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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 한눈 · 제5권
16세기부터 18세기
종교개혁과 세계로 나간 종교
검수용 교정본 · 배포 금지
같은 시대, 서로 다른 믿음은 어떤 역사를 지나왔는가
검수 완료 0 / 3장 — 아직 검수를 마치지 않은 원고가 들어 있습니다.
차례
- 제1장 16세기의 세계 종교
- 제2장 17세기의 세계 종교
- 제3장 18세기의 세계 종교
이 책이 다루는 것
- 종교개혁
- 가톨릭 개혁
- 개신교 교파 형성
- 유럽 종교전쟁
- 대항해시대와 세계선교
- 계몽주의와 종교
이 책은 역사적 사실, 종교 전통의 주장, 학문적 해석을 구분해 씁니다. 확정되지 않은 연대와 논쟁 중인 내용은 그렇게 밝혀 적었고, 특정 종교의 관점만으로 다른 종교를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제1장 16세기의 세계 종교
1501년~1600년
서방 교회가 갈라지고, 오스만과 무굴이 아시아의 종교 지형을 다시 짠다.
읽는 글 — 검수 전 초안
제16장 16세기의 세계 종교
서방 교회가 갈라지고, 오스만과 무굴이 아시아의 종교 지형을 다시 짭니다
1501년 ~ 1600년
여는 장면 — 토론 주제 한 장
한 수도사가 대학 게시판에 토론 주제를 붙였습니다.
그가 원한 것은 교회 개혁을 위한 논쟁이었지 새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면벌부 판매 관행이 신학적으로 옳은가를 묻는 95개 항목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쇄기가 그의 글을 몇 주 만에 유럽 전역에 뿌렸고, 논쟁은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이 되었습니다.
같은 세기 오스만은 이집트를 차지했고, 무굴 제국이 인도에 섰으며, 예수회 선교사가 일본과 중국에 닿았습니다.
1. 세계가 하나로 이어지다
합스부르크와 프랑스가 유럽 패권을 다투는 가운데 오스만이 헝가리까지 진출했습니다. 아메리카에서는 스페인이 정복과 선교를 함께 진행했고, 인도에는 무굴 제국이 섰습니다.
- 1517년 오스만이 맘루크를 무너뜨리고 이집트와 성지 관리권을 차지했습니다.
- 1526년 무굴 제국 성립, 1556년 아크바르 즉위.
- 1529년 오스만의 빈 포위.
- 아메리카 정복과 함께 대규모 선교가 진행되었습니다.
- 1549년 사비에르가 일본에, 1582년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도착했습니다.
2. 1517년 — 논쟁이 분열이 되기까지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자금을 위한 면벌부 판매가 독일 지역에서 논란이 되었습니다.
루터가 면벌부에 관한 95개 토론 주제를 발표했고, 인쇄되어 몇 주 만에 독일 전역에 퍼졌습니다.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그는 철회를 거부했습니다.
'교회 문에 못 박았다'는 장면의 사실 여부는 논쟁 중입니다. 발표와 확산 자체는 확실합니다. 루터의 초기 의도가 개혁이었는지 분리였는지도 논쟁점입니다.
비텐베르크 성교회에 지금 있는 '논제의 문'은 1858년에 만든 청동 기념물입니다. 1517년의 그 문이 아닙니다.
개신교 전통은 복음의 재발견이 시작된 사건으로 기억합니다. 가톨릭 쪽은 개혁이 필요했다는 점은 인정하되 분열의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랜 입장이었고, 오늘날 공식 대화에서는 상호 이해가 크게 진전되었습니다.
논쟁은 면벌부에서 시작해 성경의 권위, 구원의 이해, 교회의 성격 전반으로 번졌습니다. 인쇄술과 제후들의 정치적 이해가 맞물리며 개혁은 여러 갈래로 퍼졌습니다.
3. 개신교는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이 점이 이 장에서 가장 자주 오해되는 대목입니다.
| 루터파 | 개혁파(칼뱅) | 재세례파 | 잉글랜드 교회 | 가톨릭 개혁 | |
|---|---|---|---|---|---|
| 출발 | 1517년 비텐베르크 | 1530년대 제네바 | 1525년 취리히 | 1534년 수장령 | 1545년 트리엔트 |
| 성경의 자리 | 최종 권위 | 최종 권위 | 최종 권위 | 최종 권위 | 전통과 함께 권위 |
| 국가와의 관계 | 제후와 협력 | 도시 정부와 협력 | 국가교회 거부 | 국왕이 수장 | 교황권 유지 |
| 세례 | 유아세례 | 유아세례 | 신앙고백 후 세례 | 유아세례 | 유아세례 |
재세례파는 국가교회 자체를 거부해 양쪽 모두에게 박해받았습니다. 잉글랜드의 개혁은 정치적 계기에서 출발했습니다. 칼뱅은 제네바에서 교회와 도시 질서를 함께 정비했고, 《기독교 강요》로 개혁파 신학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루터는 말년에 유대인에 관한 저술을 남겼고, 오늘날 여러 루터교회가 그것을 공식적으로 거부하고 사과했습니다. 칼뱅에 대해서는 제네바에서의 통치 방식과 세르베투스 처형에 대한 비판적 평가가 함께 다뤄집니다. 인물의 성취와 그림자를 함께 적습니다.
각 전통의 자기 이해를 그 전통의 언어로 적었습니다. 우열을 매기지 않습니다.
4. 1545년 — 트리엔트
개신교의 확산과 오래된 내부 개혁 요구가 함께 압력이 되었습니다.
세 차례에 걸친 회기 동안 교리와 규율을 정리했습니다. 성경과 전통을 함께 권위로 인정했고, 원죄와 칭의와 성사에 관한 입장을 정리했으며, 신학교 제도를 도입해 성직자 교육을 체계화했습니다.
이 개혁은 개신교에 대한 대응이자 오래된 내부 요구의 결실이었습니다. 한쪽만 말하면 정확하지 않습니다.
1540년 인가된 예수회는 교육과 해외 선교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영신수련》은 체계적 영성 훈련의 틀을 제시했습니다.
이 결정들이 이후 400년 가톨릭교회의 형태를 규정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까지 이어집니다.
5. 1555년 — 불완전한 타협
제국 안에서 가톨릭과 루터파 제후의 무력 충돌이 이어졌습니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제후가 자기 영지의 신앙을 정하도록 하는 원칙에 합의했습니다.
개인의 신앙 자유가 아니라 통치자의 선택권을 인정한 타협이었습니다. 그리고 개혁파(칼뱅)를 포함하지 않아 훗날 30년전쟁의 불씨가 남았습니다.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에서는 파리에서 시작된 학살이 여러 도시로 번져 수천 명이 살해되었습니다.
종교적 차이가 제후들의 정치적 이해와 겹치며 전쟁과 학살로 번졌습니다. '16세기 종교전쟁은 오직 신앙 때문에 일어났다'는 서술은 제후의 권력, 영토, 교회 재산 문제를 지웁니다.
6. 같은 세기, 세 이슬람 제국
오스만·사파비·무굴 세 제국이 이슬람 세계를 나눠 다스렸습니다.
1517년 이후 오스만 술탄이 성지 관리자의 지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쉴레이만 1세는 제국의 법제를 정비하고 영토를 넓혔으며 건축을 후원했습니다. 밀레트 제도로 여러 종교 공동체가 자치를 유지했습니다.
사파비가 시아 이슬람을 국교로 삼으면서 오스만과의 대립이 종파 대립과 겹쳤습니다. 오늘날 이란의 종교 지형이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무굴의 아크바르는 여러 종교를 아우르는 정책을 폈고 궁정에서 종교 간 토론을 열었습니다.
같은 세기에 유럽에서는 교회가 갈라지고, 이슬람 세계에서는 종파 대립이 국가 간 대립과 겹쳤습니다.
7. 게토와 카발라, 그리고 달라이 라마
이탈리아 도시들에 유대인 거주 구역(게토)이 제도화되었습니다. 1516년 베네치아, 1555년 로마입니다.
게토는 보호를 명분으로 했지만 실질은 격리였습니다. 오스만 영역의 유대인 공동체는 상대적으로 활동 폭이 넓었습니다.
한편 팔레스타인 사페드에서는 루리아를 중심으로 한 카발라 사상이 꽃피어 이후 유대 신비주의의 방향을 정했습니다.
티베트에서는 1578년 몽골 지도자가 티베트 승려에게 '달라이 라마' 칭호를 주었습니다. 겔룩파가 티베트의 중심 세력이 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전국시대의 무장 세력이 대사찰의 힘을 꺾었습니다.
그리고 예수회 선교사가 일본과 중국에 도착하면서 기독교와 아시아 종교가 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초기에는 상호 관심과 오해가 함께 있었습니다.
