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건·문헌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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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개 항목
모세
이집트 탈출을 이끌었다고 전한다
아모스
북이스라엘에서 예언 활동을 했다
아브라함
성경은 그가 고향을 떠나 가나안으로 갔다고 전한다
이사야
아시리아 위협기에 유다 왕실을 향해 예언했다
메르넵타 석비
가나안 원정의 전과를 새긴 승전 비문.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가장 이른 기록이다.
함무라비 법전
재산·상해·가족·계약에 관한 판례 모음으로, 신에게서 받은 정의라는 틀 안에 놓여 있다.
이집트 탈출 전승
히브리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다 탈출해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었다고 전한다. 이 이야기는 유대교 신앙과 절기(유월절)의 뼈대를 이룬다.
사마리아 함락과 북이스라엘의 멸망
신아시리아 제국이 근동으로 세력을 넓히는 가운데 북이스라엘이 조공을 끊고 반기를 들었다.
요시야의 종교개혁
아시리아의 힘이 약해진 틈에 남유다 요시야 왕이 종교와 정치를 함께 정비했다. 성전을 수리하다 율법책을 발견했다고 성경은 전한다.
고타마 싯다르타(붓다)
출가해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한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성전을 파괴했다
에스겔
포로로 끌려간 공동체 가운데서 예언했다
키루스 2세
아케메네스 제국을 세웠다
키루스 원통
바빌론 점령을 정당화하고 여러 신전과 주민을 복구·귀환시켰다고 밝히는 왕실 문서다.
예루살렘 함락과 제1성전 파괴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사이에서 줄타기하던 남유다가 바빌로니아에 반기를 들었다.
키루스 칙령과 귀환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점령하면서 근동의 지배자가 바뀌었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깨달음과 첫 설법
브라만교의 제사와 카스트 질서 바깥에서 수행으로 해탈을 찾는 사문(沙門)들이 활동하던 시대였다.
제2성전 봉헌
귀환자들이 성전 재건을 시작했으나 자금과 이웃 세력의 반대로 오래 지체되었다.
느헤미야
페르시아 왕의 술 맡은 관원이었다고 전한다
아난다
붓다를 오래 시봉했다고 전한다
에스라
율법을 백성 앞에서 읽고 풀이했다고 전한다
엘레판티네 파피루스
결혼·재산·소송 문서와 함께, 그곳에 있던 유대인 성소의 재건을 예루살렘에 요청하는 편지가 남아 있다.
제1차 결집
붓다의 입멸 후 가르침과 규율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가 승가의 과제가 되었다.
에스라의 율법 낭독
제사장이자 서기관인 에스라가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왔다고 전한다.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성벽 재건
귀환 이후에도 예루살렘은 성벽이 무너진 채였고 공동체는 흔들렸다.
알렉산드로스 3세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렸다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마우리아 왕조를 세웠다
사마리아 오경
사마리아 공동체가 경전으로 삼는 오경. 예배 장소를 그리심산으로 지시하는 대목 등에서 유대교 본문과 차이가 있다.
제2차 결집과 승가의 분화
붓다 입멸 후 백 년쯤 지나 계율의 세부 해석을 두고 견해가 갈렸다고 전한다.
알렉산드로스의 근동 정복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아우른 마케도니아가 페르시아 원정에 나섰다.
마우리아 왕조의 성립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으로 인도 서북부의 정치 질서가 흔들린 뒤였다.
마힌다
스리랑카에 가르침을 전했다고 전한다
아쇼카
칼링가 전쟁 후 다르마 통치를 선언했다
70인역
히브리 성경을 그리스어로 옮긴 번역본. 책의 순서와 범위가 히브리어 성경과 다르다.
아쇼카 칙령
다르마에 따른 통치, 생명 존중, 다른 종교 집단에 대한 존중, 관리의 의무 등을 새긴 공표문.
히브리 성경의 그리스어 번역(70인역)
이집트의 유대인 공동체는 일상에서 그리스어를 썼고 히브리어를 잘 읽지 못했다.
칼링가 전쟁과 아쇼카의 전환
마우리아 제국이 아직 복속시키지 못한 칼링가를 정복하려 했다.
