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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 한눈 · 제6권
19세기부터 21세기
선교와 식민, 절멸과 대화
검수용 교정본 · 배포 금지
같은 시대, 서로 다른 믿음은 어떤 역사를 지나왔는가
검수 완료 0 / 3장 — 아직 검수를 마치지 않은 원고가 들어 있습니다.
차례
- 제1장 19세기의 세계 종교
- 제2장 20세기의 세계 종교
- 제3장 21세기의 세계 종교
이 책이 다루는 것
- 세계선교운동
- 식민주의와 종교
- 근대 유대교와 시온주의
- 이슬람 개혁운동
- 불교의 현대화
- 세계대전과 종교
- 홀로코스트
- 종교 간 대화
- 현대 종교 갈등과 평화운동
이 책은 역사적 사실, 종교 전통의 주장, 학문적 해석을 구분해 씁니다. 확정되지 않은 연대와 논쟁 중인 내용은 그렇게 밝혀 적었고, 특정 종교의 관점만으로 다른 종교를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제1장 19세기의 세계 종교
1801년~1900년
선교사가 배를 타고 세계로 나가고, 아시아의 종교들이 응답한다.
읽는 글 — 검수 전 초안
제19장 19세기의 세계 종교
선교사가 배를 타고 세계로 나가고, 아시아의 종교들이 응답합니다
1801년 ~ 1900년
여는 장면 — 배와 깃발
선교사들이 배를 타고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그들 뒤에는 종종 제국의 깃발이 있었습니다.
아시아의 불교와 이슬람은 이 만남에 대응하며 스스로를 다시 설명해야 했습니다. 서구에서는 성경을 역사 자료로 읽는 방법이 등장해 신앙에 새로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세기의 이야기는 한 방향이 아닙니다. 나간 사람들과 응답한 사람들이 함께 있습니다.
1. 하나로 묶인 세계
산업혁명과 제국주의가 세계를 하나의 체제로 묶었습니다. 민족주의가 퍼졌고, 과학과 역사학이 종교 이해를 흔들었습니다.
- 유럽 열강의 아시아·아프리카 식민지 확대.
- 1859년 다윈 《종의 기원》 출간.
-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
- 1893년 시카고 세계종교회의.
- 1897년 제1차 시온주의자 대회.
2. 나간 사람들
부흥 운동으로 자란 헌신과 유럽의 해상 진출이 겹치면서 선교 단체가 잇따라 세워졌습니다.
선교사들이 성경을 현지어로 옮기고 학교와 병원을 세웠습니다. 윌리엄 캐리는 인도 세람포르에서 성경을 여러 언어로 옮기고 인쇄소를 세웠으며, 사티(과부 순장) 폐지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식민 지배의 확장과 자주 겹쳤습니다.
개신교 전통은 복음을 전한 헌신의 역사로 기려 왔습니다. 아시아 여러 지역에서는 이 만남이 자기 전통을 다시 설명하게 만든 도전이었습니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선교가 서구 세력과 함께 온 것으로 인식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선교와 식민 지배를 같은 것으로 보는 서술도, 완전히 분리하는 서술도 모두 정확하지 않습니다. 현지 신자들의 주체적 역할이 최근 크게 강조됩니다.
결과는 분명합니다. 기독교가 유럽의 종교에서 세계 종교로 바뀌었습니다. 20세기 후반 인구 중심이 남반구로 옮겨 가는 바탕이 여기서 만들어졌습니다. 현지 언어의 문자화와 교육에 기여한 면과, 문화를 훼손한 면이 함께 남았습니다.
3. 응답한 사람들
스리랑카 — 1873년 파나두라 논쟁. 식민 통치 아래에서 기독교 선교가 활발했고, 불교계가 공개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틀에 걸친 공개 토론에 수천 명이 모였고, 불교 측 발언이 널리 호응을 얻었습니다.
선교가 일방적으로 진행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이후 불교 학교와 출판이 늘어나며 근대 불교의 자기 이해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시기 형성된 '합리적 불교' 이미지가 서구의 불교 이해에 오래 영향을 주었습니다.
일본 — 1868년 폐불훼석. 메이지 정부가 천황 중심의 국가 신도를 세우려 하면서 불교와 신도를 분리하려 했습니다. 사찰과 불상이 파괴되고 승려가 환속했으며, 사찰의 토지와 특권이 사라졌습니다.
'폐불훼석'의 실제 규모는 지역차가 컸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불교계는 스스로를 근대적 종교로 재정의하며 교육과 학문, 사회 사업에 참여했습니다. 다만 일부는 뒤에 국가 정책에 협력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그 책임은 전후에 논의됩니다.
이슬람 세계 — 개혁 사상. 무함마드 압두는 알아즈하르의 교육 개혁을 추진하고 이집트의 대무프티를 지냈습니다. 이슬람과 근대 과학·이성은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 법 해석을 시대에 맞게 다시 여는 것(이즈티하드)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그의 유산은 뒤에 서로 다른 방향(자유주의적 개혁과 근본으로의 회귀)으로 갈라져 계승되었습니다.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의 부대 행사로 세계의 여러 종교 대표가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아시아의 종교 지도자들이 서구 청중 앞에서 직접 자기 전통을 소개했습니다. 불교의 다르마팔라 등이 큰 반향을 얻었습니다.
주최 측은 기독교의 우위를 보여 주는 자리로 기대했으나 결과는 달랐습니다. 종교 간 대화 운동의 출발점으로 꼽히며, 미국에서 불교와 힌두교가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세계 종교'라는 근대적 범주 자체가 이 무렵 만들어졌다는 점이 함께 지적됩니다.
4. 흔들린 확신
역사학과 문헌학의 방법이 성경 연구에 본격 적용되었습니다.
오경의 여러 자료를 구분하는 가설, 복음서의 형성 과정 연구, 예수의 생애를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이어졌습니다.
개신교는 받아들인 쪽과 거부한 쪽으로 크게 갈렸습니다. 가톨릭은 처음에는 경계했으나 20세기 중반 이후 공식적으로 수용했습니다. 유대교 안에서도 개혁파는 수용하고 정통파는 거리를 두었습니다.
이 방법이 신앙을 부정한다고 보는 견해와, 본문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한다고 보는 견해가 함께 있습니다. 역사적 방법과 신앙적 읽기의 관계는 지금도 열린 물음입니다.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은 창조 이해를 둘러싼 오랜 논쟁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교단과 전통에 따라 수용의 폭이 크게 달랐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라는 갈래가 형성되는 배경이 이 세기에 만들어졌습니다.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신앙과 도덕에 관해 공식적으로 선언할 때의 교황 무류성을 정의했습니다.
가톨릭 쪽에서는 무류성의 범위가 매우 제한적이라는 점이 강조됩니다. 정교회는 총대주교들의 협의 구조와 어긋난다고 보았고, 개신교는 성경의 최종 권위와 충돌한다고 보았습니다. 일부 신학자와 신자가 이탈해 구가톨릭교회를 형성했습니다.
1891년에는 산업화 시대의 노동 문제를 다룬 회칙이 나와 가톨릭 사회 교리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5. 1897년 — 다른 해법
해방과 근대화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를 두고 유대교 안에서 개혁파, 정통파, 보수파의 갈래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조직적 폭력(포그롬)과 서유럽의 드레퓌스 사건은 다른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해방만으로는 안전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헤르츨의 주도로 바젤에서 여러 나라 대표가 모여 조직과 강령을 마련했습니다.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을 팔레스타인에 세운다는 목표가 공식화되었습니다.
유대교 안에서 찬반이 갈렸습니다. 종교적 이유로 반대한 흐름과 세속적 민족운동으로 지지한 흐름이 함께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주민에게는 이후 실향으로 이어지는 출발점으로 기억됩니다.
시온주의는 하나의 사상이 아니라 여러 갈래(정치적·문화적·종교적·사회주의적)의 묶음이었습니다. 헤르츨의 구상이 그 땅에 살던 주민에 대해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함께 제기됩니다.
같은 세기에 근대적 반유대주의가 등장했습니다. 종교적 반유대주의가 인종 이론과 결합한 새로운 형태입니다. 이것이 다음 세기 참극의 사상적 배경이 됩니다.
6. 같은 도전, 네 가지 응답
| 전통 | 무엇이 도전이었나 | 어떻게 응답했나 |
|---|---|---|
| 유대교 | 해방 이후의 정체성, 새 형태의 반유대주의 | 개혁·정통·보수의 분화, 시온주의 |
| 기독교 | 성서비평, 진화론, 식민주의와의 얽힘 | 선교 확장, 사회 교리, 신학의 여러 갈래 |
| 이슬람교 | 식민 지배와 근대 제도 | 개혁 사상(이성과 신앙의 조화)과 회귀 운동 |
| 불교 | 선교의 도전과 국가 정책 | 공개 논쟁, 교육과 출판, 근대적 자기 서술 |
네 전통 모두 '근대'라는 같은 도전 앞에서 각자의 답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 장이 남긴 다섯 문장
- 19세기 선교는 기독교를 세계 종교로 만들었지만 식민주의와 분리해 말할 수 없습니다.
- 아시아 종교들의 근대적 자기 이해는 이 만남 속에서 형성되었습니다.
- 성서비평과 진화론은 신앙에 새로운 질문을 던졌고 다양한 응답을 낳았습니다.
- 근대적 반유대주의의 등장은 20세기 홀로코스트의 배경이 됩니다.
- 1893년 시카고 세계종교회의는 종교 간 대화의 출발점으로 꼽힙니다.
생각해 볼 질문
- 선교와 식민 지배가 겹칠 때 복음은 어떻게 받아들여질까요?
- 한 종교가 다른 종교의 도전에 응답하며 스스로를 새로 설명하는 일은 어떤 변화를 낳을까요?
- 성경을 역사 자료로 읽는 것과 신앙의 책으로 읽는 것은 함께 갈 수 있을까요?
