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역사
1세기 유대교 안의 예수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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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따라 읽기
원고가 있는 시대 21개유대교 안의 운동에서 제국의 종교 공동체로
예수를 따르는 무리는 처음에 유대교 안의 한 운동이었다. 그들은 회당에서 예배하고 성전에 올라갔으며 유대교 성경을 읽었다. 그러나 이방인 신자가 늘고 그들에게 할례와 음식 규정을 요구하지 않기로 하면서, 이 운동은 유대교와 다른 경계를 갖게 되었다. 1세기 말이 되면 두 공동체는 서로 다른 정체성으로 갈라지기 시작한다.
- 예루살렘·안디옥·에페소·로마 등 도시 공동체가 그물처럼 이어졌다.
- 바울의 서신은 신약성서에서 가장 이른 문헌층에 속한다.
- 이방인 선교의 조건을 정한 예루살렘 회의가 분기점이 되었다.
- 박해는 이 시기 제국 전체의 정책이 아니라 국지적·산발적이었다.
무엇이 참된 가르침인가
여러 갈래의 가르침이 함께 존재하는 상황에서 교회는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배제할지 정해야 했다. 정경 목록, 신앙 규범, 감독의 계승이라는 세 가지 장치가 이 과정에서 자리 잡았다. 동시에 변증가들은 로마 사회를 향해 기독교가 위험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 마르키온과 여러 영지주의 계열에 대한 논쟁이 정경 논의를 앞당겼다.
- 박해는 여전히 국지적이었지만 순교 기록이 공동체의 기억이 되었다.
- 그리스 철학의 개념이 신학 언어로 쓰이기 시작했다.
박해와 신학, 두 가지 시험
제국 차원의 박해가 처음으로 조직적으로 시행되었다. 동시에 오리게네스 같은 학자들이 성경을 여러 층위로 읽는 방법을 발전시켰다. 박해 뒤 배교자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문제는 교회의 성격을 묻는 논쟁이 되었다.
- 데키우스·발레리아누스 박해는 제국 정책 차원의 박해였다.
- 배교자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교회론을 발전시켰다.
-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의 성경 해석 방식이 갈렸다.
공인, 국교화, 그리고 신경
밀라노 칙령으로 박해가 끝나고 국가와의 관계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황제가 공의회를 소집해 교리 문제를 정리했고, 니케아 신경은 이후 대부분의 기독교 전통이 공유하는 고백이 되었다. 동시에 제국의 후원은 교회를 권력 구조 안으로 끌어들였다.
- 니케아 공의회는 황제가 소집했다. 교회와 국가의 새로운 관계를 보여 준다.
- ‘정통’과 ‘이단’의 경계가 국가 권력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 수도원 운동은 제도화된 교회에 대한 대안적 흐름이기도 했다.
한 공의회가 여러 교회를 만들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를 두고 공의회가 이어졌고, 그 결정에 동의하지 않은 교회들이 갈라져 나갔다. 오늘날의 아시리아 동방교회와 오리엔트 정교회(콥트·시리아·아르메니아 등)가 여기서 비롯한다. 서방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이 이후 천 년의 서방 사상을 형성했다.
- 에페소(431)·칼케돈(451) 공의회가 분기점이 되었다.
- 갈라진 교회들은 사라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 서방에서는 교회가 무너진 행정 기능을 떠맡기 시작했다.
돔과 수도 규칙
동방에서는 황제와 교회가 함께 움직이는 체제가 완성되었고, 서방에서는 수도원이 학문·농업·구제의 거점이 되었다. 두 지역 교회의 성격 차이가 더 뚜렷해졌다.
- 베네딕도 규칙은 기도와 노동의 균형을 담았다.
- 그레고리우스 1세는 잉글랜드 선교를 파견하고 로마 교회의 위상을 높였다.
중동 기독교가 소수가 되기 시작하다
시리아·이집트·북아프리카의 오래된 기독교 지역이 무슬림 통치 아래 들어갔다. 교회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점차 소수 종교가 되었다. 한편 서방에서는 잉글랜드 선교가 진행되었고, 동방교회는 중앙아시아를 지나 중국까지 이르렀다.
- 콥트·시리아 교회 등은 오히려 동로마의 교리 압박에서 벗어난 면도 있었다.
- 635년 동방교회가 당의 장안에 이르러 경교로 알려졌다.
- 잉글랜드와 게르만 지역 선교가 이어졌다.
성상 논쟁과 프랑크 동맹
성상을 공경하는 것이 우상숭배인가를 두고 동방 교회가 크게 다투었다. 이 논쟁은 신학 문제이면서 황제권과 수도원의 힘겨루기이기도 했다. 서방에서는 교황과 프랑크 왕국이 손잡으며 새로운 정치 질서가 만들어졌다.
