 있었다. 권위가 흔들릴 때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이 세기가 보여 준다.
2. 14세기의 세계사 배경
흑사병과 백년전쟁이 유럽을 흔들었다. 오스만이 발칸으로 진출했고, 중국에서는 원이 무너지고 명이 섰다. 티무르가 중앙아시아를 휩쓸었다.
- 1309~1377년 교황청의 아비뇽 시기.
- 1347~1351년 흑사병 대유행.
- 1378~1417년 서방 교회의 대분열(교황이 둘 이상).
- 1368년 명 건국, 오스만의 발칸 진출.
3. 한눈에 보는 연대표
| 연도 | 일어난 일 | 관련 종교 |
|---|---|---|
| 1309~1377년 | 교황청이 아비뇽에 머문다. | 가톨릭 |
| 1347~1351년 | 흑사병이 유럽을 휩쓴다. | |
| 1348~1349년 | 역병의 책임을 뒤집어쓴 유대인 공동체가 유럽 여러 도시에서 학살당한다. | 유대 |
| 1378년 | 서방 교회의 대분열이 시작된다. | 가톨릭 |
| 1380년대 | 위클리프가 성경의 영어 번역과 교회 비판을 이끈다. | 가톨릭 |
| 14세기 | 이븐 할둔이 《역사서설》을 저술한다. | 이슬람 |
| 14세기 말 | 총카파가 티베트에서 개혁 운동을 시작한다(겔룩파의 뿌리). | 불교 |
4. 유대교
역병의 희생양
흑사병의 원인을 모르는 상황에서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헛소문이 퍼져 수많은 공동체가 학살당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동유럽으로 이주했고, 이것이 이후 아슈케나짐 중심지의 이동으로 이어진다.
5. 기독교
권위가 흔들리다
교황이 둘 이상 존재하는 상황은 교회의 권위 자체에 대한 물음을 낳았다. 공의회가 교황보다 위에 있다는 주장(공의회주의)이 힘을 얻었고, 성경을 각 나라 말로 읽자는 요구도 커졌다.
6. 가톨릭
아비뇽 시기와 대분열로 교황권의 도덕적 권위가 크게 손상되었다. 개혁 요구가 쌓였다.
7. 동방정교회
동로마는 영토를 거의 잃고 오스만의 압박을 받았다. 서방과의 재결합 논의가 다시 시작되었다.
8. 개신교
이 시기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16세기 종교개혁 과정에서 여러 갈래로 형성되었다.
9. 이슬람교
오스만의 부상
오스만이 발칸으로 진출하며 동유럽 종교 지형을 바꾸기 시작했다. 학문에서는 이븐 할둔이 문명의 흥망을 설명하는 독창적 역사 이론을 내놓았다.
10. 불교
티베트에서 계율과 학문을 강조하는 개혁 흐름이 일어나 겔룩파로 이어진다.
11. 종교 간 관계
유대교 ↔ 가톨릭 — 박해와 차별
흑사병기 학살은 재난 상황에서 소수자가 희생양이 되는 전형적 사례다. 일부 교황과 지역 지도자가 이를 막으려 했으나 널리 퍼졌다.
기독교 ↔ 이슬람교 — 전쟁과 충돌
오스만의 발칸 진출로 남동유럽에서 두 종교의 접촉면이 넓어졌다.
12. 이 세기의 결정적 사건
아비뇽 교황청 시기 (1309년~1377년)
교황과 프랑스 왕의 충돌 끝에 교황청이 로마를 떠나 프랑스 남부에 자리 잡았다.
원인
- 프랑스 왕권의 압박
- 로마의 정치적 불안
전개
일곱 명의 교황이 잇따라 아비뇽에 머물며 행정과 재정 조직을 크게 키웠다.