이 장에서 쓴 자료
문헌
- 테오도르 헤르츨 《유대 국가》 (1896년, 독일어)
- 《새로운 사태》 (1891년, 라틴어) — 가톨릭 사회 교리의 출발점
- 찰스 다윈 《종의 기원》 (1859년, 영어)
자료 사진
- 제1차 시온주의자 대회의 헤르츨 (당대 기록 사진) · 1893년 시카고 세계종교회의 (당대 기록 사진)
참고
- 선교 단체 기록, 세계 기독교사 연구
- 파나두라 논쟁 기록
- 메이지 정부 법령, 일본 근대 불교사 연구
- 근대 반유대주의 연구
「종교사 한눈」이 모아 둔 자료로 작성한 초안입니다. 출판 전 사실 확인과 관점 검토가 필요합니다.
1. 세기를 여는 한 장면
선교사들이 배를 타고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떠났다. 그들 뒤에는 종종 제국의 깃발이 있었다. 아시아의 불교와 이슬람은 이 만남에 대응하며 스스로를 다시 설명해야 했다. 서구에서는 성경을 역사 자료로 읽는 방법이 등장해 신앙에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2. 19세기의 세계사 배경
산업혁명과 제국주의가 세계를 하나의 체제로 묶었다. 민족주의가 퍼졌고, 과학과 역사학이 종교 이해를 흔들었다.
- 유럽 열강의 아시아·아프리카 식민지 확대.
- 1859년 다윈 《종의 기원》 출간.
-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
- 1893년 시카고 세계종교회의.
- 1897년 제1차 시온주의자 대회.
3. 한눈에 보는 연대표
| 연도 | 일어난 일 | 관련 종교 |
|---|---|---|
| 19세기 초 | 개신교 세계 선교 단체들이 잇따라 설립된다. | 개신교 |
| 1810~1840년대 | 독일에서 성서 역사비평 연구가 본격화된다. | 기독교 |
| 1810~1840년대 | 독일에서 개혁파 유대교가 형성된다. | 유대 |
| 1868년 | 일본의 신불분리 정책으로 폐불훼석이 일어난다. | 불교 |
| 1870년 |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황 무류성을 선언한다. | 가톨릭 |
| 1873년 | 스리랑카 파나두라 논쟁 — 불교 측이 기독교 선교에 공개 반론한다. | 불교, 기독교 |
| 1893년 | 시카고 세계종교회의에서 아시아 종교 지도자들이 서구 청중 앞에 선다. | |
| 1897년 | 바젤에서 제1차 시온주의자 대회가 열린다. | 유대 |
4. 유대교
개혁·정통·시온주의
해방과 근대화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를 두고 개혁파, 정통파, 보수파의 갈래가 형성되었다. 동유럽의 박해가 이어지면서 정치적 해법으로 시온주의가 나타났다.
- 러시아의 포그롬이 대규모 이주를 낳았다.
- 반유대주의가 인종 이론과 결합하는 새로운 형태로 나타났다.
5. 기독교
세계로 나간 선교, 흔들린 확신
선교 운동으로 기독교가 세계 종교가 되었지만, 그 과정은 식민 지배와 얽혀 있었다. 동시에 성서비평과 진화론이 전통적 확신을 흔들었고, 그에 대한 여러 응답이 근대 신학의 갈래를 만들었다.
6. 가톨릭
근대 사상에 맞서는 입장을 분명히 하는 한편, 1891년 노동 문제에 관한 회칙으로 사회 교리의 출발점을 놓았다.
7. 동방정교회
발칸의 민족국가 성립과 함께 각 민족별 교회가 자립했다. 러시아에서는 수도원 영성이 되살아났다.
8. 개신교
선교의 세기
성경 번역과 학교·병원 설립을 통해 선교가 진행되었다. 이 과정은 복음 전파이자 문화 접촉이었고, 때로 식민 권력과 구별되지 않았다.
9. 이슬람교
개혁과 응답
식민 지배와 근대 문물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를 두고 개혁 사상이 일어났다. 이슬람의 원리와 근대 과학·제도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가 핵심 물음이었다.
10. 불교
근대 불교의 형성
기독교 선교에 대한 대응과 서구 학문과의 만남 속에서 불교는 스스로를 ‘합리적인 종교’로 다시 설명했다. 스리랑카·일본·태국에서 각각 다른 형태의 근대화가 진행되었다.
11. 종교 간 관계
기독교 ↔ 불교 — 교리적 차이와 논쟁
스리랑카의 공개 논쟁과 일본의 배불 정책 이후 재정비 과정에서 두 종교가 본격적으로 마주했다. 불교의 근대적 자기 이해는 이 만남 속에서 형성된 면이 있다.
기독교의 자리에서: 선교 측은 이를 진리 전파로 보았다.
불교의 자리에서: 불교 측은 이를 외래 세력에 대한 방어이자 자기 갱신의 계기로 보았다.
기독교 ↔ 이슬람교 — 선교와 전파
선교와 식민 지배가 겹치면서, 이슬람 세계에서 기독교는 종교이자 서구 세력으로 인식되었다.
유대교 ↔ 기독교 — 박해와 차별
종교적 반유대주의가 인종 이론과 결합해 근대적 반유대주의로 바뀌었다. 이것이 다음 세기 참극의 사상적 배경이 된다.
12. 이 세기의 결정적 사건
개신교 세계 선교 운동 (1792년~1900년)
부흥 운동으로 자란 헌신과 유럽의 해상 진출이 겹치면서 선교 단체가 잇따라 세워졌다.
원인
- 부흥 운동의 열정
- 해상 교통과 제국의 확장
- 성경 번역과 인쇄의 발달
전개
선교사들이 성경을 현지어로 옮기고 학교와 병원을 세웠다. 그 과정은 식민 지배의 확장과 자주 겹쳤다.
결과
- 기독교가 아시아·아프리카·태평양으로 크게 퍼졌다
장기적 영향
- 기독교가 유럽의 종교에서 세계 종교로 바뀌었다
- 20세기 후반 인구 중심이 남반구로 옮겨 가는 바탕이 되었다
- 현지 언어의 문자화와 교육에 기여한 면과, 문화를 훼손한 면이 함께 남았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개신교 | 복음을 전한 헌신의 역사로 기려 왔다. |
| 불교 | 아시아 여러 지역에서는 이 만남이 자기 전통을 다시 설명하게 만든 도전이었다. |
| 이슬람교 | 선교가 서구 세력과 함께 온 것으로 인식된 경우가 많았다. |
| 역사학계 | 선교와 식민 지배를 같은 것으로 보는 서술도, 완전히 분리하는 서술도 모두 정확하지 않다. 현지 신자들의 주체적 역할이 최근 크게 강조된다. |
학계의 평가
선교의 유산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가 오늘날에도 활발히 논의된다.
성서 역사비평의 확산 (1835년~1900년)
역사학과 문헌학의 방법이 성경 연구에 본격 적용되었다.
전개
오경의 여러 자료를 구분하는 가설, 복음서의 형성 과정 연구, 예수의 생애를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결과
- 성경을 역사 문헌으로 읽는 학문 분야가 자리 잡았다
장기적 영향
- 신앙과 학문의 관계를 두고 교단마다 다른 응답이 나왔다
-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라는 갈래가 형성되는 배경이 되었다
-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 교육에서 표준 방법으로 쓰인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개신교 | 받아들인 쪽과 거부한 쪽으로 크게 갈렸다. |
| 가톨릭 | 처음에는 경계했으나 20세기 중반 이후 공식적으로 수용했다. |
| 유대교 | 유대교 안에서도 개혁파는 수용하고 정통파는 거리를 두었다. |
| 역사학계 | 이 방법이 신앙을 부정한다고 보는 견해와, 본문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한다고 보는 견해가 함께 있다. |
학계의 평가
역사적 방법과 신앙적 읽기의 관계는 지금도 열린 물음이다.
일본의 신불분리와 폐불훼석 (1868년~1874년)
새 정부가 천황 중심의 국가 신도를 세우려 하면서 불교와 신도를 분리하려 했다.
원인
- 국가 신도 확립 정책
- 오랫동안 섞여 있던 신불습합의 해체
- 불교의 특권에 대한 반발
전개
사찰과 불상이 파괴되고 승려가 환속했으며, 사찰의 토지와 특권이 사라졌다.
결과
- 일본 불교가 제도적 기반을 크게 잃었다
장기적 영향
- 불교계가 스스로를 근대적 종교로 재정의하는 계기가 되었다
- 교육과 학문, 사회 사업에 참여하며 새 자리를 찾았다
- 일부는 뒤에 국가 정책에 협력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그 책임은 전후에 논의되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불교 | 큰 타격이자 근대적 자기 갱신의 출발점으로 이해된다. |
| 역사학계 | ‘폐불훼석’의 실제 규모는 지역차가 컸다는 연구가 있다. |
제1차 바티칸 공의회 (1869년~1870년)
교황령이 축소되고 근대 사상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교회의 권위를 분명히 하려 했다.
전개
신앙과 도덕에 관해 공식적으로 선언할 때의 교황 무류성을 정의했다.
결과
- 교황 수위권과 무류성이 교의로 선포되었다
장기적 영향
- 일부 신학자와 신자가 이탈해 구가톨릭교회를 형성했다
- 정교회·개신교와의 거리가 더 벌어졌다
- 이탈리아군의 로마 점령으로 공의회가 중단되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균형이 보완된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가톨릭 | 무류성의 범위가 매우 제한적이라는 점이 자주 강조된다. |
| 동방정교회 | 총대주교들의 협의 구조와 어긋난다고 보았다. |
| 개신교 | 성경의 최종 권위와 충돌한다고 보았다. |
파나두라 논쟁 (1873년)
식민 통치 아래에서 기독교 선교가 활발했고, 불교계가 공개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전개
이틀에 걸친 공개 토론에 수천 명이 모였고, 불교 측 발언이 널리 호응을 얻었다.