이 장이 남긴 다섯 문장
- 종교개혁은 한 사람의 결단이 아니라 인쇄술·정치·오래된 개혁 요구가 겹친 결과입니다.
- 개신교는 처음부터 여러 갈래였습니다. 하나로 묶어 말하면 안 됩니다.
- 가톨릭 개혁(트리엔트)은 개신교에 대한 대응이자 내부 요구의 결실이었습니다.
- 같은 세기에 오스만·사파비·무굴이 이슬람 세계를 세 갈래로 나눴고, 시아·수니 대립이 국가 간 대립과 겹쳤습니다.
- 예수회 선교로 기독교와 아시아 종교가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해 볼 질문
- 새 기술(인쇄술)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은 어떻게 달랐을까요?
- '제후가 신앙을 정한다'는 타협은 무엇을 해결하고 무엇을 남겼을까요?
- 개혁을 원했지만 분열은 원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장에서 쓴 자료
문헌
- 95개 논제 (1517년, 라틴어)
- 칼뱅 《기독교 강요》 (1536년 초판, 1559년 최종판, 라틴어)
-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1530년, 라틴어·독일어)
- 트리엔트 공의회 교령 (1545~1563년, 라틴어)
자료 사진
- 비텐베르크 성교회의 '논제의 문' (1858년 청동 기념물 — 현대 복원물) · 트리엔트 공의회를 그린 그림 (후대의 그림) · 쉴레이마니예 모스크 (실제 유물)
참고
- 16세기 인쇄물 연구
- 오스만·사파비·무굴사 연구
「종교사 한눈」이 모아 둔 자료로 작성한 초안입니다. 출판 전 사실 확인과 관점 검토가 필요합니다.
1. 세기를 여는 한 장면
한 수도사가 대학 게시판에 토론 주제를 붙였다. 그가 원한 것은 교회 개혁을 위한 논쟁이었지 새 교회가 아니었다. 그러나 인쇄기가 그의 글을 몇 주 만에 유럽 전역에 뿌렸고, 논쟁은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이 되었다. 같은 세기 오스만은 이집트를 차지했고, 무굴 제국이 인도에 섰으며, 예수회 선교사가 일본과 중국에 닿았다.
2. 16세기의 세계사 배경
합스부르크와 프랑스가 유럽 패권을 다투는 가운데 오스만이 헝가리까지 진출했다. 아메리카에서는 스페인이 정복과 선교를 함께 진행했고, 인도에는 무굴 제국이 섰다.
- 1517년 오스만이 맘루크를 무너뜨리고 이집트와 성지 관리권을 차지했다.
- 1526년 무굴 제국 성립, 1556년 아크바르 즉위.
- 1529년·1683년 오스만의 빈 포위.
- 아메리카 정복과 함께 대규모 선교가 진행되었다.
- 1549년 사비에르가 일본에, 1582년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도착했다.
3. 한눈에 보는 연대표
| 연도 | 일어난 일 | 관련 종교 |
|---|---|---|
| 1517년 | 루터가 95개 논제를 발표한다. | 가톨릭, 개신교 |
| 1521년 |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루터가 철회를 거부한다. | 개신교 |
| 1525년 | 취리히에서 재세례파가 시작된다. | 개신교 |
| 1534년 | 잉글랜드 수장령으로 왕이 교회의 수장이 된다. | 개신교, 가톨릭 |
| 1536년 | 칼뱅이 《기독교 강요》 초판을 낸다. | 개신교 |
| 1540년 | 예수회가 인가된다. | 가톨릭 |
| 1545~1563년 | 트리엔트 공의회가 가톨릭 개혁을 결정한다. | 가톨릭 |
| 1555년 |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 제후가 자기 영지의 신앙을 정한다. | 가톨릭, 개신교 |
| 1516년·1555년 | 베네치아와 로마에 유대인 게토가 설치된다. | 유대 |
| 1572년 |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 | 가톨릭, 개신교 |
| 1578년 | 몽골 지도자가 티베트 승려에게 ‘달라이 라마’ 칭호를 준다. | 불교 |
4. 유대교
게토와 카발라
이탈리아 도시들에 유대인 거주 구역(게토)이 제도화되었다. 한편 팔레스타인 사페드에서는 루리아를 중심으로 한 카발라 사상이 꽃피어 이후 유대 신비주의의 방향을 정했다.
- 게토는 보호를 명분으로 했지만 실질은 격리였다.
- 오스만 영역의 유대인 공동체는 상대적으로 활동 폭이 넓었다.
5. 기독교
하나였던 서방 교회가 여럿이 되다
면벌부 문제에서 시작된 논쟁은 성경의 권위, 구원의 이해, 교회의 성격 전반으로 번졌다. 인쇄술과 제후들의 정치적 이해가 맞물리며 개혁은 여러 갈래로 퍼졌고, 가톨릭 쪽에서도 자체 개혁이 진행되었다. 이 분열은 신학 문제이자 유럽 정치 질서의 재편이었다.
6. 가톨릭
트리엔트의 개혁
트리엔트 공의회는 개신교의 주장을 반박하는 동시에 성직자 교육·규율·전례를 정비했다. 예수회는 교육과 해외 선교의 중심이 되었다. 이 개혁은 개신교에 대한 대응이자 오래된 내부 요구의 결실이었다.
- 성경과 전통을 함께 권위로 인정했다.
- 신학교 제도를 도입해 성직자 교육을 체계화했다.
- 예수회를 통해 아시아·아메리카 선교가 확대되었다.
7. 동방정교회
오스만 지배 아래 밀레트 체제로 공동체를 유지했다. 모스크바 총대주교좌가 1589년에 세워졌다.
8. 개신교
하나가 아닌 여러 갈래
루터파, 개혁파(칼뱅), 재세례파, 잉글랜드 교회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개신교를 하나의 단일한 집단으로 서술하면 안 된다. 성경 번역과 회중 찬송, 모국어 예배가 공통된 특징이었다.
- 오직 성경·오직 은혜·오직 믿음이라는 표어로 요약되곤 한다.
- 재세례파는 국가교회 자체를 거부해 양쪽 모두에게 박해받았다.
- 잉글랜드의 개혁은 정치적 계기에서 출발했다.
9. 이슬람교
세 제국의 시대
오스만·사파비·무굴 세 제국이 이슬람 세계를 나눠 다스렸다. 사파비가 시아 이슬람을 국교로 삼으면서 오스만과의 대립이 종파 대립과 겹쳤다. 무굴의 아크바르는 여러 종교를 아우르는 정책을 폈다.
- 1517년 이후 오스만 술탄이 성지 관리자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 사파비의 시아 국교화가 오늘날 이란의 종교 지형을 만들었다.
- 아크바르는 종교 간 토론을 궁정에서 열었다.
10. 불교
달라이 라마 제도의 시작
몽골과 티베트의 관계 속에서 달라이 라마 칭호가 생겼고, 겔룩파가 티베트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전국시대의 무장 세력이 대사찰의 힘을 꺾었다.
11. 종교 간 관계
가톨릭 ↔ 개신교 — 교리적 차이와 논쟁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성경과 전통의 관계, 성사의 수와 의미, 교회의 권위 구조가 쟁점이었다. 오늘날 여러 교단이 이 쟁점들을 두고 공식 대화를 이어 오고 있다.
가톨릭의 자리에서: 가톨릭은 교회의 가르치는 직무와 전통을 성경과 함께 권위로 본다.
개신교의 자리에서: 개신교는 성경을 최종 권위로 삼고 교회의 판단을 성경 아래 둔다.
가톨릭 ↔ 개신교 — 전쟁과 충돌
종교적 차이가 제후들의 정치적 이해와 겹치며 전쟁과 학살로 번졌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신앙 선택권을 제후에게 주는 방식의 타협이었다.
유대교 ↔ 가톨릭 — 박해와 차별
게토 제도가 이탈리아에서 확립되었다. 개혁 진영 안에서도 유대인에 대한 적대적 문헌이 나왔다.
기독교 ↔ 불교 — 선교와 전파
예수회 선교사가 일본과 중국에 도착하면서 두 종교가 본격적으로 만났다. 초기에는 상호 관심과 오해가 함께 있었다.
12. 이 세기의 결정적 사건
95개 논제 발표 (1517년)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자금을 위한 면벌부 판매가 독일 지역에서 논란이 되었다.
원인
- 면벌부 판매 관행
- 구원 이해에 관한 신학적 물음
- 교회 재정에 대한 불만
전개
루터가 면벌부에 관한 95개 토론 주제를 발표했고, 인쇄되어 몇 주 만에 독일 전역에 퍼졌다.