결과
- 교황청 관료제와 재정 체계가 정비되었다
장기적 영향
- 프랑스에 종속되었다는 인식이 퍼져 교황권의 도덕적 권위가 손상되었다
- 로마 복귀 직후 대분열로 이어졌다
- 재정 확충을 위한 각종 부과금이 뒤에 개혁 요구의 표적이 된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가톨릭 | 행정 정비라는 성과와 정치적 종속이라는 문제를 함께 평가한다. |
| 역사학계 | ‘바빌론 유수’라는 별칭은 당대 비판자들의 표현이며, 그대로 중립적 서술로 쓰기는 어렵다. |
흑사병과 유대인 학살 (1347년~1351년)
몇 해 사이 유럽 인구의 삼분의 일가량이 사라지는 대유행이 닥쳤다.
원인
- 원인을 알 수 없는 재난 앞의 공포
-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헛소문
- 채무 관계와 지역 권력의 방조
전개
스트라스부르·바젤·마인츠 등 여러 도시에서 유대인 공동체가 고문 끝의 자백을 근거로 학살당했다.
결과
- 수백 곳의 공동체가 파괴되었다
장기적 영향
- 생존자들이 동유럽(폴란드·리투아니아)으로 옮겨 가면서 아슈케나짐의 중심이 이동했다
- 재난기에 소수자가 희생양이 되는 전형이 되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유대교 | 중세 유럽에서 겪은 가장 큰 규모의 폭력 가운데 하나로 기억한다. |
| 가톨릭 | 교황 클레멘스 6세는 이런 고발이 근거 없다고 두 차례 공표했으나 학살을 막지 못했다. |
| 역사학계 | 유대인 공동체도 똑같이 병에 걸려 죽었다는 사실이 고발의 근거 없음을 보여 준다. |
서방 교회의 대분열 (1378년~1417년)
교황청이 로마로 돌아온 직후의 선거를 두고 다툼이 일어났다.
전개
로마와 아비뇽에 각각 교황이 서고, 뒤에는 피사에서 제3의 교황까지 나와 세 명이 병존했다.
결과
- 유럽 각국이 정치적 이해에 따라 서로 다른 교황을 지지했다
장기적 영향
- 공의회가 교황보다 위에 있다는 주장(공의회주의)이 힘을 얻었다
- 1417년 콘스탄츠 공의회로 수습되었으나 권위의 상처는 남았다
- 개혁 요구가 쌓여 다음 세기로 이어졌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가톨릭 | 제도의 위기가 개혁 논의를 낳았다는 점에서 양면적으로 평가된다. |
| 개신교 | 16세기 개혁자들이 교황권의 한계를 말할 때 자주 인용한 사건이다. |
| 역사학계 | 당대 사람들에게 ‘누가 진짜 교황인가’는 구원과 직결된 실질적 문제였다. |
위클리프의 개혁 요구와 영어 성경 (1380년)
교회의 재산과 권위에 대한 비판이 잉글랜드에서 커지고 있었다.
전개
위클리프와 그 제자들이 성경의 권위를 앞세우고 성경을 영어로 옮겼으며, 롤라드라 불린 추종자들이 생겼다.