결과
- 불교 부흥 운동에 큰 힘이 실렸다
장기적 영향
- 불교 학교와 출판이 늘어나며 근대 불교의 자기 이해가 형성되었다
- 서구 지식인들이 불교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 이 흐름이 1893년 시카고 세계종교회의로 이어진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불교 | 식민 상황에서 자기 전통을 공적으로 변호한 사건으로 기억한다. |
| 기독교 | 선교가 일방적으로 진행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사례다. |
| 역사학계 | 이 시기 형성된 ‘합리적 불교’ 이미지가 서구의 불교 이해에 오래 영향을 주었다. |
시카고 세계종교회의 (1893년)
만국박람회의 부대 행사로, 세계의 여러 종교 대표를 한자리에 모으는 시도가 이뤄졌다.
전개
아시아의 종교 지도자들이 서구 청중 앞에서 직접 자기 전통을 소개했다. 힌두교의 비베카난다와 불교의 다르마팔라 등이 큰 반향을 얻었다.
결과
- 아시아 종교가 서구 대중에게 직접 소개되었다
장기적 영향
- 종교 간 대화 운동의 출발점으로 꼽힌다
- 미국에서 불교와 힌두교가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 1993년 100주년 대회로 이어졌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기독교 | 주최 측은 기독교의 우위를 보여 주는 자리로 기대했으나 결과는 달랐다. |
| 불교 | 서구를 향해 스스로 말할 기회를 얻은 자리였다. |
| 역사학계 | ‘세계 종교’라는 근대적 범주 자체가 이 무렵 만들어졌다는 점이 함께 지적된다. |
제1차 시온주의자 대회 (1897년)
러시아의 학살(포그롬)과 서유럽의 드레퓌스 사건으로, 해방만으로는 안전을 얻을 수 없다는 인식이 퍼졌다.
원인
- 동유럽의 조직적 폭력
- 근대적 반유대주의의 대두
- 민족주의 시대의 흐름
전개
헤르츨의 주도로 여러 나라 대표가 모여 조직과 강령을 마련했다.
결과
-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을 팔레스타인에 세운다는 목표가 공식화되었다
장기적 영향
-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이어졌다
- 그 땅에 살던 주민들과의 갈등이라는 또 다른 역사가 시작되었다
- 유대교 내부에서도 종교적 정통파를 중심으로 반대가 있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유대교 | 찬반이 갈렸다. 종교적 이유로 반대한 흐름과 세속적 민족운동으로 지지한 흐름이 함께 있었다. |
| 이슬람교 | 팔레스타인 주민에게는 이후 실향으로 이어지는 출발점으로 기억된다. |
| 역사학계 | 시온주의는 하나의 사상이 아니라 여러 갈래(정치적·문화적·종교적·사회주의적)의 묶음이었다. |
13. 주요 인물
| 인물 | 생몰 | 활동 | 후대의 평가 |
|---|---|---|---|
| 윌리엄 캐리 | 1761년 ~ 1834년 | 인도에서 성경을 여러 언어로 옮겼다 / 학교와 인쇄소를 세웠다 / 사티(과부 순장) 폐지 운동에 참여했다 | ‘근대 선교의 아버지’로 불린다. 인도 언어 연구와 사회 개혁에 기여한 면과, 선교가 식민 체제 안에서 이뤄졌다는 점이 함께 논의된다. |
| 테오도르 헤르츨 | 1860년 ~ 1904년 | 《유대 국가》를 썼다 / 제1차 시온주의자 대회를 조직했다 | 이스라엘 건국의 사상적 아버지로 기려진다. 그의 구상이 그 땅에 살던 주민에 대해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함께 제기된다. |
| 무함마드 압두 | 1849년 ~ 1905년 | 알아즈하르의 교육 개혁을 추진했다 / 이집트의 대무프티를 지냈다 / 잡지를 통해 개혁 사상을 폈다 | 근대 이슬람 개혁 사상의 대표 인물로 꼽힌다. 그의 유산은 뒤에 서로 다른 방향(자유주의적 개혁과 근본으로의 회귀)으로 갈라져 계승되었다. |
|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 | 1864년 ~ 1933년 | 불교 부흥 운동을 이끌었다 / 보드가야 성지의 관리 회복 운동을 폈다 / 1893년 시카고 세계종교회의에서 연설했다 | 근대 불교 형성의 핵심 인물이다. 다만 그의 운동이 스리랑카에서 민족주의와 결합한 유산은 오늘날 비판적으로 검토된다. |
14. 주요 문헌과 사상
| 문헌 | 시기 | 언어 | 핵심 내용 |
|---|---|---|---|
| 유대 국가 | 1896년 | 독일어 | 반유대주의에 대한 해법으로 유대인의 국가 수립을 제안한다. |
| 새로운 사태 (Rerum Novarum) | 1891년 | 라틴어 | 산업화 시대의 노동 문제를 다루며 노동자의 권리, 정당한 임금, 결사의 자유와 사유재산을 함께 논한다. |
| 종의 기원 | 1859년 | 영어 | 자연선택에 의한 생물 진화를 논증한 저작. |
15. 지도와 이동 경로
19세기 — 나간 사람들과 응답한 사람들 (1801~1900년)
| 장소 | 성격 | 설명 |
|---|---|---|
| 세람포르(인도) | 도시 | 성경 번역과 인쇄의 거점. |
| 런던 | 도시 | 선교 단체의 본부들. |
| 괴팅겐·튀빙겐 | 수도원·학교 | 성서비평 연구의 중심. |
| 바티칸 | 회의 | 1869~1870년 공의회. |
| 바젤 | 회의 | 1897년 시온주의자 대회. |
| 카이로(알아즈하르) | 수도원·학교 | 이슬람 개혁 사상의 무대. |
| 파나두라 | 도시 | 1873년 공개 논쟁. |
| 교토 | 도시 | 폐불훼석과 근대적 재편. |
| 시카고 | 회의 | 1893년 세계종교회의. |
경계 확실성: 대체로 확실
| 경로 | 성격 | 설명 |
|---|---|---|
| 선교의 이동(개략) | 선교 | 수많은 흐름 가운데 대표적인 방향만 단순화해 그렸다. |
16. 사진과 유물로 보는 역사
17. 핵심 정리
- 19세기 선교는 기독교를 세계 종교로 만들었지만 식민주의와 분리해 말할 수 없다.
- 아시아 종교들의 근대적 자기 이해는 이 만남 속에서 형성되었다.
- 성서비평과 진화론은 신앙에 새로운 질문을 던졌고 다양한 응답을 낳았다.
- 근대적 반유대주의의 등장은 20세기 홀로코스트의 배경이 된다.
- 1893년 시카고 세계종교회의는 종교 간 대화의 출발점으로 꼽힌다.
18. 비교표
| 전통 | 무엇이 도전이었나 | 어떻게 응답했나 |
|---|---|---|
| 유대교 | 해방 이후의 정체성, 새 형태의 반유대주의 | 개혁·정통·보수의 분화, 시온주의 |
| 기독교 | 성서비평, 진화론, 식민주의와의 얽힘 | 선교 확장, 사회 교리, 신학의 여러 갈래 |
| 이슬람교 | 식민 지배와 근대 제도 | 개혁 사상(이성과 신앙의 조화)과 회귀 운동 |
| 불교 | 선교의 도전과 국가 정책 | 공개 논쟁, 교육과 출판, 근대적 자기 서술 |
네 전통 모두 ‘근대’라는 같은 도전 앞에서 각자의 답을 만들어야 했다.
19. 생각해 볼 질문
- 선교와 식민 지배가 겹칠 때 복음은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 한 종교가 다른 종교의 도전에 응답하며 스스로를 새로 설명하는 일은 어떤 변화를 낳을까?
- 성경을 역사 자료로 읽는 것과 신앙의 책으로 읽는 것은 함께 갈 수 있을까?
20. 확인 퀴즈
제1차 시온주의자 대회가 열린 해는?
- 1870년
- 1893년
- 1897년
- 1917년
1873년 스리랑카 파나두라 논쟁의 의의는?
- 불교가 기독교 선교에 공개적으로 반론하며 근대 불교 부흥의 계기가 되었다
- 불교가 금지되었다
- 기독교가 국교가 되었다
- 이슬람이 전래되었다
‘19세기 선교는 순수하게 종교적 활동이었다’는 서술의 문제는?
- 문제 없다
- 식민 지배와 얽힌 맥락을 지웠다
- 선교가 없었다
- 연도가 틀렸다
정답 1) 3 · 2) 1 · 3) 2
해설
1. 1897년 바젤에서 열렸다.
2. 이후 불교 근대화 운동으로 이어졌다.
3. 교육·의료의 기여와 식민 권력과의 얽힘을 함께 말해야 한다.
21. 주석과 참고문헌
- 선교 단체 기록
- 파나두라 논쟁 기록
- 근대 반유대주의 연구
제2장 20세기의 세계 종교
1901년~2000년
가장 참혹한 일이 일어난 뒤, 종교들이 서로를 다시 보기 시작한다.
읽는 글 — 검수 전 초안
제20장 20세기의 세계 종교
가장 참혹한 일이 일어난 뒤, 종교들이 서로를 다시 보기 시작합니다
1901년 ~ 2000년
여는 장면 — 직면
20세기 중반, 유럽 한복판에서 육백만 명의 유대인이 조직적으로 살해되었습니다.
기독교 세계는 그 일이 자기들이 오래 가르쳐 온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직면해야 했습니다.
그 직면에서 종교 간 대화라는 새로운 흐름이 나왔습니다.
같은 세기에 식민지가 독립하고, 이스라엘이 세워지고, 이란에서 종교 혁명이 일어났으며, 티베트 불교가 세계로 흩어졌습니다.
