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사 한눈
1세기~현재

유대교 ↔ 기독교

기독교는 유대교 안에서 시작되었다. 성경, 절기, 예배 형식, 메시아 기대를 물려받았고, 1세기 말부터 두 종교로 갈라졌다.

관점 검토
유대교기독교공통 기원과 공유 전통지중해·유럽·중동·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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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은 이 관계를 어떻게 보는가

어느 한쪽을 정답으로 두지 않습니다

유대교의 자리에서

유대교는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으며, 기독교의 성경 해석을 자기 전통의 해석과 다른 것으로 본다. 오랜 박해의 역사가 관계 인식의 바탕에 있다.

기독교의 자리에서

기독교는 예수 안에서 이스라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고 고백한다. 20세기 이후 많은 교단이 대체주의적 서술과 반유대적 가르침을 공식 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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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와 오늘

가까운 결과

1세기 말~2세기에 두 공동체의 분리가 진행되었다.

긴 시간의 결과

유럽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기독교는 다수, 유대교는 소수였고 그 힘의 차이가 관계를 규정했다.

현대

홀로코스트 이후 신학적 재검토와 공식 대화가 제도화되었다. 대화는 진행 중이며 반유대주의의 재부상이라는 과제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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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관계를 대표하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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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별로 본 이 관계

기원전 20~7세기
공통 기원과 공유 전통

기독교는 아직 없다. 다만 이 시기에 만들어진 성경과 예언자 전통, 절기와 언약 개념이 뒤에 기독교가 그대로 물려받는 유산이 된다.

기원전 1세기
공통 기원과 공유 전통

기독교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그러나 1세기 예수 운동이 놓이게 될 자리 — 로마의 점령, 성전 체제, 여러 갈래의 메시아 기대, 그리스어를 쓰는 디아스포라 — 가 이 세기에 모두 갖춰졌다.

1세기
공통 기원과 공유 전통

초기 예수 운동은 유대교 성경, 회당 예배, 절기, 메시아 기대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두 종교는 남남이 아니라 같은 뿌리에서 갈라진 가지다.

교리적 차이와 논쟁

예수를 메시아로 볼 것인가, 이방인 신자에게 율법을 요구할 것인가가 핵심 쟁점이었다. 성전 파괴 이후 양쪽 모두 자기 정체성을 다시 정의하면서 거리가 벌어졌다.

2세기
교리적 차이와 논쟁

두 공동체는 이제 서로를 다른 종교로 여기며 논쟁했다. 기독교 변증가들은 유대교 성경을 자기 방식으로 읽었고, 유대교 쪽은 그 해석을 인정하지 않았다.

3세기
박해와 차별

이 시기 두 종교 모두 로마 제국 안에서 취약했지만 처지는 달랐다. 유대교는 오래된 민족 종교로 일정한 법적 지위를 인정받은 반면, 기독교는 그런 지위가 없었다.

4세기
박해와 차별

제국의 종교가 된 기독교와 소수가 된 유대교 사이의 힘의 균형이 완전히 뒤집혔다. 이 구도가 이후 유럽사에서 오래 이어진다.

5세기
박해와 차별

기독교 로마법 아래 유대인의 활동 제한이 이어졌다. 다만 사산조 페르시아 지역의 유대인 공동체는 다른 조건에서 학문을 이어 갔다.

6세기
박해와 차별

동로마 법전은 유대인의 공직·증언·개종 활동을 제한했다. 법으로 지위를 규정하는 방식이 이후 유럽의 모델이 된다.

7세기
정치적 협력

638년 이후 예루살렘에서 유대인 거주가 다시 허용되면서, 동로마 시기와는 다른 세 종교의 공존 구도가 만들어졌다.

18세기
화해와 종교 간 대화

계몽주의의 관용 논의는 유대인의 시민권 문제를 공론장에 올렸다. 해방은 그러나 ‘시민이 되려면 유대인다움을 얼마나 내려놓아야 하는가’라는 새 질문을 낳았다.

19세기
박해와 차별

종교적 반유대주의가 인종 이론과 결합해 근대적 반유대주의로 바뀌었다. 이것이 다음 세기 참극의 사상적 배경이 된다.

20세기
화해와 종교 간 대화

홀로코스트 이후 기독교 여러 교단이 반유대적 가르침을 공식적으로 철회하고 관계를 다시 세우려 했다. 1965년 〈우리 시대〉가 대표적이다. 이 대화는 여전히 진행 중이며 완결된 것이 아니다.

21세기
화해와 종교 간 대화

20세기의 화해 노력이 제도로 자리 잡았지만, 반유대주의의 재부상은 이 대화가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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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1. 〈우리 시대〉
  2. 각 교단의 유대교 관련 공식 문서
  3. 유대교–기독교 관계사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