스리랑카 전래
아쇼카가 여러 지역에 전법사를 보냈다고 전한다.
메난드로스 1세
인도 서북부를 다스렸다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유대교 관습을 금하고 성전을 훼손했다
유다 마카비
항쟁을 이끌어 예루살렘과 성전을 되찾았다
다니엘서
바빌론 궁정 이야기와 종말 환상을 함께 담고 있다.
밀린다왕문경
그리스계 왕과 승려 나가세나의 문답 형식으로 불교 교리를 설명한다.
사해문서
성경 사본, 성경 해석서, 공동체 규율, 찬송과 종말론 문헌이 함께 들어 있다.
마카비 항쟁과 성전 정화
탄압에 맞서 시골 제사장 가문이 무장 저항을 일으켰다.
안티오코스 4세의 유대교 금지
예루살렘 내부의 헬레니즘 수용파와 반대파의 갈등에 왕권이 개입하면서 상황이 격해졌다.
쿰란 공동체의 형성
하스몬 왕조의 성전 운영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광야로 물러났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아우구스투스
로마 제정을 열었다
헤롯 대왕
로마의 후원으로 유대 왕이 되었다
힐렐
율법 해석 학파를 이끌었다
팔리 삼장
율장(규율), 경장(가르침), 논장(교학)의 세 묶음으로 이뤄져 있다.
폼페이우스의 예루살렘 점령
하스몬 왕조 형제 사이의 왕위 다툼에 로마가 중재자로 끌려 들어왔다.
팔리 삼장의 문자화
기근과 전란으로 구전 전승이 끊길 위험이 있었다고 연대기는 전한다.
헤롯의 제2성전 증축
로마의 후원으로 왕이 된 헤롯은 대규모 건축으로 정통성을 보이려 했다.
예수의 십자가형
로마의 지배 아래 유월절 순례로 붐비던 예루살렘에서, 갈릴리 출신 교사 예수가 성전 뜰에서 소동을 일으킨 뒤 체포되었다.
예루살렘 회의
이방인 신자가 늘면서 그들에게 할례와 음식 규정을 요구할 것인지가 공동체의 현안이 되었다.
유대 전쟁과 예루살렘 성전 파괴
무거운 세금, 총독의 실정, 종파 간 갈등이 겹쳐 유대 지방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야브네의 재편
성전이 사라진 뒤 유대교는 제사 없이 신앙을 이어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바울
지중해 동부 도시에 공동체를 세웠다
예수
갈릴리와 유대에서 가르치고 병자를 고쳤다고 전한다
요하난 벤 자카이
성전 파괴 후 야브네에서 학문 공동체를 세웠다고 전한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와 《유대 고대사》를 저술했다
바울 서신
지중해 여러 도시의 공동체에 보낸 편지들로, 신앙과 공동체 생활의 실제 문제를 다룬다.
복음서
예수의 활동과 가르침, 죽음과 부활 고백을 담은 네 편의 이야기.
유대 전쟁사
유대 봉기와 예루살렘 함락의 경과를 상세히 기록했다.
바르 코크바 항쟁
70년 성전 파괴 이후에도 회복의 기대가 남아 있었고,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정책이 갈등을 촉발했다.
마르키온 논쟁과 정경 논의
여러 갈래의 가르침이 함께 존재하는 상황에서 무엇을 받아들일지 정해야 할 필요가 커졌다.
불경 한역의 시작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 출신 승려들이 중국에 들어왔다.
랍비 아키바
율법 해석의 체계를 세웠다
미쉬나 편집
성전이 사라진 뒤 구전으로 이어지던 율법 해석이 흩어질 위험이 있었다.
안세고
낙양에서 불경을 한문으로 옮겼다
유스티누스
황제에게 보내는 변증서를 썼다
이레네우스
《이단 반박》을 썼다
카니슈카
쿠샨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디다케(열두 사도의 가르침)
두 길의 윤리 교훈, 세례와 성찬, 예언자를 대하는 법 등 초기 공동체의 실제 규범을 담았다.