1. 뒤흔들린 세기
두 번의 세계대전, 냉전, 탈식민화가 세계를 뒤흔들었습니다. 후반에는 세계화와 대규모 이주가 진행되며 종교 지도가 다시 그려졌습니다.
- 1914~1918년, 1939~1945년 두 차례 세계대전.
- 1947년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
-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팔레스타인 난민 발생.
- 1962~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 1979년 이란 혁명.
- 20세기 후반 기독교 인구 중심이 남반구로 이동했습니다.
2. 1941~1945년 — 쇼아
수백 년에 걸친 종교적 반유대주의 위에 19세기 인종 이론이 결합하면서, 유대인을 인종적으로 규정하고 배제하는 정책이 가능해졌습니다.
차별 법령, 격리, 강제 이주를 거쳐 조직적 절멸 정책이 시행되었습니다. 절멸 수용소에서의 대량 학살이 그 정점이었습니다. 약 600만 명이 살해되었고 유럽 유대인 공동체가 파괴되었습니다.
우발적 학살이 아니라 국가가 조직한 절멸 정책이었습니다.
유대교는 쇼아(재앙)라 부르며, 기억과 증언이 공동체의 의무로 자리 잡았습니다. 기독교 쪽에서는 교회의 오랜 반유대적 가르침이 이 참극의 토양을 만들었다는 자기 성찰이 이어졌습니다.
가해의 구조, 방관자의 역할, 교회의 책임 범위가 계속 연구되고 있습니다. 개별 지도자들의 책임 범위, 저항과 침묵의 사례에 대한 평가도 계속 논의됩니다.
1934년 독일 고백교회는 바르멘 선언으로 교회가 국가 이념에 종속될 수 없음을 선언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치 저항에 참여했다가 처형되었습니다.
바르멘 선언은 국가 권력에 맞선 신앙 고백으로 널리 인용되지만, 유대인 박해 자체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았다는 한계도 지적됩니다.
'그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라는 물음이 유대·기독교 양쪽에서 신학의 중심 주제가 되었습니다.
3. 1948년 — 두 개의 이야기
19세기 말 시온주의 운동, 영국 위임통치, 홀로코스트 이후의 난민 문제가 겹쳤습니다.
1947년 유엔 분할안 이후 전쟁이 일어났고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포했습니다.
결과는 두 가지였습니다. 유대 국가가 수립되었고, 수십만 명의 팔레스타인 주민이 고향을 떠났습니다(나크바). 이후 아랍 국가들에 살던 유대인 다수도 이스라엘로 이주했습니다.
유대교 쪽에서는 이천 년 만의 국가 수립이자 홀로코스트 이후의 생존 문제로 이해됩니다. 팔레스타인 주민에게는 실향과 상실의 사건으로 기억됩니다. 지역의 기독교 공동체는 양쪽 모두와 얽혀 있으며, 서구 교회 안에서도 견해가 크게 갈립니다.
이 사건은 종교 갈등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민족주의·식민 유산·냉전이 함께 작용했습니다.
이 항목은 오늘날 살아 있는 정치 쟁점입니다. 어느 한쪽의 서술을 정답으로 제시하지 않고, 사실과 각 당사자의 관점을 구분해 적습니다.
같은 해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창립되어 교회 일치 운동이 제도화되었습니다.
4. 1962~1965년 — 문을 열다
근현대 세계와의 관계를 다시 정리해야 한다는 요구가 오래 쌓여 있었습니다.
요한 23세가 소집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네 차례 회기에 걸쳐 16개 문헌을 채택했습니다.
- 모국어 전례를 허용했습니다.
- 다른 기독교 전통과의 일치 운동에 참여를 표명했습니다.
- 종교 자유를 인정하는 선언을 채택했습니다.
- 〈우리 시대〉로 타 종교, 특히 유대교와의 관계를 새로 정리했습니다.
〈우리 시대〉는 유대인에게 집단적 책임을 지우는 서술을 부정하고, 이슬람·힌두교·불교에 대해서도 존중을 표명했습니다.
이 문서가 나오기까지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같은 유대 신학자들이 논의에 관여했습니다. 그는 민권 운동에도 참여했고, 20세기 유대교–기독교 대화의 대표적 인물로 평가됩니다.
가톨릭 내부에서도 개혁의 폭을 두고 평가가 갈립니다. 유대교 쪽에서는 관계의 전환점으로 평가하며, 사과의 진정성과 실천을 함께 봅니다. 정교회 쪽에서는 일치 운동에 대한 문호 개방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신학적 쟁점은 남았습니다.
1965년, 가톨릭과 정교회가 1054년의 상호 파문을 철회했습니다. 911년 만입니다. 통합은 아니지만 공식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1999년에는 가톨릭과 루터교 사이에 칭의론에 관한 공동선언이 나왔습니다. 16세기에 갈라진 그 쟁점에 대한 것입니다.
5. 1979년 — 종교가 국가의 원리가 되다
이란에서 급속한 근대화 정책, 정치적 억압, 외세 개입에 대한 반발이 쌓였습니다.
대규모 시위로 왕정이 무너지고 이슬람 공화국 체제가 수립되었습니다. 시아 이슬람 법학자가 국가 최고 권위를 갖는 체제입니다.
무슬림 사회 안에서도 이 체제에 대한 평가는 크게 갈립니다. 하나의 이슬람적 국가 모델로 일반화할 수 없습니다.
세속화가 필연이라는 근대화 이론을 흔든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탈식민 이후 무슬림 국가들이 어떤 체제를 세울 것인가를 두고 세속 민족주의와 이슬람적 국가 구상이 경쟁했습니다. 석유 경제와 이주로 무슬림 인구가 유럽·북미에 정착했습니다.
정치적 이슬람 운동과 그에 대한 내부 비판이 함께 존재합니다. 이슬람을 하나의 정치 성향으로 일반화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1947년 인도·파키스탄 분리 과정에서는 대규모 종교 간 폭력이 있었습니다.
6. 흩어지고 자라난 것
티베트 불교의 세계화. 1959년 14대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했습니다. 다람살라에 망명 공동체가 세워졌고, 티베트 불교가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선(禪)과 명상이 서구에 확산되었고, 참여불교라는 사회 참여 흐름도 나타났습니다. 동아시아에서는 공산 정권과 근대화 속에서 큰 변동을 겪었습니다.
오순절 운동. 1906년 로스앤젤레스 아주사 거리 부흥에서 시작된 이 흐름이 20세기 기독교의 가장 큰 성장 흐름이 되었습니다.
남반구로의 이동. 기독교 인구의 중심이 유럽·북미에서 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아시아로 옮겨 갔습니다. 이것이 20세기 기독교사의 가장 큰 사건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정교회의 시련과 부활. 소련과 동유럽 공산 정권 아래에서 큰 탄압을 받았고, 1990년대 이후 다시 살아났습니다.
| 무엇이 있었나 | 무엇이 달라졌나 | |
|---|---|---|
| 유대교 | 홀로코스트와 이스라엘 건국 | 생존과 기억이 정체성의 중심 주제가 됨 |
| 가톨릭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 모국어 전례, 종교 자유, 타 종교 존중 선언 |
| 정교회 | 공산 정권의 탄압과 이후 부활 | 민족 교회 중심의 재건 |
| 개신교 | 교회 일치 운동과 오순절 운동 | 남반구 중심의 급성장 |
| 이슬람 | 탈식민과 이란 혁명 | 종교와 국가의 관계를 둘러싼 다양한 실험 |
| 불교 | 티베트 망명과 서구 확산 | 명상 중심의 세계적 수용 |
이 장이 남긴 여섯 문장
- 홀로코스트는 20세기 종교사에서 반드시 정면으로 다뤄야 할 사건입니다.
- 그 직면에서 유대교–기독교 관계를 다시 세우려는 흐름이 나왔습니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교회가 다른 종교·다른 교회와 관계 맺는 방식을 바꿨습니다.
- 1965년 상호 파문 철회로 가톨릭과 정교회의 공식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 이스라엘 건국은 유대사의 전환점이자 팔레스타인 실향의 시작입니다. 두 측면을 함께 말합니다.
- 기독교의 무게중심이 남반구로 옮겨 갔고, 불교는 세계 종교가 되었습니다.
생각해 볼 질문
- 종교가 자기 역사의 잘못을 인정하는 일은 왜 그렇게 오래 걸릴까요?
- 한 사건이 어떤 이에게는 회복이고 다른 이에게는 상실일 때, 역사는 이를 어떻게 서술해야 할까요?
- 종교 간 대화는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할까요? 같아지는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채로 함께 사는 법일까요?
이 장에서 쓴 자료
문헌
- 〈우리 시대〉(Nostra Aetate) (1965년, 라틴어)
- 바르멘 선언 (1934년, 독일어)
자료 사진
-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비르케나우) 정문 (실제 유물)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당대 기록 사진)
참고
- 홀로코스트 연구와 증언 자료, 나치 문서와 재판 기록
- 유엔 결의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양측 사료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 20세기 세계 종교 인구 통계
「종교사 한눈」이 모아 둔 자료로 작성한 초안입니다. 출판 전 사실 확인과 관점 검토가 필요합니다.
1. 세기를 여는 한 장면
20세기 중반, 유럽 한복판에서 육백만 명의 유대인이 조직적으로 살해되었다. 기독교 세계는 그 일이 자기들이 오래 가르쳐 온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직면해야 했다. 그 직면에서 종교 간 대화라는 새로운 흐름이 나왔다. 같은 세기에 식민지가 독립하고, 이스라엘이 세워지고, 이란에서 종교 혁명이 일어났으며, 티베트 불교가 세계로 흩어졌다.
2. 20세기의 세계사 배경
두 번의 세계대전, 냉전, 탈식민화가 세계를 뒤흔들었다. 후반에는 세계화와 대규모 이주가 진행되며 종교 지도가 다시 그려졌다.
