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안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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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참혹한 일이 일어난 뒤, 종교들이 서로를 다시 보기 시작합니다
1901년 ~ 2000년
여는 장면 — 직면
20세기 중반, 유럽 한복판에서 육백만 명의 유대인이 조직적으로 살해되었습니다.
기독교 세계는 그 일이 자기들이 오래 가르쳐 온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직면해야 했습니다.
그 직면에서 종교 간 대화라는 새로운 흐름이 나왔습니다.
같은 세기에 식민지가 독립하고, 이스라엘이 세워지고, 이란에서 종교 혁명이 일어났으며, 티베트 불교가 세계로 흩어졌습니다.
1. 뒤흔들린 세기
두 번의 세계대전, 냉전, 탈식민화가 세계를 뒤흔들었습니다. 후반에는 세계화와 대규모 이주가 진행되며 종교 지도가 다시 그려졌습니다.
- 1914~1918년, 1939~1945년 두 차례 세계대전.
- 1947년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
-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팔레스타인 난민 발생.
- 1962~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 1979년 이란 혁명.
- 20세기 후반 기독교 인구 중심이 남반구로 이동했습니다.
2. 1941~1945년 — 쇼아
수백 년에 걸친 종교적 반유대주의 위에 19세기 인종 이론이 결합하면서, 유대인을 인종적으로 규정하고 배제하는 정책이 가능해졌습니다.
이 장이 적은 1941~1945년은 조직적 절멸이 시행된 기간입니다. 박해 자체는 1933년 나치 집권 직후부터 법령과 폭력의 형태로 이어져 왔습니다. 시작을 1941년으로 읽지 않도록 적어 둡니다.
차별 법령, 격리, 강제 이주를 거쳐 조직적 절멸 정책이 시행되었습니다. 절멸 수용소에서의 대량 학살이 그 정점이었습니다. 약 600만 명이 살해되었고 유럽 유대인 공동체가 파괴되었습니다.
우발적 학살이 아니라 국가가 조직한 절멸 정책이었습니다.
유대교는 쇼아(재앙)라 부르며, 기억과 증언이 공동체의 의무로 자리 잡았습니다. 기독교 쪽에서는 교회의 오랜 반유대적 가르침이 이 참극의 토양을 만들었다는 자기 성찰이 이어졌습니다.
가해의 구조, 방관자의 역할, 교회의 책임 범위가 계속 연구되고 있습니다. 개별 지도자들의 책임 범위, 저항과 침묵의 사례에 대한 평가도 계속 논의됩니다.
1934년 독일 고백교회는 바르멘 선언으로 교회가 국가 이념에 종속될 수 없음을 선언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치 저항에 참여했다가 처형되었습니다.
바르멘 선언은 국가 권력에 맞선 신앙 고백으로 널리 인용되지만, 유대인 박해 자체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았다는 한계도 지적됩니다.
'그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라는 물음이 유대·기독교 양쪽에서 신학의 중심 주제가 되었습니다.
3. 1948년 — 두 개의 이야기
19세기 말 시온주의 운동, 영국 위임통치, 홀로코스트 이후의 난민 문제가 겹쳤습니다.
1947년 유엔 분할안 이후 전쟁이 일어났고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포했습니다.
결과는 두 가지였습니다. 유대 국가가 수립되었고, 수십만 명의 팔레스타인 주민이 고향을 떠났습니다(나크바). 그리고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아랍·이슬람 국가들에 살던 유대인 팔십만 명 남짓이 그 땅을 떠났습니다. 이 이동을 「이주」 한 낱말로 적기는 어렵습니다. 추방과 재산 몰수, 폭력을 피한 탈출, 스스로 택한 이민이 나라마다 다르게 섞여 있었습니다. 천 년 넘게 이어져 온 공동체들이 이 시기에 사실상 사라졌습니다.
유대교 쪽에서는 이천 년 만의 국가 수립이자 홀로코스트 이후의 생존 문제로 이해됩니다. 팔레스타인 주민에게는 실향과 상실의 사건으로 기억됩니다. 지역의 기독교 공동체는 양쪽 모두와 얽혀 있으며, 서구 교회 안에서도 견해가 크게 갈립니다.
이 사건은 종교 갈등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민족주의·식민 유산·냉전이 함께 작용했습니다.
이 항목은 오늘날 살아 있는 정치 쟁점입니다. 어느 한쪽의 서술을 정답으로 제시하지 않고, 사실과 각 당사자의 관점을 구분해 적습니다.
같은 해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창립되어 교회 일치 운동이 제도화되었습니다.
4. 1962~1965년 — 문을 열다
근현대 세계와의 관계를 다시 정리해야 한다는 요구가 오래 쌓여 있었습니다.
요한 23세가 소집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네 차례 회기에 걸쳐 16개 문헌을 채택했습니다.
- 모국어 전례를 허용했습니다.
- 다른 기독교 전통과의 일치 운동에 참여를 표명했습니다.
- 종교 자유를 인정하는 선언을 채택했습니다.
- 〈우리 시대〉로 타 종교, 특히 유대교와의 관계를 새로 정리했습니다.
〈우리 시대〉는 유대인에게 집단적 책임을 지우는 서술을 부정하고, 이슬람·힌두교·불교에 대해서도 존중을 표명했습니다.
이 문서가 나오기까지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같은 유대 신학자들이 논의에 관여했습니다. 그는 민권 운동에도 참여했고, 20세기 유대교–기독교 대화의 대표적 인물로 평가됩니다.
가톨릭 내부에서도 개혁의 폭을 두고 평가가 갈립니다. 유대교 쪽에서는 관계의 전환점으로 평가하며, 사과의 진정성과 실천을 함께 봅니다. 정교회 쪽에서는 일치 운동에 대한 문호 개방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신학적 쟁점은 남았습니다.