이단 반박
여러 갈래의 가르침을 소개하고 반박하면서 신앙의 규범과 사도적 계승을 제시한다.
마니교의 등장
조로아스터교·기독교·불교의 요소가 함께 흐르던 이란과 메소포타미아가 무대였다.
데키우스 박해
3세기의 위기 속에서 제국의 결속을 신들에 대한 제사로 다지려 했다.
마니
마니교를 창시했다
오리게네스
성경 주석을 방대하게 남겼다
유다 하나시
미쉬나를 편집했다
키프리아누스
카르타고의 감독으로 박해기를 지도했다
미쉬나
농사·절기·혼인·손해·성물·정결의 여섯 편으로 나뉜 구전 율법의 정리.
헥사플라
히브리어 본문과 여러 그리스어 번역본을 여섯 단으로 나란히 배열한 대조본.
디오클레티아누스 대박해
제국을 재정비하던 황제가 전통 종교 질서 회복을 함께 추진했다.
밀라노 칙령
박해가 실패로 끝나고 제국의 두 통치자가 종교 정책을 조정했다.
니케아 공의회
아리우스의 주장을 둘러싼 논쟁이 동방 교회 전체로 번졌다.
테살로니카 칙령과 국교화
니케아 신앙과 다른 계열의 대립이 이어지는 가운데 황제가 한쪽을 국가의 신앙으로 정했다.
아리우스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났으므로 시작이 있다고 주장했다
아타나시우스
니케아 신앙을 옹호했다
안토니우스
사막에서 홀로 수행하며 수도 생활의 본을 세웠다
콘스탄티누스 1세
기독교를 공인했다
히에로니무스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했다(불가타)
교회사
사도 시대부터 콘스탄티누스 시대까지 교회의 역사를 정리하고 여러 문서를 인용했다.
구마라집의 한역 사업
쿠차 출신 승려 구마라집이 전란 중에 중국으로 옮겨 왔다.
니케아 신경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대한 신앙을 짧은 문장으로 고백한다.
불가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원문에서 옮긴 라틴어 성경.
서고트의 로마 약탈
게르만 여러 집단이 제국 안으로 이동하는 가운데 서고트가 이탈리아로 들어왔다.
에페소 공의회
마리아를 ‘하나님을 낳은 이’라 부를 수 있는가를 두고 알렉산드리아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충돌했다.
칼케돈 공의회
에페소 이후에도 그리스도 안의 두 본성을 설명하는 방식을 두고 대립이 이어졌다.
구마라집
대승 경전을 한문으로 옮겼다
네스토리우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지냈다
레오 1세
칼케돈 공의회에 신학 서한을 보냈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과 《신국론》을 썼다
키릴로스(알렉산드리아)
에페소 공의회를 주도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
미쉬나에 대한 방대한 토론(게마라)으로, 법과 이야기와 논쟁이 함께 실려 있다.
신국론
로마 약탈의 충격에 답하며 지상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를 구분해 역사를 해석한다.
칼케돈 정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고, 두 본성이 혼합·변화·분할·분리되지 않는다고 정한다.
베네딕도 규칙의 제정
서로마가 무너진 뒤 수도 생활의 기준이 지역마다 제각각이었다.
하기아 소피아 완공
폭동으로 옛 성당이 불탄 뒤 유스티니아누스가 전례 없는 규모로 다시 지었다.
일본 불교 전래
한반도의 백제가 야마토 왕권과 교류하며 불상과 경전을 보냈다.
그레고리우스 1세
로마 주교로 일했다
누르시아의 베네딕도
수도 규칙을 남겼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로마법을 집대성했다
베네딕도 규칙
하루의 기도 시간, 노동, 식사, 손님 접대, 원장의 직무 등 공동생활의 세부를 정한다.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로마법을 집대성한 법전. 종교에 관한 조항도 다수 포함한다.
히즈라(메카에서 메디나로의 이주)
메카의 지도층이 무함마드와 그 추종자들을 배척하면서 공동체의 존립이 어려워졌다.
현장의 구법 여행
한역 경전의 번역이 서로 달라 원전을 직접 확인할 필요가 커졌다.