- 1914~1918년, 1939~1945년 두 차례 세계대전.
- 1947년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
-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팔레스타인 난민 발생.
- 1962~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 1979년 이란 혁명.
- 20세기 후반 기독교 인구 중심이 남반구로 이동했다.
3. 한눈에 보는 연대표
| 연도 | 일어난 일 | 관련 종교 |
|---|---|---|
| 1906년 | 로스앤젤레스 아주사 거리 부흥으로 오순절 운동이 시작된다. | 개신교 |
| 1934년 | 독일 고백교회가 바르멘 선언을 발표한다. | 개신교 |
| 1941~1945년 | 홀로코스트 — 나치 독일이 유대인 약 600만 명을 조직적으로 학살한다. | 유대 |
| 1947~1948년 | 인도·파키스탄 분리와 대규모 종교 간 폭력. | 이슬람 |
| 1948년 | 이스라엘 건국. 같은 해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창립된다. | 유대, 기독교 |
| 1959년 | 14대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한다. | 불교 |
| 1962~1965년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65년 〈우리 시대〉 선언이 나온다. | 가톨릭 |
| 1965년 | 가톨릭과 정교회가 1054년의 상호 파문을 철회한다. | 가톨릭, 정교회 |
| 1979년 | 이란 혁명으로 이슬람 공화국이 세워진다. | 이슬람 |
| 1993년 | 시카고에서 세계종교의회 100주년 대회가 열린다. |
4. 유대교
절멸의 시도와 국가의 수립
홀로코스트는 유럽 유대인 공동체의 삶을 거의 파괴했다. 생존자와 이주자들이 세운 이스라엘은 유대 역사에서 이천 년 만의 국가였고, 동시에 팔레스타인 주민의 실향이라는 또 다른 역사를 낳았다. 신앙의 자리에서는 ‘그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라는 물음이 신학의 중심 주제가 되었다.
- 홀로코스트는 우발적 학살이 아니라 국가가 조직한 절멸 정책이었다.
- 이스라엘 건국은 유대사의 전환점이자 중동 분쟁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두 측면을 함께 말해야 한다.
- 홀로코스트 이후 신학이 유대·기독교 양쪽에서 형성되었다.
5. 기독교
자기 역사를 직면하다
교회는 홀로코스트 앞에서 오랜 반유대적 가르침의 책임을 물어야 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우리 시대〉 선언은 유대인에 대한 집단적 책임 전가를 명시적으로 부정하고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존중을 표명했다. 같은 세기에 교회 일치 운동과 남반구 기독교의 성장이 있었다.
- 1948년 WCC 창립으로 교회 일치 운동이 제도화되었다.
- 기독교 인구의 중심이 유럽·북미에서 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아시아로 옮겨 갔다.
- 오순절·은사주의 운동이 20세기 기독교의 가장 큰 성장 흐름이 되었다.
6. 가톨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모국어 전례, 다른 기독교 전통과의 관계, 타 종교에 대한 태도, 종교 자유에 관한 문서를 채택하며 가톨릭교회가 근현대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을 바꿨다.
7. 동방정교회
소련과 동유럽 공산 정권 아래에서 큰 탄압을 받았고, 1990년대 이후 다시 살아났다. 1965년 로마와의 상호 파문 철회는 관계 회복의 상징이다.
8. 개신교
교회 일치 운동, 사회 참여 신학, 오순절 운동, 복음주의 선교 등 여러 갈래가 함께 성장했다.
9. 이슬람교
탈식민 이후의 길 찾기
독립한 무슬림 국가들이 어떤 체제를 세울 것인가를 두고 세속 민족주의와 이슬람적 국가 구상이 경쟁했다. 1979년 이란 혁명은 종교가 근대 국가의 원리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준 사건으로 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 석유 경제와 이주로 무슬림 인구가 유럽·북미에 정착했다.
- 정치적 이슬람 운동과 그에 대한 내부 비판이 함께 존재한다.
- 이슬람을 하나의 정치 성향으로 일반화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10. 불교
세계로 흩어진 불교
티베트 불교가 망명을 통해 세계에 알려졌고, 선(禪)과 명상이 서구에 확산되었다. 동아시아에서는 공산 정권과 근대화 속에서 큰 변동을 겪었다. 참여불교라는 사회 참여 흐름도 나타났다.
11. 종교 간 관계
유대교 ↔ 기독교 — 화해와 종교 간 대화
홀로코스트 이후 기독교 여러 교단이 반유대적 가르침을 공식적으로 철회하고 관계를 다시 세우려 했다. 1965년 〈우리 시대〉가 대표적이다. 이 대화는 여전히 진행 중이며 완결된 것이 아니다.
유대교의 자리에서: 유대교 쪽에서는 사과의 진정성과 실천을 함께 본다.
기독교의 자리에서: 기독교 쪽에서는 자기 전통 안의 반유대적 요소를 계속 점검하는 과제로 받아들인다.
가톨릭 ↔ 동방정교회 — 화해와 종교 간 대화
1965년 상호 파문 철회로 900년 만에 공식 관계가 회복되었다. 다만 신학적·관할권 문제는 남아 있다.
가톨릭 ↔ 개신교 — 화해와 종교 간 대화
교회 일치 운동과 신학 대화가 진행되었고, 1999년 칭의론에 관한 공동선언이 나왔다.
기독교 ↔ 이슬람교 — 전쟁과 충돌
탈식민 과정과 중동 분쟁 속에서 두 종교의 관계가 정치와 깊이 얽혔다. 종교 갈등으로만 설명하면 원인을 놓친다.
불교 ↔ 기독교 — 문화·학문·예술 교류
명상과 영성 분야에서 두 전통의 교류가 활발해졌고, 수도자들 사이의 대화가 제도화되었다.
12. 이 세기의 결정적 사건
홀로코스트 (1941년~1945년)
종교적 반유대주의의 오랜 전통 위에 19세기 인종 이론이 결합하면서, 유대인을 인종적으로 규정하고 배제하는 정책이 가능해졌다.
원인
- 수백 년에 걸친 종교적 반유대주의
- 19세기 인종주의 이론
- 전쟁 상황과 전체주의 국가 기구
전개
차별 법령, 격리, 강제 이주를 거쳐 조직적 절멸 정책이 시행되었다. 절멸 수용소에서의 대량 학살이 그 정점이었다.
결과
- 약 600만 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고 유럽 유대인 공동체가 파괴되었다
장기적 영향
- 생존자의 이주와 이스라엘 건국 논의가 가속되었다
- 기독교 여러 교단이 반유대적 가르침을 공식 철회하는 계기가 되었다
- ‘그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라는 물음이 신학의 중심 주제가 되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유대교 | 쇼아(재앙)라 부르며, 기억과 증언이 공동체의 의무로 자리 잡았다. |
| 기독교 | 교회의 오랜 반유대적 가르침이 이 참극의 토양을 만들었다는 자기 성찰이 이어졌다. |
| 역사학계 | 가해의 구조, 방관자의 역할, 교회의 책임 범위가 계속 연구되고 있다. |
학계의 평가
교회와 개별 지도자들의 책임 범위, 저항과 침묵의 사례에 대한 평가가 계속 논의되고 있다.
이스라엘 건국과 팔레스타인 실향 (1948년)
19세기 말 시온주의 운동, 영국 위임통치, 홀로코스트 이후의 난민 문제가 겹쳤다.
전개
1947년 유엔 분할안 이후 전쟁이 일어났고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포했다.
결과
- 유대 국가가 수립되었다
- 수십만 명의 팔레스타인 주민이 고향을 떠났다(나크바)
- 아랍 국가들에 살던 유대인 다수도 이후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장기적 영향
-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중동 분쟁의 구조가 만들어졌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유대교 | 이천 년 만의 국가 수립이자 홀로코스트 이후의 생존 문제로 이해된다. |
| 이슬람교 | 팔레스타인 주민에게는 실향과 상실의 사건으로 기억된다. |
| 기독교 | 지역의 기독교 공동체는 양쪽 모두와 얽혀 있으며, 서구 교회 안에서도 견해가 크게 갈린다. |
| 역사학계 | 이 사건은 종교 갈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민족주의·식민 유산·냉전이 함께 작용했다. |
학계의 평가
이 항목은 오늘날 살아 있는 정치 쟁점이다. 이 앱은 어느 한쪽의 서술을 정답으로 제시하지 않고, 사실과 각 당사자의 관점을 구분해 적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62년~1965년)
근현대 세계와의 관계를 다시 정리해야 한다는 요구가 오래 쌓여 있었다.
전개
네 차례 회기에 걸쳐 16개 문헌을 채택했다.
결과
- 모국어 전례를 허용했다
- 다른 기독교 전통과의 일치 운동에 참여를 표명했다
- 종교 자유를 인정하는 선언을 채택했다
- 〈우리 시대〉로 타 종교, 특히 유대교와의 관계를 새로 정리했다
장기적 영향
- 가톨릭교회가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가톨릭 | 교회 내부에서도 개혁의 폭을 두고 평가가 갈린다. |
| 유대교 | 〈우리 시대〉는 유대교–기독교 관계의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
| 동방정교회 | 일치 운동에 대한 문호 개방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신학적 쟁점은 남았다. |
이란 혁명 (1979년)
급속한 근대화 정책, 정치적 억압, 외세 개입에 대한 반발이 쌓였다.
전개
대규모 시위로 왕정이 무너지고 이슬람 공화국 체제가 수립되었다.
