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사 한눈
1201년~1300년 · 정리한 내용으로 원고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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뽑아 둔 초안13세기 초안5,064자

제13장 13세기의 세계 종교

같은 편끼리 도시를 약탈하고, 유럽은 소수자에게 표식을 붙입니다

1201년 ~ 1300년


여는 장면 — 사흘 동안

1204년, 성지로 가야 할 군대가 같은 기독교 도시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했습니다.

사흘 동안 성당과 도서관과 성유물이 털렸습니다. 동방 교회 사람들에게 이 사건은 1054년보다 훨씬 깊은 상처로 남았습니다.

같은 세기 서유럽에서는 공의회가 유대인과 무슬림에게 구별되는 복장을 요구했습니다. 교황권은 절정에 있었고, 대학과 탁발수도회가 자라났으며, 아퀴나스가 《신학대전》을 썼습니다.

권력이 절정에 이르면 무엇이 생기는가. 이 세기의 물음입니다.


1. 몽골의 세기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를 가로질렀고 1258년 바그다드를 함락했습니다. 서유럽에서는 대학과 탁발수도회가 성장했습니다. 인도에는 델리 술탄국이, 일본에는 가마쿠라 막부가 섰습니다.

  • 1204년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
  • 1206년 델리 술탄국 성립, 몽골 제국의 팽창.
  • 1258년 몽골이 바그다드를 함락하고 아바스 칼리프조가 끝났습니다.
  • 1291년 아크레 함락으로 십자군 국가가 소멸했습니다.
  • 대학과 탁발수도회(프란치스코회·도미니코회)가 성장했습니다.

2. 1204년 — 형제 교회를 치다

성지로 향하던 원정이 뱃삯 문제와 동로마 왕위 다툼에 얽혀 방향을 잃었습니다. 베네치아에 진 빚이 있었고, 지휘 체계가 없었습니다.

당사자별로

동방 교회는 형제 교회에 대한 배신으로 기억하며, 1054년보다 깊은 상처로 꼽습니다. 서방 쪽에서는 당시 교황도 이 사태를 승인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해 왔습니다.

학문적 해석

종교적 동기보다 경제와 정치의 연쇄가 만든 결과라는 설명이 유력합니다. '의도된 침공인가 우연한 표류인가'가 오랜 논쟁입니다.

라틴 제국이 세워져 반세기 넘게 도시를 지배했습니다. 동로마는 회복 뒤에도 힘을 되찾지 못해 1453년으로 이어집니다.

같은 종교 안의 상처가 다른 종교와의 갈등보다 깊을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이 동방 교회가 서방과의 재결합을 거부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되었습니다.

2001년 교황이 이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797년이 걸렸습니다.


3. 1215년 — 표식을 붙이다

교황권이 절정에 이른 시기에 열린 제4차 라테란 공의회는 교회 전반의 규율을 정비했습니다.

성사와 고해, 성직자 규율, 이단 대응을 결정했습니다. 해마다 고해와 영성체를 하도록 정한 것도 이때입니다. 가톨릭 신앙 생활의 기본 틀이 오래 유지됩니다.

그리고 유대인과 무슬림에게 구별되는 복장을 요구했습니다.

당사자별로

가톨릭 쪽에서는 교회 개혁과 신앙 생활의 정비라는 면과 소수자 규정이라는 면을 함께 봐야 합니다. 유대교 쪽은 유럽에서의 법적 차별이 본격화된 분기점으로 기억합니다.

학문적 해석

규정의 실제 시행은 지역마다 크게 달랐습니다.

같은 세기에 탈무드가 불태워지고 공개 논쟁이 강요되기도 했습니다. 1240년 파리에서 열린 논쟁 뒤 1242년 수레 스무 대분이 넘는 탈무드 사본이 광장에서 불태워졌습니다. 소수자 차별이 교회법으로 제도화되어 유럽 전역에 퍼졌고, 이 규정이 훗날 여러 차별 표식의 선례로 인용됩니다.

한편 같은 시기 유대교 안에서는 신비주의 전통인 카발라가 문헌으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조하르》는 토라를 신비적으로 풀이한 주석 모음입니다.

학문적 해석

저작 시기와 저자를 두고 두 견해가 크게 다릅니다. 전통은 2세기의 랍비 시몬 바르 요하이가 남긴 것으로 전하고, 학계는 13세기 후반 카스티야의 모세스 데 레온과 그 주변에서 쓰인 것으로 봅니다. 천 년의 차이입니다. 이 책은 어느 한쪽을 확정으로 적지 않고 둘을 나란히 둡니다.


4. 신학의 절정, 통제의 강화

같은 힘이 두 방향으로 쓰였습니다.

아퀴나스는 파리 대학에서 가르치며 《신학대전》을 썼습니다. 은총은 자연을 없애지 않고 완성한다는 것, 이성으로 아는 것과 계시로 아는 것을 구분하되 조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그의 틀이었습니다.

주목할 점

그의 작업은 아랍어를 거쳐 들어온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이모니데스·이븐 시나 등 다른 전통의 사상가들을 읽은 결과이기도 합니다. 12세기 톨레도의 번역이 없었다면 13세기의 신학도 없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가난을 택하고 탁발 형제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5차 십자군 중 이집트로 건너가 술탄을 만났습니다.

학문적 해석

이 만남은 오늘날 종교 간 대화의 상징으로 자주 인용됩니다. 다만 만남의 내용은 사료가 제한적입니다.

같은 세기에 탁발수도회는 도시에서 설교하고 가르쳤지만, 동시에 이단 심문의 실무를 맡기도 했습니다. 하나의 조직이 두 가지 일을 했습니다.