예루살렘의 무슬림 접수
동로마와 사산조의 오랜 전쟁으로 지친 시리아·팔레스타인이 차례로 무슬림 세력에 넘어갔다.
카르발라 사건
무함마드 사후 공동체 지도자의 자격과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이어졌다.
무함마드
메카에서 유일신 신앙을 전했다
우마르 이븐 알카타브
제2대 칼리프로서 급속한 영토 확장을 지휘했다
현장
17년간 인도를 여행하고 경전을 가져와 번역했다
후사인 이븐 알리
우마이야 왕조의 계승에 반대하다 카르발라에서 살해되었다
대당서역기
중앙아시아와 인도 여러 나라의 지리·풍습·불교 상황을 기록했다.
쿠란
유일신 신앙, 예언자 전통, 최후의 심판, 공동체의 법과 윤리를 담고 있다.
무슬림 세력의 이베리아 진출
서고트 왕국 내부의 왕위 다툼으로 방어가 흔들리던 때였다.
성상 파괴 논쟁
성상 공경이 우상숭배인가를 두고 황제와 수도원 세력이 부딪쳤다.
아바스 혁명과 바그다드 건설
아랍인 우대 정책에 대한 비아랍 무슬림의 불만이 쌓여 있었다.
다마스쿠스의 요한
성상 공경을 옹호하는 글을 썼다
아부 하니파
법 추론의 방법을 세웠다
카롤루스 대제
서유럽 대부분을 통합했다
카롤루스의 황제 대관
교황이 동로마 대신 프랑크 왕국을 후원자로 택하는 흐름이 이어져 왔다.
파드마삼바바
티베트에 밀교 전통을 전했다고 전한다
정통신앙론
그때까지의 교부 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교의서.
카라이파의 대두
탈무드 전승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성경만을 따르려는 흐름이 세력을 얻었다.
성상 공경의 최종 회복
787년 공의회 이후에도 성상 파괴 정책이 한 차례 되살아났다.
회창폐불
사찰이 소유한 토지와 인력이 국가 재정과 병력에 부담이 된다는 인식이 커졌다.
슬라브 선교와 문자 창제
모라비아의 군주가 자기 말로 가르칠 선교사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요청했다.
공해(구카이)
당에서 밀교를 배워 와 진언종을 열었다
메토디오스
동생과 함께 슬라브 선교를 이끌었다
부하리
방대한 하디스를 수집하고 진위를 검증해 모음집을 냈다
키릴로스(콘스탄티노스)
슬라브 문자를 만들었다
고대 교회 슬라브어 성경·전례서
복음서와 전례서를 슬라브어로 옮긴 번역.
사히흐 알부하리
무함마드의 말과 행동에 관한 전승을 주제별로 모아 검증해 실은 모음집.
클뤼니 수도원 설립과 개혁 운동
지역 영주가 수도원장을 임명하고 교회 재산을 좌우하는 관행이 널리 퍼져 있었다.
코르도바 칼리프국 선포
이베리아를 다스리던 우마이야 가문이 바그다드·카이로와 대등함을 내세우려 했다.
대장경 목판 인쇄
목판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방대한 경전을 대량으로 찍을 수 있게 되었다.
키예프 루스의 개종
루스의 대공이 이웃 여러 종교를 살핀 끝에 동방 기독교를 택했다고 연대기는 전한다.
블라디미르 1세
동방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나라에 도입했다
사아디아 가온
성경을 아랍어로 옮겼다
하스다이 이븐 샤프루트
칼리프의 의사이자 외교 담당으로 일했다
신념과 견해
창조·계시·자유의지·부활 등을 이성적 논증으로 다룬 최초의 체계적 유대 신학서.
원초 연대기
루스의 기원부터 12세기 초까지를 다루며, 988년 개종 기사를 담고 있다.
동서 교회의 상호 파문
언어(라틴어·그리스어), 전례 관습, 신경의 필리오케 표현, 로마 주교의 권위 범위를 둘러싼 차이가 수백 년에 걸쳐 쌓여 있었다.