결과
- 대규모 신학 논쟁이 시작되었다
장기적 영향
- 서방 교회의 분열과 여러 개신교 전통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개신교 | 복음의 재발견이 시작된 사건으로 기억한다. |
| 가톨릭 | 개혁이 필요했다는 점은 인정하되 분열의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랜 입장이었다. 오늘날 공식 대화에서는 상호 이해가 크게 진전되었다. |
| 역사학계 | ‘교회 문에 못 박았다’는 장면의 사실 여부는 논쟁 중이다. 발표와 확산 자체는 확실하다. |
학계의 평가
게시 장면의 역사성, 루터의 초기 의도(개혁인가 분리인가)가 주요 논쟁점이다.
트리엔트 공의회 (1545년~1563년)
개신교의 확산과 오래된 내부 개혁 요구가 함께 압력이 되었다.
전개
세 차례에 걸친 회기 동안 교리와 규율을 정리했다.
결과
- 성경과 전통의 관계, 성사, 칭의에 관한 가톨릭의 입장을 정리했다
- 신학교 제도를 도입했다
장기적 영향
- 이후 400년 가톨릭교회의 형태를 결정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까지 이어졌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1555년)
제국 안에서 가톨릭과 루터파 제후의 무력 충돌이 이어졌다.
전개
제후가 자기 영지의 신앙(가톨릭 또는 루터파)을 정하도록 하는 원칙에 합의했다.
결과
- 일시적 평화가 확보되었다
장기적 영향
- 개인의 신앙 자유가 아니라 통치자의 선택권을 인정한 타협이었다
- 개혁파(칼뱅)를 포함하지 않아 훗날 30년전쟁의 불씨가 남았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 (1572년)
가톨릭과 위그노(프랑스 개혁파)의 갈등이 왕실 혼례를 계기로 폭발했다.
전개
파리에서 시작된 학살이 여러 도시로 번져 수천 명이 살해되었다.
결과
- 프랑스 종교전쟁이 격화되었다
장기적 영향
- 1598년 낭트 칙령으로 일시적 관용이 마련되었으나 1685년 철회되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개신교 | 위그노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기억으로 남았다. |
| 가톨릭 | 오늘날 프랑스 가톨릭교회는 이 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유감을 표명한 바 있다. |
13. 주요 인물
| 인물 | 생몰 | 활동 | 후대의 평가 |
|---|---|---|---|
| 마르틴 루터 | 1483년 ~ 1546년 | 95개 논제 발표 /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 / 찬송과 교리문답 저술 | 개신교 전통에서는 개혁의 출발점으로 기린다. 말년의 유대인에 관한 저술은 오늘날 여러 루터교회가 공식적으로 거부하고 사과했다. 두 가지를 함께 서술해야 한다. |
| 장 칼뱅 | 1509년 ~ 1564년 | 《기독교 강요》 저술 / 제네바 교회와 도시 질서 정비 | 개혁파 전통의 기초를 놓았다. 제네바에서의 통치 방식과 세르베투스 처형에 대한 비판적 평가도 함께 다뤄야 한다. |
| 이냐시오 데 로욜라 | 1491년 ~ 1556년 | 예수회 창립 / 《영신수련》 저술 | 가톨릭 개혁과 세계 선교·교육의 중심 인물로 평가된다. |
| 술레이만 1세 | 1494년 ~ 1566년 | 제국의 법제를 정비했다 / 영토를 크게 넓히고 건축을 후원했다 | 오스만의 전성기를 이끈 통치자로 평가된다. 밀레트 제도로 여러 종교 공동체가 자치를 유지했다. |
14. 주요 문헌과 사상
| 문헌 | 시기 | 언어 | 핵심 내용 |
|---|---|---|---|
| 95개 논제 | 1517년 | 라틴어 | 면벌부의 신학적 근거와 관행을 문제 삼는 토론 주제 95개. |
| 기독교 강요 | 1536년 초판, 1559년 최종판 | 라틴어(프랑스어 번역판도 냈다) |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교의서. |
|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 1530년 | 라틴어·독일어 | 루터파의 신앙을 황제와 제국의회 앞에 제시한 문서. |
| 트리엔트 공의회 교령 | 1545~1563년 | 라틴어 | 성경과 전통, 원죄와 칭의, 성사, 성직자 규율에 관한 결정. |
15. 지도와 이동 경로
16세기 중반 유럽의 신앙 분포(개략) (1560년경)
실제로는 도시와 마을 단위로 뒤섞여 있었다. 면으로 칠한 지도는 언제나 단순화다.
| 장소 | 성격 | 설명 |
|---|---|---|
| 비텐베르크 | 도시 | 1517년 95개 논제. |
| 취리히 | 도시 | 츠빙글리와 재세례파. |
| 제네바 | 도시 | 칼뱅의 활동지. |
| 런던 | 도시 | 1534년 수장령. |
| 트리엔트 | 회의 | 1545~1563년 공의회. |
| 로마 | 도시 | |
| 이스탄불 | 도시 | 오스만의 수도. |
| 사페드 | 수도원·학교 | 카발라의 중심. |
경계 확실성: 논쟁 중
16. 사진과 유물로 보는 역사
17. 핵심 정리
- 종교개혁은 한 사람의 결단이 아니라 인쇄술·정치·오래된 개혁 요구가 겹친 결과다.
- 개신교는 처음부터 여러 갈래였다. 하나로 묶어 말하면 안 된다.
- 가톨릭 개혁(트리엔트)은 개신교에 대한 대응이자 내부 요구의 결실이었다.
- 같은 세기에 오스만·사파비·무굴이 이슬람 세계를 세 갈래로 나눴고, 시아·수니 대립이 국가 간 대립과 겹쳤다.
- 예수회 선교로 기독교와 아시아 종교가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했다.
18. 비교표
| 루터파 | 개혁파(칼뱅) | 재세례파 | 잉글랜드 교회 | 가톨릭 개혁 | |
|---|---|---|---|---|---|
| 출발 | 1517년 비텐베르크 | 1530년대 제네바 | 1525년 취리히 | 1534년 수장령 | 1545년 트리엔트 |
| 성경의 자리 | 최종 권위 | 최종 권위 | 최종 권위 | 최종 권위 | 전통과 함께 권위 |
| 국가와의 관계 | 제후와 협력 | 도시 정부와 협력 | 국가교회 거부 | 국왕이 수장 | 교황권 유지 |
| 세례 | 유아세례 | 유아세례 | 신앙고백 후 세례 | 유아세례 | 유아세례 |
각 전통의 자기 이해를 그 전통의 언어로 적었다. 우열을 매기지 않는다.
19. 생각해 볼 질문
- 새 기술(인쇄술)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은 어떻게 달랐을까?
- ‘제후가 신앙을 정한다’는 타협은 무엇을 해결하고 무엇을 남겼을까?
- 개혁을 원했지만 분열은 원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20. 확인 퀴즈
트리엔트 공의회가 열린 기간은?
- 1517~1521년
- 1545~1563년
- 1618~1648년
- 1962~1965년
16세기 개신교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처음부터 하나의 통일된 교회였다
- 루터파·개혁파·재세례파·잉글랜드 교회 등 여러 갈래로 나타났다
- 가톨릭과 교리가 완전히 같았다
- 국가와 무관하게 형성되었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의 내용은?
- 제후가 자기 영지의 신앙을 정하도록 했다
- 모든 신앙의 자유를 보장했다
- 개신교를 금지했다
- 교황권을 폐지했다
‘16세기 종교전쟁은 오직 신앙 때문에 일어났다’는 서술의 문제는?
- 문제 없다
- 정치·경제적 원인을 종교 하나로 단순화했다
- 전쟁이 없었다
- 연도가 틀렸다
정답 1) 2 · 2) 2 · 3) 1 · 4) 2
해설
1. 1962~1965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다.
2. 개신교를 단일 집단으로 서술하지 않는 것이 이 앱의 원칙이다.
3. 개인의 신앙 자유가 아니라 제후의 선택권을 인정한 타협이었다.
4. 제후의 권력, 영토, 교회 재산 문제가 함께 얽혀 있었다.
21. 주석과 참고문헌
- 95개 논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트리엔트 공의회 문서 (1차 사료)
- 칼뱅 《기독교 강요》
- 오스만·사파비·무굴사 연구
제2장 17세기의 세계 종교
1601년~1700년
종교로 시작된 전쟁이 국가 간 조약으로 끝나고, 종교의 자리가 달라진다.
읽는 글 — 검수 전 초안
제17장 17세기의 세계 종교
종교로 시작된 전쟁이 국가 간 조약으로 끝나고, 종교의 자리가 달라집니다
1601년 ~ 1700년
여는 장면 — 결론짓지 않고 끝내다
삼십 년 동안 중부 유럽이 불탔습니다. 어떤 지역은 인구의 삼분의 일 이상이 사라졌습니다.
