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교의 역사
이스라엘 종교 전통은 고대 근동에서 오래 형성되었고, 오늘날의 유대교로 이어지는 형태는 바빌론 포로기와 그 이후에 재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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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가 있는 시대 28개여러 신 가운데 한 분만을 예배하는 길
이스라엘 종교 전통은 고대 근동의 종교 세계 안에서 형성되었다. 성경은 족장들의 부름, 이집트 탈출, 시내산 언약, 왕국과 예언자들의 이야기로 이 시기를 전한다. 역사학계는 이 전승들이 언제 어떻게 문헌이 되었는지를 두고 여러 견해로 나뉘어 있다.
- 예배의 중심이 여러 성소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이는 과정을 겪었다.
- 예언자들은 제사보다 정의와 자비를 앞세우는 목소리를 냈다.
-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무너지면서 남유다에 신앙 전통이 집중되었다.
- 기원전 622년 요시야의 개혁은 신명기 계열 전통과 연결되어 논의된다.
성전을 잃고 책과 공동체를 얻다
성전 파괴와 바빌론 포로기는 유대교 역사에서 가장 큰 전환점 가운데 하나다. 제사를 드릴 성전이 없는 상태에서 안식일 준수, 할례, 율법 낭독, 공동체 모임이 신앙의 중심 표지가 되었다. 페르시아의 통치 아래 일부가 귀환해 제2성전을 세웠지만, 많은 유대인은 바빌론과 이집트에 남았다. 디아스포라가 이때부터 유대교의 상수가 된다.
- 기원전 586년 제1성전 파괴, 기원전 516년경 제2성전 봉헌.
- 포로기에 성전 없는 신앙 형태가 자리 잡았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설명이다.
- 에스겔·제2이사야 계열 문헌이 이 시기의 신학을 담고 있다.
- 유대인 공동체가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사는 형태가 굳어졌다.
책의 종교로 굳어지다
제2성전기의 유다는 페르시아 제국의 작은 지방이었다. 이 시기에 토라를 공적으로 낭독하고 그것을 공동체 규범으로 삼는 형태가 굳어졌다. 사마리아 사람들과의 거리도 이 무렵부터 벌어지기 시작한다.
-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과 에스라의 율법 낭독이 상징적 사건으로 전해진다.
- 제사장 계층이 공동체의 지도력을 쥐었다.
- 엘레판티네 파피루스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실제 생활을 보여 주는 1차 사료다.
- ‘유대인’이라는 이름이 이 시기를 거치며 자리 잡는다.
그리스어 세계 속의 유대인
알렉산드로스 이후 유대인은 헬레니즘 문화와 마주했다. 그리스어를 쓰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늘었고, 예루살렘 안에서도 헬레니즘을 받아들일 것인가를 두고 긴장이 생겼다. 이 긴장은 다음 두 세기에 걸쳐 커진다.
- 제사장 가문이 정치적 지도력을 함께 쥐고 있었다.
-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큰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 헬레니즘 수용을 둘러싼 내부 갈등의 씨앗이 뿌려졌다.
성경이 번역되다
이집트의 유대인 공동체는 히브리어를 잘 읽지 못했다. 그래서 성경을 그리스어로 옮겼고, 이 번역본(70인역)은 이후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초기 기독교인이 함께 읽는 성경이 된다. 번역은 단순한 언어 옮기기가 아니라 신앙을 다른 문화 속에서 설명하는 일이었다.
- 70인역이라는 이름은 번역자 수에 관한 전승에서 왔다.
- 번역 과정에서 쓰인 그리스어 용어가 훗날 신학 용어의 바탕이 된다.
-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공동체는 헬레니즘 학문과 활발히 접촉했다.
박해가 만든 항쟁, 항쟁이 만든 왕조
셀레우코스의 종교 탄압에 맞선 마카비 항쟁은 유대교사에서 신앙의 자유를 지킨 사건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 결과로 세워진 하스몬 왕조는 제사장직과 왕권을 함께 쥐면서 내부 비판을 받았고, 그 갈등 속에서 여러 종파가 자기 자리를 분명히 했다.
- 하누카는 성전 정화를 기념하는 절기다.
- 바리새는 구전 전승과 율법 해석을, 사두개는 성전 제사와 성문 율법을 중시했다.
- 에세네 계열은 성전 체제를 비판하며 광야 공동체를 이뤘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 다니엘서의 최종 형태가 이 시기 상황과 연결된다는 것이 다수 학설이다.