클레르몽 교회회의와 원정 호소
만지케르트 패배 후 동로마 황제가 서방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라인란트 유대인 학살
제1차 십자군에 참가하려 모인 무리 가운데 일부가 출발 전 유대인 공동체를 습격했다.
제1차 십자군의 예루살렘 점령
3년에 걸친 원정 끝에 십자군이 예루살렘에 이르렀다.
라시(슐로모 이츠하키)
히브리 성경과 탈무드 전체에 대한 주석을 남겼다
미카엘 케룰라리오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서 로마 사절과 충돌했다
아부 하미드 알가잘리
《종교학의 부흥》을 비롯한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우르바노 2세
1095년 클레르몽에서 원정을 호소했다
라시 주석
히브리 성경과 탈무드 본문의 뜻을 간결하게 풀이했다.
종교학의 부흥
예배와 일상, 마음의 수양을 아우르는 종합적 신앙 안내서.
톨레도 번역 학파
1085년 톨레도가 기독교 왕국에 넘어가면서 아랍어 장서가 그대로 남았다.
하틴 전투와 살라딘의 예루살렘 회복
십자군 국가들이 내부 분열을 겪는 사이 살라딘이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합했다.
요크 유대인 학살
제3차 십자군 준비 열기 속에 잉글랜드 여러 도시에서 유대인 공격이 이어졌다.
인도 불교 대사원의 파괴
북인도의 정치 질서가 무너지고 새 세력이 갠지스 유역으로 들어왔다.
마이모니데스(람밤)
《미쉬네 토라》로 유대 법을 체계화했다
살라딘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합했다
이븐 루시드(아베로에스)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에 방대한 주석을 달았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시토회 개혁을 이끌었다
미쉬네 토라
탈무드의 법을 주제별로 재편해 결론만 명료하게 제시한 법전.
아리스토텔레스 주석
아리스토텔레스 저작 대부분에 대한 소·중·대 주석.
혼란한 자들을 위한 안내서
철학을 배운 이들이 성경과 신앙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를 다룬다.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
성지로 향하던 원정이 뱃삯 문제와 동로마 왕위 다툼에 얽혀 방향을 잃었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
교황권이 절정에 이른 시기에 교회 전반의 규율을 정비하려 했다.
일본 가마쿠라 신불교의 등장
전란과 기근으로 말세 의식이 퍼졌고, 기존 대사찰은 귀족 중심이었다.
몽골의 바그다드 함락
몽골이 서쪽으로 진격하며 이란과 이라크를 차례로 장악했다.
신란
정토진종의 가르침을 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가난을 택하고 탁발 형제회를 시작했다
잘랄 앗딘 루미
《마스나비》 등 방대한 시를 남겼다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을 썼다
마스나비
이야기와 비유로 영적 여정을 노래한 장편 시.
신학대전
하나님·인간·그리스도를 다루며 질문과 반론, 답변의 형식으로 신학을 정리한다.
조하르
토라를 신비적으로 풀이한 주석 모음.
아비뇽 교황청 시기
교황과 프랑스 왕의 충돌 끝에 교황청이 로마를 떠나 프랑스 남부에 자리 잡았다.
흑사병과 유대인 학살
몇 해 사이 유럽 인구의 삼분의 일가량이 사라지는 대유행이 닥쳤다.
서방 교회의 대분열
교황청이 로마로 돌아온 직후의 선거를 두고 다툼이 일어났다.
위클리프의 개혁 요구와 영어 성경
교회의 재산과 권위에 대한 비판이 잉글랜드에서 커지고 있었다.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
헤시카즘(고요의 기도) 전통을 신학적으로 옹호했다
이븐 할둔
《역사서설》을 썼다
존 위클리프
성경의 최종 권위를 주장했다
총카파
계율과 교학을 강조하는 개혁을 이끌었다
역사서설
역사 서술의 방법과 문명·왕조의 흥망을 사회적 조건으로 설명한다.
위클리프 성경
라틴어 불가타를 바탕으로 옮긴 영어 성경.
얀 후스의 화형
대분열을 수습하려 열린 공의회가 개혁 문제도 함께 다뤘다.