1648년의 조약은 어느 신앙이 옳은지를 정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국가들이 서로의 주권을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진리 문제를 결론짓지 않고 공존의 규칙을 만든 것 — 이것이 이 세기가 남긴 가장 큰 변화입니다.
1. 지쳐 가는 유럽
30년전쟁과 영국 내전이 유럽을 흔들었고, 베스트팔렌 조약이 근대 국가 체제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과학혁명이 진행되었고, 오스만은 1683년 빈 포위 실패 후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 1618~1648년 30년전쟁과 베스트팔렌 조약.
- 1642~1651년 영국 내전.
- 1620년 메이플라워호의 아메리카 이주.
- 1683년 오스만의 제2차 빈 포위 실패.
- 갈릴레오 재판(1633년)과 과학혁명.
2. 1618~1648년 — 삼십 년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개혁파(칼뱅)를 포함하지 않았고, 제후들의 종교·정치 이해가 얽혀 있었습니다.
보헤미아에서 시작해 덴마크·스웨덴·프랑스가 차례로 개입하며 30년간 이어졌습니다.
가톨릭 프랑스가 개신교 편에 서기도 했습니다. '종교전쟁'이라는 이름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왕조의 이해, 조세, 용병 경제가 크게 작용했습니다. 이 전쟁을 얼마나 '종교 전쟁'으로 부를 수 있는지가 계속 논쟁됩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은 제후의 신앙 선택권을 개혁파까지 확대하고, 영토와 배상, 제국 내 권한을 정했습니다.
가톨릭 쪽에서는 신앙 전쟁으로 시작했으나 결국 국가 이해가 앞섰다는 점이 지적됩니다. 개신교 쪽에서는 개혁파가 처음으로 법적 인정을 받았습니다.
국가 주권과 내정 불간섭이라는 근대 국제 질서의 출발점으로 자주 꼽힙니다. 다만 이를 '근대의 시작'으로 단정하는 서술은 근래 비판받습니다.
종교가 국제 질서의 결정 요인에서 물러나기 시작한 것이 이 조약의 의미입니다.
이 세기가 갈등을 다룬 세 가지 방식을 나란히 놓아 보겠습니다.
| 방식 | 사례 | 결과 |
|---|---|---|
| 누가 옳은지 끝까지 싸운다 | 30년전쟁 | 인구의 대량 손실, 어느 쪽도 이기지 못함 |
| 옳고 그름을 미루고 규칙을 정한다 | 베스트팔렌 조약 | 불완전하지만 공존의 틀이 생김 |
| 다른 쪽을 없앤다 | 일본의 금교, 구교도 박해 | 숨어서 이어지거나 오랜 상처로 남음 |
이 세기의 경험이 다음 세기 관용 논의의 바탕이 됩니다.
3. 1633년 — 갈릴레오
지구가 움직인다는 주장이 성경 해석과 충돌한다는 판단이 있었습니다.
갈릴레오는 자기 주장을 철회하고 가택 연금 상태로 여생을 보냈습니다. 지동설 관련 저작이 금서 목록에 올랐습니다.
'신앙 대 과학'의 단순한 대결로 그리면 실제를 놓칩니다. 후원 관계, 개인적 마찰, 저작의 발표 방식을 둘러싼 문제, 당시 과학적 증거의 한계가 함께 작용했습니다. 그 자신은 평생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1992년 교황청이 이 사건 처리의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루브르에 있는 〈심문받는 갈릴레오〉는 1847년에 그린 그림입니다. 이 장면을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4. 1637년 — 숨은 신앙
선교로 일본에 신자가 늘었으나 막부는 기독교를 통치의 위협으로 보고 탄압을 강화했습니다.
과중한 세금과 기근, 지역 영주의 실정, 신자 탄압이 겹쳐 시마바라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진압되었습니다.
봉기의 성격을 종교 반란으로만 볼 것인지 농민 봉기로 볼 것인지 논의가 있습니다.
기독교 금지가 철저해지고 쇄국 정책이 굳어졌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이 250년 가까이 숨어 신앙을 이어 갔습니다. 19세기에 그 후손들이 다시 나타나 세계를 놀라게 합니다.
5. 1654~1666년 — 손가락 몇 개의 문제
러시아 총대주교 니콘이 전례서와 예식을 그리스 관행에 맞춰 고치려 했습니다.
성호를 긋는 손가락 수 같은 세부까지 바뀌자 이를 거부하는 이들이 분리해 나갔습니다. 구교도(라스콜니키)입니다.
겉으로는 사소해 보이는 예식의 차이가 정체성 전체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개혁의 내용보다 강행 방식이 분열을 키웠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정작 니콘 자신도 차르와 충돌해 폐위되었습니다.
구교도는 오랜 박해를 받으면서도 오늘날까지 이어집니다. 국가가 개입한 종교 개혁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6. 1666년 — 기대와 좌절
1648년 동유럽 학살의 참상과 카발라의 종말 기대가 겹쳐 구원에 대한 갈망이 컸습니다.
샤브타이 츠비가 메시아로 선포되자 유럽과 중동의 유대 공동체가 크게 술렁였습니다. 그리고 술탄 앞에 선 그가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운동이 무너졌습니다.
유대교는 가장 큰 규모의 메시아 운동이자 가장 큰 좌절로 기억합니다. 개종 이후 그는 오스만 궁정의 관리가 되었습니다.
이 운동의 규모와 여파가 20세기 연구로 크게 재평가되었습니다.
대규모 실망과 혼란이 뒤따랐고, 메시아 운동에 대한 랍비 진영의 경계가 강해졌습니다. 일부 추종자들은 비밀 집단으로 남았습니다.
이 충격이 18세기 하시디즘 등 새로운 영성 운동의 배경이 됩니다.
같은 세기 암스테르담에서는 스피노자가 성경을 역사 문헌으로 분석했고, 1656년 유대 공동체에서 파문되었습니다. 그의 《신학정치론》은 성경 해석에 역사적·문헌적 방법을 적용하고 사상의 자유를 옹호했으며, 출간 즉시 금서가 되었습니다. 근대 성서비평과 정교분리 논의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로 평가됩니다.
그의 파문은 관용을 내세운 공동체 안에서도 경계가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7. 동쪽에서
티베트에서는 제5대 달라이 라마가 종교·정치 권력을 함께 쥐고 포탈라궁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몽골 세력의 지원이 그 배경이었습니다. 산비탈에 층층이 쌓아 올린 그 궁전이 종교와 정치가 한자리에 있던 체제를 보여 줍니다.
일본에서는 막부 아래 사찰이 호적 관리 기능을 맡았습니다.
중국 선교에서는 조상 제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두고 전례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문화와 신앙의 경계를 묻는 문제였고, 다음 세기까지 이어집니다.
이 장이 남긴 네 문장
- 베스트팔렌 조약은 종교 문제를 국가 주권의 틀로 옮겨 놓았습니다.
- 종교전쟁의 참혹함은 관용 논의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 메시아 운동의 좌절은 유대 사상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 선교 현장에서 문화와 신앙의 경계를 묻는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생각해 볼 질문
- 진리 문제를 결론짓지 않고 공존을 정하는 것은 타협일까요, 지혜일까요?
- 조상 제사를 신앙의 문제로 볼 것인가 문화의 문제로 볼 것인가?
- 국가가 종교 의례를 개혁하려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이 장에서 쓴 자료
문헌
- 베스트팔렌 조약 (1648년, 라틴어)
- 스피노자 《신학정치론》 (1670년, 라틴어)
자료 사진
- 뮌스터 조약 비준 (당대 시각자료 — 현장에 있던 화가의 그림) · 심문받는 갈릴레오 (1847년 그림 — 후대의 상상도) · 포탈라궁 (실제 유물)
참고
- 30년전쟁 연구
- 갈릴레오 재판 기록
- 전례 논쟁 관련 문서
「종교사 한눈」이 모아 둔 자료로 작성한 초안입니다. 출판 전 사실 확인과 관점 검토가 필요합니다.
1. 세기를 여는 한 장면
삼십 년 동안 중부 유럽이 불탔다. 1648년의 조약은 어느 신앙이 옳은지를 정하지 않았다. 대신 국가들이 서로의 주권을 인정하기로 했다. 진리 문제를 결론짓지 않고 공존의 규칙을 만든 것 — 이것이 이 세기가 남긴 가장 큰 변화다.
2. 17세기의 세계사 배경
30년전쟁과 영국 내전이 유럽을 흔들었고, 베스트팔렌 조약이 근대 국가 체제의 출발점이 되었다. 과학혁명이 진행되었고, 오스만은 1683년 빈 포위 실패 후 후퇴하기 시작했다.
- 1618~1648년 30년전쟁과 베스트팔렌 조약.
- 1642~1651년 영국 내전.
- 1620년 메이플라워호의 아메리카 이주.