점령 아래서 커지는 기다림
로마의 지배와 헤롯의 통치 아래서 유대 사회는 크게 흔들렸다. 성전은 화려해졌지만 세금과 정치적 억압은 무거웠고, 하나님이 개입해 주시기를 바라는 종말론적 기대가 여러 형태로 퍼졌다. 메시아에 대한 기대도 하나로 통일된 것이 아니라 집단마다 달랐다.
- 헤롯 성전은 당시 세계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성소였다.
- 성전 세력, 율법 해석 학파, 광야 공동체, 무장 저항 세력이 공존했다.
- 메시아 기대는 왕적·제사장적·예언자적 형태로 다양했다.
- 그리스어를 쓰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제국 곳곳에 살고 있었다.
성전을 잃고 랍비 유대교로 다시 서다
1세기 유대교는 하나가 아니었다. 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사장 세력, 율법 해석을 중시한 바리새, 광야 공동체, 무장 저항 세력, 그리스어를 쓰는 디아스포라가 함께 있었다. 70년 성전이 파괴되면서 제사 중심의 종교 생활이 끝났고, 회당과 율법 연구를 중심으로 한 랍비 유대교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 성전 파괴로 제사·순례·제사장 제도가 사실상 중단되었다.
- 야브네의 학자들이 율법 해석 전통을 이어 유대교를 재편했다.
- 이 재편 과정에서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무리와의 거리도 벌어졌다.
-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유대교 존속의 기반이 되었다.
율법 해석이 신앙의 중심이 되다
바르 코크바 항쟁의 실패로 유대 지역의 정치적 회복 가능성은 사라졌다. 랍비들은 율법 해석과 교육을 통해 성전 없는 시대의 유대교를 세워 갔고, 그 결과가 다음 세기 초 미쉬나로 정리된다.
- 예루살렘 출입 금지로 유대교의 중심이 갈릴리와 디아스포라로 옮겨졌다.
- 구전 율법의 체계적 정리가 진행되었다.
- 회당이 예배·교육·공동체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미쉬나가 완성되다
구전으로 이어지던 율법 해석이 미쉬나로 정리되었다. 이 책은 이후 예루살렘 탈무드와 바빌로니아 탈무드의 바탕이 되며, 랍비 유대교의 기본 틀을 놓았다.
- 미쉬나는 주제별로 배열된 율법 해석 모음이다.
- 바빌로니아의 유대인 학원들이 중심지로 성장했다.
제국이 기독교가 되면서 좁아진 자리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유대인의 법적 지위는 점차 제한되었다. 회당은 유지되었지만 새 회당 건축이나 공직 진출이 어려워졌다. 학문의 중심은 팔레스타인에서 바빌로니아로 옮겨 갔다.
- 예루살렘 탈무드가 이 시기에 정리되기 시작했다.
- 바빌로니아 학원들이 유대 학문의 중심이 되었다.
탈무드의 세기
바빌로니아의 학원들에서 미쉬나에 대한 방대한 토론이 정리되어 바빌로니아 탈무드로 묶였다. 이 책은 이후 유대교 학문과 생활의 중심 문헌이 된다.
- 탈무드는 법과 이야기, 논쟁을 함께 담은 문헌이다.
- 사산조 페르시아 아래의 유대인 공동체가 학문 중심지였다.
새 지배자 아래의 유대인
이슬람 세력의 확장으로 중동 대부분의 유대인이 무슬림 통치 아래 놓였다. ‘성서의 백성’으로서 지즈야(인두세)를 내고 자기 종교를 유지하는 딤미 제도가 자리 잡았다. 완전한 평등은 아니었지만, 동로마 아래에서보다 제약이 덜한 경우가 많았다.
- 638년 이후 유대인의 예루살렘 거주가 다시 가능해졌다.
- 바빌로니아(이라크) 학원들이 계속 유대 학문의 중심이었다.
- 딤미 제도는 보호와 차별을 동시에 담은 제도다. 한쪽만 말하지 않는다.
두 세계에 걸쳐 살다
이슬람 세계와 기독교 세계 양쪽에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고, 처지는 지역마다 달랐다. 이슬람 통치 지역에서는 상업과 학문에서 활동 폭이 넓은 편이었다.
전승의 권위를 묻다
탈무드 전승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성경만을 따르려는 카라이파가 등장하면서, 랍비 유대교는 자기 전통의 근거를 다시 설명해야 했다. 이 논쟁은 유대 사상에 철학적 언어를 끌어들였다.