피렌체 공의회의 재결합 시도
오스만의 압박을 받던 동로마가 서방의 군사 지원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동로마는 도시 하나만 남은 상태였고, 오스만은 대포를 앞세워 포위했다.
구텐베르크의 성경 인쇄
금속 활자와 유성 잉크, 압착기를 결합한 인쇄술이 완성되었다.
그라나다 함락과 유대인 추방령
이베리아 재정복이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고, 종교적 단일화 정책이 강화되었다.
메흐메트 2세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했다
얀 후스
프라하에서 체코어로 설교했다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금속 활자 인쇄술을 실용화했다
이삭 아브라바넬
왕실 재정 관리로 일했다
구텐베르크 성경
금속 활자로 인쇄한 라틴어 성경.
알함브라 칙령
유대인에게 넉 달 안에 개종하거나 왕국을 떠나라고 명한 문서.
95개 논제 발표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자금을 위한 면벌부 판매가 독일 지역에서 논란이 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
개신교의 확산과 오래된 내부 개혁 요구가 함께 압력이 되었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제국 안에서 가톨릭과 루터파 제후의 무력 충돌이 이어졌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
가톨릭과 위그노(프랑스 개혁파)의 갈등이 왕실 혼례를 계기로 폭발했다.
마르틴 루터
95개 논제 발표
술레이만 1세
제국의 법제를 정비했다
이냐시오 데 로욜라
예수회 창립
장 칼뱅
《기독교 강요》 저술
95개 논제
면벌부의 신학적 근거와 관행을 문제 삼는 토론 주제 95개.
기독교 강요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교의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루터파의 신앙을 황제와 제국의회 앞에 제시한 문서.
트리엔트 공의회 교령
성경과 전통, 원죄와 칭의, 성사, 성직자 규율에 관한 결정.
30년전쟁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개혁파(칼뱅)를 포함하지 않았고, 제후들의 종교·정치 이해가 얽혀 있었다.
갈릴레오 재판
지구가 움직인다는 주장이 성경 해석과 충돌한다는 판단이 있었다.
시마바라 봉기와 일본의 기독교 금지
선교로 신자가 늘었으나 막부는 기독교를 통치의 위협으로 보고 탄압을 강화했다.
러시아 정교회의 전례 개혁과 구교도 분리
총대주교 니콘이 그리스 관행에 맞춰 전례서와 예식을 고치려 했다.
샤브타이 츠비 운동
1648년 동유럽 학살의 참상과 카발라의 종말 기대가 겹쳐 구원에 대한 갈망이 컸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측했다
바뤼흐 스피노자
성경을 역사 문헌으로 분석했다
샤브타이 츠비
메시아로 선포되어 큰 운동을 일으켰다
제5대 달라이 라마
티베트의 종교·정치 권력을 함께 쥐었다
총대주교 니콘
전례서와 예식을 그리스 관행에 맞춰 고쳤다
베스트팔렌 조약
제후의 신앙 선택권을 개혁파까지 확대하고, 영토와 배상, 제국 내 권한을 정한 강화 조약.
신학정치론
성경을 역사적 문헌으로 읽는 방법을 제시하고 사상의 자유를 옹호한다.
대각성 운동
형식화된 교회 생활에 대한 불만과 개인적 회심 체험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웨슬리의 회심과 감리교 운동
국교회 안에서 형식적 신앙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지고 있었다.
와하비 운동과 사우드 가문의 동맹
후대에 더해진 관행을 걷어 내고 초기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나왔다.
하시디즘의 시작
학문 중심의 엘리트 문화와 메시아 운동의 좌절 뒤에, 가난한 이들이 다가갈 수 있는 신앙이 필요했다.
프랑스 혁명과 탈기독교화
교회는 프랑스에서 최대의 지주였고 신분제의 한 축이었다.
개신교 세계 선교 운동
부흥 운동으로 자란 헌신과 유럽의 해상 진출이 겹치면서 선교 단체가 잇따라 세워졌다.