결과
- 시아 이슬람 법학자가 국가 최고 권위를 갖는 체제가 만들어졌다
장기적 영향
- 종교가 근대 국가의 조직 원리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어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 중동의 종파 간 정치 대립이 격화되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이슬람교 | 무슬림 사회 안에서도 이 체제에 대한 평가는 크게 갈린다. 하나의 이슬람적 국가 모델로 일반화할 수 없다. |
| 역사학계 | 세속화가 필연이라는 근대화 이론을 흔든 사건으로 평가된다. |
13. 주요 인물
| 인물 | 생몰 | 활동 | 후대의 평가 |
|---|---|---|---|
| 요한 23세 | 1881년 ~ 1963년 |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했다 / 평화에 관한 회칙을 발표했다 | 가톨릭교회의 방향을 바꾼 공의회를 연 교황으로 기억된다. |
|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 1907년 ~ 1972년 | 유대 신학 저술 /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유대교 관련 논의에 관여했다 / 민권 운동에 참여했다 | 20세기 유대교–기독교 대화의 대표적 인물로 평가된다. |
| 제14대 달라이 라마 | 1935년 | 1959년 이후 인도에서 망명 공동체를 이끌었다 / 종교 간 대화와 비폭력을 주창했다 | 티베트 불교가 세계에 알려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정치적 평가는 국가에 따라 갈린다. |
| 디트리히 본회퍼 | 1906년 ~ 1945년 | 고백교회 활동 / 나치 저항에 참여했다가 처형되었다 / 옥중 서신을 남겼다 | 국가 권력에 맞선 신앙의 사례로 널리 인용된다. 그의 저항 참여를 둘러싼 신학적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
14. 주요 문헌과 사상
| 문헌 | 시기 | 언어 | 핵심 내용 |
|---|---|---|---|
| 우리 시대 (Nostra Aetate) | 1965년 | 라틴어 | 비그리스도교 종교와의 관계를 다룬 선언. 유대인에게 집단적 책임을 지우는 서술을 부정하고, 이슬람·힌두교·불교에 대해 존중을 표명했다. |
| 바르멘 선언 | 1934년 | 독일어 | 교회가 국가 이념에 종속될 수 없음을 선언했다. |
15. 지도와 이동 경로
20세기의 종교와 이동 (1900~2000년)
인구 이동은 지속적 흐름이다. 점과 선은 대표적 사례를 표시한 것이다.
| 장소 | 성격 | 설명 |
|---|---|---|
| 아우슈비츠 | 유적 | 홀로코스트의 대표적 절멸 수용소. |
| 예루살렘 | 성지 | 세 종교의 성지이자 분쟁의 중심. |
| 바티칸 | 회의 | 1962~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
| 다람살라 | 도시 | 1959년 이후 티베트 망명 정부. |
| 테헤란 | 도시 | 1979년 이란 혁명. |
| 아주사 거리(로스앤젤레스) | 도시 | 1906년 오순절 운동의 시작. |
| 라고스 | 도시 | 남반구 기독교 성장의 상징적 도시. |
경계 확실성: 대체로 확실
| 경로 | 성격 | 설명 |
|---|---|---|
| 티베트 불교의 망명(1959년) | 이주 | |
| 기독교 인구 중심의 이동(20세기) | 이주 | 인구 통계상의 무게중심 변화를 개략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
16. 사진과 유물로 보는 역사
17. 핵심 정리
- 홀로코스트는 20세기 종교사에서 반드시 정면으로 다뤄야 할 사건이다.
- 그 직면에서 유대교–기독교 관계를 다시 세우려는 흐름이 나왔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교회가 다른 종교·다른 교회와 관계 맺는 방식을 바꿨다.
- 1965년 상호 파문 철회로 가톨릭과 정교회의 공식 관계가 회복되었다.
- 이스라엘 건국은 유대사의 전환점이자 팔레스타인 실향의 시작이다. 두 측면을 함께 말한다.
- 기독교의 무게중심이 남반구로 옮겨 갔고, 불교는 세계 종교가 되었다.
18. 비교표
| 무엇이 있었나 | 무엇이 달라졌나 | |
|---|---|---|
| 유대교 | 홀로코스트와 이스라엘 건국 | 생존과 기억이 정체성의 중심 주제가 됨 |
| 가톨릭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 모국어 전례, 종교 자유, 타 종교 존중 선언 |
| 정교회 | 공산 정권의 탄압과 이후 부활 | 민족 교회 중심의 재건 |
| 개신교 | 교회 일치 운동과 오순절 운동 | 남반구 중심의 급성장 |
| 이슬람 | 탈식민과 이란 혁명 | 종교와 국가의 관계를 둘러싼 다양한 실험 |
| 불교 | 티베트 망명과 서구 확산 | 명상 중심의 세계적 수용 |
19. 생각해 볼 질문
- 종교가 자기 역사의 잘못을 인정하는 일은 왜 그렇게 오래 걸릴까?
- 한 사건이 어떤 이에게는 회복이고 다른 이에게는 상실일 때, 역사는 이를 어떻게 서술해야 할까?
- 종교 간 대화는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할까? 같아지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채로 함께 사는 법일까?
20. 확인 퀴즈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린 기간은?
- 1545~1563년
- 1869~1870년
- 1948~1950년
- 1962~1965년
1965년 〈우리 시대〉 선언의 내용으로 옳은 것은?
- 유대인에게 집단적 책임을 지우는 서술을 부정하고 다른 종교에 대한 존중을 표명했다
- 개신교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 십자군을 정당화했다
- 종교 간 대화를 금지했다
1965년 가톨릭과 정교회 사이에 있었던 일은?
- 상호 파문 철회
- 완전한 통합
- 새로운 분열
- 공동 공의회 개최
‘중동 분쟁은 종교 갈등이다’라는 서술의 문제는?
- 문제 없다
- 영토·난민·국가 형성 등 정치적 원인을 종교 하나로 단순화했다
- 분쟁이 없었다
- 종교가 무관하다
정답 1) 4 · 2) 1 · 3) 1 · 4) 2
해설
1. 1962~1965년이다. 1545~1563년은 트리엔트 공의회다.
2. 유대교–기독교 관계의 전환점으로 꼽힌다.
3. 1054년의 상호 파문을 거두었지만 통합은 아니다.
4. 이 앱의 서술 원칙(§13.3)에 따라 단일 원인 설명을 피한다.
21. 주석과 참고문헌
- 〈우리 시대〉(Nostra Aetate) 본문
- 바르멘 선언 본문
- 홀로코스트 연구와 증언 자료
- 20세기 세계 종교 인구 통계
제3장 21세기의 세계 종교
2001년~2100년
이주와 다문화 속에서 종교가 다시 공적 문제가 되고, 대화와 갈등이 함께 커진다.
읽는 글 — 검수 전 초안
제21장 21세기의 세계 종교
이주와 다문화 속에서 종교가 다시 공적 문제가 되고, 대화와 갈등이 함께 커집니다
2001년 ~ 현재
여는 장면 — 이웃이 다른 신을 예배할 때
21세기의 종교는 국경 안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웃이 다른 신을 예배하는 일이 세계 대부분의 도시에서 일상이 되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진 폭력이 세계를 흔들었고, 그 반대편에서는 종교 지도자들이 함께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지금 이 세기의 역사는 아직 쓰이는 중입니다. 이 장은 결론이 아니라 중간 보고입니다.
1. 아직 진행 중인 세계
세계화, 대규모 이주, 디지털 기술이 사회를 바꾸고 있습니다. 종교는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정체성 정치의 중심에 다시 놓였습니다.
- 2001년 9·11 이후 종교와 안보 담론이 결합했습니다.
- 난민과 이주로 유럽·북미의 종교 구성이 바뀌었습니다.
- 온라인 예배와 디지털 종교 활동이 확산되었습니다.
- 여러 사회에서 무종교 인구가 늘고 있습니다.
2. 2001년 — 두 방향으로 커진 것
민간 항공기를 이용한 공격으로 약 3천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뒤 전 세계에서 안보 정책과 이슬람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무슬림 지도자와 단체들이 폭넓게 규탄했습니다. 그러나 소수 극단 세력의 행동으로 16억 신자 전체가 의심받는 일이 뒤따랐습니다. 교회와 종교 지도자들은 함께 애도하고 보복적 적대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문명의 충돌' 틀로 설명하는 시도가 많았으나, 정치·경제·역사적 요인을 지운다는 비판이 큽니다. 종교가 이 폭력의 원인인지, 정치가 종교의 언어를 쓴 것인지가 계속 논쟁됩니다.
이 사건 이후 두 가지가 동시에 커졌습니다. 무슬림에 대한 편견과 혐오 범죄가 늘었고, 종교 간 대화와 상호 이해의 노력도 크게 늘었습니다.
3. 2007년 — 먼저 내민 손
9·11 이후 높아진 긴장 속에서 138명의 무슬림 학자와 지도자가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공개 서한을 보냈습니다.
쿠란과 성경을 함께 인용하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두 종교의 공통 기반으로 제안했습니다.
무슬림 측이 먼저 제안한 대규모 대화라는 점에서 이례적입니다. 여러 교단과 신학교가 공식 응답을 보냈고 정기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정상급 대화가 지역 사회의 관계 개선으로 얼마나 이어지는가가 과제로 지적됩니다.
4. 2019년 — 함께 서명하다
가톨릭과 수니 이슬람의 대표적 기관 사이에 대화가 여러 해 이어져 왔습니다.
아부다비에서 교황과 알아즈하르의 대이맘이 함께 〈인간 형제애〉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폭력을 함께 규탄하고 공존을 선언했습니다. 신앙의 자유와 공동의 시민권, 여성과 아동의 권리를 함께 말했습니다.
가톨릭과 수니 이슬람 최고 지도자가 함께 서명한 첫 공동 문서입니다. 유엔이 이를 기려 국제 인간 형제애의 날을 정했습니다.
알아즈하르가 수니 세계를 대표해 참여했으나, 무슬림 전체를 대표하는 기구는 없다는 점도 함께 봐야 합니다. 실제 지역 사회의 변화로 얼마나 이어질지는 과제로 남았습니다.
5. 2016년 — 천 년 만의 회의
정교회 전체가 모이는 공의회를 열자는 논의가 20세기 초부터 이어져 왔습니다.