결과
- 영어 성경이 필사로 퍼졌다
장기적 영향
- 얀 후스에게 영향을 주었고, 다시 16세기 개혁으로 이어진다
-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가 그의 주장을 단죄하고 유해를 파내 태우게 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개신교 | ‘종교개혁의 새벽별’로 불려 왔다. |
| 가톨릭 | 당시에는 교회 질서를 흔드는 주장으로 단죄되었다. |
| 역사학계 | 그를 곧바로 16세기 개혁자와 같은 인물로 보는 것은 시대착오라는 지적이 있다. |
13. 주요 인물
| 인물 | 생몰 | 활동 | 후대의 평가 |
|---|---|---|---|
| 존 위클리프 | 1328년경 ~ 1384년 | 성경의 최종 권위를 주장했다 / 성경의 영어 번역을 이끌었다 | 개신교 전통은 선구자로 기린다. 그의 주장 가운데 일부는 당대 정치 상황과 얽혀 있었다는 점도 함께 읽어야 한다. |
| 이븐 할둔 | 1332년 ~ 1406년 | 《역사서설》을 썼다 / 재판관과 관리로 일했다 | 사회학과 역사학의 선구로 평가된다. 종교사에서는 종교 운동의 힘을 사회 구조로 설명하려 한 이른 시도로 중요하다. |
|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 | 1296년 ~ 1359년 | 헤시카즘(고요의 기도) 전통을 신학적으로 옹호했다 | 정교회 영성 신학의 기둥으로 평가된다. 서방 신학과의 차이를 보여 주는 대표적 지점이기도 하다. |
| 총카파 | 1357년 ~ 1419년 | 계율과 교학을 강조하는 개혁을 이끌었다 / 간덴 사원을 세웠다 | 그의 흐름이 겔룩파로 이어져 뒤에 달라이 라마 제도의 바탕이 된다. 티베트 불교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남긴 인물로 꼽힌다. |
14. 주요 문헌과 사상
| 문헌 | 시기 | 언어 | 핵심 내용 |
|---|---|---|---|
| 역사서설 | 1377년 | 아랍어 | 역사 서술의 방법과 문명·왕조의 흥망을 사회적 조건으로 설명한다. |
| 위클리프 성경 | 1380년대 | 중세 영어 | 라틴어 불가타를 바탕으로 옮긴 영어 성경. |
15. 지도와 이동 경로
14세기 — 역병과 분열의 지도 (1301~1400년)
| 장소 | 성격 | 설명 |
|---|---|---|
| 아비뇽 | 도시 | 1309~1377년 교황청. |
| 로마 | 도시 | 대분열의 한 축. |
| 스트라스부르 | 도시 | 1349년 학살. |
| 바젤 | 도시 | 1349년 학살. |
| 크라쿠프 | 도시 | 동유럽으로의 이주 목적지. |
| 옥스퍼드 | 수도원·학교 | 위클리프의 무대. |
| 아토스산 | 수도원·학교 | 헤시카즘의 중심. |
| 간덴 사원 | 수도원·학교 | 총카파가 세운 곳. |
경계 확실성: 대체로 확실
| 경로 | 성격 | 설명 |
|---|---|---|
| 학살을 피한 이주(개략) | 이주 | 여러 세대에 걸친 흐름을 단순화한 것이다. |
16. 사진과 유물로 보는 역사
17. 핵심 정리
- 재난은 종종 소수자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졌다.
- 교황이 둘 이상인 상황은 개혁 요구와 공의회주의를 불러왔다.
- 성경을 각 나라 말로 읽자는 요구는 16세기보다 훨씬 앞서 나타났다.
- 오스만의 부상은 다음 세기 동유럽의 종교 지형을 바꾼다.
18. 비교표
| 무엇이 흔들렸나 | 누가 대가를 치렀나 | 무엇이 자라났나 | |
|---|---|---|---|
| 교회 | 교황이 둘·셋이 되는 사태 | 신자들의 신뢰 | 공의회주의와 개혁 요구 |
| 사회 | 역병으로 인구 3분의 1 소실 | 유대인 공동체 | 동유럽으로의 이주와 새 중심 |
| 신앙 | 제도가 답을 주지 못함 | — | 개인의 영성과 성경 읽기에 대한 갈망 |
제도가 흔들린 자리에서 다음 세기의 개혁이 준비되었다.
19. 생각해 볼 질문
- 설명할 수 없는 재난 앞에서 사람들은 왜 누군가를 탓하게 될까?
- 권위가 둘로 갈라지면 무엇이 무너지고 무엇이 새로 생길까?
- 16세기 종교개혁의 씨앗은 이 세기에 어떻게 뿌려졌을까?
20. 확인 퀴즈
서방 교회의 대분열(교황이 둘 이상)이 시작된 해는?
- 1309년
- 1347년
- 1378년
- 1417년
1348~1349년 유럽 여러 도시에서 유대인 학살이 일어난 배경은?