모제스 멘델스존
토라를 독일어로 옮겼다
무함마드 이븐 압둘와합
유일신 신앙의 회복을 주장하는 저작을 남겼다
바알 셈 토브
하시디즘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조나단 에드워즈
대각성 운동의 신학적 해석을 남겼다
존 웨슬리
야외 설교와 순회 전도를 했다
성직자 시민헌장
성직자를 국가 공무원처럼 선출하고 국가에 서약하도록 정했다.
예루살렘
국가는 행위를 다스리되 양심을 강제할 수 없으며, 유대교는 신앙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논한다.
성서 역사비평의 확산
역사학과 문헌학의 방법이 성경 연구에 본격 적용되었다.
일본의 신불분리와 폐불훼석
새 정부가 천황 중심의 국가 신도를 세우려 하면서 불교와 신도를 분리하려 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황령이 축소되고 근대 사상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교회의 권위를 분명히 하려 했다.
파나두라 논쟁
식민 통치 아래에서 기독교 선교가 활발했고, 불교계가 공개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시카고 세계종교회의
만국박람회의 부대 행사로, 세계의 여러 종교 대표를 한자리에 모으는 시도가 이뤄졌다.
제1차 시온주의자 대회
러시아의 학살(포그롬)과 서유럽의 드레퓌스 사건으로, 해방만으로는 안전을 얻을 수 없다는 인식이 퍼졌다.
무함마드 압두
알아즈하르의 교육 개혁을 추진했다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
불교 부흥 운동을 이끌었다
윌리엄 캐리
인도에서 성경을 여러 언어로 옮겼다
테오도르 헤르츨
《유대 국가》를 썼다
새로운 사태 (Rerum Novarum)
산업화 시대의 노동 문제를 다루며 노동자의 권리, 정당한 임금, 결사의 자유와 사유재산을 함께 논한다.
유대 국가
반유대주의에 대한 해법으로 유대인의 국가 수립을 제안한다.
종의 기원
자연선택에 의한 생물 진화를 논증한 저작.
홀로코스트
종교적 반유대주의의 오랜 전통 위에 19세기 인종 이론이 결합하면서, 유대인을 인종적으로 규정하고 배제하는 정책이 가능해졌다.
이스라엘 건국과 팔레스타인 실향
19세기 말 시온주의 운동, 영국 위임통치, 홀로코스트 이후의 난민 문제가 겹쳤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근현대 세계와의 관계를 다시 정리해야 한다는 요구가 오래 쌓여 있었다.
이란 혁명
급속한 근대화 정책, 정치적 억압, 외세 개입에 대한 반발이 쌓였다.
디트리히 본회퍼
고백교회 활동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유대 신학 저술
요한 23세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했다
제14대 달라이 라마
1959년 이후 인도에서 망명 공동체를 이끌었다
9·11 이후 종교와 안보 담론의 결합
20세기 후반의 정치적 갈등과 극단주의 조직의 활동이 배경에 있었다.
바르멘 선언
교회가 국가 이념에 종속될 수 없음을 선언했다.
우리 시대 (Nostra Aetate)
비그리스도교 종교와의 관계를 다룬 선언. 유대인에게 집단적 책임을 지우는 서술을 부정하고, 이슬람·힌두교·불교에 대해 존중을 표명했다.
〈우리와 당신 사이의 공통된 말〉 서한
9·11 이후 높아진 긴장 속에서 대화의 틀을 만들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정교회 대공의회(크레타)
정교회 전체가 모이는 공의회를 열자는 논의가 20세기 초부터 이어져 왔다.
〈인간 형제애〉 문서 서명
가톨릭과 수니 이슬람의 대표적 기관 사이에 대화가 여러 해 이어져 왔다.
감염병 유행과 온라인 예배의 확산
전 세계적 감염병 유행으로 모임 자체가 제한되었다.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 1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일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
라틴아메리카 출신의 첫 교황이었다
우리와 당신 사이의 공통된 말
쿠란과 성경을 함께 인용하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두 종교의 공통 기반으로 제시한다.
인간 형제애 문서
종교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폭력을 규탄하고, 신앙의 자유와 공동의 시민권, 여성과 아동의 권리를 함께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