오랜 준비 끝에 크레타에서 열렸으나 러시아 등 네 개 교회가 불참했습니다. 여러 문헌이 채택되었으나 전체 교회의 참여는 이루지 못했습니다.
천 년 만의 범정교회 회의라는 의의와, 불참으로 남은 한계가 함께 평가됩니다.
교회 문제와 국가 간 정치가 얽혀 있다는 점이 지적됩니다. 이후 우크라이나 교회 문제로 갈등이 더 커졌습니다.
6. 2020년 — 모여야 예배인가
전 세계적 감염병 유행으로 모임 자체가 제한되었습니다.
예배·기도회·순례가 중단되거나 온라인으로 옮겨 갔습니다. 메카 순례와 부활절·유월절 모임도 크게 축소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성찬과 모임의 의미를 두고 교단마다 다른 답을 냈습니다. 이슬람에서 금요 예배와 순례의 중단은 유례가 드문 일이었습니다. 유대교 정통파는 안식일에 기기를 쓰는 문제로 다른 방식을 택했습니다.
'모여야 예배인가'라는 오랜 물음이 실제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온라인 참여로 접근성이 넓어진 면과 공동체의 결속이 약해진 면이 함께 나타났습니다. 종교 시설의 재정과 참여 구조가 바뀌었습니다.
이 변화가 일시적인지 구조적인지는 아직 결론을 내리기 이릅니다.
7. 오늘의 지형
유대교는 이스라엘과 디아스포라 두 축으로 존재하며, 홀로코스트 기억의 계승과 반유대주의의 재부상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인구 중심은 아프리카·아시아·라틴아메리카입니다. 서구에서는 교인 수가 줄고, 성직자의 학대 문제와 사회 쟁점을 둘러싼 내부 논쟁이 이어집니다. 가톨릭은 2013년 이후 사회·환경 문제와 종교 간 대화에 힘을 실었고, 남반구 신자가 다수인 교회로 무게중심이 옮겨 갔습니다. 오순절·복음주의 계열이 남반구에서 크게 성장했습니다.
정교회는 2016년 대공의회가 열렸으나 일부 교회가 불참했고, 우크라이나 문제로 교회 간 갈등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슬람교는 세계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며 가장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소수 극단 세력의 폭력과 그에 대한 무슬림 사회 내부의 비판이 함께 존재합니다.
불교는 명상과 마음챙김이 종교 밖으로도 퍼졌습니다. 동시에 일부 지역에서 불교가 민족주의와 결합해 갈등에 연루되는 문제도 나타났습니다.
미얀마 로힝야 위기 등 종교 정체성이 민족 갈등과 겹친 사례가 있습니다. 어느 종교든 다수 종교가 되면 같은 위험을 안는다는 점을 함께 봐야 합니다. 이 책이 다룬 스무 세기가 그것을 반복해 보여 주었습니다.
8. 함께 커진 두 흐름
| 갈등의 흐름 | 대화의 흐름 | |
|---|---|---|
| 사건 | 9·11과 그 여파, 종교 정체성이 얽힌 지역 갈등 | 〈공통된 말〉(2007), 〈인간 형제애〉(2019) |
| 누가 움직였나 | 소수 극단 세력과 그에 대한 반작용 | 종교 지도자와 학자, 지역의 신자들 |
| 무엇이 커졌나 | 혐오와 상호 의심 | 공동 문서와 정기 협의체 |
| 남은 과제 | 부분을 전체로 일반화하지 않기 | 정상급 합의를 마을 단위로 잇기 |
한쪽만 보면 이 세기를 반만 아는 것입니다. 두 흐름은 같은 시기에 함께 자랐습니다.
이 책을 닫으며
스무 세기를 지나왔습니다.
기원전 고대 근동의 신전에서 시작해 오늘의 도시까지, 네 전통이 어떻게 생겨나고 만나고 부딪히고 화해했는지를 따라왔습니다.
되풀이해 보인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종교는 홀로 자라지 않습니다. 제국의 도로와 언어, 인쇄술, 교역로, 이주가 언제나 함께 있었습니다.
둘째, 다수가 되면 위험해집니다. 4세기의 기독교, 중세의 가톨릭, 근대의 여러 국가 종교, 오늘의 일부 지역 — 어느 전통이든 힘을 가지면 소수자에게 같은 일을 했습니다.
셋째, 화해는 오래 걸립니다. 1054년의 파문은 1965년에 철회되었고, 1204년의 약탈은 2001년에 사과되었으며, 1415년의 처형은 1999년에 유감을 받았고, 1492년의 추방령은 1968년에 철회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결국 일어났습니다.
넷째, 이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도 훗날 한 장이 될 것입니다.
생각해 볼 질문
- 이웃이 다른 신을 예배할 때,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지켜야 할까요?
- 소수 극단 세력의 행동으로 한 종교 전체를 판단하는 일은 왜 위험할까요?
-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훗날 어떤 세기로 기록될까요?
이 장에서 쓴 자료
문헌
- 〈우리와 당신 사이의 공통된 말〉 (2007년, 아랍어·영어)
- 〈인간 형제애 문서〉 (2019년, 아랍어·영어·이탈리아어)
자료 사진
- 오늘의 하기아 소피아 (실제 유물) · 셰이크 자이드 그랜드 모스크 (실제 유물)
참고
- 9·11 위원회 보고서, 현대 종교와 폭력 연구
- 크레타 공의회 문헌
- 세계 종교 인구 통계(퓨 리서치 등)
「종교사 한눈」이 모아 둔 자료로 작성한 초안입니다. 이 세기의 역사는 아직 진행 중이므로, 평가를 앞당겨 확정하지 않았습니다. 출판 전 사실 확인과 관점 검토가 필요합니다.
1. 세기를 여는 한 장면
21세기의 종교는 국경 안에 머물지 않는다. 이웃이 다른 신을 예배하는 일이 세계 대부분의 도시에서 일상이 되었다. 같은 시기에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진 폭력이 세계를 흔들었고, 그 반대편에서는 종교 지도자들이 함께 문서에 서명했다. 지금 이 세기의 역사는 아직 쓰이는 중이다.
2. 21세기의 세계사 배경
세계화, 대규모 이주, 디지털 기술이 사회를 바꾸고 있다. 종교는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정체성 정치의 중심에 다시 놓였다.
- 2001년 9·11 이후 종교와 안보 담론이 결합했다.
- 난민과 이주로 유럽·북미의 종교 구성이 바뀌었다.
- 온라인 예배와 디지털 종교 활동이 확산되었다.
- 여러 사회에서 무종교 인구가 늘고 있다.
3. 한눈에 보는 연대표
| 연도 | 일어난 일 | 관련 종교 |
|---|---|---|
| 2001년 | 9·11 이후 이슬람에 대한 편견과 그에 맞선 대화 노력이 동시에 커진다. | 이슬람, 기독교 |
| 2007년 | 무슬림 학자들이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우리와 당신 사이의 공통된 말〉을 보낸다. | 이슬람, 기독교 |
| 2016년 | 정교회 대공의회가 크레타에서 열린다(일부 교회 불참). | 정교회 |
| 2019년 | 아부다비에서 〈인간 형제애〉 문서에 가톨릭과 이슬람 지도자가 함께 서명한다. | 가톨릭, 이슬람 |
| 2010년대 | 미얀마 로힝야 위기 등 종교 정체성이 얽힌 폭력이 아시아에서 일어난다. | 불교, 이슬람 |
| 2020년 | 감염병 유행으로 온라인 예배와 종교 활동이 급속히 확산된다. |
4. 유대교
이스라엘과 디아스포라 두 축으로 존재하며, 홀로코스트 기억의 계승과 반유대주의의 재부상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5. 기독교
인구의 중심은 아프리카·아시아·라틴아메리카다. 서구에서는 교인 수가 줄고, 성직자의 학대 문제와 사회 쟁점을 둘러싼 내부 논쟁이 이어진다.
6. 가톨릭
2013년 이후 사회·환경 문제와 종교 간 대화에 힘을 실었다. 남반구 신자가 다수인 교회로 무게중심이 옮겨 갔다.
7. 동방정교회
2016년 대공의회가 열렸으나 일부 교회가 불참했고, 우크라이나 문제로 교회 간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8. 개신교
오순절·복음주의 계열이 남반구에서 크게 성장했고, 서구에서는 세속화와 함께 재편이 진행 중이다.
9. 이슬람교
세계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며 가장 빠르게 늘고 있다. 소수 극단 세력의 폭력과 그에 대한 무슬림 사회 내부의 비판이 함께 존재한다.
10. 불교
명상과 마음챙김이 종교 밖으로도 퍼졌다. 동시에 일부 지역에서 불교가 민족주의와 결합해 갈등에 연루되는 문제도 나타났다.
11. 종교 간 관계
기독교 ↔ 이슬람교 — 화해와 종교 간 대화
〈공통된 말〉(2007)과 〈인간 형제애〉(2019) 같은 공동 문서가 나왔다. 대화는 진행 중이며 성과와 한계를 함께 봐야 한다.
불교 ↔ 이슬람교 — 전쟁과 충돌
남아시아·동남아시아에서 종교 정체성이 민족 갈등과 겹치며 폭력으로 이어진 사례가 있다. 어느 종교든 다수 종교가 되면 같은 위험을 안는다는 점을 함께 봐야 한다.
유대교 ↔ 기독교 — 화해와 종교 간 대화
20세기의 화해 노력이 제도로 자리 잡았지만, 반유대주의의 재부상은 이 대화가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12. 이 세기의 결정적 사건
9·11 이후 종교와 안보 담론의 결합 (2001년)
20세기 후반의 정치적 갈등과 극단주의 조직의 활동이 배경에 있었다.
