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초안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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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가 배를 타고 세계로 나가고, 아시아의 종교들이 응답합니다
1801년 ~ 1900년
여는 장면 — 배와 깃발
선교사들이 배를 타고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그들 뒤에는 종종 제국의 깃발이 있었습니다.
아시아의 불교와 이슬람은 이 만남에 대응하며 스스로를 다시 설명해야 했습니다. 서구에서는 성경을 역사 자료로 읽는 방법이 등장해 신앙에 새로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세기의 이야기는 한 방향이 아닙니다. 나간 사람들과 응답한 사람들이 함께 있습니다.
1. 하나로 묶인 세계
산업혁명과 제국주의가 세계를 하나의 체제로 묶었습니다. 민족주의가 퍼졌고, 과학과 역사학이 종교 이해를 흔들었습니다.
- 유럽 열강의 아시아·아프리카 식민지 확대.
- 1792년 영국에서 침례교 선교회가 세워지며 개신교 세계 선교 운동이 시작됩니다(이 장의 세기보다 조금 앞섭니다).
- 1859년 다윈 《종의 기원》 출간.
-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
- 1893년 시카고 세계종교회의.
- 1897년 제1차 시온주의자 대회.
2. 나간 사람들
부흥 운동으로 자란 헌신과 유럽의 해상 진출이 겹치면서 선교 단체가 잇따라 세워졌습니다.
선교사들이 성경을 현지어로 옮기고 학교와 병원을 세웠습니다. 윌리엄 캐리는 인도 세람포르에서 성경을 여러 언어로 옮기고 인쇄소를 세웠으며, 사티(과부 순장) 폐지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1829년 사티 금지는 선교사들만의 성과가 아닙니다. 람 모한 로이를 비롯한 인도인 개혁가들이 힌두 경전 자체를 근거로 이 관습을 오래 비판해 왔고, 금지에 이르는 데 그들의 역할이 컸습니다. 「밖에서 온 사람들이 고쳐 주었다」는 서술은 안에서 싸운 사람들을 지웁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식민 지배의 확장과 자주 겹쳤습니다.
개신교 전통은 복음을 전한 헌신의 역사로 기려 왔습니다. 아시아 여러 지역에서는 이 만남이 자기 전통을 다시 설명하게 만든 도전이었습니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선교가 서구 세력과 함께 온 것으로 인식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선교와 식민 지배를 같은 것으로 보는 서술도, 완전히 분리하는 서술도 모두 정확하지 않습니다. 현지 신자들의 주체적 역할이 최근 크게 강조됩니다.
결과는 분명합니다. 기독교 신자의 분포가 이 세기에 크게 달라졌습니다. 20세기 후반 인구 중심이 남반구로 옮겨 가는 바탕이 여기서 만들어졌습니다.
다만 「이때 기독교가 유럽의 종교에서 세계 종교가 되었다」고 적으면 사실과 어긋납니다. 에티오피아 교회는 4세기부터, 인도 남부의 성 토마스 기독교인은 그보다 이른 전승부터, 중동과 아르메니아의 교회들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 장이 다루는 것은 「없던 곳에 생긴 일」이 아니라 유럽에서 나간 선교로 분포가 다시 그려진 일입니다. 5세기 장에서 적었듯, 갈라져 나간 교회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현지 언어의 문자화와 교육에 기여한 면과, 문화를 훼손한 면이 함께 남았습니다.
3. 응답한 사람들
스리랑카 — 1873년 파나두라 논쟁. 식민 통치 아래에서 기독교 선교가 활발했고, 불교계가 공개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틀에 걸친 공개 토론에 수천 명이 모였고, 불교 측 발언이 널리 호응을 얻었습니다.
선교가 일방적으로 진행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이후 불교 학교와 출판이 늘어나며 근대 불교의 자기 이해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시기 형성된 '합리적 불교' 이미지가 서구의 불교 이해에 오래 영향을 주었습니다.