- 흑사병의 원인을 유대인에게 돌리는 헛소문
- 십자군 원정
- 종교개혁
- 오스만의 침입
《역사서설》로 문명의 흥망을 설명한 14세기 학자는?
- 이븐 할둔
- 이븐 루시드
- 가잘리
- 마이모니데스
정답 1) 3 · 2) 1 · 3) 1
해설
1. 1378년에 시작해 1417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수습되었다.
2. 재난의 책임을 소수자에게 돌린 사례다.
3. 이븐 할둔은 근대 사회과학의 선구로 평가되기도 한다.
21. 주석과 참고문헌
- 흑사병 관련 연대기와 연구
- 콘스탄츠 공의회 문서
- 이븐 할둔 《역사서설》
제5장 15세기의 세계 종교
1401년~1500년
제국이 무너지고 인쇄기가 돌기 시작한다. 다음 세기의 화약이 쌓인다.
1. 세기를 여는 한 장면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면서 천 년의 제국이 끝났다. 그 무렵 마인츠에서는 활자로 성경을 찍어 내고 있었다. 1492년 그라나다가 함락되고 같은 해 유대인이 스페인에서 추방되었다. 끝과 시작이 겹친 세기다.
2. 15세기의 세계사 배경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를 무너뜨리고 강대국이 되었다. 이베리아에서는 재정복이 완성되었고, 대항해가 시작되었다. 인쇄술이 유럽에 퍼졌고 르네상스가 무르익었다.
-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동로마 제국의 종말.
- 1455년경 구텐베르크 성경 인쇄.
- 1492년 그라나다 함락, 유대인 추방령, 콜럼버스의 항해.
- 1498년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
3. 한눈에 보는 연대표
| 연도 | 일어난 일 | 관련 종교 |
|---|---|---|
| 1415년 | 콘스탄츠 공의회가 얀 후스를 화형에 처한다. | 가톨릭 |
| 1439년 | 피렌체 공의회에서 동서 교회 재결합이 선언되지만 동방에서 거부된다. | 가톨릭, 정교회 |
| 1453년 | 오스만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한다. | 이슬람, 정교회 |
| 1455년경 | 구텐베르크가 활판으로 성경을 인쇄한다. | 기독교 |
| 1478년 | 스페인 종교재판소가 설치된다. | 가톨릭, 유대 |
| 1492년 | 그라나다 함락과 유대인 추방령. | 유대, 이슬람, 가톨릭 |
| 1469년 | 시크교의 창시자 나낙이 태어난다. |
4. 유대교
추방
1492년 스페인에서, 1497년 포르투갈에서 유대인이 추방되었다. 세파르디 유대인은 오스만 제국·북아프리카·네덜란드 등으로 흩어졌고, 오스만은 이들을 받아들였다. 개종했으나 의심받는 이들(콘베르소)에 대한 종교재판도 이어졌다.
5. 기독교
인쇄된 성경, 억눌린 개혁
인쇄술은 성경과 소책자를 빠르게 퍼뜨릴 수 있게 했다. 후스의 처형은 개혁 요구를 잠재우지 못했고, 체코 지역에는 그 흐름이 남았다. 다음 세기 종교개혁의 조건이 이 세기에 갖춰졌다.
6. 가톨릭
대분열은 수습되었지만 개혁 요구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베리아에서는 종교재판이 강화되었다.
7. 동방정교회
제국 없는 교회
동로마가 사라진 뒤 정교회는 오스만의 밀레트 제도 아래에서 공동체를 유지했다. 모스크바가 스스로를 정교 신앙의 계승자로 내세우기 시작했다.
8. 개신교
다음 세기에 형성된다. 다만 후스파 등 선행하는 개혁 흐름은 이미 있었다.
9. 이슬람교
오스만의 세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차지한 오스만은 지중해 동부의 지배자가 되었고, 밀레트 제도로 여러 종교 공동체를 관리했다. 이베리아에서는 반대로 무슬림이 추방·개종을 강요당했다.
10. 불교
티베트에서 겔룩파가 자리 잡고, 동남아시아에서는 상좌부 불교가 국가 종교로 확립되었다.