- 1683년 오스만의 제2차 빈 포위 실패.
- 갈릴레오 재판(1633년)과 과학혁명.
3. 한눈에 보는 연대표
| 연도 | 일어난 일 | 관련 종교 |
|---|---|---|
| 1618~1648년 | 30년전쟁.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끝난다. | 가톨릭, 개신교 |
| 1633년 | 갈릴레오가 재판을 받는다. | 가톨릭 |
| 1637~1638년 | 일본 시마바라 봉기 후 기독교가 강하게 금지된다. | 기독교 |
| 1654~1666년 | 러시아 정교회의 전례 개혁과 구교도의 분리. | 정교회 |
| 1666년 | 샤브타이 츠비를 둘러싼 메시아 운동이 유대 세계를 흔든다. | 유대 |
| 1656년 | 스피노자가 암스테르담 유대 공동체에서 파문된다. | 유대 |
| 17세기 | 예수회의 중국 선교와 전례 논쟁이 시작된다. | 가톨릭, 불교 |
4. 유대교
메시아 기대와 그 좌절
샤브타이 츠비를 메시아로 믿는 운동이 유럽과 중동의 유대 공동체를 휩쓸었다가 그의 개종으로 무너졌다. 이 충격은 이후 유대 사상에 오래 영향을 남겼다. 한편 암스테르담 등지에서는 세파르디 공동체가 상업과 학문의 중심이 되었다.
5. 기독교
전쟁이 남긴 교훈
종교 갈등에서 시작된 전쟁이 국가 간 세력 균형 문제로 옮겨 가며 끝났다. 종교가 국제 질서의 결정 요인에서 물러나는 흐름이 이때 시작된다.
6. 가톨릭
해외 선교가 확대되는 한편, 유럽 내에서는 국가권력과의 관계를 조정해야 했다.
7. 동방정교회
러시아 교회의 분열
전례서 개정을 둘러싼 갈등으로 구교도가 갈라져 나갔다. 국가 권력이 개입한 종교 개혁의 사례다.
8. 개신교
국가교회와 자유교회
국가와 결합한 개신교회와 국가에서 독립하려는 흐름이 함께 있었다. 아메리카로 건너간 이들은 새로운 실험을 시작했다.
9. 이슬람교
확장의 끝
1683년 빈 포위 실패 이후 오스만은 유럽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무굴에서는 아우랑제브의 정책이 종교 간 관계를 경직시켰다는 평가가 있다.
10. 불교
티베트에서 5대 달라이 라마가 정치·종교 권력을 함께 쥐었고, 일본에서는 막부 아래 사찰이 호적 관리 기능을 맡았다.
11. 종교 간 관계
가톨릭 ↔ 개신교 — 화해와 종교 간 대화
베스트팔렌 조약은 신학적 화해가 아니라 정치적 공존의 규칙이었다. 진리 문제를 미루고 함께 사는 법을 정한 첫 대규모 시도다.
기독교 ↔ 불교 — 교리적 차이와 논쟁
중국 선교에서 조상 제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두고 전례 논쟁이 벌어졌다. 문화와 신앙의 경계를 묻는 문제였다.
12. 이 세기의 결정적 사건
30년전쟁 (1618년~1648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개혁파(칼뱅)를 포함하지 않았고, 제후들의 종교·정치 이해가 얽혀 있었다.
원인
- 1555년 타협의 한계
- 보헤미아의 왕위와 신앙 문제
- 합스부르크에 맞선 프랑스의 세력 균형 정책
전개
보헤미아에서 시작해 덴마크·스웨덴·프랑스가 차례로 개입하며 30년간 이어졌다. 가톨릭 프랑스가 개신교 편에 서기도 했다.
결과
- 중부 유럽 일부 지역에서 인구가 3분의 1 이상 줄었다
장기적 영향
-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국가 주권과 세력 균형이라는 원리가 자리 잡았다
- 종교가 국제 질서의 결정 요인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 관용과 공존을 실질적으로 논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가톨릭 | 신앙 전쟁으로 시작했으나 결국 국가 이해가 앞섰다는 점이 함께 지적된다. |
| 개신교 | 개혁파가 처음으로 법적 인정을 받았다. |
| 역사학계 | ‘종교전쟁’이라는 이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왕조의 이해, 조세, 용병 경제가 크게 작용했다. |
학계의 평가
이 전쟁을 얼마나 ‘종교 전쟁’으로 부를 수 있는지가 계속 논쟁된다.
갈릴레오 재판 (1633년)
지구가 움직인다는 주장이 성경 해석과 충돌한다는 판단이 있었다.
원인
-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대한 교회의 경계
- 저작의 발표 방식을 둘러싼 마찰
- 당대 정치 상황
전개
그는 자기 주장을 철회하고 가택 연금 상태로 여생을 보냈다.
결과
- 지동설 관련 저작이 금서 목록에 올랐다
장기적 영향
- ‘종교와 과학의 충돌’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오래 인용되었다
- 1992년 교황청이 처리의 잘못을 인정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가톨릭 | 오늘날 교회는 이 사건의 처리가 잘못되었다고 공식 인정했다. |
| 역사학계 | ‘신앙 대 과학’의 단순한 대결로 그리면 실제를 놓친다. 후원 관계, 개인적 마찰, 당시 과학적 증거의 한계가 함께 작용했다. |
학계의 평가
이 사건을 종교와 과학의 본질적 충돌로 볼 수 있는가가 논쟁의 핵심이다.
시마바라 봉기와 일본의 기독교 금지 (1637년~1638년)
선교로 신자가 늘었으나 막부는 기독교를 통치의 위협으로 보고 탄압을 강화했다.
원인
- 과중한 세금과 기근
- 기독교 신자에 대한 탄압
- 지역 영주의 실정
전개
농민과 신자들이 봉기했으나 진압되었다.
결과
- 기독교 금지가 철저해지고 쇄국 정책이 굳어졌다
장기적 영향
- 신자들이 250년 가까이 숨어 신앙을 이어 갔다(가쿠레 기리시탄)
- 19세기에 그 후손들이 다시 나타나 세계를 놀라게 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가톨릭 | 순교와 잠복의 역사로 기억한다. 관련 유적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 역사학계 | 봉기의 성격을 종교 반란으로만 볼 것인지 농민 봉기로 볼 것인지 논의가 있다. |
러시아 정교회의 전례 개혁과 구교도 분리 (1654년~1666년)
총대주교 니콘이 그리스 관행에 맞춰 전례서와 예식을 고치려 했다.
원인
- 그리스 전통과의 일치 추구
- 국가의 통합 정책
- 관행의 신성함에 대한 민중의 확신
전개
성호를 긋는 손가락 수 같은 세부까지 바뀌자 이를 거부하는 이들이 분리해 나갔다.
결과
- 구교도(라스콜니키)가 갈라졌다
장기적 영향
- 구교도는 오랜 박해를 받으면서도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 국가가 개입한 종교 개혁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 주는 사례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동방정교회 | 러시아 교회사에서 가장 아픈 분열로 꼽힌다. |
| 역사학계 | 겉으로는 사소해 보이는 예식의 차이가 정체성 전체와 연결되어 있었다. |
샤브타이 츠비 운동 (1665년~1666년)
1648년 동유럽 학살의 참상과 카발라의 종말 기대가 겹쳐 구원에 대한 갈망이 컸다.
전개
그가 메시아로 선포되자 유럽과 중동의 공동체가 크게 술렁였으나, 술탄 앞에 선 그가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운동이 무너졌다.