일본 — 1868년 폐불훼석. 메이지 정부가 천황 중심의 국가 신도를 세우려 하면서 불교와 신도를 분리하려 했습니다. 사찰과 불상이 파괴되고 승려가 환속했으며, 사찰의 토지와 특권이 사라졌습니다.
'폐불훼석'의 실제 규모는 지역차가 컸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불교계는 스스로를 근대적 종교로 재정의하며 교육과 학문, 사회 사업에 참여했습니다. 다만 일부는 뒤에 국가 정책에 협력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그 책임은 전후에 논의됩니다.
이슬람 세계 — 개혁 사상. 무함마드 압두는 알아즈하르의 교육 개혁을 추진하고 이집트의 대무프티를 지냈습니다. 이슬람과 근대 과학·이성은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 법 해석을 시대에 맞게 다시 여는 것(이즈티하드)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그의 유산은 뒤에 서로 다른 방향(자유주의적 개혁과 근본으로의 회귀)으로 갈라져 계승되었습니다.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의 부대 행사로 세계의 여러 종교 대표가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아시아의 종교 지도자들이 서구 청중 앞에서 직접 자기 전통을 소개했습니다. 불교의 다르마팔라 등이 큰 반향을 얻었습니다.
주최 측은 기독교의 우위를 보여 주는 자리로 기대했으나 결과는 달랐습니다. 종교 간 대화 운동의 출발점으로 꼽히며, 미국에서 불교와 힌두교가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세계 종교'라는 근대적 범주 자체가 이 무렵 만들어졌다는 점이 함께 지적됩니다.
4. 흔들린 확신
역사학과 문헌학의 방법이 성경 연구에 본격 적용되었습니다.
오경의 여러 자료를 구분하는 가설, 복음서의 형성 과정 연구, 예수의 생애를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이어졌습니다.
개신교는 받아들인 쪽과 거부한 쪽으로 크게 갈렸습니다. 가톨릭은 처음에는 경계했으나 20세기 중반 이후 공식적으로 수용했습니다. 유대교 안에서도 개혁파는 수용하고 정통파는 거리를 두었습니다.
이 방법이 신앙을 부정한다고 보는 견해와, 본문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한다고 보는 견해가 함께 있습니다. 역사적 방법과 신앙적 읽기의 관계는 지금도 열린 물음입니다.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은 창조 이해를 둘러싼 오랜 논쟁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교단과 전통에 따라 수용의 폭이 크게 달랐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라는 갈래가 형성되는 배경이 이 세기에 만들어졌습니다.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신앙과 도덕에 관해 공식적으로 선언할 때의 교황 무류성을 정의했습니다.
가톨릭 쪽에서는 무류성의 범위가 매우 제한적이라는 점이 강조됩니다. 정교회는 총대주교들의 협의 구조와 어긋난다고 보았고, 개신교는 성경의 최종 권위와 충돌한다고 보았습니다. 일부 신학자와 신자가 이탈해 구가톨릭교회를 형성했습니다.
1891년에는 산업화 시대의 노동 문제를 다룬 회칙이 나와 가톨릭 사회 교리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5. 1897년 — 다른 해법
해방과 근대화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를 두고 유대교 안에서 개혁파, 정통파, 보수파의 갈래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의 조직적 폭력(포그롬)과 서유럽의 드레퓌스 사건은 다른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해방만으로는 안전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헤르츨의 주도로 바젤에서 여러 나라 대표가 모여 조직과 강령을 마련했습니다.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을 팔레스타인에 세운다는 목표가 공식화되었습니다.
유대교 안에서 찬반이 갈렸습니다. 종교적 이유로 반대한 흐름과 세속적 민족운동으로 지지한 흐름이 함께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주민에게는 이후 실향으로 이어지는 출발점으로 기억됩니다.