11. 종교 간 관계
유대교 ↔ 이슬람교 — 정치적 협력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 다수를 오스만 제국이 받아들였다. 같은 세기에 한쪽에서는 추방이, 다른 쪽에서는 수용이 일어났다.
가톨릭 ↔ 동방정교회 — 화해와 종교 간 대화
1439년 피렌체 공의회의 재결합 선언은 정치적 필요에서 나온 것이었고, 동방 신자들이 받아들이지 않아 무산되었다.
기독교 ↔ 이슬람교 — 전쟁과 충돌
동쪽에서는 오스만이 기독교 제국을 무너뜨렸고, 서쪽에서는 기독교 왕국이 무슬림 왕국을 무너뜨렸다. 같은 세기에 반대 방향의 두 일이 일어났다.
12. 이 세기의 결정적 사건
얀 후스의 화형 (1415년)
대분열을 수습하려 열린 공의회가 개혁 문제도 함께 다뤘다.
원인
-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은 주장
- 체코 지역의 민족적·사회적 긴장
- 안전 통행 보장의 파기
전개
안전 통행을 약속받고 공의회에 온 후스가 체포되어 이단으로 단죄되고 화형에 처해졌다.
결과
- 체코에서 후스 전쟁이 일어났다
장기적 영향
- 체코에 개혁 전통이 남아 뒤에 모라비아 형제단으로 이어진다
- 루터가 자신을 후스와 견주며 개혁의 정당성을 말하게 된다
- 1999년 교황이 그의 죽음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개신교 | 신념을 지킨 순교로 기억한다. |
| 가톨릭 | 당대에는 교회 일치를 위협하는 주장으로 판단했다. 오늘날 교회는 그 처리에 유감을 표했다. |
| 역사학계 | 신학 문제와 체코·독일 사이의 민족적 갈등이 얽혀 있었다. |
피렌체 공의회의 재결합 시도 (1439년)
오스만의 압박을 받던 동로마가 서방의 군사 지원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원인
- 동로마의 군사적 위기
- 필리오케·연옥·교황 수위권 등 오랜 쟁점
전개
긴 논쟁 끝에 합의문에 서명했으나, 동방 대표 일부는 끝내 서명하지 않았다.
결과
- 형식상 재결합이 선언되었다
장기적 영향
-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직자와 신자 다수가 이를 거부해 무산되었다
- 기대했던 서방의 군사 지원도 오지 않았다
- ‘라틴의 모자보다 튀르크의 터번이 낫다’는 말이 당대의 정서를 보여 준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가톨릭 | 재결합의 정당한 절차였다고 보았다. |
| 동방정교회 | 정치적 압박 아래 이뤄진 합의여서 신자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
| 역사학계 | 위에서 맺은 합의가 아래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무효가 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례다. |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1453년)
동로마는 도시 하나만 남은 상태였고, 오스만은 대포를 앞세워 포위했다.
전개
53일의 포위 끝에 성벽이 뚫렸고 마지막 황제가 전사했다.
결과
- 천 년 넘게 이어진 동로마 제국이 끝났다
- 하기아 소피아가 모스크가 되었다
장기적 영향
- 정교회는 국가 없이 밀레트 제도 아래 공동체를 유지하게 되었다
- 모스크바가 정교 신앙의 계승자를 자처하기 시작했다
- 학자들의 서방 이주가 르네상스에 기여했다는 설명이 오래 있었으나 그 비중은 재검토되고 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동방정교회 | 가장 큰 상실로 기억되며, 오늘날에도 애도의 대상이다. |
| 이슬람교 | 오랜 목표의 성취로 기념되었고, 술탄은 총대주교를 인정해 공동체를 존속시켰다. |
| 역사학계 | 정복 이후 정교회는 사라지지 않고 오스만 체제 안에서 법적 지위를 얻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
구텐베르크의 성경 인쇄 (1455년)
금속 활자와 유성 잉크, 압착기를 결합한 인쇄술이 완성되었다.
