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사 한눈
801년~900년 · 정리한 내용으로 원고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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뽑아 둔 초안9세기 초안4,368자

제9장 9세기의 세계 종교

슬라브 세계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중국은 불교를 억누릅니다

801년 ~ 900년


여는 장면 — 받아들이는 곳과 밀어내는 곳

두 형제가 슬라브 사람들의 말을 적을 글자를 만들었습니다. 낯선 말로 예배하고 성경을 읽게 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같은 세기 중국에서는 황제가 사찰을 헐고 승려를 환속시켰습니다.

종교를 받아들이는 세기와 밀어내는 세기가 지구 반대편에서 함께 흘렀습니다. 두 사건을 나란히 놓으면, 국가 권력이 종교에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가 한눈에 보입니다.


1. 흔들리는 제국들

카롤루스 제국이 분열하며 서유럽의 윤곽이 잡혔습니다. 바이킹의 이동이 유럽을 흔들었고, 아바스 왕조는 정치적으로 약해졌지만 학문은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당은 쇠퇴기에 접어들었습니다.

  •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카롤루스 제국이 나뉘었습니다.
  • 바이킹의 침입과 정착이 이어졌습니다.
  • 바그다드에서 번역·연구가 절정에 달했습니다.
  • 845년 당 무종의 회창폐불.

2. 843년 — 성상 논쟁의 끝

787년 공의회 이후에도 성상 파괴 정책이 815년에 다시 살아나 한 세대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843년 황후 테오도라의 결정으로 성상 공경이 회복되었고, 이를 기념하는 주일이 정해졌습니다. 정교회는 지금도 사순절 첫 주일에 '정교회의 승리'로 기념합니다.

이콘이 정교회 신앙 생활의 중심 요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3. 863년 — 자기 말로 예배하다

모라비아의 군주가 자기 말로 가르칠 선교사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요청했습니다. 현지어 교육이 필요했고, 프랑크 교회의 영향력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판단도 있었습니다.

테살로니키 출신의 두 형제,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가 갔습니다. 그들은 슬라브어를 적을 문자를 만들고 성경과 전례서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라틴어·그리스어·히브리어만 거룩한 언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메토디오스는 프랑크 성직자들의 반대로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확인된 사실

슬라브어로 예배하고 성경을 읽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들이 만든 문자가 오늘날 키릴 문자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학문적 해석

글라골 문자와 키릴 문자의 관계, 창제 과정은 계속 연구되는 주제입니다.

이 결정의 무게는 종교를 넘어섭니다. 동유럽 문화와 문자 생활 전체가 여기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이 선택이 서방과의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동방은 현지어 예배를 택했고, 서방은 라틴어를 고수했습니다. 그 차이가 이후 천 년 동안 두 문화권의 성격을 갈랐습니다.

함께 기억할 것

두 형제는 동·서방 교회가 함께 기리는 드문 인물입니다. 교황이 슬라브어 전례를 승인한 일이 있었고, 오늘날 그들은 유럽의 공동 수호성인입니다.


4. 845년 — 사찰이 헐리다

사찰이 소유한 토지와 인력이 국가 재정과 병력에 부담이 된다는 인식이 커졌습니다. 도교를 우대한 황제의 성향도 있었고, 외래 종교에 대한 반발도 있었습니다.

수천 곳의 사찰이 헐리고 승려가 환속했습니다. 《구당서》는 사찰 4,600여 곳을 헐고 승려·비구니 26만여 명을 환속시켰다고 적습니다. 다만 이 숫자는 조치를 시행한 쪽이 스스로 적어 남긴 것이므로, 규모의 짐작으로 읽되 정확한 집계로 다루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불교만이 아니라 경교·마니교·조로아스터교도 함께 금지되었습니다.

학문적 해석

종교 탄압이자 재정·사회 정책이었습니다. 한 가지 동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결과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중국 불교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다만 사찰 경제에 덜 의존하는 선종이 상대적으로 힘을 얻었습니다. 이후 중국 불교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둘째, 635년 이후 이어지던 동방교회의 중국 선교가 여기서 끊겼습니다. 5세기에 갈라져 나가 이백 년에 걸쳐 동쪽 끝까지 갔던 그 교회의 중국 공동체가 사실상 무너졌습니다.

뤄양의 룽먼 석굴에는 675년에 완성된 거대한 석불이 있습니다. 절벽을 깎아 만든 그 규모가, 폐불의 배경이 된 사찰 경제의 크기를 짐작하게 합니다.


5. 전승의 권위를 묻다

유대교 안에서 탈무드 전승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성경만을 따르려는 카라이파가 세력을 얻었습니다.

카라이파 학자들은 성경 본문 연구와 히브리어 문법 연구를 발전시키며 랍비 진영과 논쟁했습니다.

당사자별로

랍비 전통은 이를 이탈로 보았고, 카라이파는 성경으로 돌아가는 개혁으로 이해했습니다.