전개
민간 항공기를 이용한 공격으로 약 3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결과
- 전 세계에서 안보 정책과 이슬람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었다
장기적 영향
- 무슬림에 대한 편견과 혐오 범죄가 늘었다
- 동시에 종교 간 대화와 상호 이해의 노력도 크게 늘었다
- 종교가 다시 공적 논의의 중심 주제가 되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이슬람교 | 무슬림 지도자와 단체들이 폭넓게 규탄했다. 소수 극단 세력의 행동으로 16억 신자 전체가 의심받는 일이 뒤따랐다. |
| 기독교 | 교회와 종교 지도자들이 함께 애도하고 보복적 적대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
| 역사학계 | ‘문명의 충돌’ 틀로 설명하는 시도가 많았으나, 정치·경제·역사적 요인을 지운다는 비판이 크다. |
학계의 평가
종교가 이 폭력의 원인인지, 정치가 종교의 언어를 쓴 것인지가 계속 논쟁된다.
〈우리와 당신 사이의 공통된 말〉 서한 (2007년)
9·11 이후 높아진 긴장 속에서 대화의 틀을 만들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전개
138명의 무슬림 학자와 지도자가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공통 기반을 제안했다.
결과
- 여러 교단과 신학교가 공식 응답을 보냈고 정기 대화가 시작되었다
장기적 영향
- 무슬림 측이 먼저 제안한 대규모 대화라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 대학과 교단 차원의 지속적 협의체로 이어졌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이슬람교 | 공통 기반을 신학적으로 제시한 문서로 평가된다. |
| 기독교 | 응답 가운데는 환영과 함께 신중한 검토도 있었다. |
| 역사학계 | 정상급 대화가 지역 사회의 관계 개선으로 얼마나 이어지는가가 과제로 지적된다. |
정교회 대공의회(크레타) (2016년)
정교회 전체가 모이는 공의회를 열자는 논의가 20세기 초부터 이어져 왔다.
전개
오랜 준비 끝에 열렸으나 러시아 등 네 개 교회가 불참했다.
결과
- 여러 문헌이 채택되었으나 전체 교회의 참여는 이루지 못했다
장기적 영향
- 정교회 안의 협의 구조와 주도권 문제가 드러났다
- 이후 우크라이나 교회 문제로 갈등이 더 커졌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동방정교회 | 천 년 만의 범정교회 회의라는 의의와, 불참으로 남은 한계가 함께 평가된다. |
| 역사학계 | 교회 문제와 국가 간 정치가 얽혀 있다는 점이 지적된다. |
〈인간 형제애〉 문서 서명 (2019년)
가톨릭과 수니 이슬람의 대표적 기관 사이에 대화가 여러 해 이어져 왔다.
전개
교황과 알아즈하르의 대이맘이 함께 문서에 서명했다.
결과
- 종교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폭력을 함께 규탄하고 공존을 선언했다
장기적 영향
- 가톨릭과 수니 이슬람 최고 지도자가 함께 서명한 첫 공동 문서다
- 유엔이 이를 기려 국제 인간 형제애의 날을 정했다
- 실제 지역 사회의 변화로 얼마나 이어질지는 과제로 남았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가톨릭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이어진 대화의 결실로 본다. |
| 이슬람교 | 알아즈하르가 수니 세계를 대표해 참여했으나, 무슬림 전체를 대표하는 기구는 없다는 점도 함께 봐야 한다. |
감염병 유행과 온라인 예배의 확산 (2020년~2022년)
전 세계적 감염병 유행으로 모임 자체가 제한되었다.
전개
예배·기도회·순례가 중단되거나 온라인으로 옮겨 갔다. 메카 순례와 부활절·유월절 모임도 크게 축소되었다.
결과
- 종교 활동의 상당 부분이 온라인으로 이동했다
장기적 영향
- ‘모여야 예배인가’라는 오랜 물음이 실제 문제로 떠올랐다
- 온라인 참여로 접근성이 넓어진 면과 공동체의 결속이 약해진 면이 함께 나타났다
- 종교 시설의 재정과 참여 구조가 바뀌었다
| 자리 |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는가 |
|---|---|
| 기독교 | 성찬과 모임의 의미를 두고 교단마다 다른 답을 냈다. |
| 이슬람교 | 금요 예배와 순례의 중단은 유례가 드문 일이었다. |
| 유대교 | 안식일에 기기를 쓰는 문제로 정통파는 다른 방식을 택했다. |
| 역사학계 | 이 변화가 일시적인지 구조적인지는 아직 결론을 내리기 이르다. |
학계의 평가
이 시기의 변화가 종교 생활에 남긴 영향은 지금도 연구되고 있다.
13. 주요 인물
| 인물 | 생몰 | 활동 | 후대의 평가 |
|---|---|---|---|
| 프란치스코 교황 | 1936년 ~ 2025년 | 라틴아메리카 출신의 첫 교황이었다 / 환경과 가난에 관한 회칙을 냈다 / 2019년 〈인간 형제애〉 문서에 서명했다 | 종교 간 대화와 사회 문제에 무게를 실었다는 평가와, 교리 문제에서의 방향을 두고 교회 안에서 엇갈린 반응이 함께 있었다. |
|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 1세 | 1940년 |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일하고 있다 / 크레타 공의회를 주도했다 / 환경 문제에 목소리를 내 왔다 | ‘녹색 총대주교’로 불릴 만큼 환경 문제에 앞장서 왔다. 우크라이나 교회 문제를 둘러싸고 러시아 교회와 갈등하고 있다. |
14. 주요 문헌과 사상
| 문헌 | 시기 | 언어 | 핵심 내용 |
|---|---|---|---|
| 우리와 당신 사이의 공통된 말 | 2007년 | 아랍어·영어 | 쿠란과 성경을 함께 인용하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두 종교의 공통 기반으로 제시한다. |
| 인간 형제애 문서 | 2019년 | 아랍어·영어·이탈리아어 | 종교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폭력을 규탄하고, 신앙의 자유와 공동의 시민권, 여성과 아동의 권리를 함께 말한다. |
15. 지도와 이동 경로
21세기 — 대화의 자리와 갈등의 자리 (2001년~현재)
이 세기의 역사는 아직 쓰이는 중이다. 평가를 앞당겨 확정하지 않는다.
| 장소 | 성격 | 설명 |
|---|---|---|
| 뉴욕 | 도시 | 2001년 9·11. |
| 암만 | 회의 | 2007년 〈공통된 말〉. |
| 아부다비 | 회의 | 2019년 〈인간 형제애〉 서명. |
| 크레타 | 회의 | 2016년 대공의회. |
| 바티칸 | 도시 | |
| 라카인(미얀마) | 도시 | 로힝야 위기 — 종교 정체성과 민족 갈등이 겹친 사례. |
| 라고스 | 도시 | 남반구 기독교 성장의 상징. |
| 자카르타 | 도시 | 세계에서 무슬림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의 수도. |
경계 확실성: 대체로 확실
16. 사진과 유물로 보는 역사
17. 핵심 정리
- 종교는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정체성과 공공 영역의 문제로 돌아왔다.
-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진 폭력과 종교 간 대화가 같은 시기에 함께 커졌다.
- 다수 종교가 된 어느 전통이든 소수자에 대한 폭력의 위험을 안는다.
- 이 세기의 역사는 아직 진행 중이다. 결론을 앞당겨 쓰지 않는다.
18. 비교표
| 갈등의 흐름 | 대화의 흐름 | |
|---|---|---|
| 사건 | 9·11과 그 여파, 종교 정체성이 얽힌 지역 갈등 | 〈공통된 말〉(2007), 〈인간 형제애〉(2019) |
| 누가 움직였나 | 소수 극단 세력과 그에 대한 반작용 | 종교 지도자와 학자, 지역의 신자들 |
| 무엇이 커졌나 | 혐오와 상호 의심 | 공동 문서와 정기 협의체 |
| 남은 과제 | 부분을 전체로 일반화하지 않기 | 정상급 합의를 마을 단위로 잇기 |
한쪽만 보면 이 세기를 반만 아는 것이다. 두 흐름은 같은 시기에 함께 자랐다.
19. 생각해 볼 질문
- 이웃이 다른 신을 예배할 때,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지켜야 할까?
- 소수 극단 세력의 행동으로 한 종교 전체를 판단하는 일은 왜 위험할까?
-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훗날 어떤 세기로 기록될까?
20. 확인 퀴즈
〈인간 형제애〉 문서가 아부다비에서 서명된 해는?
- 2001년
- 2007년
- 2016년
- 2019년
‘한 종교의 극단적 사례로 그 종교 전체를 설명한다’는 서술 방식의 문제는?
- 문제 없다
- 부분을 전체로 일반화하는 오류이며 이 앱이 금지하는 서술이다
- 사례가 부족하다
- 연도가 틀렸다
21세기 기독교 인구 분포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인구의 중심이 아프리카·아시아·라틴아메리카로 옮겨 갔다
- 유럽에 집중되어 있다
- 북미에만 있다
- 변화가 없다
정답 1) 4 · 2) 2 · 3) 1
해설
1. 2019년이다. 2007년은 〈공통된 말〉 서한이다.
2. 기획서 §13.3의 원칙이다.
3. 20세기 후반부터 진행된 큰 변화다.
21. 주석과 참고문헌
- 〈우리와 당신 사이의 공통된 말〉(2007) 본문
- 〈인간 형제애〉(2019) 본문
- 세계 종교 인구 통계(퓨 리서치 등)
참고문헌
- 선교 단체 기록
- 파나두라 논쟁 기록
- 근대 반유대주의 연구
- 〈우리 시대〉(Nostra Aetate) 본문
- 바르멘 선언 본문
- 홀로코스트 연구와 증언 자료
- 20세기 세계 종교 인구 통계
- 〈우리와 당신 사이의 공통된 말〉(2007) 본문
- 〈인간 형제애〉(2019) 본문
- 세계 종교 인구 통계(퓨 리서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