전개
라틴어 성경을 180부 남짓 인쇄했다.
결과
- 책을 대량으로 똑같이 찍어 낼 수 있게 되었다
장기적 영향
- 다음 세기 종교개혁이 몇 주 만에 유럽 전역으로 퍼질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 모국어 성경과 소책자, 교리문답이 값싸게 보급되었다
- 가톨릭 쪽에서도 인쇄를 적극 활용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기독교 | 성경을 개인이 소유하고 읽는 시대가 열렸다. |
| 역사학계 | 인쇄술이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은 아니지만, 그 속도와 범위를 결정했다는 데는 이견이 적다. |
그라나다 함락과 유대인 추방령 (1492년)
이베리아 재정복이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고, 종교적 단일화 정책이 강화되었다.
원인
- 재정복의 완성
- 개종자(콘베르소)의 진정성에 대한 의심
- 종교적 통일을 통한 왕권 강화
전개
1월 그라나다가 항복하고, 3월 유대인에게 개종하거나 떠나라는 칙령이 내려졌으며, 8월 콜럼버스가 출항했다.
결과
- 이베리아의 이슬람 통치가 끝났다
- 수만 명의 유대인이 추방되었다
- 대서양 항해가 시작되었다
장기적 영향
- 세파르디 디아스포라가 오스만·북아프리카·네덜란드에 형성되었다
- 무슬림에 대한 개종 강요와 추방이 뒤이어 진행되었다
- 아메리카에서 정복과 선교가 함께 시작되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유대교 | 티샤 베아브 무렵 떠나야 했던 추방으로 기억한다. |
| 이슬람교 | 알안달루스의 종말이자 이후 강제 개종의 시작이었다. |
| 가톨릭 | 당시에는 신앙 통일 정책으로 정당화되었다. 오늘날 스페인은 세파르디 후손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을 두기도 했다. |
| 역사학계 | 세 사건이 같은 해 같은 왕실의 결정이었다는 점이 이 해를 상징적으로 만든다. |
13. 주요 인물
| 인물 | 생몰 | 활동 | 후대의 평가 |
|---|---|---|---|
| 얀 후스 | 1372년경 ~ 1415년 | 프라하에서 체코어로 설교했다 / 교회의 부패를 비판했다 / 콘스탄츠에서 화형되었다 | 체코의 국민적 인물이자 개혁의 선구자로 기억된다. 그의 죽음이 후스 전쟁을 불러 유럽 정치까지 흔들었다. |
| 메흐메트 2세 | 1432년 ~ 1481년 |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했다 / 정교회 총대주교를 인정해 공동체를 존속시켰다 | ‘정복자’로 불린다. 밀레트 제도를 통해 여러 종교 공동체를 제국 안에 편입한 통치 방식이 이후 오스만의 특징이 된다. |
|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 1400년경 ~ 1468년 | 금속 활자 인쇄술을 실용화했다 / 라틴어 성경을 인쇄했다 | 종교사에서 그의 발명은 다음 세기를 가능하게 한 조건으로 평가된다. 정작 본인은 사업에서 큰 이익을 얻지 못했다. |
| 이삭 아브라바넬 | 1437년 ~ 1508년 | 왕실 재정 관리로 일했다 / 성경 주석을 남겼다 / 추방을 택하고 공동체와 함께 떠났다 | 1492년 추방을 겪은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기억된다. |
14. 주요 문헌과 사상
| 문헌 | 시기 | 언어 | 핵심 내용 |
|---|---|---|---|
| 구텐베르크 성경 | 1455년경 | 라틴어(불가타) | 금속 활자로 인쇄한 라틴어 성경. |
| 알함브라 칙령 | 1492년 3월 | 스페인어 | 유대인에게 넉 달 안에 개종하거나 왕국을 떠나라고 명한 문서. |
15. 지도와 이동 경로
1453과 1492 — 지중해의 두 끝에서 (1401~1500년)
동쪽에서는 이슬람 세력이 기독교 제국을 무너뜨렸고, 서쪽에서는 기독교 왕국이 이슬람 왕국을 무너뜨렸다.