1965년, 가톨릭과 정교회가 1054년의 상호 파문을 철회했습니다. 911년 만입니다. 통합은 아니지만 공식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1999년에는 가톨릭과 루터교 사이에 칭의론에 관한 공동선언이 나왔습니다. 16세기에 갈라진 그 쟁점에 대한 것입니다.
5. 1979년 — 종교가 국가의 원리가 되다
이란에서 급속한 근대화 정책, 정치적 억압, 외세 개입에 대한 반발이 쌓였습니다.
대규모 시위로 왕정이 무너지고 이슬람 공화국 체제가 수립되었습니다. 시아 이슬람 법학자가 국가 최고 권위를 갖는 체제입니다.
무슬림 사회 안에서도 이 체제에 대한 평가는 크게 갈립니다. 하나의 이슬람적 국가 모델로 일반화할 수 없습니다.
세속화가 필연이라는 근대화 이론을 흔든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탈식민 이후 무슬림 국가들이 어떤 체제를 세울 것인가를 두고 세속 민족주의와 이슬람적 국가 구상이 경쟁했습니다. 석유 경제와 이주로 무슬림 인구가 유럽·북미에 정착했습니다.
정치적 이슬람 운동과 그에 대한 내부 비판이 함께 존재합니다. 이슬람을 하나의 정치 성향으로 일반화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1947년 인도·파키스탄 분리 과정에서는 대규모 종교 간 폭력이 있었습니다.
6. 흩어지고 자라난 것
티베트 불교의 세계화. 1959년 14대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했습니다. 다람살라에 망명 공동체가 세워졌고, 티베트 불교가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선(禪)과 명상이 서구에 확산되었고, 참여불교라는 사회 참여 흐름도 나타났습니다. 동아시아에서는 공산 정권과 근대화 속에서 큰 변동을 겪었습니다.
오순절 운동. 1906년 로스앤젤레스 아주사 거리 부흥에서 시작된 이 흐름이 20세기 기독교의 가장 큰 성장 흐름이 되었습니다.
남반구로의 이동. 기독교 인구의 중심이 유럽·북미에서 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아시아로 옮겨 갔습니다. 이것이 20세기 기독교사의 가장 큰 사건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정교회의 시련과 부활. 소련과 동유럽 공산 정권 아래에서 큰 탄압을 받았고, 1990년대 이후 다시 살아났습니다.
| 무엇이 있었나 | 무엇이 달라졌나 | |
|---|---|---|
| 유대교 | 홀로코스트와 이스라엘 건국 | 생존과 기억이 정체성의 중심 주제가 됨 |
| 가톨릭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 모국어 전례, 종교 자유, 타 종교 존중 선언 |
| 정교회 | 공산 정권의 탄압과 이후 부활 | 민족 교회 중심의 재건 |
| 개신교 | 교회 일치 운동과 오순절 운동 | 남반구 중심의 급성장 |
| 이슬람 | 탈식민과 이란 혁명 | 종교와 국가의 관계를 둘러싼 다양한 실험 |
| 불교 | 티베트 망명과 서구 확산 | 명상 중심의 세계적 수용 |
이 장이 남긴 여섯 문장
- 홀로코스트는 20세기 종교사에서 반드시 정면으로 다뤄야 할 사건입니다.
- 그 직면에서 유대교–기독교 관계를 다시 세우려는 흐름이 나왔습니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교회가 다른 종교·다른 교회와 관계 맺는 방식을 바꿨습니다.
- 1965년 상호 파문 철회로 가톨릭과 정교회의 공식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 이스라엘 건국은 유대사의 전환점이자 팔레스타인 실향의 시작입니다. 두 측면을 함께 말합니다.
- 기독교의 무게중심이 남반구로 옮겨 갔고, 불교는 세계 종교가 되었습니다.
생각해 볼 질문
- 종교가 자기 역사의 잘못을 인정하는 일은 왜 그렇게 오래 걸릴까요?
- 한 사건이 어떤 이에게는 회복이고 다른 이에게는 상실일 때, 역사는 이를 어떻게 서술해야 할까요?
- 종교 간 대화는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할까요? 같아지는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채로 함께 사는 법일까요?
이 장에서 쓴 자료
문헌
- 〈우리 시대〉(Nostra Aetate) (1965년, 라틴어)
- 바르멘 선언 (1934년, 독일어)
자료 사진
-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비르케나우) 정문 (실제 유물)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당대 기록 사진)
참고
- 홀로코스트 연구와 증언 자료, 나치 문서와 재판 기록
- 유엔 결의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양측 사료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 20세기 세계 종교 인구 통계
「종교사 한눈」이 모아 둔 자료로 작성한 원고입니다.
검수 이력
- 1차 · 사실 확인 — 홀로코스트의 1941~1945년이 조직적 절멸의 기간이며 박해 자체는 1933년부터 이어졌다는 점을 밝힘.
- 2차 · 관점 검토 — 아랍·이슬람 국가 유대인의 이동을 「이주」 한 낱말로 적은 대목을 고침. 규모(팔십만 명 남짓)와 함께 추방·재산 몰수·탈출·자발적 이민이 나라마다 다르게 섞여 있었다는 점, 오래된 공동체들이 이 시기에 사라졌다는 점을 적음. 1948년을 두 이야기로 나눠 적는 기존 구성과 바르멘 선언의 한계 서술은 유지.
- 3차 · 저작권 확인 — 자료 사진 2장의 이용 조건 확인.
- 남은 것 · 외부 검토 — 쓴 쪽과 검수한 쪽이 같습니다. 이 장은 오늘날 살아 있는 정치 쟁점을 다루므로, 출판 전 제3자의 확인이 특히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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