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사 한눈
1001년~1100년

11세기

동과 서의 교회가 갈라서고, 성지를 향한 원정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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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를 여는 한 장면

1054년 여름, 로마에서 온 사절이 하기아 소피아 제단 위에 파문 문서를 놓고 나갔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그날이 천 년을 가르는 날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십 년 뒤 한 교황이 서방의 기사들에게 동방을 도우라고 호소했고, 그 호소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 세기에 세 종교의 관계가 다시 짜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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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배경

셀주크 튀르크가 중동을 장악하고 1071년 만지케르트에서 동로마를 크게 이겼다. 서유럽에서는 교황과 황제가 서임권을 두고 다투었고, 노르만인이 잉글랜드와 남이탈리아를 차지했다. 중국은 송, 인도 북부는 가즈니 왕조의 침입을 겪었다.

  • 1066년 노르만의 잉글랜드 정복.
  •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로 동로마가 소아시아 대부분을 잃었다.
  • 1077년 카노사의 굴욕 — 서임권 투쟁의 상징적 장면.
  • 1095년 클레르몽 교회회의, 1096~1099년 제1차 십자군.
  • 가즈니의 마흐무드가 인도 북서부를 여러 차례 침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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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종교는 이 시대에 무엇을 겪었나

같은 구조로 나란히 비교합니다

유대교

십자군이 지나간 자리

제1차 십자군이 출발하면서 라인란트의 유대인 공동체가 습격을 받았다. 성지를 향한 원정이 가는 길에 있는 이웃을 죽이는 일로 시작된 것이다. 이 사건은 유럽 유대인 역사에서 오래 기억되는 상처가 되었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라시가 성경과 탈무드 주석을 남겨 이후 유대교 학습의 표준이 되었다.

  • 1096년 보름스·마인츠·쾰른 등지에서 학살이 일어났다.
  • 일부 주교가 유대인을 보호하려 했으나 막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 라시의 주석은 오늘날까지 유대교 학습의 기본 텍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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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하나의 교회가 둘이 되다

1054년의 상호 파문은 오랫동안 쌓여 온 언어·전례·권위 이해의 차이가 터진 사건이었다. 실제로 두 교회의 관계는 그 후에도 한동안 이어졌고, 결정적으로 벌어진 것은 1204년 이후다. 서방에서는 교황권이 강화되며 십자군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종교 전쟁이 시작되었다.

  • 1054년을 ‘분열의 날’로만 가르치면 과정을 놓친다.
  • 서임권 투쟁으로 교황권이 세속 권력에 맞설 힘을 얻었다.
  • 십자군은 순례·전쟁·속죄가 뒤섞인 복합적 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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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황권의 세기

개혁 운동을 거쳐 교황이 서유럽 전체를 향해 발언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클레르몽의 호소가 실제로 수만 명을 움직인 것이 그 힘을 보여 준다.

  • 교황이 황제를 파문할 수 있음을 보여 준 카노사 사건.
  • 십자군 참가자에게 주어진 영적 보상이 대규모 동원을 가능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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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정교회

도움을 청했다가 더 큰 문제를 얻다

만지케르트 패배 후 동로마 황제는 서방에 용병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도착한 것은 용병이 아니라 독자적인 목표를 가진 대규모 군대였고, 이 어긋남이 이후 두 교회 관계를 결정적으로 악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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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

셀주크의 시대, 가잘리의 종합

셀주크 튀르크가 중동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었고, 마드라사 제도가 확산되며 학문이 제도화되었다. 가잘리는 법학·신학·철학·수피 영성을 잇는 저작으로 이후 수니 이슬람 사상의 방향을 정했다.

  • 십자군의 도착은 지역 세력 다툼 속의 한 사건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 마드라사가 학문 교육의 표준 기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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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티베트의 후전기

아티샤의 티베트 방문으로 불교가 다시 정비되었고, 여러 종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인도 본토에서는 정치 상황이 나빠지며 불교 교단이 위축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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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 아직 형성되지 않음
16세기 종교개혁 과정에서 여러 갈래로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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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가톨릭동방정교회교리적 차이와 논쟁

신경의 필리오케 표현, 무교병 사용, 로마 주교의 권위 범위가 쟁점이었다. 언어가 달라 서로의 문헌을 읽지 못한 것도 오해를 키웠다.

가톨릭의 자리에서

로마 쪽은 베드로의 자리로서 로마 주교의 보편적 관할권을 주장했다.

동방정교회의 자리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쪽은 다섯 총대주교의 동등한 협의 구조를 지켰다고 본다.

기독교이슬람교전쟁과 충돌

제1차 십자군은 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주민을 학살했다. 이 기억은 이후 두 세계의 관계에 오래 그림자를 드리웠다.

기독교의 자리에서

서방 기록은 이를 성지 회복으로 서술했다.

이슬람교의 자리에서

이슬람 쪽 기록은 갑작스러운 침입과 학살로 서술한다.

유대교가톨릭박해와 차별

십자군 출발 과정에서 라인란트 유대인 공동체가 학살당했다. 종교적 열정이 가장 가까운 소수자에게 먼저 향한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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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자료

눌러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금빛 바탕에 황제 부부와 성모자를 그린 모자이크
실제 유물·유적12세기
하기아 소피아의 황제 봉헌 모자이크

황제권과 교회가 하나로 묶여 있던 동방의 구도를 보여 준다.

이스탄불 · Unknown authorUnknown author · Public domain · 위키미디어 공용
돌로 지은 오래된 성당의 내부와 돔
실제 유물·유적4세기 창건, 십자군기 재건
예루살렘 성묘교회

십자군 원정의 목적지로 이야기되던 곳. 오늘날 여러 교파가 함께 관리한다.

예루살렘 · Berthold Werner · CC BY-SA 3.0 · 위키미디어 공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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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 보는 연대표

  1. 1054년가톨릭동방정교회

    로마 사절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서로를 파문한다. 동서 교회 분열의 상징적 사건.

  2. 1071년이슬람교동방정교회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가 동로마를 격파한다.

  3. 1077년가톨릭

    카노사 — 황제가 교황 앞에 굴복한다.

  4. 1095년가톨릭

    우르바노 2세가 클레르몽에서 원정을 호소한다.

  5. 1096년유대교가톨릭

    라인란트에서 십자군 무리가 유대인 공동체를 학살한다.

  6. 1099년가톨릭이슬람교유대교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주민을 학살한다.

  7. 11세기 후반유대교

    라시가 성경과 탈무드 주석을 남긴다.

  8. 11세기 말이슬람교

    가잘리가 신학과 수피 영성을 잇는 저작을 남긴다.

  9. 1042년불교

    아티샤가 티베트에 들어가 불교 부흥을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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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정리

  • 1054년은 분열의 시작점이 아니라 오래 쌓인 차이가 드러난 상징적 사건이다.
  • 십자군은 순례·전쟁·속죄가 섞인 복합적 운동이었고, 종교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 성지로 가는 길에서 유럽 유대인이 먼저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빼놓고 십자군을 말할 수 없다.
  • 동로마는 도움을 청했다가 오히려 더 큰 위기를 맞았다.
  • 이슬람 세계에서는 가잘리가 신학과 영성을 잇는 종합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