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3년
파나두라 논쟁
식민 통치 아래에서 기독교 선교가 활발했고, 불교계가 공개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불교기독교파나두라(스리랑카)공개 논쟁
전개 과정
이틀에 걸친 공개 토론에 수천 명이 모였고, 불교 측 발언이 널리 호응을 얻었다.
직접적 결과
- 불교 부흥 운동에 큰 힘이 실렸다
장기적 영향
- 불교 학교와 출판이 늘어나며 근대 불교의 자기 이해가 형성되었다
- 서구 지식인들이 불교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 이 흐름이 1893년 시카고 세계종교회의로 이어진다
1
당사자별 관점
같은 사건도 자리에 따라 다르게 기억됩니다불교
식민 상황에서 자기 전통을 공적으로 변호한 사건으로 기억한다.
기독교
선교가 일방적으로 진행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사례다.
역사학계
이 시기 형성된 ‘합리적 불교’ 이미지가 서구의 불교 이해에 오래 영향을 주었다.
3
관련 인물
6
일어난 곳
파나두라(스리랑카)1873년경계 확실성: 대체로 확실
지도에 표시된 곳을 글로 보기
- 파나두라(스리랑카) — 파나두라 논쟁
7
출처와 추가 읽기
- 논쟁 기록
- 스리랑카 불교 부흥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