결과
- 대규모 실망과 혼란이 뒤따랐다
장기적 영향
- 메시아 운동에 대한 랍비 진영의 경계가 강해졌다
- 일부 추종자들이 비밀 집단으로 남았다
- 이 충격이 18세기 하시디즘 등 새로운 영성 운동의 배경이 된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유대교 | 가장 큰 규모의 메시아 운동이자 가장 큰 좌절로 기억한다. |
| 이슬람교 | 개종 이후 그는 오스만 궁정의 관리가 되었다. |
| 역사학계 | 이 운동의 규모와 여파가 20세기 연구로 크게 재평가되었다. |
13. 주요 인물
| 인물 | 생몰 | 활동 | 후대의 평가 |
|---|---|---|---|
| 갈릴레오 갈릴레이 | 1564년 ~ 1642년 |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측했다 / 지동설을 옹호하는 저작을 냈다 / 1633년 재판을 받았다 |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논할 때 가장 자주 인용되는 인물이다. 그 자신은 평생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는 점도 함께 언급된다. |
| 샤브타이 츠비 | 1626년 ~ 1676년 | 메시아로 선포되어 큰 운동을 일으켰다 / 1666년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 유대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다. 그의 운동과 좌절이 이후 유대 사상에 남긴 영향이 크게 연구되었다. |
| 총대주교 니콘 | 1605년 ~ 1681년 | 전례서와 예식을 그리스 관행에 맞춰 고쳤다 / 뒤에 차르와 충돌해 폐위되었다 | 개혁의 내용보다 강행 방식이 분열을 키웠다는 평가가 많다. 정작 그 자신도 권력 다툼에서 밀려났다. |
| 바뤼흐 스피노자 | 1632년 ~ 1677년 | 성경을 역사 문헌으로 분석했다 / 1656년 유대 공동체에서 파문되었다 | 근대 성서비평과 종교 비판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그의 파문은 관용을 내세운 공동체 안에서도 경계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
| 제5대 달라이 라마 | 1617년 ~ 1682년 | 티베트의 종교·정치 권력을 함께 쥐었다 / 포탈라궁 건축을 시작했다 | 티베트에서 종교 지도자가 정치 통치자를 겸하는 체제를 확립한 인물로 평가된다. 몽골 세력의 지원이 그 배경이었다. |
14. 주요 문헌과 사상
| 문헌 | 시기 | 언어 | 핵심 내용 |
|---|---|---|---|
| 베스트팔렌 조약 | 1648년 | 라틴어 | 제후의 신앙 선택권을 개혁파까지 확대하고, 영토와 배상, 제국 내 권한을 정한 강화 조약. |
| 신학정치론 | 1670년 | 라틴어 | 성경을 역사적 문헌으로 읽는 방법을 제시하고 사상의 자유를 옹호한다. |
15. 지도와 이동 경로
17세기 — 전쟁으로 배운 공존 (1601~1700년)
| 장소 | 성격 | 설명 |
|---|---|---|
| 프라하 | 도시 | 1618년 전쟁의 발단. |
| 뮌스터·오스나브뤼크 | 회의 | 1648년 강화 조약. |
| 로마 | 도시 | 1633년 갈릴레오 재판. |
| 암스테르담 | 도시 | 세파르디 공동체와 스피노자. |
| 모스크바 | 도시 | 전례 개혁과 구교도 분리. |
| 이즈미르 | 도시 | 샤브타이 츠비의 활동지. |
| 빈 | 전투 | 1683년 오스만의 포위 실패. |
| 시마바라 | 전투 | 1637~1638년 봉기. |
| 라싸(포탈라궁) | 수도원·학교 |
경계 확실성: 대체로 확실
16. 사진과 유물로 보는 역사
17. 핵심 정리
- 베스트팔렌 조약은 종교 문제를 국가 주권의 틀로 옮겨 놓았다.
- 종교전쟁의 참혹함은 관용 논의의 출발점이 되었다.
- 메시아 운동의 좌절은 유대 사상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 선교 현장에서 문화와 신앙의 경계를 묻는 논쟁이 시작되었다.
18. 비교표
| 방식 | 사례 | 결과 |
|---|---|---|
| 누가 옳은지 끝까지 싸운다 | 30년전쟁 | 인구의 대량 손실, 어느 쪽도 이기지 못함 |
| 옳고 그름을 미루고 규칙을 정한다 | 베스트팔렌 조약 | 불완전하지만 공존의 틀이 생김 |
| 다른 쪽을 없앤다 | 일본의 금교, 구교도 박해 | 숨어서 이어지거나 오랜 상처로 남음 |
이 세기의 경험이 다음 세기 관용 논의의 바탕이 된다.
19. 생각해 볼 질문
- 진리 문제를 결론짓지 않고 공존을 정하는 것은 타협일까 지혜일까?
- 조상 제사를 신앙의 문제로 볼 것인가 문화의 문제로 볼 것인가?
- 국가가 종교 의례를 개혁하려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20. 확인 퀴즈
30년전쟁을 끝낸 조약은?
-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 베스트팔렌 조약
- 낭트 칙령
- 빈 회의
베스트팔렌 조약의 종교사적 의의로 가장 적절한 것은?
- 종교 문제를 국가 주권과 세력 균형의 틀 안으로 옮겼다
- 가톨릭을 유일한 종교로 정했다
- 모든 종교를 금지했다
- 교황권을 강화했다
1666년 유대 세계를 뒤흔든 메시아 운동의 중심 인물은?
- 샤브타이 츠비
- 스피노자
- 마이모니데스
- 바알 셈 토브
정답 1) 2 · 2) 1 · 3) 1
해설
1.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다.
2. 이후 국제 질서에서 종교의 자리가 달라진다.
3. 바알 셈 토브는 18세기 하시디즘의 인물이다.
21. 주석과 참고문헌
- 베스트팔렌 조약문
- 전례 논쟁 관련 문서
- 17세기 유대사 연구
제3장 18세기의 세계 종교
1701년~1800년
이성이 종교를 심문하고, 마음의 신앙이 부흥으로 되살아난다.
읽는 글 — 검수 전 초안
제18장 18세기의 세계 종교
이성이 종교를 심문하고, 마음의 신앙이 부흥으로 되살아납니다
1701년 ~ 1800년
여는 장면 — 같은 세기의 두 얼굴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종교를 이성의 법정에 세웠습니다.
같은 세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광장과 들판에 모여 회심을 경험했습니다.
비판과 부흥이 함께 일어난 세기입니다. 그리고 세기 끝에 혁명이 일어나 교회를 국가에서 떼어 내려 했습니다.
이 세기에는 서로 반대 방향처럼 보이는 흐름들이 나란히 일어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모두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돌아가자'입니다. 다만 어디로 돌아가자는지가 달랐습니다.
1. 혁명의 세기
계몽주의가 유럽 사상을 바꾸었고, 미국 독립과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산업혁명이 시작되었고, 무굴 제국은 쇠퇴했습니다.
- 계몽주의와 관용 논의의 확산.
- 1776년 미국 독립선언, 1789년 프랑스 혁명.
- 1773년 예수회 해산(1814년 복원).
- 1744년 아라비아에서 와하비 운동과 사우드 가문의 동맹.
- 1784년 조선에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
2. 1730년대 — 들판의 설교
형식화된 교회 생활에 대한 불만과 개인적 회심 체험에 대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북아메리카와 유럽에서 야외 설교와 순회 전도로 대규모 집회가 잇따랐고, 교단의 경계를 넘어 번졌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현상을 신학적으로 분석했습니다. 종교적 정서의 참됨을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가 그의 관심이었습니다.
감정적 과열에 대한 당대의 비판도 컸습니다. 찬반이 갈린 운동이었습니다.
에드워즈는 미국 신학사에서 가장 큰 인물로 꼽히지만, 그가 노예를 소유했다는 사실이 오늘날 함께 논의됩니다.
1738년 존 웨슬리가 회심 경험을 한 뒤 야외 설교와 소그룹(속회)을 통해 조직적인 운동을 폈습니다. 규율 있는 소그룹 중심의 신앙 운동이었습니다.
그는 성화(거룩해짐)와 실천을 함께 강조했고, 노예제를 반대했습니다. 평생 국교회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 자주 언급됩니다.
감리교가 산업화 시기 영국 사회의 안정에 기여했다는 해석과, 저항의 언어를 제공했다는 해석이 함께 있습니다.
교단을 넘는 복음주의 흐름이 여기서 형성되었고, 평신도의 역할과 자발적 결사가 커졌습니다. 노예제 반대와 교육 사업으로도 이어졌고, 다음 세기 세계 선교 운동의 인적·정신적 기반이 됩니다.
3. 1744년 — 처음으로 돌아가자
아라비아에서 후대에 더해진 관행을 걷어 내고 초기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성인 무덤 참배 등의 관행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종교 지도자와 지역 수장이 동맹을 맺어 종교 개혁과 정치적 확장을 함께 추진했습니다.
무슬림 사회 안에서 평가가 크게 갈립니다. 순수한 유일신 신앙의 회복으로 보는 시각과, 다양한 전통을 배제한다고 보는 비판이 맞섭니다.
'와하비즘'이라는 이름 자체가 주로 외부와 비판자가 붙인 것입니다. 내부에서는 다른 이름을 씁니다. 이 운동과 현대 극단주의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첨예한 쟁점입니다.
20세기 사우디아라비아 건국의 뿌리가 되었고, 석유 수입을 배경으로 이 해석이 세계로 확산되었습니다.
4. 1750년대 — 기쁨의 신앙
학문 중심의 엘리트 문화와 메시아 운동의 좌절 뒤에, 가난한 이들이 다가갈 수 있는 신앙이 필요했습니다.
동유럽 포돌리아에서 바알 셈 토브를 중심으로 기쁨과 기도, 일상의 거룩함을 강조하는 흐름이 퍼졌습니다. 하시디즘입니다.
배움이 짧은 사람도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메시지가 힘을 얻어, 동유럽 유대 사회의 큰 부분이 이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이 운동을 반지성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독자적 학문 전통을 함께 발전시켰습니다. 바알 셈 토브가 직접 쓴 글은 거의 없어 그의 가르침은 제자들의 전승으로 전합니다.