이 논쟁의 결과가 흥미롭습니다. 랍비 유대교는 구전 전승의 근거를 이론적으로 설명해야 했습니다. 그전까지 당연했던 것을 논증해야 하게 된 것입니다. 그 응답이 본격적으로 나오는 것은 다음 세기입니다. 사아디아 가온(882~942년)이 카라이파를 논박하며 유대 철학과 히브리어 문법 연구의 틀을 세웁니다.

반대가 있으면 자기 근거를 다듬게 됩니다. 카라이파 공동체는 규모는 작지만 오늘날까지 이어집니다.


6. 학문의 절정과 정리

칼리프의 실질 권력이 약해지는 동안 이슬람 세계의 학문은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의학·수학·천문학의 성과가 뒤에 유럽으로 전해집니다.

부하리는 방대한 하디스를 수집하고 진위를 검증해 모음집을 냈습니다. 전승 경로를 따져 신뢰도를 가리는 방법이 이 과정에서 정교해졌습니다.

확인된 사실

《사히흐 알부하리》는 수니 이슬람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하디스 모음집으로 꼽힙니다. 시아 전통은 다른 모음집을 따릅니다.

일본에서는 최징과 공해가 당에서 배워 와 천태종과 진언종을 열었습니다. 공해는 고야산에 수행 도량을 세웠고, 서예와 문학, 교육 사업으로도 기억됩니다.

한편 슬라브 선교의 관할권과 신경의 표현(필리오케)을 둘러싸고 동서 교회가 부딪쳤습니다. 863~867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포티오스와 교황 니콜라오 1세가 서로를 파문하는 데까지 갔습니다. 뒤에 회복되기는 했지만, 1054년 이전에 이미 갈라섬을 예행연습한 셈입니다.


7. 같은 세기, 정반대의 일

동유럽중국
일어난 일슬라브 선교와 문자 창제회창폐불
국가의 태도군주가 요청하고 받아들임황제가 사찰을 헐고 승려를 환속시킴
동기자기 말로 가르치고 외부 영향을 조절재정·인력 확보와 외래 종교 배척
장기적 결과동유럽 문자 문화의 출발선종 중심으로 재편

국가 권력은 종교를 퍼뜨리기도 하고 꺾기도 합니다. 같은 세기의 두 사례가 그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 국가의 동기는 순수하게 종교적이지 않았습니다.


이 장이 남긴 네 문장

  1. 현지어 선교와 라틴어 고수는 이후 동·서 유럽 문화의 큰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2. 1054년의 분열은 갑작스러운 사건이 아니라 이런 갈등이 쌓인 결과입니다.
  3. 845년 폐불은 국가 권력이 종교를 억누른 대표적 사례입니다.
  4. 이슬람 세계의 학문은 정치적 분열과 무관하게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생각해 볼 질문

  • 예배를 어떤 말로 드리느냐가 왜 그렇게 중요한 문제였을까요?
  • 국가가 종교를 억누를 때 어떤 종파가 살아남을까요?
  • 정치가 약해져도 학문이 꽃필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요?

이 장에서 쓴 자료

문헌

  • 《사히흐 알부하리》 (9세기 중반, 아랍어)
  • 고대 교회 슬라브어 성경·전례서 (9세기 후반)

자료 사진

  • 글라골 문자 단편 (실제 유물 · 10~11세기 사본, 창제보다 뒤의 것) · 켈스의 서 (실제 유물 · 800년경) · 룽먼 석굴 봉선사 대불 (실제 유물 · 675년 완성, 폐불보다 이전의 것)

참고

  • 《키릴로스 전기》·《메토디오스 전기》
  • 《구당서》, 엔닌의 일기
  • 아바스 학문사 연구

「종교사 한눈」이 모아 둔 자료로 작성한 원고입니다.

검수 이력

  • 1차 · 사실 확인 — 성상 파괴가 되살아난 해를 815년으로 특정. 회창폐불의 규모를 《구당서》의 숫자로 적되 그것이 시행한 쪽의 기록임을 밝힘. 카라이파에 대한 랍비 진영의 응답이 다음 세기 사아디아 가온(882~942년)에게서 본격화된다는 점으로 시점을 바로잡음. 863~867년 포티오스와 니콜라오 1세의 상호 파문을 넣어 「갈등이 쌓였다」를 사건으로 특정.
  • 2차 · 관점 검토 — 자료 사진 세 점의 제작 시기를 목록에 밝힘. 글라골 문자 단편이 창제보다 뒤인 10~11세기 사본이고, 룽먼 대불이 폐불보다 이전의 것임을 표시.
  • 3차 · 저작권 확인 — 자료 사진 3장의 이용 조건 확인.
  • 남은 것 · 외부 검토 — 쓴 쪽과 검수한 쪽이 같습니다. 출판 전 제3자의 확인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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