이베리아의 황금기
무슬림 통치의 이베리아에서 유대인은 궁정 관리·의사·시인·철학자로 활동했다. 히브리어 시문학이 되살아났고 철학과 성경 주석이 발전했다. 이 시기를 이상화하지 않되, 실제로 예외적인 시기였다는 점도 함께 말해야 한다.
십자군이 지나간 자리
제1차 십자군이 출발하면서 라인란트의 유대인 공동체가 습격을 받았다. 성지를 향한 원정이 가는 길에 있는 이웃을 죽이는 일로 시작된 것이다. 이 사건은 유럽 유대인 역사에서 오래 기억되는 상처가 되었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라시가 성경과 탈무드 주석을 남겨 이후 유대교 학습의 표준이 되었다.
- 1096년 보름스·마인츠·쾰른 등지에서 학살이 일어났다.
- 일부 주교가 유대인을 보호하려 했으나 막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 라시의 주석은 오늘날까지 유대교 학습의 기본 텍스트다.
학문의 절정과 폭력의 확산
마이모니데스는 유대 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철학과 신앙을 잇는 저작을 남겼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십자군 열기와 함께 유대인에 대한 폭력과 헛소문이 퍼졌다.
- 마이모니데스는 이슬람 세계(안달루시아·이집트)에서 활동했다.
- ‘의례 살인’ 같은 근거 없는 고발이 이 시기부터 퍼졌다.
표식과 추방의 시대가 열리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의 결정으로 유대인은 옷차림으로 구별되어야 했다. 탈무드가 불태워지고 공개 논쟁이 강요되기도 했다. 동시에 신비주의 전통인 카발라가 이 시기에 문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역병의 희생양
흑사병의 원인을 모르는 상황에서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헛소문이 퍼져 수많은 공동체가 학살당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동유럽으로 이주했고, 이것이 이후 아슈케나짐 중심지의 이동으로 이어진다.
추방
1492년 스페인에서, 1497년 포르투갈에서 유대인이 추방되었다. 세파르디 유대인은 오스만 제국·북아프리카·네덜란드 등으로 흩어졌고, 오스만은 이들을 받아들였다. 개종했으나 의심받는 이들(콘베르소)에 대한 종교재판도 이어졌다.
게토와 카발라
이탈리아 도시들에 유대인 거주 구역(게토)이 제도화되었다. 한편 팔레스타인 사페드에서는 루리아를 중심으로 한 카발라 사상이 꽃피어 이후 유대 신비주의의 방향을 정했다.
- 게토는 보호를 명분으로 했지만 실질은 격리였다.
- 오스만 영역의 유대인 공동체는 상대적으로 활동 폭이 넓었다.
메시아 기대와 그 좌절
샤브타이 츠비를 메시아로 믿는 운동이 유럽과 중동의 유대 공동체를 휩쓸었다가 그의 개종으로 무너졌다. 이 충격은 이후 유대 사상에 오래 영향을 남겼다. 한편 암스테르담 등지에서는 세파르디 공동체가 상업과 학문의 중심이 되었다.
해방과 하시디즘
서유럽에서는 시민권을 얻는 해방이 시작되었고, 동유럽에서는 기쁨과 영성을 강조하는 하시디즘이 퍼졌다. 멘델스존은 유대 전통과 계몽 사상을 잇는 길을 모색했다. 근대 유대교의 여러 갈래가 여기서 시작된다.
개혁·정통·시온주의
해방과 근대화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를 두고 개혁파, 정통파, 보수파의 갈래가 형성되었다. 동유럽의 박해가 이어지면서 정치적 해법으로 시온주의가 나타났다.
- 러시아의 포그롬이 대규모 이주를 낳았다.
- 반유대주의가 인종 이론과 결합하는 새로운 형태로 나타났다.
절멸의 시도와 국가의 수립
홀로코스트는 유럽 유대인 공동체의 삶을 거의 파괴했다. 생존자와 이주자들이 세운 이스라엘은 유대 역사에서 이천 년 만의 국가였고, 동시에 팔레스타인 주민의 실향이라는 또 다른 역사를 낳았다. 신앙의 자리에서는 ‘그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라는 물음이 신학의 중심 주제가 되었다.
- 홀로코스트는 우발적 학살이 아니라 국가가 조직한 절멸 정책이었다.
- 이스라엘 건국은 유대사의 전환점이자 중동 분쟁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두 측면을 함께 말해야 한다.
- 홀로코스트 이후 신학이 유대·기독교 양쪽에서 형성되었다.
이스라엘과 디아스포라 두 축으로 존재하며, 홀로코스트 기억의 계승과 반유대주의의 재부상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