랍비 학문 진영(미트나그딤)과의 격렬한 대립이 있었으나 뒤에 공존했습니다.
5. 1789년 — 혁명과 교회
교회는 프랑스에서 최대의 지주였고 신분제의 한 축이었습니다. 교회의 재산과 특권, 계몽주의의 비판, 재정 위기가 겹쳤습니다.
교회 재산이 국유화되고 성직자에게 국가에 대한 서약이 요구되었으며, 공포정치기에는 예배가 사실상 금지되기도 했습니다.
가톨릭 쪽에는 박해의 기억으로 남았고, 19세기 교회의 방어적 태도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혁명기 종교 정책은 시기마다 크게 달랐습니다. 하나로 뭉뚱그리지 않습니다.
1791년 프랑스가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했습니다. 유럽 유대인 해방의 출발점입니다.
시민권을 얻었지만 '개인으로서의 유대인에게는 모든 것을, 집단으로서는 아무것도'라는 조건이 붙었습니다. 권리의 확대이자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질문이었습니다.
베를린에서는 모제스 멘델스존이 토라를 독일어로 옮기고, 《예루살렘》에서 국가는 행위를 다스리되 양심을 강제할 수 없으며 유대교는 신앙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논했습니다. 유대 계몽(하스칼라)의 상징적 인물입니다.
그의 뒤를 이은 세대에서 개혁파 유대교와 동화 문제가 함께 나타납니다. 권리를 얻기 위해 자기다움을 내려놓아야 한다면 그것은 해방인가.
6. 네 가지 '돌아가자'
| 운동 | 어디로 돌아가자고 했나 | 무엇을 얻었나 | 무엇이 논쟁이 되었나 |
|---|---|---|---|
| 부흥 운동 | 개인의 회심 체험으로 | 교단을 넘는 복음주의 | 감정적 과열에 대한 비판 |
| 하시디즘 | 마음의 기쁨과 일상의 거룩함으로 | 가난한 이들이 참여하는 신앙 | 학문 진영과의 대립 |
| 와하비 운동 | 초기 이슬람의 실천으로 | 정치·종교 체제의 결합 | 다양한 전통의 배제 |
| 계몽주의 | 이성으로 | 종교 자유와 시민권 논의 | 신앙의 자리를 어디에 둘 것인가 |
같은 세기에 정반대 방향처럼 보이는 흐름들이 함께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왕실의 후원 아래 승가 개혁이 진행되었고, 일본에서는 사찰이 제도 안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1773년 예수회가 해산되었다가 1814년 복원되었습니다.
이 장이 남긴 네 문장
- 계몽주의의 종교 비판과 부흥 운동은 같은 세기의 두 얼굴입니다.
- 유대인 해방은 권리의 확대이자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질문이었습니다.
- 와하비 운동은 근현대 이슬람 논쟁의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 혁명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다시 물었습니다.
생각해 볼 질문
- 이성으로 신앙을 검토하는 일은 신앙에 해로울까요, 도움이 될까요?
- 권리를 얻기 위해 자기다움을 내려놓아야 한다면 그것은 해방일까요?
- '처음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은 언제 개혁이 되고 언제 배타가 될까요?
이 장에서 쓴 자료
문헌
- 모제스 멘델스존 《예루살렘》 (1783년, 독일어)
- 성직자 시민헌장 (1790년, 프랑스어)
자료 사진
- 존 웨슬리의 초상 (당대 시각자료) · 모제스 멘델스존의 초상 (당대 시각자료)
참고
- 웨슬리 일기와 설교, 에드워즈 저작
- 프랑스 혁명기 종교 정책 자료
- 하시디즘 문헌, 근대 이슬람 사상사 연구
「종교사 한눈」이 모아 둔 자료로 작성한 초안입니다. 출판 전 사실 확인과 관점 검토가 필요합니다.
1. 세기를 여는 한 장면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종교를 이성의 법정에 세웠다. 같은 세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광장과 들판에 모여 회심을 경험했다. 비판과 부흥이 함께 일어난 세기다. 그리고 혁명이 일어나 교회를 국가에서 떼어 내려 했다.
2. 18세기의 세계사 배경
계몽주의가 유럽 사상을 바꾸었고, 미국 독립과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산업혁명이 시작되었고, 무굴 제국은 쇠퇴했다.
- 계몽주의와 관용 논의의 확산.
- 1776년 미국 독립선언, 1789년 프랑스 혁명.
- 1773년 예수회 해산(1814년 복원).
- 1744년 아라비아에서 와하비 운동과 사우드 가문의 동맹.
- 1784년 조선에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3. 한눈에 보는 연대표
| 연도 | 일어난 일 | 관련 종교 |
|---|---|---|
| 1730~1740년대 | 북아메리카와 유럽에서 대각성·부흥 운동이 일어난다. | 개신교 |
| 1738년 | 존 웨슬리의 회심 경험. 감리교 운동이 시작된다. | 개신교 |
| 1744년 | 무함마드 이븐 압둘와합과 사우드 가문의 동맹. | 이슬람 |
| 1750년대 | 동유럽에서 하시디즘이 시작된다. | 유대 |
| 1773년 | 예수회가 해산된다. | 가톨릭 |
| 1789~1794년 | 프랑스 혁명과 탈기독교화 정책. | 가톨릭 |
| 1791년 | 프랑스가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한다. | 유대 |
4. 유대교
해방과 하시디즘
서유럽에서는 시민권을 얻는 해방이 시작되었고, 동유럽에서는 기쁨과 영성을 강조하는 하시디즘이 퍼졌다. 멘델스존은 유대 전통과 계몽 사상을 잇는 길을 모색했다. 근대 유대교의 여러 갈래가 여기서 시작된다.
5. 기독교
비판과 부흥
이성으로 성경과 교리를 검토하는 흐름과, 개인의 회심 체험을 강조하는 부흥 운동이 나란히 일어났다. 두 흐름 모두 이후 근대 기독교의 성격을 만들었다.
6. 가톨릭
혁명과 계몽 사상의 도전에 직면했다. 프랑스 혁명기에 교회 재산이 몰수되고 성직자가 박해받았다.
7. 동방정교회
러시아에서 교회가 국가 기구에 더 깊이 편입되었다.
8. 개신교
부흥과 선교의 준비
경건주의와 부흥 운동은 개인의 신앙 체험과 실천을 강조했고, 다음 세기 세계 선교 운동의 인적·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9. 이슬람교
정화 운동의 시작
아라비아에서 시작된 와하비 운동은 후대의 관행을 걷어내고 초기 이슬람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이 흐름은 오늘날까지 이슬람 세계의 논쟁 지점 가운데 하나다.
10. 불교
동남아시아에서 왕실의 후원 아래 승가 개혁이 진행되었고, 일본에서는 사찰이 제도 안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다.
11. 종교 간 관계
유대교 ↔ 기독교 — 화해와 종교 간 대화
계몽주의의 관용 논의는 유대인의 시민권 문제를 공론장에 올렸다. 해방은 그러나 ‘시민이 되려면 유대인다움을 얼마나 내려놓아야 하는가’라는 새 질문을 낳았다.
12. 이 세기의 결정적 사건
대각성 운동 (1734년~1745년)
형식화된 교회 생활에 대한 불만과 개인적 회심 체험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전개
야외 설교와 순회 전도로 대규모 집회가 잇따랐고, 교단의 경계를 넘어 번졌다.
결과
- 회심 체험을 강조하는 신앙 형태가 자리 잡았다
장기적 영향
- 교단을 넘는 복음주의 흐름이 형성되었다
- 평신도의 역할과 자발적 결사가 커졌다
- 노예제 반대와 교육 사업으로도 이어졌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개신교 | 개인의 회심을 신앙의 중심에 두는 전통이 여기서 굳어졌다. |
| 역사학계 | 감정적 과열에 대한 당대의 비판도 컸다. 찬반이 갈린 운동이었다. |
웨슬리의 회심과 감리교 운동 (1738년)
국교회 안에서 형식적 신앙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지고 있었다.
전개
웨슬리가 회심 경험을 한 뒤 야외 설교와 소그룹(속회)을 통해 조직적인 운동을 폈다.
결과
- 규율 있는 소그룹 중심의 신앙 운동이 확산되었다
장기적 영향
- 감리교가 독립 교단으로 형성되었다
- 노동자 계층에 뿌리내리며 사회 개혁 운동으로 이어졌다
- 성결·오순절 계열의 뿌리가 되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개신교 | 개인의 성화와 사회적 실천을 함께 강조한 전통으로 평가된다. |
| 역사학계 | 산업화 시기 영국 사회의 안정에 기여했다는 해석과, 저항의 언어를 제공했다는 해석이 함께 있다. |
와하비 운동과 사우드 가문의 동맹 (1744년)
후대에 더해진 관행을 걷어 내고 초기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나왔다.