시온주의는 하나의 사상이 아니라 여러 갈래(정치적·문화적·종교적·사회주의적)의 묶음이었습니다. 헤르츨의 구상이 그 땅에 살던 주민에 대해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함께 제기됩니다.
같은 세기에 근대적 반유대주의가 등장했습니다. 종교적 반유대주의가 인종 이론과 결합한 새로운 형태입니다. 이것이 다음 세기 참극의 사상적 배경이 됩니다.
6. 같은 도전, 네 가지 응답
| 전통 | 무엇이 도전이었나 | 어떻게 응답했나 |
|---|---|---|
| 유대교 | 해방 이후의 정체성, 새 형태의 반유대주의 | 개혁·정통·보수의 분화, 시온주의 |
| 기독교 | 성서비평, 진화론, 식민주의와의 얽힘 | 선교 확장, 사회 교리, 신학의 여러 갈래 |
| 이슬람교 | 식민 지배와 근대 제도 | 개혁 사상(이성과 신앙의 조화)과 회귀 운동 |
| 불교 | 선교의 도전과 국가 정책 | 공개 논쟁, 교육과 출판, 근대적 자기 서술 |
네 전통 모두 '근대'라는 같은 도전 앞에서 각자의 답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 장이 남긴 다섯 문장
- 19세기 선교는 기독교를 세계 종교로 만들었지만 식민주의와 분리해 말할 수 없습니다.
- 아시아 종교들의 근대적 자기 이해는 이 만남 속에서 형성되었습니다.
- 성서비평과 진화론은 신앙에 새로운 질문을 던졌고 다양한 응답을 낳았습니다.
- 근대적 반유대주의의 등장은 20세기 홀로코스트의 배경이 됩니다.
- 1893년 시카고 세계종교회의는 종교 간 대화의 출발점으로 꼽힙니다.
생각해 볼 질문
- 선교와 식민 지배가 겹칠 때 복음은 어떻게 받아들여질까요?
- 한 종교가 다른 종교의 도전에 응답하며 스스로를 새로 설명하는 일은 어떤 변화를 낳을까요?
- 성경을 역사 자료로 읽는 것과 신앙의 책으로 읽는 것은 함께 갈 수 있을까요?
이 장에서 쓴 자료
문헌
- 테오도르 헤르츨 《유대 국가》 (1896년, 독일어)
- 《새로운 사태》 (1891년, 라틴어) — 가톨릭 사회 교리의 출발점
- 찰스 다윈 《종의 기원》 (1859년, 영어)
자료 사진
- 제1차 시온주의자 대회의 헤르츨 (당대 기록 사진) · 1893년 시카고 세계종교회의 (당대 기록 사진)
참고
- 선교 단체 기록, 세계 기독교사 연구
- 파나두라 논쟁 기록
- 메이지 정부 법령, 일본 근대 불교사 연구
- 근대 반유대주의 연구
「종교사 한눈」이 모아 둔 자료로 작성한 원고입니다.
검수 이력
- 1차 · 사실 확인 — 개신교 세계 선교 운동의 시작(1792년)이 이 세기보다 앞선다는 점을 세계사 항목에 밝힘.
- 2차 · 관점 검토 — 「기독교가 유럽의 종교에서 세계 종교로 바뀌었다」는 문장을 고침. 에티오피아·인도 남부·중동·아르메니아의 교회는 그 전부터 있었고, 이 서술은 5세기 장에서 적은 「갈라져 나간 교회들은 사라지지 않았다」와 어긋납니다. 사티 금지를 선교사의 성과로만 적은 대목에 람 모한 로이 등 인도인 개혁가들의 역할을 함께 실음.
- 3차 · 저작권 확인 — 자료 사진 2장의 이용 조건 확인. 둘 다 당대 기록 사진임을 표시.
- 남은 것 · 외부 검토 — 쓴 쪽과 검수한 쪽이 같습니다. 출판 전 제3자의 확인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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