-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가 성상 공경을 인정했다.
- 성상 논쟁은 이슬람의 형상 금지와 무관하지 않다는 견해가 있다(학문적 해석).
- 800년 대관식은 동로마와의 관계를 껄끄럽게 만들었다.
새 언어로 예배하다
슬라브 선교는 현지어로 성경을 옮기고 예배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 결정은 동유럽 문화사 전체에 영향을 주었고, 라틴어를 고수한 서방과 대비된다.
새 민족들이 들어오다
북유럽과 동유럽의 여러 민족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유럽의 종교 지도가 거의 완성되었다. 어느 쪽 교회를 통해 받아들였는가가 이후 그 지역의 문화권을 결정했다.
하나의 교회가 둘이 되다
1054년의 상호 파문은 오랫동안 쌓여 온 언어·전례·권위 이해의 차이가 터진 사건이었다. 실제로 두 교회의 관계는 그 후에도 한동안 이어졌고, 결정적으로 벌어진 것은 1204년 이후다. 서방에서는 교황권이 강화되며 십자군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종교 전쟁이 시작되었다.
- 1054년을 ‘분열의 날’로만 가르치면 과정을 놓친다.
- 서임권 투쟁으로 교황권이 세속 권력에 맞설 힘을 얻었다.
- 십자군은 순례·전쟁·속죄가 뒤섞인 복합적 운동이었다.
대학과 스콜라의 시작
도시의 성장과 함께 대학이 생기고,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이 라틴어로 들어오면서 신학이 새로운 방법을 얻었다. 동시에 이단 심문과 통제도 강화되기 시작했다.
신학의 절정과 통제의 강화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 기독교 신학을 체계화했다. 탁발수도회는 도시에서 설교하고 가르쳤지만, 동시에 이단 심문의 실무를 맡기도 했다.
권위가 흔들리다
교황이 둘 이상 존재하는 상황은 교회의 권위 자체에 대한 물음을 낳았다. 공의회가 교황보다 위에 있다는 주장(공의회주의)이 힘을 얻었고, 성경을 각 나라 말로 읽자는 요구도 커졌다.
인쇄된 성경, 억눌린 개혁
인쇄술은 성경과 소책자를 빠르게 퍼뜨릴 수 있게 했다. 후스의 처형은 개혁 요구를 잠재우지 못했고, 체코 지역에는 그 흐름이 남았다. 다음 세기 종교개혁의 조건이 이 세기에 갖춰졌다.
하나였던 서방 교회가 여럿이 되다
면벌부 문제에서 시작된 논쟁은 성경의 권위, 구원의 이해, 교회의 성격 전반으로 번졌다. 인쇄술과 제후들의 정치적 이해가 맞물리며 개혁은 여러 갈래로 퍼졌고, 가톨릭 쪽에서도 자체 개혁이 진행되었다. 이 분열은 신학 문제이자 유럽 정치 질서의 재편이었다.
전쟁이 남긴 교훈
종교 갈등에서 시작된 전쟁이 국가 간 세력 균형 문제로 옮겨 가며 끝났다. 종교가 국제 질서의 결정 요인에서 물러나는 흐름이 이때 시작된다.
비판과 부흥
이성으로 성경과 교리를 검토하는 흐름과, 개인의 회심 체험을 강조하는 부흥 운동이 나란히 일어났다. 두 흐름 모두 이후 근대 기독교의 성격을 만들었다.
세계로 나간 선교, 흔들린 확신
선교 운동으로 기독교가 세계 종교가 되었지만, 그 과정은 식민 지배와 얽혀 있었다. 동시에 성서비평과 진화론이 전통적 확신을 흔들었고, 그에 대한 여러 응답이 근대 신학의 갈래를 만들었다.
자기 역사를 직면하다
교회는 홀로코스트 앞에서 오랜 반유대적 가르침의 책임을 물어야 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우리 시대〉 선언은 유대인에 대한 집단적 책임 전가를 명시적으로 부정하고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존중을 표명했다. 같은 세기에 교회 일치 운동과 남반구 기독교의 성장이 있었다.
- 1948년 WCC 창립으로 교회 일치 운동이 제도화되었다.
- 기독교 인구의 중심이 유럽·북미에서 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아시아로 옮겨 갔다.
- 오순절·은사주의 운동이 20세기 기독교의 가장 큰 성장 흐름이 되었다.
인구의 중심은 아프리카·아시아·라틴아메리카다. 서구에서는 교인 수가 줄고, 성직자의 학대 문제와 사회 쟁점을 둘러싼 내부 논쟁이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