원인
- 성인 무덤 참배 등 관행에 대한 비판
- 지역 정치 세력과의 이해 일치
전개
종교 지도자와 지역 수장이 동맹을 맺어 종교 개혁과 정치적 확장을 함께 추진했다.
결과
- 아라비아 중부에 새로운 정치·종교 체제가 세워졌다
장기적 영향
- 20세기 사우디아라비아 건국의 뿌리가 되었다
- 석유 수입을 배경으로 이 해석이 세계로 확산되었다
- 무슬림 사회 안에서 이 흐름에 대한 지지와 비판이 함께 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이슬람교 | 순수한 유일신 신앙의 회복으로 보는 시각과, 다양한 전통을 배제한다고 보는 비판이 맞선다. |
| 역사학계 | ‘와하비즘’이라는 이름 자체가 주로 외부와 비판자가 붙인 것이다. 내부에서는 다른 이름을 쓴다. |
학계의 평가
이 운동과 현대 극단주의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첨예한 쟁점이다.
하시디즘의 시작 (1750년)
학문 중심의 엘리트 문화와 메시아 운동의 좌절 뒤에, 가난한 이들이 다가갈 수 있는 신앙이 필요했다.
전개
바알 셈 토브를 중심으로 기쁨과 기도, 일상의 거룩함을 강조하는 흐름이 퍼졌다.
결과
- 동유럽 유대 사회의 큰 부분이 이 운동에 참여했다
장기적 영향
- 랍비 학문 진영(미트나그딤)과의 격렬한 대립이 있었으나 뒤에 공존했다
- 홀로코스트로 큰 타격을 입었으나 미국과 이스라엘에서 재건되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유대교 | 배움이 짧은 사람도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메시지가 힘을 얻었다. |
| 역사학계 | 이 운동을 반지성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독자적 학문 전통을 함께 발전시켰다. |
프랑스 혁명과 탈기독교화 (1789년~1794년)
교회는 프랑스에서 최대의 지주였고 신분제의 한 축이었다.
원인
- 교회의 재산과 특권
- 계몽주의의 비판
- 재정 위기
전개
교회 재산이 국유화되고 성직자에게 국가에 대한 서약이 요구되었으며, 공포정치기에는 예배가 사실상 금지되기도 했다.
결과
- 교회가 국가에서 분리되는 과정이 폭력적으로 시작되었다
장기적 영향
- 1791년 유대인에게 시민권이 부여되어 유럽 유대인 해방의 출발점이 되었다
- 정교분리와 세속 국가라는 근대적 모델이 형성되었다
- 교회 안에서는 근대 사상 전반에 대한 경계가 커졌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가톨릭 | 박해의 기억으로 남았고, 19세기 교회의 방어적 태도에 영향을 주었다. |
| 유대교 | 시민권을 얻었지만 ‘개인으로서의 유대인에게는 모든 것을, 집단으로서는 아무것도’라는 조건이 붙었다. |
| 역사학계 | 혁명기 종교 정책은 시기마다 크게 달랐다. 하나로 뭉뚱그리지 않는다. |
13. 주요 인물
| 인물 | 생몰 | 활동 | 후대의 평가 |
|---|---|---|---|
| 존 웨슬리 | 1703년 ~ 1791년 | 야외 설교와 순회 전도를 했다 / 소그룹 조직을 만들었다 / 노예제를 반대했다 | 감리교 전통의 창시자로 기려진다. 평생 국교회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 자주 언급된다. |
| 조나단 에드워즈 | 1703년 ~ 1758년 | 대각성 운동의 신학적 해석을 남겼다 / 부흥 현상을 분석한 글을 썼다 | 미국 신학사에서 가장 큰 인물로 꼽힌다. 동시에 그가 노예를 소유했다는 사실이 오늘날 함께 논의된다. |
| 바알 셈 토브 | 1698년경 ~ 1760년 | 하시디즘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 직접 쓴 글이 거의 없어, 그의 가르침은 제자들의 전승으로 전한다. 그만큼 역사적 재구성과 전승을 구분해 읽어야 한다. |
| 모제스 멘델스존 | 1729년 ~ 1786년 | 토라를 독일어로 옮겼다 / 《예루살렘》에서 국가와 종교의 관계를 논했다 | 유대 계몽(하스칼라)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의 뒤를 이은 세대에서 개혁파 유대교와 동화 문제가 함께 나타난다. |
| 무함마드 이븐 압둘와합 | 1703년 ~ 1792년 | 유일신 신앙의 회복을 주장하는 저작을 남겼다 / 사우드 가문과 동맹을 맺었다 | 무슬림 사회 안에서 평가가 크게 갈리는 인물이다. 그의 이름을 딴 호칭은 주로 비판자들이 쓴 것이며, 지지자들은 다른 이름을 쓴다. |
14. 주요 문헌과 사상
| 문헌 | 시기 | 언어 | 핵심 내용 |
|---|---|---|---|
| 예루살렘 | 1783년 | 독일어 | 국가는 행위를 다스리되 양심을 강제할 수 없으며, 유대교는 신앙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논한다. |
| 성직자 시민헌장 | 1790년 | 프랑스어 | 성직자를 국가 공무원처럼 선출하고 국가에 서약하도록 정했다. |
15. 지도와 이동 경로
18세기 — 부흥과 혁명, 그리고 정화 운동 (1701~1800년)
| 장소 | 성격 | 설명 |
|---|---|---|
| 노샘프턴(뉴잉글랜드) | 도시 | 대각성 운동의 무대. |
| 런던 | 도시 | 웨슬리의 활동 중심. |
| 파리 | 도시 | 혁명과 탈기독교화. |
| 베를린 | 도시 | 멘델스존과 유대 계몽. |
| 메지비시(포돌리아) | 도시 | 하시디즘의 요람. |
| 디리야 | 도시 | 1744년 동맹. |
경계 확실성: 대체로 확실
16. 사진과 유물로 보는 역사
17. 핵심 정리
- 계몽주의의 종교 비판과 부흥 운동은 같은 세기의 두 얼굴이다.
- 유대인 해방은 권리의 확대이자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질문이었다.
- 와하비 운동은 근현대 이슬람 논쟁의 중요한 출발점이다.
- 혁명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다시 물었다.
18. 비교표
| 운동 | 어디로 돌아가자고 했나 | 무엇을 얻었나 | 무엇이 논쟁이 되었나 |
|---|---|---|---|
| 부흥 운동 | 개인의 회심 체험으로 | 교단을 넘는 복음주의 | 감정적 과열에 대한 비판 |
| 하시디즘 | 마음의 기쁨과 일상의 거룩함으로 | 가난한 이들이 참여하는 신앙 | 학문 진영과의 대립 |
| 와하비 운동 | 초기 이슬람의 실천으로 | 정치·종교 체제의 결합 | 다양한 전통의 배제 |
| 계몽주의 | 이성으로 | 종교 자유와 시민권 논의 | 신앙의 자리를 어디에 둘 것인가 |
같은 세기에 정반대 방향처럼 보이는 흐름들이 함께 일어났다.
19. 생각해 볼 질문
- 이성으로 신앙을 검토하는 일은 신앙에 해로울까 도움이 될까?
- 권리를 얻기 위해 자기다움을 내려놓아야 한다면 그것은 해방일까?
- ‘처음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은 언제 개혁이 되고 언제 배타가 될까?
20. 확인 퀴즈
감리교 운동으로 이어진 부흥 운동의 중심 인물은?
- 존 웨슬리
- 장 칼뱅
- 모제스 멘델스존
- 바알 셈 토브
프랑스가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한 해는?
- 1648년
- 1744년
- 1791년
- 1897년
18세기 동유럽에서 시작된 유대교의 영성 운동은?
- 하시디즘
- 카라이파
- 개혁파 유대교
- 시온주의
정답 1) 1 · 2) 3 · 3) 1
해설
1. 1738년 회심 경험 이후 운동이 확산되었다.
2. 혁명기의 조치다.
3. 개혁파 유대교는 19세기, 시온주의는 19세기 말에 등장한다.
21. 주석과 참고문헌
- 웨슬리 일기
- 프랑스 혁명기 종교 정책 자료
- 하시디즘 연구
참고문헌
- 95개 논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트리엔트 공의회 문서 (1차 사료)
- 칼뱅 《기독교 강요》
- 오스만·사파비·무굴사 연구
- 베스트팔렌 조약문
- 전례 논쟁 관련 문서
- 17세기 유대사 연구
- 웨슬리 일기
- 프랑스 혁명기 종교 정책 자료
- 하시디즘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