5. 1258년 — 칼리프조의 끝

몽골이 서쪽으로 진격하며 이란과 이라크를 차례로 장악했습니다. 포위 끝에 바그다드가 함락되고 칼리프가 처형되었으며 도서관이 파괴되었습니다.

5백 년 이어진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프조가 끝났습니다.

반드시 짚을 것

다만 「칼리프가 사라졌다」고 적으면 정확하지 않습니다. 살아남은 아바스 가문의 한 사람이 1261년 카이로에서 맘루크의 옹립으로 칼리프를 이어받아, 실권 없는 상징으로 1517년까지 이어집니다. 권력은 끝났고 이름은 남았습니다.

학문적 해석

'도서관의 물이 잉크로 검게 물들었다' 같은 서술은 문학적 과장으로 봅니다. 다만 큰 파괴가 있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결과가 뜻밖이었습니다.

이슬람 세계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정치 중심이 이집트 맘루크와 다른 지역으로 옮겨졌고, 몽골 지배층도 뒤에 이슬람을 받아들였습니다. 일한국의 가잔 칸이 1295년 개종한 것이 그 분기점입니다. 정복자가 피정복 종교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델리 술탄국을 통해 이슬람이 인도 아대륙에 자리 잡은 것도 이 세기입니다.

몽골 제국 아래에서 여러 종교가 한 정치 질서 안에 놓였습니다. 지배층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불교·이슬람·기독교를 각각 후원하기도 했습니다. 동방교회 일부는 몽골과의 협력에 기대를 걸기도 했습니다.

같은 세기 코니아에서는 루미가 《마스나비》를 썼습니다. 이야기와 비유로 영적 여정을 노래한 이 장편 시는 '페르시아어로 된 쿠란'이라 불릴 만큼 이슬람 영성 문학에서 큰 자리를 차지합니다.

오늘의 문제

루미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시인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만 서구에서 그의 시가 이슬람적 맥락을 지운 채 소비된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6. 일본 — 민중의 불교

전란과 기근으로 말세 의식이 퍼졌고, 기존 대사찰은 귀족 중심이었습니다.

염불, 좌선, 제목 등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단순한 수행을 내세운 새 종파들이 잇따라 일어났습니다. 정토종·정토진종·선종·일련종입니다.

신란은 자기 힘이 아니라 아미타불의 힘에 의지한다고 가르쳤고, 승려의 결혼과 육식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악인도 구원받는다는 역설적 가르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학문적 해석

'가마쿠라 신불교'라는 묶음 자체가 근대에 만들어진 틀이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불교가 귀족의 종교에서 민중의 종교로 넓어졌습니다. 오늘날 일본 불교 종파 구성의 기틀이 여기서 만들어집니다.


7. 권력이 절정에 이르면

무엇이 절정이었나그 힘으로 한 일그 힘이 남긴 그늘
가톨릭교회교황권공의회로 신앙 생활을 정비, 대학과 탁발수도회소수자 복장 규정, 이단 심문
몽골 제국군사력유라시아를 하나의 교통망으로 이음바그다드 함락과 도시 파괴
일본 무가 정권무사 권력민중이 실천할 불교의 확산기존 대사찰과의 충돌

이 장이 남긴 네 문장

  1.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은 동서 교회 관계를 결정적으로 갈라놓았습니다.
  2. 제4차 라테란 공의회는 유럽에서 종교적 소수자 차별을 제도화했습니다.
  3. 몽골의 정복은 이슬람 세계의 중심을 옮겼지만 이슬람을 없애지 못했습니다.
  4. 일본에서는 민중이 실천할 수 있는 불교가 자리 잡았습니다.

생각해 볼 질문

  • 같은 종교 안의 상처가 다른 종교와의 갈등보다 깊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표식을 달게 하는 제도는 사회에 무엇을 남길까요?
  • 정복자가 피정복지의 종교를 받아들이는 일은 왜 일어날까요?

이 장에서 쓴 자료

문헌

  •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1265~1274년, 라틴어) — 저자가 마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남
  • 《조하르》 (13세기 후반, 아람어)
  • 루미 《마스나비》 (13세기 후반, 페르시아어)

자료 사진

  • 조토의 성 프란치스코 연작 (후대의 그림 · 1290년대 말, 인물의 사후에 그려짐. 조토 작품인지도 논쟁 중) · 조하르 사본 (실제 유물 · 13세기 이후) ·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실제 유물 · 12~13세기)

참고

  • 제4차 십자군 연대기 (빌라르두앵, 니케타스 코니아테스)
  • 제4차 라테란 공의회 교령
  • 몽골 시대 이슬람사 연구

「종교사 한눈」이 모아 둔 자료로 작성한 원고입니다.

검수 이력

  • 1차 · 사실 확인 — 「아바스 칼리프조가 끝났다」는 서술을 고침. 1261년 카이로에서 상징적 칼리프가 이어져 1517년까지 남습니다. 탈무드 소각을 1240년 파리 논쟁과 1242년 소각으로 특정. 몽골 지배층의 이슬람 수용을 1295년 가잔 칸으로 특정.
  • 2차 · 관점 검토 — 《조하르》의 저작 시기를 「견해가 다르다」로만 두지 않고, 전통(2세기 시몬 바르 요하이)과 학계(13세기 모세스 데 레온) 두 견해를 나란히 적음. 조토 연작이 인물 사후의 그림이고 작가 귀속에도 논쟁이 있다는 점을 목록에 밝힘.
  • 3차 · 저작권 확인 — 자료 사진 3장의 이용 조건과 제작 시기 확인.
  • 남은 것 · 외부 검토 — 쓴 쪽과 검수한 쪽이 같습니다. 출판 전 제3자의 확인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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