| 장소 | 성격 | 설명 |
|---|---|---|
| 콘스탄츠 | 회의 | 1415년 후스 화형, 1417년 대분열 수습. |
| 피렌체 | 회의 | 1439년 재결합 시도. |
| 콘스탄티노폴리스 | 도시 | 1453년 함락. |
| 마인츠 | 도시 | 1455년경 성경 인쇄. |
| 그라나다 | 도시 | 1492년 함락. |
| 살로니카 | 도시 | 추방된 세파르디의 주요 정착지. |
| 프라하 | 도시 | 후스 전통이 남은 곳. |
경계 확실성: 대체로 확실
| 경로 | 성격 | 설명 |
|---|---|---|
| 세파르디의 이동(1492년 이후) | 이주 |
16. 사진과 유물로 보는 역사
17. 핵심 정리
- 1453년과 1492년은 지중해 세계의 종교 지도를 바꾼 두 사건이다.
- 인쇄술은 다음 세기 종교개혁이 빠르게 퍼질 수 있게 한 결정적 조건이다.
- 추방과 수용이 같은 세기에 일어났다. 한쪽만 보면 그림이 반쪽이 된다.
- 동로마 이후 정교회는 국가 없이 공동체를 지키는 법을 배워야 했다.
18. 비교표
| 언제 | 무슨 일 | 누구에게 | 무엇이 이어졌나 |
|---|---|---|---|
| 1월 | 그라나다 함락 | 이베리아 무슬림 | 개종 강요와 뒤이은 추방 |
| 3월 | 유대인 추방령 | 스페인 유대인 | 세파르디 디아스포라 |
| 8월 | 콜럼버스 출항 | 아메리카 원주민 | 정복과 선교의 시작 |
세 사건은 같은 왕실의 같은 해 결정이었다. 하나만 떼어 보면 이 해를 이해할 수 없다.
19. 생각해 볼 질문
- 새로운 기술은 종교를 어떻게 바꿀까? 인쇄술과 오늘날의 인터넷을 비교해 보자.
- 국가를 잃은 종교 공동체는 무엇으로 자기를 지킬까?
- 추방당한 사람들을 받아들인 쪽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20. 확인 퀴즈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에 함락된 해는?
- 1204년
- 1439년
- 1453년
- 1492년
1492년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을 대규모로 받아들인 곳은?
- 오스만 제국
- 프랑스 왕국
- 교황령
- 잉글랜드
인쇄술이 종교사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 성경과 논쟁 소책자가 빠르고 싸게 퍼질 수 있게 되었다
- 라틴어가 사라졌다
- 십자군이 끝났다
- 공의회가 없어졌다
정답 1) 3 · 2) 1 · 3) 1
해설
1. 1453년이다. 1204년은 십자군의 약탈이다.
2. 오스만 제국이 이들을 받아들였고 살로니카 등에 큰 공동체가 생겼다.
3. 다음 세기 종교개혁의 확산 속도를 설명하는 핵심 조건이다.
21. 주석과 참고문헌
- 오스만 정복 관련 사료
- 1492년 추방령 문서
- 인쇄술과 종교개혁 연구
참고문헌
- 십자군 연대기(라틴어·아랍어·히브리어 기록을 함께 볼 것)
- 1054년 관련 문서와 최근 연구
- 라시 주석, 가잘리 저작
- 아랍어·라틴어 십자군 연대기
- 마이모니데스 저작
- 톨레도 번역 학파 연구
- 제4차 십자군 연대기
- 제4차 라테란 공의회 문서
- 몽골 시대 이슬람사 연구
- 흑사병 관련 연대기와 연구
- 콘스탄츠 공의회 문서
- 이븐 할둔 《역사서설》
- 오스만 정복 관련 사료
- 1492년 추방령 문서
- 인쇄술과 종교개혁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